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읽어보고 불교가 전래되어 한민족 고유의 민속문화를 어떻게 습합하였는가 하는가를 되돌아보자. 불교의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는 아래의 글은, 한국적 가치의 산신, 독각과 나반, 용왕, 조왕, 칠성 등의 신앙을 불교가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으며, 민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방법이었음을 명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원효의 화쟁, 서산의 보국안민의 불교로 재창조하였음도 상기하자. 우리의 '무엇이' 그렇게 재창조하는 동력이 되었을까도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의할 점은, 이러한 사실들을 보는 나의 관점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1. 올바른 안목, 판별력을 지닐 수 없다.
2. 어떻게 변용되어 수용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3.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
4. 결과적으로 한국의 한국다움을 찾을 수가 없다. 자문화를 경시하거나 비하또는 종속되는 현상을 겪을 수 있다.
다음을 주의하여 불교가 수용한 민속신앙을 읽어 보시고 그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추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절'의 올바른 의미 파악
2. '삼'의 원리: 사물의 의미를 세가지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관점, 일석삼극의 원리, 천지인 사상...
3. 음양 이원의 관점은 있는가? 중국의 음양개념의 정립은 춘추전국 말기나 한나라 초기 가량임.
4. 불교, 유교, 도교의 발생은 전5세기 정도이며, 삼국에 전래된 것은 4-6세기 가량임. 그때는 단군조선이 막을 내린지 600-800여년이 지난 후였음, 이정도의 시간이면 단군조선의 가르침이 원래의 의미를 잊은 채 민속화, 민간신앙화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함. 단, 불교가 수용하고 있는 힌두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살펴야 함.
5.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수용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6. '한단고기'는 읽었는가.
7. 본래의 의미는 무엇이며, 본래의 의미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8. 불교적 신앙을 우선으로 하고, 한국적 가치를 종속으로 하고 있는 점을 감안 할 것.
9. 불교의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점
다음의 선교와 불교의 유사성은 깊이 검토되어야 합니다.
1. 마고성의 구조에서 천부를 중앙에 봉수하고 네 부족이 사방을 지키는 구조: 불교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천왕이 사방을 지키는것
2. 마고성에 사방을 맡은 부족이 수화기토를 관장한 점: 불교의 지수화풍 사대설
3. 마고성의 구조: 밀교의 만다라 구도: 윷판의 구조
4. 그밖에 천부경, 삼일신고에 나타난 원리와 불교교리와의 비교
같이 연구해 봅시다.
1. 산신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이 불교와 접합하여 그 신앙이 되었고, 곁따라 절의 법당에까지 봉안되어 숭경을 받고 있는 대상이 된 것으로 '산신(山神)·독성(獨聖)·칠성(七星)·용왕(龍王)' 등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드러나는 것이 산신 신앙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지형 조건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은 아득한 옛적부터 산악, 산신에 관한 숭배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태초의 산들은 그 돌올(突兀) 유장(悠長)한 모습이 우선 우러러 보는 이를 압도하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통로가 없어, 또는 맹수의 출몰 때문에 가까이 범접하기가 어려워 신성시될 수 있었고, 철이 늦도록 머리에 흰 눈을 이고 광채를 발하면서 또 그 위로 솟아 오른 태양이 광명을 비롯하므로 신령스러운, 신이 머물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적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대 신화는 하늘 임금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단군(檀君)이 내려와 나라를 처음 연 것으로 말하였는데, 태백산의 '백(白)', 신단수, 단군의 '단(檀, 밝달)'은 높은 산 정상에서 연원하는 맑고 밝음과 관련을 맺고 있고, 국호이던 '조선(朝鮮), 숙신(肅愼), 예맥(濊貊)' 등에 나타나는 '선(鮮), 숙(肅), 맥(貊)' 등도 그러한 맑고 밝음과 인연이 닿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예나 다름 없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거 가까운 산을 신격인 당산(堂山)으로 삼아 제사를 받드는 등의 민간 신앙이 이어지고 있으며, 동리마다 산신당이 모셔지며, 유가(儒家)의 치상이나 묘제에서는 조상 유택을 호휘해 줄 산신을 위한 제사를 어김없이 받들고 있다.
이 '산신'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 고유의 토속신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어느 민족에게서나 보편적으로 이어졌을 법한 토속 신앙이 곧 '산신' 신앙이었던 터라, 그 '산신'은 금방 불교에 접목되어 나타났다. 곧 불교가 재래의 신앙을 수용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도와 사찰을 호위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맡기게 되었는데, 화엄신중(華嚴神衆) 속에 '산신'이 이미 들어 있고, 사찰의 신중탱화(神衆幀畵) 속에도 '산신' 그림이 흔하게 나타나는 것 등이 모두 그 증거가 된다. '산신'을 그리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은 살펴보면 우선 우리 나라의 사찰은 그 대부분이 산지가람(山地伽藍)인지라 실화나 산불 기타의 재해를 입기 쉬웠고, '불승·보살·대중'이 왕래하는 길에 맹수의 피해가 적잖이 있엇을 것임을 생각할 때, 그러한 재앙을 막아 주는, 당지(當地)와 인연 있는 '신중(神衆)을 특별히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민간에서 '산신령'으로 터부(Taboo)의 대상이 되는 호랑이는 당연히 불교의 '산신'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산신'이 불교와 일찍이 접합되었음을 이미 고사서에서 보게 되는데, 안흥사(安興寺)의 비구니 지혜(智惠)가 경주 서쪽 선도산(仙桃山)의 여자 산신격이엇던 선도성모(仙桃聖母)에게 도움을 얻어 불전을 수리하였다는 이야기와 심지왕사(心地王師)는 팔공산(八公山) 산신에게 계(戒)를 주고 그 대가로 산신으로부터 동화사(桐華寺) 지을 절터를 안내 받았다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그래서 흔하지는 않으나 절 이름을 아예 재해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여 소재사(消災寺)라 한 예를 경북 달성군의 비슬산(琵瑟山)에서 볼 수 있고, 신중들을 주로 모시고자 한 절 이름으로 신중사(神衆寺)와 신중암(神衆庵)이라 한 것도 있었다.
지금 절 가운데서 산신을 모시는 당우의 이름이 산신각(山神閣) 혹은 산령각(山靈閣)인데, 그 산신은 가람의 수호신으로 요마를 물리치고 산중 생활을 안온토록 호위하는 신중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나 혹은 부녀자들에게서 복록이 많아지고 가족이 무병장수하기를 비는 이른바 소재강복(消災降福)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데, 양산 통도사 '산령각' 주련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位鎭山川護法身 지위가 산천을 위압하여 부처님 호위하니
靈通廣大泰山神 그 영험 넓고 커서 태산의 신령일세.
'산신각' 안에는 드물게 호랑이를 타거나 호랑이에 기대 앉은 '산신상'을 봉안하기도 하나 대개는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 탱화를 봉안한다. 그 신상이나 탱화를 보면 산신이 남자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여자인 경우도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 산신이 관장하는 것으로 믿는 산들인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등의 절에는 노파의 모습을 한 여산신탱화나 소상(塑像)을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다. 이 여성 산신은 트레머리를 댕기를 둘렀으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타거나 기대어 있고, 손에는 불로초를 들고 있다. 남자인 산신의 탱화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 첫째의 도교적 산신 탱화는 대머리에 백발 수염을 늘어뜨린 채 긴 눈섭인 신선의 모습이며, 손에는 하양 깃털 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신 그림의 배경에는 신선 세계의 산이라 하는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 등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하나는 유교적 산신 탱화인데, 머리에 복건(福巾), 유건(儒巾), 정자관(程子冠) 등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신령스런 노인으로 묘사되며, 노인 신선의 주위에는 책거리나 대나무, 차를 달이는 도구 등이 배경 그림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한 가지는 불교적 산신 탱화로 삭발한 스님의 모습이며 손에는 '법화경(法華經) 등 불경이나 단주를 들고 있는 경우가 흔하며, 옷은 대개 적록색에 금박이나 노란 색깔로 그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변형된 가사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들 탱화에는 산신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여 나타나는 그림이 호랑이인데, 백호(白虎), 흑호(黑虎), 갈범, 표범, 줄범 등이 흔하고, 때로는 산신이 탈 수레를 끄는 호랑이로 묘사되는 등 다양하며, 또 재미 있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산신령 그 자체이거나 혹은 신령의 인도자로 일컬어지는 그 영험스러운 호랑이가 항상 무섭고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조금은 장난스럽고 애교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아주 친밀감을 주는 것이 특이하며, 호랑이 외에도 그림 속에는 꽃이나 차, 천도(天桃)의 상징일 것으로 보이는 과일 등을 산신에게 공양하는 동자가 함께 나타나는 것을 흔하게 보게 된다.
2. 나반과 독각
절 경내의 본당 뒷편에 독성각(獨聖閣)이라 일컫는 작은 전각을 두고 있는 절이 흔한데, 청도 운문사 사리암의 예와 같이 그 '독성각'에다 나반존자(那畔尊者)의 신상을 봉안하기도 하나 대부분의 절에서는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이 '독성각'의 '나반존자'는 '16나한' 중 하나인 '빈두로존자'가 따로 이름만 바뀌어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된 것이므로 불교 경전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주지하는 대로 인도는 물론 중국, 일본 어디에서고 봉안된 예가 없고, 우리 나라에만 있으며, 그것도 '산신·칠성·용왕'들과 나란히 신봉되는 것을 보아 우리 토속 신양의 고유신이 불교적인 색깔을 띤 불·보살로 변형되어 절에서까지 모셔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형상만은 중국의 불교에서 독립 신앙 대상이 된 '빈두로존자'의 모습을 적절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이하게도 부처의 '10대제자'나 '16나한, 500나한' 등 그 어디에도 '나반존자'라는 이름은 발견되지 아니하며 불경 속에서도 그 이름과 '독성'이 곧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나반존자'에 관한 신앙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한국의 불교에서만 독특한 것을 파악했던 최남선(崔南善)은 그 '나반존자'가 전통 불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민족 고유의 신앙 대상이던 것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라 하고, 그가 곧 단군(檀君)일 것이라 하였다.
그 '나반존자'의 다른 이름을 독수성(獨修聖) 혹은 독성(獨聖)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 그 독성 '나반존자'를 '16나한' 중의 우두머리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빈두로존자'는 달리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岝墮寐),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 등으로 일컫는다. 이 존자는 세상이 말세가 되었을 때 중생을 제도하는 복밭(福田)이라 신앙되는 나한 중 하나이며, 중국에서부터 그 모습이 머리카락은 희고 눈섭이 길다란 형상으로 그려진 바 있는데, 우리 불교의 나반존자 탱화 역시 역시 비슷한 모습이다.
'빈두로존자'는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 부동이근(不動利根)이라 번역한다. 원래 인도 발차국(跋蹉國) 구사미성 보상(輔相)의 아들이었는데, 어렷을 적에 불교에 귀의,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으며, 후에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석존 성도한 지 6년에 왕사성에서 신통력을 나타냈다가 외도들의 조소를 받았으므로 부처님께서 이 뒤로는 부질없이 신통력을 나타내지 말라 하고,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게 하였다.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어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 있으면서 부처 열반 후에 중생을 제도하여 말세의 공양을 받아 대복전(大福田)얘 되었으므로 주세(住世) 아라한이라 일컫게 되었다 한다. 후세에 인도 대승절에서 문수(文殊)를 상좌로 함에 대하여 소승절에서는 '빈두로'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다. 중국에서는 동진(東晋)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빈두로'를 신앙하고, 송(宋) 나라 태초(太初) 말기(471)에 법현·법정 등이 처음으로 그 형상을 그려 공양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그를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라 하여 절마다 독성각(獨聖閣)에 봉안한다.
'나반존자'에 대한 독성 신앙이 격이 높은 전(殿)이 아니라 각(閣)에 모셔진 점, '산신, 칠성 등'과 함께 이른바 삼성(三聖) 민속 신앙과 인연이 깊은 점을 감안할 경우 나한 중 한 분인 '빈두로존자'이기보다는 최남선의 말처럼 고유의 신앙 대상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반존자를 향한 독성각의 예불문 중에 다음처럼 그 존자가 남인도 천태산(天台山) 위에서 선정(禪定)한 분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또한 그를 나한이라 말하고 용화세상(龍華世上)을 기다린다 하여 미륵신앙과도 인연이 있어 보여 종잡을 수가 없는데, 혹시는 도교 관련 신앙 대상이 한국 불교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하나 이 문제는 깊이 있는 탐구를 거쳐야만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南無 天台山上 獨修禪定 那畔尊者 귀의하옵니다.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계신 나반존자께.
위는 나반존자를 향해 아침 저녁으로 3번 절을 하면서 외우는 독성각의 예불문인데, 이 글에서 보다시피 독성각의 경배 대상은 '나반존자'이고, 이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독성(獨聖), 독수성(獨修聖)의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삼명(三明)과 이리(二利)의 능력을 갖춘 성인으로 일컬어졌다. 삼명은 아라한의 지헤를 갖추고 있는 이에게 자재(自在)하는 오묘한 작용으로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인데, 숙명명은 전생을 자신과 남의 전생을 꿰뚫어 아는 것이고, 천안명은 자기나 다른 이의 미래를 꿰뚫어 아는 것이고, 누진명은 지금 세상의 고통을 알아 번뇌를 끊는 지혜를 일컬음이었다. 곧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을 남김없이 통달한 분이 나반존자이므로 아울러 자신도 이롭히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능력을 두루 갖춘 바 되었으므로 아라한의 지위에 이르러 복밭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가 이를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독성을 모신 기도 도량으로는 청도 운문사 사리암의 독성각, 합천 해인사의 희랑대(希郞臺) 등이 유명한데, 흔하지 않게 독성각에다가 나반존자상을 모신 곳도 있으나 대개는 수독성탱(修獨聖幀),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 이름하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봉안한다.
불교 의식집 속의 독성청(獨聖請) 유치(由致)에 나반존자는 "혹시는 층층대 위에 고유히 머물러 선정(禪定)을 즐기거나 또 혹은 낙낙장송 사이를 자유로히 오가며,……눈처럼 흰 눈섭이 온 눈을 덮고 있으면서 공(空)을 관(觀)한다, 或於層層臺上 靜居安禪 或於落落長松間 往返任意,……雪眉覆眼而觀空)"라 한 바와 같이 독성탱화는 천태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하여 희고 긴 눈섭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 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의 그림을 곁들인 것이 있는가 하면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탱화는 산신탱화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독성에 관한 신앙은 현재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3. 칠성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사찰에 독성각(獨聖閣이) 및 산신각(山神閣)이 있는 것처럼 또 거의 빠짐 없이 갖추어진 작은 집으로 칠성각(七星閣)을 볼 수 있다. 그 칠성각에다 모셔 신앙하는 주되는 대상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며, 그래서 칠성각의 다른 이름을 복두각(北斗閣)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칠성각에서는 오로지 의신화(擬神化)된 북두칠성만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불교적으로 충분히 윤색(潤色)된 삼존(三尊)과 칠여래(七如來) 및 도교의 칠성신(七星神) 등이 함께 봉안된다. 주지하다시피 북두칠성은 이른바 큰곰좌(大雄坐)를 이루는 별들 중 가장 뚜렷이 보이는 일곱 별이며 국자의 모양이고 북극에서 약 30도의 거리에 있으면서 북극의 주위를 원형을 그리면서 돌고 있는 별이므로 인간이 동서남북을 판단하는 준거가 되는 별이었다. 그런데 이 칠성의 신앙은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고, 원래는 도교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도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의신화(擬神化)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일곱 신으로 받들어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였는데, 나중에 불교가 그 신앙을 접합하고 탈바꿈시켜 칠성여래(七星如來), 칠여래(七如來)함으로써 비로소 사찰에서의 신앙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의 칠성여래는 불법의 수호에 참여하는 다음 여러 부류 중단(中壇) 호법신(護法神)의 신중(神衆) 속에 포함된 이들인데, 하필 이들만이 독립적으로 칠성각에 모셔졌는가는 적잖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위 표에서 보듯이 도교에서의 북두칠성과 관련 칠원성군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고 있다고 믿은 데다가 불교의 칠여래에서 보듯이 그 관장하는 하늘이 모두 동방인데, 우리 나라를 동국(東國),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함에서 보듯이 동토(東土)의 신인 것을 특별히 고려한 것인 듯 싶다. 게다가 우리 나라 불교에선 옛부터 약사불(藥師佛)을 주신앙 대상으로 한 기복 신앙이 발달해 있었는데, 위에 정리해 보인 불교의 칠여래 중 여럿이 약사경의 칠불 이름과 같으므로 약사 신앙이 발전 확대되는 것과 발맞추어 칠성 신앙이 크게 전개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칠성각에는 봉안되는 칠성 탱화에는 위 칠원성군과 칠불여래가 주로 그려져 있고,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의 성격을 갖게 되는데, 그밖에도 도교에서는 북극성(北極星)을 자미대제(紫薇大帝)라 하고,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라 하는데, 상단에 그것이 각각 3존상(三尊像)으로 더 그려지기도 하고, 또는 불교에서 일월(日月)을 각각 일광편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월광편조식재보살(月光遍照息災菩薩)이라 하는바 그것이 더 그려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삼태성과 육성(六星)과 이십팔수(二十八宿) 등을 탱화의 맨 위 좌우에 배치한 예도 있다.
삼태성(三台星)은 오리온좌의 세 별로, 상태(上台)·중태(中台)·하태(下台)를 일컬음이고, 육성(六星)은 문창궁(文昌宮)이라는 이름의 성좌(星座)에 소속된 여섯 별인데, '상장(上將)·차장(次將) 귀상(貴相)·사명(司命)·사중(司中)·사록(司祿)'의 여섯 별이며, 이십팔수(二十八宿)란 옛날 인도, 페르샤, 중국 등에서 해와 달과 여러 혹성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 황도(黃道)를 중심으로 천구(天球)를 28로 구분한 것인데, 중국의 28수는 다음과 같이 '東…角, 亢,灓, 房, 心, 尾, 箕, 西…奎, 婁, 胃, 昴 畢, 澇, 參, 南…井, 鬼, 柳, 星, 張, 翼, 軫, 北…斗, 牛, 女, 虛, 危, 室, 壁' 등으로 나뉜다.
4. 용왕과 조왕
농업이 생애 수단의 중심이었던 민족, 종족들은 모두 비(雨)를 관장하는 신격으로 용(龍)을 신앙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 용은 못이나 강, 바다와 같은 물 속에 살며, 비나 바람을 일으키고 몰고 다닌다고 여겨져 왔다. 따라서 용은 물의 신이면서 물의 신이면서 우사(雨師)의 성격도 지닌다고 한다. 용(龍 )의 순 우리말은 '미르'로 '물'과 인연이 닿는 말이며, 나아가 불교의 미륵(彌勒)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용과 물의 상관성은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우물, 호소(湖沼), 강담(江潭) 관련 지명으로 용정(龍井), 용호(龍湖), 용소(龍沼), 용추(龍湫), 용담(龍潭), 용강(龍江) 등이 흔하고, 그런 이름을 얻은 곳은 어김없이 기우제(祈雨祭)의 장소가 된 것에서 잘 살필 수 있다. 우리 건국 신화에서는 국조(國祖), 군주(君主), 족조(族祖) 들 중의 많은 사람이 수신(水神)인 용(龍)과 통혼하여 태어난 사람이고, 임금의 지위와 관련하는 말을 일컬어 용안(龍顔), 용상(龍床), 용포(龍袍)라 함에서 보듯이 용은 제왕(帝王)의 상징이기도 해서 여러 모로 존경 내지는 신앙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대중의 생각이 발전하여 불교와 접합됨으로써 불교에서도 용은 호법신중(護法神衆) 가운데의 하나로 대접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왕천(四王天) 중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의 막하에 불법을 호지한다는 용(龍)이 있어 이른바 팔부귀중(八部鬼衆·八部衆) 가운데의 하나였고, 28부중(部衆) 가운데에도 난타용왕(難陀龍王)이 그러한불교와의 접합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민간의 각처에 용왕당이 흔하고 요새는 별로 흔하지 않으나 사찰 가운데에서도 여러 곳에 용왕당(龍王堂)의 이름을 가진 작은 건물을 보게 된다. 용 신앙 관련 민간의 습속이 불교와 접합하여 용왕당이 절에 잇는 것과 비슷한 처지로 민간의 조왕 신앙(爬王信仰)이 사찰로 들어가 사찰의 부엌에 조왕단(爬王壇)이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주지하는 대로 조왕은 민가의 불과 부엌은 관장하는 귀신의 이름이었다.
5. 삼성신앙과 삼성각
여러 곳의 사찰에 위에서 살핀 바 '산신각·독성각·칠성각'이 따로 나란히 마련되지 아니한 채 합쳐져서 봉안되어 삼성각(三聖閣)이라 한 곳이 흔하다. 그러나 삼성각이라 한 건물에서 이들 3종 신앙대상과는 달리 고려말의 삼대성승(三大聖僧)이던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정을 모신 곳도 있는데, 양산 통도사 삼성각이 그러했다. 그밖에도 불교의 삼성(三聖)은 이른바 화엄3성(華嚴三聖)으로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을 일컫는 수가 있으며, 미타3성(彌陀三聖)이라 하여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일컬음이기도 하여 민속 신앙 관련 '삼성'과는 다른 이름이었다. 사찰에 딸린 건물로써 '3성'을 신앙하는 경우가 아니고, 독립된 절이나 암자에서 '3성을 모실 때에는 '삼성굴(三聖窟)·삼성대(三聖臺)·삼성암(三聖庵)'이라 한 곳도 많았는데, 그 때의 '3성'이 무엇을 일컬음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도 주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