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문화의 고장 안동
역사속의 그녀를 마감하고, 역사이야기에 무엇을 연재할까 생각하다 작년부터 역사문화체험을 함께했던 성서초등학교 친구들과 답사한 내용으로 정하였다. 올해 1월 2박3일의 일정으로 천년고도의 도시 경주를 답사하고 더욱 끈끈해진 9명의 친구들과 2월에는 전통과 문화의 고장이며 충절의 고장인 안동을 다녀왔다. 하루일정으로 둘러보기에 벅찬 곳이라 답사코스를 정하는 것부터 고민이었다. 안동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곳이 하회마을이고, 다음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혼이 담겨있는 도산서원을 함께 볼 욕심을 갖자니 두 곳의 거리가 자동차로 1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곳이기에 두 곳을 포함해서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행하기로 하고,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30분이라는 긴 일정을 잡았다. 고학년이긴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다녀야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경주를 다녀온 후라 우리 친구들이 잘 따라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전통한지 체험과 하회마을 - 하회동 탈박물관- 안동민속박물관 -도산서원 - 퇴계종택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21일 오전 7시. 안개주의보가 내려 비행기가 결항된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참가자 모두 약속시간을 잘 지켜 정시에 출발할 수 있었다. 안동 가는 길은 중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또 중앙고속도로로 이어지는 4시간을 숨가쁘게 달려 서안동 톨게이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안동에 발을 딛었다.
안동한지 신라시대 종이 재현
안동은 전통과 문화의 고장답게 하회마을 등 종택에서 진행되는 문화체험이 많지만 시간관계상 우리는 전통한지 체험을 하기로 하였다. 닥나무 1년생 가지를 양잿물에 4시간 동안 삶아 껍질을 벗겨 다시 삶고, 티 고르고, 짓이겨 한지를 뜨고, 물을 빼서 열판에서 건조 시킨 다음 마지막 공정인 도침까지 거치면 우수한 우리의 전통한지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업체인 (주)안동한지는 세계 최고 필사본 화엄경 경전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경 (국보 제196호 · 호암미술관 소장)을 재현하였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영인자료를 원본과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한다는 기본방침에 따라 전통 한지의 제작과 영인 방법 등에 대해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고증 및 자문을 거치는 등 2년에 걸쳐 영인작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2002년 12월에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경]의 영인을 최종 완료하게 되었다.
오늘날 종이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고 하나 옛 종이를 그것도 신라시대의 종이를 재현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현해낼 종이를 통해 당시의 제조방식을 유추해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전통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한지생산업체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인자료는 국내 국·공립 도서관과 박물관을 비롯한 관계기관과 해외 주재 한국문화원 및 주요 재외공관· 유명박물관 등지에 배포했다.
우리는 한지제작의 11과정 중 한지뜨기, 물빼기, 건조의 세과정을 체험하면서 나만의 한지를 만들어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교·민속의 하회마을
낙동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 도는 데서 유래된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년간 살아온 전형적인 집성촌이다. 민속촌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마을 전체가 한국 전통가옥의 미(美)가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의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 하회마을은 1999년 4월 21일에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한국 전통의 고장으로서 방문하여 생일상을 받은 곳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우리는 관광안내소에서 안내지도를 받고, 삼삼오오 자연스럽게 지도에 표시된 하동고택-남촌댁-주일재-북촌댁-삼신당-양진당-충효당-영모각-류시주가옥 등을 찾아 나섰다. 항상 필자의 안내만 받다가 직접 지도를 보고 답사할 곳을 찾아보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이 되었을 것이다. 길이 엇갈려도 휴대폰으로 연락해서 다시 만나는 과정들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하회마을을 숨바꼭질 하는 느낌이었다. 풍산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보물제306호)보다 충효당과 영모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작년에 종영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우리 꼬마 친구들에게 서애 류성룡이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모각에 전시된 류성룡의 유물들을 보면서 이순신장군과의 우정과 임진왜란 등 드라마속의 명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우리는 삼신당의 느티나무에서 소원지를 달았다. 600여년을 풍산류씨가 정착하여 번성할 수 있도록 해준 신령스러운 기운을 빌어 미리 달아 논 빽빽한 소원지 사이에 우리들도 정성껏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였다. 휴대폰으로 엄마의 소원까지 대신 소원지에 적는 모습에서 마음이 훈훈해 졌다.
조선 유학(儒學)의 대표적 성현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퇴계는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50세 이후 퇴계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도산서원은 크게 12채의 건물로 구분되는데 앞쪽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퇴계가 4년에 걸쳐서 지은 집들이다. 서원의 기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현을 추모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선비를 양성하는 일이다. 도산서당은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고, 농운정사는 학생들이 숙식을 하던 기숙사이다. 공부하는 방을 시습제(時習齎), 잠자는 방을 지숙료(止宿寮),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불렀으며, 농운정사의 건물 전체 형태는 공부를 권장하는 뜻에서工자로 지었다고 한다. 도산서원에서 아이들이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천원짜리 지폐 뒷면의 배경인 도산서원과 실제 도산서원과의 차이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내용과 마찬가지로 도산서당 앞의 나무 한그루가 실제 서원에는 없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진도문(進道門)을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서원 중앙에 대강당이라 할 수 있는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던 집회장소이며, 전교당 동쪽에는 박약재(博約齎)가 있다. 이 두 건물은 유생(儒生)들이 거쳐하던 방이다. 특히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은 선조가 하사한 조선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친필 글씨이다. 진도문 동쪽과 서쪽에는 광명실(光明室)이란 서고가 있다.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여러 임금이 내려준 책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전교당 동쪽에는 퇴계 문집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이 장판각에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언행록 등의 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의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덕사(尙德祠)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을 돌아나와 만나는 옥진각에는 선생의 행적과 지팡이, 벼루, 투호, 지구의, 책자 등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도산서원과 안동댐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곳이 시사단(試士檀)이다. 본래 터는 안동댐에 수몰되어 지금처럼 높이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서원 앞에서 나룻배로 건너다닌다. 이곳은 1792년(정조16년)에 최초로 지방에서 과거가 열렸다는 시사단으로 정조가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 (陶山別科)를 본 장소이다. 7천2백여 명의 선비들이 응시를 했는데 임금이 친히 채점을 하여 급제한 11명의 유생들에게 위로연을 열어 주었다고 전해온다.
도산서원을 지나면 바로 인근에 퇴계와 관련된 곳들을 만나게 된다. 이황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종택과 태실과 묘소가 그것이다. 주역을 공부했던 퇴계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준비했던 일화는 청렴한 학자로서의 퇴계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퇴계는 1570년(선조 3년)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 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 라고만 새기고, 뒷면 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국장인 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초라한 편이다. 현재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답사를 마치고
하루 만에 안동을 답사하는 일은 예상했던 대로 벅찬 일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안동민속박물관 대신 우리는 퇴계묘소를 참배했다. 이젠 아이들도 제법 걷는 것과 등산에 익숙한 것 같다. 퇴계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숨이 차는 것도 감수하고 산에 오른다. 작년부터 시작해 벌써 1년을 맞는 문화·역사 답사를 통해 전통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아직 묘에 대한 예를 몰라 처음엔 상석을 의자삼아 앉기도 했지만 제법 망주석과 비석을 어루만지며 묘의 주인인 퇴계선생을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려고 한다.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지고, 한적한 농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풍경을 뒤로 서울로 발길을 돌렸지만, 안동을 다녀온 아이들의 가슴엔 무엇이 채워졌을까 궁금하다. 아는 만큼 보이듯 체험을 통해 쌓이는 지식창고의 풍요로움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도산서원 퇴계묘소
도산서원 전교당 하회마을 삼신당
첫댓글 먼 길을 다녀오셨군요 근데, 사진이 배꼽만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