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에서도 물론 유고슬라비즘 운동이 소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적극적 대안으로 고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르비아주의에 밀려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운동의 핵심은 바로 1904년 베오그라드에서 창립된 남쪽의 슬라브 인이라는 의미를 담은 ‘슬로벤스키 유그(Slovenski Jug)'라는 학회다. 소장학자들과 진보적인 학생들이 주축이 된 이 학회의 핵심 프로그램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뿐만 아니라 또다른 슬라브 인인 불가리아까지의 완전한 남슬라브 인의 통합을 지향했다.
모든 남슬라브 인을 다룬 문헌이 크로아티아 인에 의해 처음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결국 유고슬라비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발상이 세르비아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 있던 크로아티아에서 더 큰 호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 인의 모든 거주 지역을 통일하는 이른바 대세르비아주의가 대세였었다. 때문에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 정치가들은 본래 세르비아 인이 주축이 된 대세르비아 제국의 건설에 더 집착하고 있었으며, 20세기 초부터 유고슬라비즘을 부르짖었던 세력은 세르비아의 일부 지식인 그룹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그리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거쳐 흘러 오는 다뉴브 강과 류블랴나, 자그레브를 거쳐 흘러 오는 사바 강이 만난다. 이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아주 높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을 칼라멕단 공원이라고 한다.‘슬로벤스키 유그’는 바로 이 칼라멕단 공원에서 정기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인의 저녁’이라는 야외 행사를 개최했다. 그래도 프랑스 말깨나 안다는 지식인들이 주최를 했다고 프랑스 어를 써서 이 행사를 ‘유고슬라브 스와레(Yugoslav soiree)’라고 명명했고 공객적으로 내건 슬로건은 “남슬라브 인들이여 단결하자!”였다.

칼라멕단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세르비아 정부는 이 모임에 대해 물질적으로 일정한 지원을 해주긴 했지만 북쪽의 영토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해 있는 현실 때문에 사실상 유고슬라비즘은 이 당시로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비전이었다. 발칸 반도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점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유고슬라비즘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 제국이 1909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고 나서부터 이 개념의 실현은 더욱더 불가능해졌다.
세르비아 정치인의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의 야망은 유고슬라비즘을 이용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합스부르크의 현실 속에서도 세르비아는 아주 소극적인 의미에서 유고슬라비즘을 위한 일종의 문화 센타 구실을 하긴 했다. 물론 세르비아 정부의 이 같은 용인의 배경에는 바로 정치적 동기가 숨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04년은 세르비아가 유고슬라비즘의 분위기를 한껏 이용한 해이다. 이해 열린 페타르 1세의 대관식에는 모든 유고슬라비아 영토로부터 대표단이 참석했다. 이 대관식을 기념해 ‘유고슬라비아 예술제’가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되었으며 5월에는 약 2백 명의 불가리아 학생들이 베오그라드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후 베오그라드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청년 제1차 회의’, ‘남슬라브 작가 회의’ 그리고 ‘남슬라브 의사 회의’ 등이 잇달아 개최되어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작가들은 1905년 베오그라드와 소피아에서 후속 모임을 열어 문학 테마로서의 유고슬라비즘을 다루는 열의를 보였다.

페타르 카라조르지예비치
크로아티아에서도 베오그라드 분위기에 걸맞는 모임이 속속 구체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05년 12월 12일 자그레브에서 만들어졌다. 이날 일단의 크로아티아 정치인과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이 모여 강력한 양민족의 연대를 맹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기로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1906년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관세 전쟁(돼지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학생들은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비엔나 측이 40명으로 구성된 자그레브 합창단의 베오그라드 공연을 금지시키자 오히려 베오그라드 학생들이 크로아티아로 넘어 들어와 시위를 벌이는 연대성을 과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1906년 8월에 베오그라드에서는 페타르 왕이 참석한 가운데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달마티아, 보이보디나, 슬라보니아(현재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한 주),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에서 참석한 교사 대표들이 대회를 개최, 유고슬라비즘의 장래를 구상하는 대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유고슬라비즘은 현실성보다는 비전만을 제시한 정도였다.
이론적으로만 거론되던 유고슬라비점이 실천적인 이데올로기로 변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53명의 세르비아 인에 대한 반역죄 재판을 자그레브에서 열었다. 이때 유고슬라비아의 궁극적 통합을 외치는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으며 특히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통합 운동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더욱이 1912년에서 1913년까지 계속된 제1차 발칸 전쟁에서의 세르비아가 거둔 승리는 크로아티아측에서의 유고 통합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다. 이 때문에 1913년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모든 유고슬라비아 영토의 해방이 손에 닿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1천 2백만 유고슬라비아 인을 묶어 내는 센터로서의 세르비아의 역할은 일종의 강력한 신화로 존재했으며 세르비아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신화는 적어도 세르비아 내에서는 일부 지식인들의 신화로만 존재했으며 정치인들에게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방파제였다. 그나마 국제 정세를 이용하려 했던 정치가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고 보다 노골적인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려던 세력은 군부였으며 특히 앞에서 언급한 블랙 핸드는 그 선두에 서 있었다.
다라서 유고슬라비즘은 적어도 세르비아에서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했다. 대세르비아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실천적 이데올로기로서 유고슬라비즘이 등장하자 양자 간의 마찰은 점점더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두 이데올로기의 마찰은 향후 발칸 반도의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