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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정씨(승지공)의 뿌리를 찾아서
*해주정씨이야기
해주정씨(海州鄭氏)의 계보(系譜) 해주정씨(海州鄭氏)는 고려 신종(神宗1197-1204)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郞)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의 관직을 지내신 휘(諱)숙(肅)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선계(先系)는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상고할 수가 없고,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세거(世居) 했던 사족(士族)으로 고려(高麗) 때에 정(鄭)씨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전한다. 시조 이후 고려조에 관직을 지내면서 연면 혈통을 이어 왔으나 계보의 실전(失傳)으로 3,4 계대(繼代)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고려후기에 그 후손인 언(琂)과 관(琯)의 두 분 선조님 중에서 관(琯)은 후손이 없고 소윤공(小尹公 언琂)선조를 1世로 하여 2世에 찬성공(贊成公 윤규允珪) 문학공(文學公 윤경允卿) 판서공(判書公 윤진允珍)선조의 세 분파(分派)와 시조와의 계(系)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3世 대장군공(大將軍公 초初 혹은 礎)선조의 분파를 더하여 4개 분파로 이어오다가 1985년 대동보(大同譜)를 발행하면서 문중 공론에 의해 높게는 5世 낮게는 10世에서 29개 분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派)는 주로 인구수에 의해 문중합의로 정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각 분파의 세(世)가 다르다. 본관(本貫) 해주(海州) 해주는 현재 북한땅에 있는 황해도(黃海道)의 도청 소재지로 고조선(古朝鮮)이후 대방군(大方郡) 내미홀군(內米忽郡) 폭지(瀑池)로 불리우다 고려 태조(太祖 877-943)때 해주로 개칭되었으며 목(牧)이 설치된 큰 고을이였다. 별칭으로 지성(池城), 대령(大寧), 서해(西海), 고죽(孤竹), 수양(首陽)이라하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땅이 넓고 비옥하며 인구가 많아 관서(關西)의 큰 고을로 정씨(鄭氏), 최씨(崔氏), 오씨(吳氏) 3성이 가장 번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쪽에 수양산(首陽山)이 있고 정상 가까이 큰 폭포가 있으며 사미정(四美亭), 지환정(志歡亭), 백세청풍비(白世淸風碑), 탁열정(濯熱亭), 부용당(芙蓉堂), 석빙고(石氷庫) 등 명승고적이 있다. ※ 해주정씨의 본관을 별칭으로 海州의 옛 지명인 대령(大寧)정씨, 수양(首陽)정씨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시조를 모신 여주의 사당 대령사(大寧祠)의 大寧도 首陽과 함께 海州의 옛 이름이다
1) 시조 숙(肅) 해정은 고려 신종(1198~1204)때 전법정랑을 지낸 휘 숙(肅)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선계는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상세히 살필 수 없다. 시조의 묘소가 실전되어 근 천년동안 묘사를 못하다가 정도공 묘소 이장을 계기로 1985년 8월 제단을 봉축하고 매년 시제를 모시고 있다. 1 - 1 시조제단 시제 매년 음력 10월 1일은 시조를 비롯하여 묘소가 실전된 1세 2세의 시제를 모신다.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2) 1세 휘 언(琂) 언(琂)을 1세로 하고 있으며 사복시 소부 소윤을 지내시고 정헌대부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제단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시조제단 하에 1985년 8월 제단을 봉축하고 세세 향화를 받들고 있다.
(3) 2세 윤규(允珪) (찬성공) 정용랑장을 지내시고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사로 추증되다. 묘 실전으로 시조 제단아래에 제단을 봉축하였다.
(4) 3세 역(易) (정도공) 고려 말 우왕9년 과거에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이방원)과 동방급제 하였으며 후일에 사돈이 되었다. 태종의 요청으로 관직에 나아가 좌정언 사헌부 지평 호조판서를 지내고 의정부 찬성 집현전 대제학에 올라 판중추부사를 겸하였다. 사후에 세종대왕이 제문을 보냈으며 영의정에 증직되고 정도의 시호를 받으셨다. 묘소가 초창지는 고양군 봉현이었으나 세조가 아들이 먼저 죽자 이곳에 경능이 되므로 현재의 강남구 서초동산 185번지로 이장한지 530여년에 다시 1984년 10월 25일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으로 이장하였다. 4 - 1 3세 역(易) 정도공 묘소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4 - 2 3세 역(易) 정도공 신도비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4 - 3 시조 숙(肅) 3세 역(易) 정도공 영정과 위패를 모신 대령사로 들어가는 오류문 대령 사 경내에 있는 숭모재 강당에는 대학생 수련회 등을 갖는다. 묘소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5) 4세 충석(忠碩) (동지공) (1406 - 1473) 정도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18세에 벼슬에 나아가 천령현감 한성부 판관 한성부 소윤을 거쳐 54세에 공주 목사에 이르고 60세에 동지중추부사 재임 중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이셨고 배위 정부인은 영일정씨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손녀이다. 슬하에 6남 4녀를 두어 해주정씨 29개파 중 19파의 직계 선조로 자손이 번성하였다. 5 - 1 4세 충석(忠碩) 동지공 묘소 묘소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북성산
(6) 5세 침(忱) (참의공) 동지중추부사(충석)의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단종 1년(1453)에 문과에 오르고 재주와 학문이 널리 통달하여 임금의 추종을 받았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으로 임금의 은우가 매우 융성하였고 이어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성종 16년(1485) 2월 23일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호는 정안재(靜安齋)이다 묘소위치 :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7) 6세 연경(延慶) (부사공) 참의공(忱)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건원릉 참봉을 거쳐 상서원 직장을 역임하였고 마전군수를 역임하면서 최상의 치적으로 통정의 품계에 올라 철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사후에 가선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상서원정에 추증되었다. 제단위치: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8) 7세 희검(希儉) (1472~1544) 철원부사(延慶)의 6남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백씨인 허암을 따라 공부하여 진사에 합격하였다. 연산의 폭정으로 백씨 허암이 무오사화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갑자사화를 예언하고 행방불명이 되자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과거를 포기한 채 공명을 초개같이 여겼다. 호를 계양어은(桂陽漁隱) 이라고 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제단위치: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9) 8세 언각(彦慤) (고죽재공) 1516(중종11년) 19세에 생원이 되고 1533년 36세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나갔다. 39세에 홍문관 박사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등 주로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는 감찰업무인 사헌부에 근무 1546년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1547년 부제학에 올랐으며 1549년 경기도 관찰사 1552년 경상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1555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르렀으나 1556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위치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산 22번지
(10) 9세 신(愼) (판서공) 죽재공(언각)의 둘째아들로 24세 때 생원시 3등과 진사시 1등에 합격하였고 문과시에서 이율곡선생이 장원하고 공은 문과 1등으로 동방급제 하셨다. 여러 관직을 거쳐 정3품 통훈대부 내자시정을 지냈으며 통정대부 당상관인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했다. 외직으로 청송부사 재직 시 임진란을 당하여 친척과 식솔 100여명을 덕동마을로 피난시켜 모두 무사하였고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첫째는 문승(봉사공) 둘째 문부(농포공) 셋째 문익(용강공)이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위치: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11) 10세 문부(文孚) 농포공 (1565-1624) 판서공 휘 신(愼)의 2째 아들로 태어나 18세에 생원이 되고 24세에 식년문과 갑과로 급제 한성부 참군이 되었다.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최배천 이봉수 등과 의병을 일으켜 먼저 국경인 국제필 등을 참수하고 이어서 명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전투와 이듬해 백탑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수복하였다. 행직: 가선대부 전주부윤 전주진 병마절제사, 병조참판이고 (증직은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1 - 1 10세 문부(文浮)충의공 (忠毅公)신도비 묘소위치 :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11 - 2 북관 대첩비 위치 :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10세 농포공 휘 문부께서 문과 갑과 2위를 한 수재로 함경도 북평사에 부임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함경도가 왜군에게 짓밟히자 반역무리 북방의 오랑캐 등 3면의 난리에 휩싸였을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경성, 명천, 길주, 장덕산, 쌍포, 백탑교에서 6대첩의 전승을 거두어 관북천리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숙종 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 임명에 세운 농포공의 임진왜란 의병전공 기념비석이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전승 기념물로 약탈 반출하여 동경 야스쿠니 신사에 100년간 방치되었다가 광복 60년 만에 환국되어 해주정씨의 긍지를 갖게 되었고 대첩비는 북한으로 넘어가 제자리 길주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경복궁, 독립기념관, 의정부묘소, 충의사 등 4곳에 복제비가 세워졌으며 용암에는 번역비를 함께 세웠다. 11 - 3 10세 충의공(문부)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충덕사 위치 :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송산) 11 - 4 10세 충의공(문부)의 위패를 모신 부조묘사당과 충의사,가호서원,촉룡서당,유물전시관 ,장판각,종택 11 - 5 10세 북관대첩비 및 번역비, 농포정문부선생사적비 위치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 정문부(鄭文孚) 1565년(명종 20) 한성판윤을 지낸 정신의 아들로 한성(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이다. 호조참판을 지낸 조부 정언각과 부친이 모두 덕망 있는 신하였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고,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 수찬, 시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회복하여 다시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맡았다.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鏡城)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회령을 차지하고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정말수(鄭末秀)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왜적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한다. 정문부는 길주 왜성을 포위하고 대치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왜적 2만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다. 왜군은 패전하여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남하했다. 이때의 승전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기록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다시 반환되어, 2006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진왜란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1612년 형조참판, 1618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 고문 받다가 사망했다. 그 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12) 11세 대륭(大隆) 승지공 (1599 -1661) 농포공의 둘째아드님으로 호는 봉은(鳳隱)이시고,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신 분으로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아버지(문부)의 원통한 화를 만난 뒤 상여를 마련하여 오늘날 의정부(당시는 양주)에 있는 선영아래에 안장하고, 숙부(문익)와 백씨(대영)와 함께 상복을 입은 채로 진주로 남하하여 자취를 감추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과 서법 모두 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나, 영예와 이름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장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아들 6형제와 딸 2자매를 두었다. 첫째는 유인(有禋), 둘째 유회(有禬), 셋째 유진(有禛), 넷째 유종(有宗), 다섯째 유지(有祉), 여섯째 유계(有禊)이다. 사위는 황용서(黃龍瑞)와 이환(李桓)이다. 묘는 사천시 정동면 학촌리 만마부락 간좌(남서향)이며, 배위 숙부인 해주오씨 묘는 진주시 정촌면 소곡리 임좌(남남동향-5시30분 뱡향)이다. 후손들이 목종숭조(睦宗崇祖)를 위하여 종중을 조직하였다.
13-1) 12세 유인(有禋)(1616-1657) 승지공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배위로는 교하노씨 인데 적성현감을 지내신 노 형의 따님이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여섯째 동생(유계有禊)의 아들(구構)을 양자로 삼았다. 묘는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해좌(남남동향-5시 방향)이며, 배위 교하노씨 묘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교방동 건좌(남동향)이다.
13-2) 12세 유계(有禊)(1638-1719) 승지공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용모가 깔끔하고 문장도 뛰어났으며 배위로는 교하노씨로 휘 회근의 따님이고 적성현감을 지낸 형의 손녀이다. 어질고 마음이 수양된 행실을 지녔다. 슬하에는 1남1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구인데 큰집으로 양자를 보냈으며, 사위는 곽수자이다. 묘는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내봉촌 자좌(남향)이며 배위 교하노씨 묘는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가술리 이고, 2배위 삭녕최씨 묘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교방동 간좌(남서향) 이다.
14) 13세 구(構)(1664-1732) 아버지는 휘 유인이고 어머니는 교하노씨인데 적성현감을 지내신 노 형의 따님이다. 우리 용암 해주정씨의 입향조(入鄕祖)이시고, 호는 로정헌(露頂軒)이시다. 서울에서 태어나시어 1680년 무렵 생부(유계)를 따라 창원으로 남하 하시어 청주한씨 집안에 장가드시어 1691년 창원에서 용암으로 옮겨 오셨다. 평생 학문과 수양에 힘쓰며 집안자녀들을 가르치시며 충효와 가정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에 뜻을 두셨으며 평소에 착한 것을 즐기시고 의리를 좋아하셨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문집으로는 《로정헌 유고집》이 있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셨다. 맏이는 상점이고, 그다음은 상림이고 그다음은 상삼이다. 따님들은 곽익조(郭翊朝), 송도전(宋道傳), 박경권(朴經權), 정수천(鄭壽千)에게 시집갔다. 묘와 배위 청주한씨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 임좌(남남동향-5시30분 방향)에 합폄이다.
15-1) 14세 상점(相點)(1693-1767) 아버지는 휘 구(構)이시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며, 첫째로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총명하시고 민첩하였으며 외우기를 잘하셨다. 본성이 청렴하시고 남을 잘 도와주었으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책을 좋아하였으며 주역에 나오는 “천리를 즐기고 명을 안다.”는 뜻을 취하여 호를 불우헌(不憂軒)이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불우헌문집》이 있다. 배위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 일곱 아들과 두 따님을 낳았다. 장남은 단(壇), 둘째는 육(堉), 셋째는 훈(壎), 넷째는 근(瑾)으로 숙부 상림(相臨)의 후사가 되었다. 다섯째는 게(土自)요, 여섯째는 전(土典)이며 일곱째가 식(直아래土)이다. 딸들은 박인혁(朴仁赫)과 강간(姜桿)에게 시집갔다. 묘는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안산 손좌(북서향)이며, 배위 안동권씨 묘는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 경좌(북동동향-2시30분 방향)이다.
15-2) 14세 상림(相臨)(1698-1723) 아버지는 휘 구이시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의 둘째로 태어나시어 효성이 지극하시고 지극정성으로 형님의 병을 간호하셨으며, 타고난 자질이 맑고 빼어나고 높고 우아하고 효도하고 우애 있고 어질고 자상하고 뛰어났으며, 아버지 생가를 잇게 하기위하여 양자로 갔으나 일찍 2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님의 셋째아들 근(瑾)을 양자로 삼았다. 근(瑾)도 후사가 없어서 형인 육(堉)의 아들 탁의(鐸毅)을 데려 다가 후사로 삼았다. 묘는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내봉촌 자좌(남향)이며 배위 파평윤씨 묘는 부군 묘 아래이다.
15-3) 14세 상삼(相參)(1704-1755) : 창원종중
* 선조 유적
가. 촉석루 촉석루에는 농포공을 비롯한 대표적인 시인 학자 9분의 시가 남아 있다. 농포공의 시는 54세 때 창원부사 시절 진주에 들렸다가 의병장으로서의 남다른 감회로 진주성 싸움을 읊은 시다. 次 矗石樓韻 (차 촉석류운) 촉석루 시에 차운하다 龍歲兵焚捲八區 (용세병분권팔구) 임진년 병화가 전국을 휩쓸어 魚殃最慘此城樓 (어영최참차성루) 느닷없이 입은 참화 이 성루가 제일 컸네. 石非可轉仍成矗 (석비가전내성촉) 돌은 구를 수 없이 우뚝하게 솟았는데 江亦何心自在流 (강역하심자재류)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흐르고 있나. 起廢神將人共力 (기폐신장인공력) 신명은 사람과 함께 퇴폐함을 복구하려 하고 凌虛天與地同浮 (능허천여지동부) 무한한 공간은 땅과 같이 떠있네. 須知幕府經營手 (수지막부경영수) 알겠구나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가 壯麗非唯鎭一州 (장려비유진일주) 한 고을만 진압하지 않으려는 장한 뜻임을. 이시는 현재 촉석루 남쪽에 걸려 있습니다.
나. 승지공의 글씨 1629(인조7)년 유림들의 중론으로 명필로 이름난 농포공의 둘째아들 승지 대륭(大隆) 공이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 변에 있는 바위의 서쪽 면에 전서로 「義 巖」(의암)이라 쓰고 새겼는데 강과 누각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어 진주8경으로 꼽힌다. 의암이라고 쓴 이 전서체는 아직도 선명하여 선조의 얼을 되새길 수 있으니.... 다. 마산 박물관과 돝섬의 농포공 시비 농포공께서 창원부사로 계시면서 고운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시를 읊고 강학하던 월영대를 보수하셨고 여가에 읊은 시 10여수를 남기셨는데 그 중 마산을 노래한 시 한수가 마산박물관 뜰과 돝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昌原 作 (창원에서 읊다) 太白山南智異東 (태백산남지리동) 태백산 남쪽 지리산 동에 還珠勝致以壺蓬 (환주승치이아봉) 구슬처럼 둘러선 산세 선경 같구려 人家離落千年碧 (인가이락천년벽) 인가의 마을은 천년이나 푸르고 官舍門庭百日紅 (관사문정백일홍) 관청의 문과 뜰은 백일이나 붉었네 元將候風行省廢 (원장후풍행성폐) 바람 기다리는 원나라 장수는 행성을 폐하였고 崔仙翫月古臺空 (최선완월고대공) 달구경하던 최고운의 옛 대만 공허 하구나 只今留與漁樵唱 (지금유여어초창) 지금은 어부와 초동으로 노래하면서 一半平分屬醉翁 (일반평분속취옹) 절반은 취한 늙은이에게 나누어 주네
(돝 섬 시 비) 라. 로정헌 글씨 남해군 금산 보리암 입구 바위에 새겨진 ‘明庵 鄭栻’(명암 정식) 이라는 글씨는 로정헌할아버지의 글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