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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성, 사랑의 길
7. 정상에서
우리는 “사랑의 길”에 정상에 도달한다. 그것이 바로 일곱째 궁방들이다. 이는 죄스러운 이 세상,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이 세상에서의 “정상”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너그러우심과 영혼의 탁월한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열망하던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여기서 보인다. 놀라우리만큼 넓은 지평들이다. 인간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것을 이미 넘어서 있다. 잃어버렸던 그 낙원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사랑이고 고요함이며 평정하고 가능성이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분의 업적들도 끝이 없습니다.”(영혼의 성 7, 1, 1) 그리스도, 그분은 영혼의 신랑이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다. 구약성경 중에서 뛰어난 신비적인 책인 ‘아가’는, 당신의 선택된 백성을 사랑으로 찾으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면서, 신비적인 노래들로 신랑의 사랑과 신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느님은 일반 대중의 신랑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 백성을 구성하는 영혼들의 신랑이시다. 이런 부르심과 이런 예정 안에로,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들어간다. 우리가 무엇을 획득해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 우리가 거기에 응답해야만 하는 그런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이다. 인간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약혼한 한 영혼이 누리는 이 탁월한 현실은, 이 세상에서 주어진다. 우리는 그 탁월한 현실을 여기서, 이 일곱째 궁방들에서 본다. “오, 위대하신 하느님! 저 같은 이렇게 가련한 피조물이 제가 알아들을 만한 것에서는 까마득히 동떨어진 것을 다루려니 떨고 있나 봅니다.”(영혼의 성 7, 1, 2) 오로지 영만이 있다! 성녀는 여기서 이 현실들은 감각도 본능도 육체도 다 초월해 있고, 모든 것은 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 사실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 다시 한 번 가르치려 한다. 그 영은 인간의 전 존재를 – 특히 그의 정신과 그의 의지와 정적인 모든 것의 총체를 – 영적인 것이 되게 한다. “여기서는, 영혼이 마치 육체 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육체의 기억은 없고 오로지 영만이 존재합니다.”(영혼의 성 7, 2, 3) “오로지 영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의 정적인 부분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매우 아름다운 선물이니 말이다.
높은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하느님은 영혼을 당신 거처에로 들어가게 하시는데, 그것은 이 일곱째 궁방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그 영혼을 하늘나라에서 소유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 안에 당신께서 홀로 거처하시는 그런 장소를 – 말하자면 또 다른 하늘나라를 – 가지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영혼의 성 7, 1, 3) 사랑은 어떤 정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그 고유한 정화이고 그리스도와 영혼 그 두 주체가 서로 관계를 가지는 그런 “존재의 내어 줌”이다. “이제 거룩하고 영적인 혼인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당신께서는 영혼에게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에 대한 환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는 영혼이 그것을 잘 이해하게 하시고 그렇게 좋은 선물에 대해서 영혼이 모르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 2, 1) 성녀 데레사는 그 영적 혼인의 은혜를 1572년 11월 18일에 받았다. 그 사실을 성녀는 ‘양심에 대한 진술’에서 밝힌다.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에서, 성녀가 원장으로 머물렀던 때 둘째 해에 있었던 일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손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을 때, 주님께서는 환시 중에 성녀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당신 오른손을 내미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못을 보아라. 이것은 네가 오늘부터 내 신부가 된다는 징표이다. 전에는 네가 이것을 받을 만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너는 내 명예를 오로지 창조주나 왕이나 네 하느님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내 신부로서 그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 명예는 너의 것이고 네 명예는 나의 것이다.”(양심에 대한 진술 25) 성녀가 57세 때, 즉 선종하기 10년 전의 일이다. 몇 년 후 1575년에 성녀는 이렇게 했다. “제가 베아스 수녀원에 있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 제가 그분의 신부가 되었으니 – 당신께 청하라고 말씀하시고, 제가 청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징표로서 제게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은 자수정 같은 보석이 박힌 것이었습니다.”(양심에 대한 진술 28) 이 영적 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영혼이 대단한 순수함과 성성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게 되는 지극히 높은 단계의 어떤 일치이다. 환시의 은혜는 부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사랑의 일치, 의지의 일치이다. 영혼이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고, 하느님은 영혼을 위한 선물에 한계를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지극히 놀랍고 신비스러운 어떤 일이 일어난다. 즉 영혼에게 주어지는 그 주님의 동반은 영속적인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 영혼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으십니다.”(영혼의 성 7, 2, 3) 성녀는 이 감탄할 만한 일치를 설명하기 원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전 단계인 “영적 약혼”의 경우에는 영혼과 주님은 마치 불꽃이 하나로 합쳐진 두 개의 촛불과 같지만, 이 둘은 나눠질 수 있고 다시 둘이 된다. 여기 “영적 혼인”의 경우에는 영혼은 마치 바다나 강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도 같아서, 절대로 다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해소될 수 없는 결합이다. 그 안에서 두 존재는 동일한 하나가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가 앞에서 우리가 말한 그 작은 나비가 죽는 곳인데, 여기서 영혼은 지극한 즐거움 안에 죽게 됩니다. 그의 생명은 벌써 그리스도이시니까요.”(영혼의 성 7, 2, 5)
주님께서 당신 신부에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보석들 중 하나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이해이다. 물론 하늘나라에서처럼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서 거룩하신 성삼위의 한 분 한 분께서 영혼에게 알려지십니다.”(영혼의 성 7, 1, 6) 영혼은 성부께, 성자께, 또 성령께 대해 사랑에 빠진다. 영혼은 세 분을 구별한다. 언제 성부님과 말씀을 나누고 언제 성자님과 언제 성령님과 말씀을 나눌지를 영혼은 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 아마 성삼의 엘리사벳 수녀는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 일곱째 궁방들에게 영혼은 인간적이고 신적인 완덕의 대단히 높은 몇몇 정상들에 도달했다. “위대한 해방”, 이것은 영이 누리는 엄청난 자유와 같다.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 자신의 조그만 문제들에 대해서 기이한 “잊어버림”을 체험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중요한 것을 위엄 있게 관조하는 데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영혼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명예와 하느님의 영광이다. 영혼은 – 설사 박해와 질병 혹은 다른 불행들을 겪는다 하더라도 – 엄청난 평화와 내적 즐거움을 체험한다. 끊임없이 찬미하기 시작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영혼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렇게 외치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덕행에 노력하지 않고 언제나 덕행의 실천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난쟁이로 머물러 있게 될 겁니다.”(영혼의 성 7, 4, 9) 영혼들이 이미 유혹들에 대해 안전하고 자유로워졌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혹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맹수는 잠들지 않는다. 언제나 숨어 노리고 있다. “여러분이 더 나은 영혼들이 되는 그만큼 … 여러분의 기도가 이웃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영혼의 성 7, 4, 15) 그리고 마침내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통해서 가려고 하지는 맙시다.”(영혼의 성 7, 4, 12) 언제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죽지 않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즐기는 것보다는 고통 받는 것이 항상 더 중요한 것이다.
일곱째 궁방들의 문제들
충만함 일곱째 궁방에서의 가장 아름답고 흥미로운 주제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이라는 주제이다.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예수께 대해서, 새 창조의 모델이신 그분께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콜로 1, 19)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충만한 신성”(콜로 2,9 참조)을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고유한 무엇으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고 참사람이시다. 하느님으로서, 그분은 분명히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새로운 피조물, 새 창조의 모델이시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도 그 새로운 창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2코린 5, 17 참조). 갈라티아서에서는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6, 15)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그 “옛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좋게 훌륭하게 만드셨으니 말이다. 그 “옛것”은 인간을 “타락”에로 끌어들였던 그 “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죄”가 인간을 그 질에 있어서나 그 가치에 있어서나, 인간 존재 전체를 “옛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의 쇄신, 하느님과의 화해, 원상태로의 복귀가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완전함 ․ 충만함은 그리스도의 피로 화해가 이루어진 그 창조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는 “창조”를 변경시키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화해시키고 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들을 새롭게 발견해 내고, 그 가치들을 “그리스도의 모상”에 합당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충만함”, “인간 전존재의 충만함”을 말하고 있다. “은총의 충만함”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새로운 질서의 “인간적 충만함”을 받으셨다. “충만함”은 인간의 윤리적 완전함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능력을 완전히 펼쳐 나감을 말한다. 복음사가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를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분으로 보았고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가 모든 은총을 받았다.”고 보았다(요한 1, 14과 1, 16 참조). “은총”이라는 말은 영적인 면에서도 인간적인 면에서도 많은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충만함을 이해하도록 하자. “창조”로 인해서 인간은 매우 풍요로운 가치들을 가진다. 처음에는 그 가치들은 마치 씨앗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의 살아 있는 존재의 한 부분으로서 점점 완성되어 간다. 그 가치들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 성장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충만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들”, 창조주께로부터 주어진 뛰어난 선물들에 대한 것이다. 이 가치들은 인간을 지상에 사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로 들어 높인다. 이 가치들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과 감각과의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데, 그래서 이 가치들은 결국 지혜 ․ 사랑 ․기쁨 ․ 창의력이고 영에 대한 지배력이고, 평화이고, 여러 가지 능력들 사이에서 형평 등등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창조로부터 온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온갖 순수함과 당신의 은총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뛰어난 선물과 당신의 진리의 빛으로, 그 “창조”에로 되돌아가신다. 그분은 첫째 아담보다 더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 뛰어난 가치들은 완전하지 않고 병들어 있고 “좌” 이후로 일그러져 있다. “새로운 창조” 안에서가 아니면 완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은총 안에, 그분의 믿음과 영적 사랑의 세계 안에 그 바탕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창조된 인간적 가치들에 새로운 차원을 주기까지 하신다. 즉 “강생”의 차원,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차원을 주신다. 모든 것은 새로운 모습이 된다(2코린 5, 17 참조). 예수께서는 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그분을 믿는 우리 모든 이들을 기다리는 미래의 영광스러운 세상의 목적성을 가진 온전히 새로운 몇몇 가치들을 창조하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아미 시작되었다. 이미 우리 가운데에 있다(마태 3,2; 4,17; 루카 17,21 참조). “하늘나라”의 이 멋진 가치들은 그리스도교적 동정성과 영적인 모성 혹은 영적인 부성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그 “충만함”은 그분과 일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 그의 삶의 상태나 상황들이 어떠하든 간에 주어지는 –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다. 그 “충만함”은 성성의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은총으로 또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여러 단계들로 이루어진다. 더 많이 일치될수록 더 온전한 “충만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은총은 결코 본성을 질식시키지 않는다. 은총은 본성을 들어 높이고, 변모시키고, 빛과 생명으로 채워 주고, 오로지 그 은총만이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경로들을 통해서 인간의 깊은 열망들을 채워 준다. 은총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영혼 안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사랑 넘치는 현존이다. 더 높은 성성에로의 모든 부르심에는 언제나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열망들을 채워지지 않은 채 버려두지 않는 풍부한 은총이 따라온다. 은총과 함께라면 아무도 실패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은 완전하시고 평온하시고 당신 자신의 모든 인간적 역량들을 온전히 지배하신다. 그분의 지혜도 그분의 감성의 영역도 완성되어 있다. 그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성령에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은 이 “충만함”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자이자 그분을 꼭 닮은 분이었던 마리아가 그러하셨다. 온전히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고, 조화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신 분이셨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시다.
이제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바라보자. 성녀는 처음부터 완전하지는 않았다. 성녀의 본연의 가치들은 대단했다. 그러나 삶의 싸움판에 들어섰을 때 그 가치들은 많은 손실을 당했다.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총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성녀를 알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좌절과 재기(再起)를 통해서, 아주 오랜 어떤 과정을 통해서 – 성녀는 『자서전』과 『영혼의 성』을 통해 놀라우리만큼 분명하게 그 과정을 보여 주지만 – 데레사 성녀는 마침내 일곱째 궁방들에 도달한다. 성녀의 묘사는 아름답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득한 자신의 영혼에 대한 묘사이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에게 있어서는, 일곱째 궁방들은 충만함의 상태, 죄스러운 이 세상 안에서의 인간적 충만함의 상태이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제 자신의 한계로부터 온전히 빠져나올 수는 없다. 여기서의 충만함은 상대적인 충만함이고, 머리이시고 원천이신 그리스도 그분의 충만함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는 “일치의 충만함”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된 것이다. 물 한 방울이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하나가 되듯이 말이다. 작은 나비는 죽는다. 그리스도로 변모된다. 이는 “사랑의 충만함”이다. 여기서 신부가 바라던 그 입맞춤으로 … 영혼의 소원이 이루어진다.“(영혼의 성 7, 3, 13 참조) 이는 “평화의 충만함”이다. “여기서 … 그 비둘기는 올리브 열매를 얻어 만난다.”(영혼의 성 7, 3, 13 참조) “모든 것이 아주 평온하게, 전혀 아무런 소란도 없이 일어난다.”(영혼의 성 7, 3, 11 참조) 이는 “조화의 충만함”이다. 여기서 영혼의 존재 전체, 영혼의 모든 능력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가 된다. 이전의 여러 궁방들에서 성녀 데레사를 고통스럽게 하던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능력들이 갈라져 있음을 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지성이, 또 때로는 의지(意志)가 갈라져 있었다. 상상(想像)은 마치 미친 것처럼 헤매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함께 있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는 그 영혼이 송두리째 하느님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 조화는 그의 모든 행동들과 모든 일들 안에 번져 나온다. 여기에는 아직 육신의 충만함은 들어오질 않는다. 그것은 부활과 함께 올 것이다. 일곱째 궁방들은 육신의 질병이나 불안정한 상태나 영혼에 대한 형평을 잃은 육신의 영향력 따위와 공존할 수 있다. 이 영혼이 지배력과 평화를 잃어버리지는 않아도, 이런 것들이 그를 성가시게 할 수 있다. 육신은 – 상처입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처럼 – 괴로움을 당할 수 있고, 영혼과 함께 고독함을 느낄 수 있고, 갈증을 느끼고 번민할 수 있다. 육신은 “희생”이 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희생물”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갚음”이 된다. 이것 역시 “충만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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