정인홍이 가야산에서 나오지 않은 채 끝내 사직하고자 하니, 1619년 3월(광해군11) 광해군은 사돈인 박승종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박승종의 본관은 밀양, 아버지 안세(安世)는 지돈녕부사였고, 할아버지 계현(啓賢)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오늘날의 서울 중구 예장동에서 태어나 자란 박승종은, 1586년(선조19) 문과에 올라 예문관에서 봉교(奉敎)·지제교(知製敎)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봉교는 왕의 칙서를 기록하는 직위였고, 지제교는 왕이 내리는 교서 등을 기초하여 올리는 실무자로, 나라의 기밀을 주요 다루는 위치였기에, 조정중진들이 협의하여 인물을 탐색 천거하는 주요 관직이었다.
요직을 두루 거친 박승종은 선조임금 말기에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광해군2년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우의정 겸 도체찰사·좌의정을 거쳐 58세 나이에 밀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었다.
거의 같은 무렵 문과에 갓 급제한 아들 자흥(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의 배필이 되니, 장차 세자가 대통을 잇기만 하면 그는 곧 임금의 처 조부가 될 위치라,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매끈해 보였다. 이때 박승종은 쇠퇴해진 명나라와 신생국 청나라 사이에서, 두나라를 함께 아우르는 등거리 외교를 펼쳐 외교의 귀재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눈이 밝은 박승종은 점점 혼조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광해군시대의 말기 현상에, 높은 관직과 존귀한 처지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급기야 박승종은 언제 어디서나 싶게 털어 넣을 수 있는 오리알 크기 만한 비상 덩어리를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말했다.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런 물건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박승종의 아들 자흥이 광해군폐정의 주역 이이첨(李爾瞻)의 사위였던 관계도 박승종의 운명에 부채질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이첨이 인목대비 폐비론을 들고 나왔을 때, 박승종은 발 벗고 나서질 못해 얼떨결에 폐비론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되었음을, 두고 두고 한탄하며 밤잠을 설치고 혼자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승이 되기 전 언젠가 이이첨의 심복 윤인(尹인) 등이, 경운궁을 급습, 인목대비를 죽이려 했을때 목숨을 걸고 대비궁을 지켜 대비의 목숨을 살렸고, 정승이 된 뒤에 이번에는 폐모론이 다시 일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었다.
드디어 광해군 퇴출 반정이 일어나던 날, 박승종은 어렴풋이 기미를 알아차려 황급히 성문을 빠져 나가,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한 그의 사돈 이이첨의 지시를 받고 병력을 동원하려던, 아들인 경기도관찰사 박자흥을 강력히 만류, 현실을 받아들이자며 아들을 주저 앉혔다.
이리하여 반정이 성공, 광해군이 쫓겨나니, 박승종 부자는 왕과 권신의 친인척으로, 오랫 동안 권력을 누렸음을 자책한 끝에, 부자가 함께 목을 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말았다. 1623년 3월 14일의 일. 박승종의 나이 62세, 아들 자흥은 43세였다. 뒤에 인조가 등극하니 집권세력들은, 이미 저승식구가 돼버린 박승종의 모든 관작을 추탈하고 가산도 적몰하니, 박승종의 집은 김류가, 아들 자흥의 집은 이귀가 집어 삼켜 버렸고 가문은 풍지박산 되고 말았다.
반정이 있던 날 박승종은 금천 삼악사라는 절간에 숨어들어 승방에 누워, 목에 올가미를 걸어 끝을 문밖으로 보내 종으로 하여금 힘껏 당기 게하여 숨이 끊어지니, 영의정의 죽음 치고는 참으로 별난 죽음이었다. 같은 시각 아들 자흥도 옆에서 자결하였다.
영의정의 아들에 임금의 사돈이며, 천하를 두려워하지 않던 권신 이이첨의 사위였던 경기도관찰사 박자흥 부자의 최후는 어처럼 허무하였다. 글쓰는 사람들은 기록하기를 “박승종은 나라걱정은 했으나 탐욕이 많았다”라고 썼다.
박승종의 둘째 아들로 자응(自凝)이 있었는데, 그는 문과에 올랐으나 광해군 조정에 나가기를 꺼려 벼슬 할 생각을 접었다가 뒤에 영광군수·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교롭게도 광해군을 들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사위였으니, 반정때 사돈간에 목숨을 내 놓고 다투는 사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까닭으로 박승종의 뒤가 이흥립의 사위인 둘째 아들 박자응에 의해 번창하여졌다.
박승종은 사후 200여년 뒤인 1857년(철종8), 그의 복권을 주장했던 송시열 등의 뒤를 이은 유신들과 후손의 주청으로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는 숙민공(肅民公)으로 내려졌다. 박승종의 손자 박수경(朴守慶)이 숙종때부터 ‘인목대비를 보호하고 반정때 의리를 지켜 자결’ 한점을 들어 할아버지 박승종의 죄과를 벗기고자 무던히 노력한 결과라 할 수있다. 박승종의 묘소는 광주, 공주, 천안 등지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경기도 고양 두응촌에 마련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