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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25×24×46.5㎝, 1988 |
무제│26×22×42㎝, 1988 |
무제│26×22×46㎝, 1988 |
둘째는, 그의 첫 개인전은 그가 지형하는 작업의 형식과 개념의 지표를 대중을 향해 고백하는 하나의 선언이자, 예고의 문(門)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 발표된 개인전의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는 개인적 경험과 사유에 입각한 '현실 체험의 반영으로서의 도예작품'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이 시기부터 작품의 형태와 구조는 물론 흙의 성형, 소성하는 방식에서 일정한 틀(Frame)을 형성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탄생-보행>, <탄생-1, 어둠을 뚫고>, <탄생-2, 고통 속에서>와 같이 작품 제목은 자신의 미국 유학 중이던 1987년에 얻었던 첫 아들 '주형'이의 출생과 탄생에 관련된 생명의 신비와 인생의 의미를 도조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한 진솔한 표현추구는 이후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개념적 축이자 예술표현의 중심주제로 고착화되면서 흔들림 없는 맥락을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이 시기부터 흙의 물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조각적 방식을 통해 외면과 내면의 구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표현구조를 택하게 된다. 이 첫 개인전의 작품은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고 있는데, 알이 깨어져가는 상황을 타원형의 형태로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흙덩어리를 속파내기 기법으로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려 하였다. 마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에 관한 시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라는 구절을 상기시켜준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역시 알 혹은 생명체를 보(褓)로 싸고 있는 듯한 구조로 눕혀져 있거나 불완전한 걸음걸이를 걷는 듯한 위태로운 형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자식의 탄생을 목격하는 일은 분명 위대한 신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경이롭고 신비한 체험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험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가가 그리 흔치 않은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얼마나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고, 일기를 쓰듯이 자기 고백적 표현에 솔직한 작가인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번에 전시된 나의 작품들은 "주형"이의 분신들이다." 라고 큰 제목을 달고 있는 첫 개인전 카탈로그에 쓴 작가노트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에 충분한 기록으로 남는다.
"나는 이번 작품들을 통하여 잉태에서 비롯하여 고통으로 귀결되는 탄생의 과정을 흙이라는 자연이 주신 매개체를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내가 태어난 흙이라는 순박한 나의 동반자를 어루만지며 그 속에서 승화된 생(生)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여 형상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3. 삶과 죽음에 대한 자각의 편린(片鱗)들
1991년도에 열렸던 강완주 선생의 두 번째 개인전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애와 슬픔이 가득 고여 있는 처절한 독백의 기록이다. 1988년 개인전을 연 이후 그의 생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던 희노애락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듯 하다. 둘째아들의 출산, 상명대의 교수임용, 아버지의 별세... 등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희열과 슬픔을 한꺼번에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러한 와중에 흙과 함께 대화하며 개인전을 준비했고, 작업실에서의 홀로 있는 시간동안 그것을 감내하며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모의 죽음은 슬픔이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비탄에 젖게 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그에게는 더욱 크게 다가섰던 듯 하다. 그의 개인전 전시타이틀도<삶과 죽음의 형상전>이라는 전위적이고 다소 섬뜩한 표현을 주저없이 쓰고 있는데, 작품들의 제목들은 이러한 자신의 심경을 여과없이 반영하듯 하나의 완결된 명사형이 아닌 서술적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삶과 죽음의 공존 속에서>, <그토록 힘차던 젊은 날도 있었는데>, <이제는 앙상한 몰골만 남아...>, <끝까지 힘차게 날고 싶었는데...>, <휘청거리는 영혼이여!>,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죽음의 고통을 생각해보자...> 등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며 느껴야 했던 비탄과 슬픔의 정한(情恨)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의 외형적인 구조는 이전의 도조형식들과 그리 큰 변화는 없지만, 다양한 유약의 구사와 함께 자신의 표현의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형태적 완결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작가로서의 열정이 배어있으면서도,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내용적 맥락과 형태적 표현이 합치될 수 있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하게 엿보이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유리된 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려 했던 예술지상주의적 작가의 모습을 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흙은 인생을 탐구하는 수단이었으며, 도조의 형식은 도예의 극점(極點)을 모색하는 고행의 과정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삶의 진실한 드러냄을 흙을 통해 구현해보고자 하였으며, 자기고백이나 하나의 예술적 울림으로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이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그가 쓴 작가노트는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을 저민다.
"너무나도 슬펐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삶은 더욱 값지다는 말인다? 그토록 모질게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이 얼마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말인가? 결국 한 생명의 탄생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죽음은 다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들어 앉아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만 하는데..."
4. 미완의 꿈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개인전 도록과 작품을 검토하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였다. 강완주 선생을 세 번째 개인전을 1994년도에 토 아트 스페이스에서 가졌는데, 이때의 전시타이틀이 <죽음과 삶의 형상전>으로 2회 때와는 다르게 삶과 죽음이 그 순서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전의 아버지의 임종을 겪으면서 준비했던 개인전과는 다르게 '죽음'이 강조된 의미로 어순이 도치된 것이었다. 이 당시 그는 국내외그룹전과 초대전에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고, 교수로서도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를 다져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개인전 카탈로그에 실린 그의 작가노트는 이 '삶과 죽음'의 어순도치와 함께 '죽음'에 대한 예감이 어떤 그림자처럼 다가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이 3년만에 가진 개인전의 카탈로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앞에 다가섰을 때, 나는 당신의 의로운 오른팔을 잡고자 발버둥쳤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당신이 매정하게 나의 손을 뿌리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신 당신의 실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여! 일그러진 내 삶 속에서 항상 같이 하셔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살라갈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작품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별세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삶'에 관한 희망의 징후로서 유약의 다양한 색채구사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 반면, 세 번째 개인전의 작품은 흑백의 극단적인 대비와 모노톤의 음습한 기운이 작품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내부를 더욱 깊숙이 파고, 수직형의 흰색 기둥이나 빈 공간을 설정하고 있다. 외형은 보다 유기적이고 비정형적인 형태로 마치 암석이나 동굴의 암벽을 연상케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이 주는 종교적 엄숙함의 아우라(Aura)에서나 그의 작가노트에서나, 아버지의 사후에 그가 기독교적인 신앙에 깊이 귀의하게 되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어떤 암시를 받았던 듯, 이후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불안한 징후들이 감지된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기원>, <무제>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 하얀 십자가, 일자형의 수직선 혹은 꺽인 선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변을 검은 색이나 단일한 색상으로 조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완주 선생은 이처럼 자신의 현실체험에서 비롯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것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치유하기 위해 애썼던 흔적을 자신의 고백에서나 작품을 통해 목격할 수 있다. 그는 이 세 번째 개인전을 치른 후, 개인적 자기진술로서의 작품활동보다는 외면할 수 없었던 사회적 책임에 보다 치중했던 이력을 발견할 수 있다. 1995년도에는 디자인연구소장직을 맡아 학교의 특성상 도자기 디자인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산업도자기 제품의 개발에 전력하였고, 현대도예비엔날레 추진위원회 홍보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서울 후암동에 새로 건립한 <새나라공원>에 환경조형물을 의뢰받아 설치했으며, 1996년도에는 상명대 디자인대학장을 역임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수술, 회복, 재발과 같은 투병기간 중에도 작품활동을 지속하는 등 작가로서나 교수로서의 직업정신을 잃지 않았다. 1988년도에는 <현대도예 100인전>, <상명대 디자인대학ㆍ예술대학 교수작품전>, <경희도예가회전>, <한ㆍ일 현대도예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1999년도에는 <경희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전>, <현대도예가회전>,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ㆍ예술대학 교수작품전>, <상명요업디자이너회원전>에 참여하였다. 2000년도에는 <도예 25인전>, <2000목포 세계도예프레-엑스포 초대전>에 출품한 것에 이어 <2000한ㆍ일 도예대학전>, <2000세계장작가마페스티벌>에서는 작품출품과 함께 실질적인 행사운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의 마지막 전시회는 미국 롱아일랜드 초청으로 힐우드미술관에서 개최된 <경희도예디자인전>이었다. 이는 자신의 미국유학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교육적이고 국제교류적인 성격의 전시회로서 모교인 경희대학교에 바친 마지막 헌사(獻射)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 헤르만 헷세가 <데미안>에서 되뇌이었던 글귀가 다시금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정말 내 자신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왜 그다지도 힘든 일이었을까."
강완주 선생은 짧은 생의 시간동안 자기애와 현실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고백적 작품세계와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의식을 도조작품을 통해 담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은 진실한 한 인간의 내면을 외부로 드러내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작품의 내용과 형식, 삶과 예술을 흙의 정신으로 일치시키려는 통합에의 의지였다. 그의 작업실은 도예가 가진 흙의 고유한 본성과 예술적 표현의 내재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열정의 무대였으며, 그의 학교는 이러한 조형적 가능태를 실용적 디자인 제품으로 이전시키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필자는 오늘 그가 남긴 유작 중 두 아들의 모습이 사람스럽게 그려진 미완성의 접시를 보며 다시금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남아있는 우리들 모두는 삶을 초극하려 했던 흙과의 열정, 그 짧은 세월동안 온전히 다 펼치지 못하고 간 그의 영전 앞에 무심한 꽃 한 송이를 바쳐야 하리라.
200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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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영혼이여!│15×17×70㎝, 1991 |
88-Ⅲ│1988 |
Ⅰ. The Birth (탄생)
이번에 전시된 나의 작품들은 "주형"이의 분신들이다.
"주형"이는 이제 갓 한 돌을 넘긴 나의 아들이다. "주형"이의 출생은 그 당시 4년여의 유학 생활 속에서 지쳐 있던 나에게 한 생명의 탄생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위대한 신의 섭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탄생의 의미는 숭고한 것이요, 그것은 고통이라는 과정을 거쳐 신비로움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체에게 진정한 의미를 부여키 위해서는 깨어질 것 같은 아픔의 순간 또한 음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형"이로 인하여 흙 속에서 거듭 태어남을 배웠으며 "주형"이는 흙으로 분신하여 나의 작품으로써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이번 작품들을 통하여 잉태에서 비롯하여 고통으로 귀결되는 탄생의 과정을 흙이라는 자연이 주신 매개체를 이용하여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내가 태어난 흙이라는 순박한 나의 동반자를 어루만지며 그 속에서 승화된 生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여 형성화 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번 전시된 모든 작품들은 4여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무리 지으며 1987.8 ~ 1988.6 사이에 작업한 것이다. 이제 이 작품들을 갖고 고국에서 첫 개인전을 갖게 되어 무한한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도조(Ceramic Sculpture)라는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은 모든 분들 앞에 내놓으며 느끼는 두려움 또한 느끼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이제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내어 놓은 지금 여러분들의 허심탄회한 조언과 질책을 감히 기대하며 성원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88. 12
탄생-보행│30×20×65㎝, 1988 |
탄생│1988 |
탄생-2, 고통 속에서│60×20×20㎝, 1988 |
88-Ⅰ│1988 |
88-Ⅱ│1988 |
탄생│1987 |
탄생│1987 |
탄생│1987 |
탄생│1987 |
탄생│1987 |
Ⅱ. Shape of Life & Death (삶과 죽음의 형상)
너무도 늦은 밤에 이렇게 홀로 있다는 것이 좋다.
지하실의 곰팡이 냄새를 곁들인 흙 내용은 더욱 좋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 있다는 것인가? 죽었다는 것인가?
어느 것이 더욱 값진 의미를 갖는 걸까?...
항상 골치가 아프다.
내가 철학가인가? 아니면 사상가?
예술가니까? 웃긴다-
그저 내 눈 앞에 스쳐 지나가는 삶의 순간 순간을
음미하려 노력할 뿐인데...
거기서 죽음은 무엇이며 삶은 무언가?
너무도 슬펐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삶은 더욱 값지다는 말인가?
그토록 모질게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이
얼마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말인가?
결국 한 생명의 탄생은 죽음으로
귀결되고 죽음은 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 앉아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만 하는데...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여
제발 내게 '이것이 무어냐'고 묻지 말아다오.
단지, 그것은 나를 사랑하셨던 아버지의
죽음과 내가 사랑하는 나의 두 아들의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로 표현일 뿐이오....
1991. 8. 작업노트 중에서
삶과 죽음의 공존 속에서│30×25×6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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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공존 속에서│30×25×6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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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영혼이여!│15×17×7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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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앙상한 몰골만 남아│20×20×6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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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힘차게 날고 싶었는데...│20×20×6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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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가는 육신이여...│10×15×4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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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용히 생을 되돌아보자!│25×25×7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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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디로 가야하나?│15×20×6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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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통을 생각해보자│13×17×3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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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기도│12×15×4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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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힘차던 젊은 날도 있었는데│25×22×75㎝, 1991 |
죽음의 고통을 생각해 보자│13×17×35㎝, 1991 |
Ⅲ. Shape of Death & Life (죽음과 삶의 형상)
죽음의 그림자가 내 옆에 다가섰을 때 나는 의로운 오른팔을
잡고자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당신이 매정하게
나의 손을 뿌리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신 당신의 실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여! 일그러진 내 삶 속에 항상 같이 하셔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1994.
25×30×4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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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31×29×87㎝,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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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22×20×70㎝,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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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0×9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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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8×74㎝,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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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37.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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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8×72㎝,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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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8×74㎝,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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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5×141㎝,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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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Pray for the Dead Man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강완주 선생은 자신의 현실체험에서 비롯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것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치유하기 위해 애썼던 흔적을
자신의 고백에서나 작품을 통해 여실히 목격할 수 있다.
- 중략 -
짧은 생의 시간동안 자기애와 현실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고백적 작품세계와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의식을 도조작품을
통해 담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은 진실한 한 인간의 내면을 외부로 드러내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작품의 내용과 형식, 삶과 예술을 흙의 정신으로
일치시키려는 통합에의 의지였다.
삶을 초극하려는 흙과의 열망 중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15×15×12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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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기도│30×15×95㎝,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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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기도│30×40×115㎝,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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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기도│36.5×40×13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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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30×20×160㎝,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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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25×25×3㎝, 1999 |
접시│27×27×3.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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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21×20×2㎝,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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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주형이, 작은아들, 신형이│20.5×17.5×3.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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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15×23×3㎝,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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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24×24×4㎝,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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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세트│7×6×15㎝,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