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낙엽이 허공을 긋는 초겨울 동구릉. 푸르른 소나무는 의연하지만, 헐벗은 참나무와 오리나무들이 허리까지 '이불'을 덮고 몸을 뒤척이는 그 숲에 따사로운 햇살이 여기저기 박히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실려오는 새 지저귀는 소리는 상쾌하다. 맑은 물에 사는 가재가 헤엄치는 개울물에선 낙엽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능에서 능으로 이어진 숲길의 곡선이 아름다운 동구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왕릉 군으로 면적은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도 큰 59만평에 달한다. 여기엔 1408년(태종 8)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이 들어온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9기 17위의 왕과 왕비 등이 안장되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를 편찬한 5대 문종,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란을 가는 수모를 겪었던 14대 선조,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효종)이 볼모로 가있던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는 슬픔을 당한 18대 현종, 조선 왕들 중 가장 긴 재위기간(52년) 동안 당쟁 근절을 위해 탕평책을 쓰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 등을 시행한 21대 영조, 글씨에 능했지만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 24대 헌종 등이 여기에 함께 잠들어 있는 것이다.
동구릉이라는 이름은 추존된 문조의 수릉이 1855년(철종 6) 아홉번째로 조성되며 불려진 것으로, 이전에는 동오릉, 동칠릉이라 했다. 경기도 고양의 서오릉, 서삼릉의 유래도 이와 같다.
동구릉의 1년 탐방객은 20여만명. 봄 가을에 서울·경기 지역의 학생들이 많이 온다. 이승희 관리소장은 “수목원이 있는 세조의 무덤 광릉의 인파를 따를 수는 없지만 순수하게 능 자체를 보러오는 사람들만 치면 다른 데 비해 빠지지 않는 숫자”라고 밝히며 “도시와 아주 가깝기 때문인지 겨울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덧붙인다.
천천히 숲속을 산책하던 한 70대 노인은 숲이 갈수록 짙어져서 좋다며 자신은 죽어서도 이처럼 좋은 숲은 거느릴 수 없겠지만, 태조 이성계 덕에 이런 숲길을 자주 걸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동구릉의 ‘지주’인 태조 이성계의 무덤엔 특이하게 새하얀 새품이 무더기로 피어나 초겨울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을 그리워 했던 태조가 그곳의 억새로 자신의 봉분을 덮어 달라고 한 유언을 태종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1394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놓은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자신의 음택을 물색케 했다. 무학대사와 함께 양주 검암산 기슭, 지금의 건원릉 자리를 둘러보고 돌아가던 태조는 고개에 이르러 자기가 묻힐 터를 굽어보며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겠노라” 했다고 한다. 그후 그 고개는 ‘근심을 잊는 고개’라는 이름을 얻어 망우고개라 불렸는데, ‘공동묘지의 대명사’로 유명한 망우리고개의 유래다.
하지만 이는 전설일 뿐 왕릉터는 태조 사후에 잡은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태조가 죽은 뒤 묻힐 길지를 고르던 중 ‘한양에서 20리쯤 떨어진 검암산 자락에 길지가 있다’는 추천을 받은 하륜이 보고 정한 것이라 한다. 여하튼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 이론에 알맞은 훌륭한 곳이라는 사실은 풍수학자인 김여가 등이 조선왕조 여러 대에 걸쳐 9개의 능터를 찾아 낸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간 세월도 많이 변했다. 능역 근처까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어 숲길에서도, 태조의 무덤에서도 콘크리트 건물이 바라보이니 말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잠든 경기도 여주의 영릉 뒷산을 쏘아대는 폭격기의 굉음 같은 무지막지한 폭력이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별미즐기기
동구릉 입구의 고향가든(031-565-8635), 나들목(551-4826), 동구릉산장갈비(563-6280) 등에선 농장에서 기른 유황오리 진흙구이 등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청량리∼휘경∼상봉∼망우동을 동서로 지나는 망우로는 조선시대 왕들이 매년 봄가을로 찾아가는 건원릉 능행길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넓고 좋았다. 망우로를 타고가다 망우리고개를 넘은 뒤 구리 교문사거리에서 좌회전해 2km쯤 가면 왼쪽에 동구릉이 있다. 화랑로∼구리인터체인지를 연결하는 고속화도로를 이용하거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구리인터체인지로 나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