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의 5일장은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도 낯설지가 않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동네의 시장과 같았고, 지나가며 인사만 해도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익숙함이 낯설지가 않았다. 소설가 이효석 선생의 고향이며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기도 한 봉평은 사실 흐드러지게 메밀꽃이 피어 있는 가을이 제철이다. 하지만 메밀꽃만큼이나 많은 사람구경에 지쳤다면 호젓한 겨울의 봉평 5일장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장이 크지 않으니 몇 바퀴만 돌다 보면 금세 시장 사람들과 익숙한 얼굴이 되어 말을 건네어 볼 수도 있다.
강원도의 상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감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시장 곳곳에도 알감자를 구워서 간식으로 먹을 수 있게 판매하고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파는 방식이 또한 특이하다. 큼직한 종이컵을 하나 주고 본인이 알아서 담아가라는 것이 바로 판매방식. 생각해 보면 내가 담으나 가게 주인이 담아주나 별반 차이도 없겠지만, 왠지 욕심껏 더 쌓을 수 없을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컵에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할머니는 작은 수레를 끌고 나와 인절미를 파신다. 집에 있어봤자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나와서 한 번씩 사람들도 만나고 해야 사는 게 덜 답답하다는 할머니는 벌써 팔순을 훌쩍 넘겼다. 누가 시켜서 했으면 이렇게 추울 때 나오기도 싫었을텐데 스스로 나와서 하나도 힘들지 않다며 아기같이 밝게 웃으신다. 시장을 더 구경하고 있자니 인절미 두 봉지만 더 팔고 집으로 가신다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시장 한 바퀴 도는 동안 다행히 나머지 인절미가 모두 팔린 모양이다.
“그 사지이 이래 빨리 나왔나?” 뒤집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못생겨서 사진 찍으면 안돼~ 라고 하시지만 정작 카메라가 앞에 오면 수줍게 웃어 보여 주신다. 봉평장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한 자리 펼치고 앉아 메밀전을 부치고 있는 할머니는 찍자마자 바로 볼 수 있는 사진에 몇 번이나 감탄하며 디지털카메라를 신기한 듯 바라보신다.
동글동글 감자들은 원하는 만큼 담아 갈 수 있다사진을 위해 머리의 수건을 벗으며 수줍게 웃으신다전 부치다 사진을 바로 볼 수 있다니 신기한 할머니
할머니가 만들고 있던 건 바로 메밀부침과 메밀부꾸미. 봉평을 이야기하자면 메밀을 빼놓을 수가 없다. 메밀은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기 때문에 예부터 강원도에서 많이 재배됐으며 그만큼 메밀로 만든 음식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강원도의 메밀부침과 메밀부꾸미는 장터에서 한 장에 1,000원 2,000원,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갓 만든 메밀부침과 메밀부꾸미를 양념된 간장에 찍어 먹으면 시장 보는 중간에 간단한 요기로 더할 나위 없는 간식이 될 수 있다. 익숙한 솜씨로 반죽을 한 국자 떠서 철판에 턱! 하니 내려놓으면 금세 깔끔하고 얇은 동그라미 모양으로 전이 부쳐진다. 그 위에 배추 절인 것을 얹어 그대로 부쳐내면 메밀부침, 양배추무침을 넣어 돌돌 말아주면 메밀부꾸미가 된다.
능숙한 손길로 메밀부꾸미를 만들고 있는 중
특이한 점은 부침을 올리기 전 한 토막 큼직하게 썰어 놓은 ‘무’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이다. 강원도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으로, 기름을 놓치지 않고 고루 흡수 하여 프라이팬에 평평히 잘 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얇게 부치는 부침과 부꾸미가 어느 한 쪽 타지 않고 고루 잘 익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정성이 그래 들어갔는데 으태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라고 말씀 하시는 할머니의 정이 더해져 더욱 고소하고 맛있는 메밀요리를 만나 볼 수 있다.
“어머님~ 맛보는 건 공짜에요. 얼마든지 드시고 가세요~” 젊은 청년이 기분 좋게 외치고 있다. 청년이 펼쳐놓은 행상에는 어릴 때 종종 볼 수 있었던 온갖 전통 과자가 바구니마다 그득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좌판 위에는 “드시는 건 공짜~” 라는 피켓이 두 세 군데 세워져 있다.
[좌] 정말로 드시는 건 모두 공짜랍니다[우] 봉지 한 가득 담아 지금은 흥정 중
그러다가 손님이 하염없이 다 드시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질문에, 그래도 괜찮으니 먹고 싶은 만큼 드시라며 환하게 웃으며 말해준다. 건너편 올챙이국숫집에서 배를 채운 아저씨 무리가 와서 정말로 이것저것 쉬지 않고 먹어보는데도 불편한 내색이 없다.결국엔 까만 봉지로 한 아름 몇 봉지나 사겠다고 나서는 아저씨들에게 당연히 덤은 필수요소. 구매한 양만큼 더 주려는 걸까 싶을 정도로 푹푹 퍼 담아 준다. 서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각박한 인심 없이 주고받는 인정이 참 푸근하게 느껴진다.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해서 다른 장에 비해 물건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강원도 산자락에서 채취한 산나물, 동해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도 제철과일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빨갛고 싱싱한 딸기와 달디 단 귤도 싸게 구매할 수 있다. 솜씨 좋게 그 자리에서 생선을 손질하여 듬뿍듬뿍 담아주는 해산물도 일품이다.
고운 빛깔이 먹음직스러운 제철 과일들
또, 약초를 말려서 차로 만들어 마실 수 있게 해두거나, 술에 담가 병째 팔기도 한다. 옛날 할머니가 끓여주던 물과 비슷하다. 약초나 열매를 말려서 그대로 파는 경우도 많으며 집으로 가져가 끓는 물에 넣어 먹어도 되고 그냥 씹어 먹어도 된다고 한다. 모두 농약 대신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에서 자라는 식물이요, 약초들이다.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시장을 다니시는 할아버지는 설탕을 사러 오셨다고 한다. 까만 비닐봉지에 작은 설탕 하나 들고 뒷짐 지은 채 찬찬히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집 앞 슈퍼에서 사는 게 더 편한데 왜 추운 날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하는 질문에 사람구경 음식구경 하러 나왔다고 하신다. 우리의 전통시장 모습을 간단히 설명해주는 장면인 듯싶다.
이것저것 털모자를 써보며 즐거운 아이
수수부꾸미를 건네며 즐거워하시는 방문객들
사람 사이의 정이 있어 그곳을 찾을 이유가 더 커지는 것이다. 5일마다 만나지만, 서로의 속사정이 뻔하다. 누구네 둘째 아들이 이번에 장개 가는 이야기, 누구네 손주 생긴 이야기. 이러저러한 사는 얘기를 하다 보면 강원도의 추위쯤 웃음 앞에 물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겨울이라 메밀꽃은 없지만, 웃음과 한숨이 모여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운 이야기 꽃이 피어난다. 소소하지만 봉평 5일장이 어느 장보다 따뜻한 이유는 바로 이런 온정 넘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봉평 5일장 - 매월 2,7일
◎가는 길 - 자가운전: 영동고속도로 – 장평IC - 6번 국도 6.4km
– 봉평효석문화제행사장 이정표 확인 후 좌회전
대중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장평행 대화시외버스탑승 3시간 소요
◎볼거리
*이효석 문화마을
이효석 선생의 작품 일대기와 유품, 사진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효석 문학관, 이효석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 등이 있는 곳이다. 가을이면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 아름답게 펼쳐진 메밀꽃밭을 바로 앞에서 감상할 수 있으며 소설 속에 나오는 물레방앗간, 충주집 등도 모두 찾아볼 수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평창무이예술관
2011년 폐교인 무이초등학교를 예술인의 모임 및 전시장소로 개관했다. 운동장은 야외조각공원으로 만들고 도자기 굽고 만들어보는 체험장도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조각, 유화, 서예 등 다양한 예술 문화 작품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
◎맛집 - 현대막국수
투박한 메밀의 맛이 그대로 면발에 살아 있는 새콤달콤하게 입맛을 돋우는 막국수이다. 봉평 5일장 입구에 있으며 주말이 낀 장날에는 줄을 서서 먹어야 할 만큼 인기가 많은 곳. 메밀국수6,000원, 메밀부침/부꾸미 5,000원
◎잠자리 - 평창현대빌리지(033-334-7775)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숙박시설로, 60여 동의 펜션이 모여 있는 대규모 펜션 단지이다. 모두 독채형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마다 개별 테라스가 있어 방해받지 않고 숙박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