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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531M)/비봉산(671M) - 경북 의성
산행코스 : 10Km(4-5시간 소요 예상 / 순보행 약 3시간 30분)
금성산안내판-(17분)-금학산성관측대-(8분)-병마훈련장-(10분)-금성산-(14분)-용문정갈림길-
(11분)-550봉-(4분)-영니산봉수대-(21분)-바위전망대-(15분)-노적봉갈림길-(5분)-수정사갈림길
-(15분)-비봉산-(20분)-직벽로프-(20분)-601봉-(20분)-산불감시초소-(16분)-금성산안내판
[금성산 - 금성면 수정리]
금성산은 의성의 명산으로 숱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해발 531m의 국내 최초 사화산으로
태백산맥 남쪽 일부이다. 옛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 시대에 조성한 길이 2,730m, 높
이 4m의 금성산성을 배경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산성을 따라가면서 흔들바위, 조
문전망암, 아들딸바위, 동굴, 솟대바위 등이 있으며 해발 671m의 비봉산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금성산은 산정에 무덤을 쓰면 석달 동안 이 지역에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운수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전설을 간직한 영산으로서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 수정사와 산운 대감마을을 함께 둘러보며 등산하기에 좋은
곳이다.
[비봉산 - 가음면 장리]
가음면 북서쪽에 위치한 해발 671m의 명산으로, 우뚝 솟은 산의 형상이 마치 날아가는 봉
황과 같다하여 비봉산이라 이름하였는데, 국내 최초 사화 산인 금성산(해발 531m)과 쌍벽
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서 보면,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산으로서 정상은 기암으로 형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가음지가 한 눈에
보이며 뒤편으로 금성산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등산로로 오를 수 있는 코스가 4개소로 금성면에서 2개
코스, 가음면에서 2개 코스가 있으며 가음면에서 올라갈 경우 1코스와 2코스로 나누면 1
코스는 어린이들도 오를 수 있는 코스이며, 2코스는 어린이들이 오르기 힘든 코스가 되며
1. 2코스 모두 비봉산 정상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서쪽 맞
은편에 있는 금성산 등산로와 연결이 되어있고 고찰 수정사와 연결되어 있어 가족 등반코
스로 적당하다.
[추가설명]
금성산은 금성면 동북쪽에 위치한 해발 531m의 사화산으로 산의 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명
가마산이라고도 한다. 금성산은 한반도 최초의 화산이었던 관계로 정상에 1천여평의 평지가 있고
여기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인근 지역은 3년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이어져,
가뭄이 지속되면 주민들이 산 정상으로 올라가 파헤친 곳이 지금도 곳곳에 큰 웅덩이로 남아 있다.
또 산 정상의 북쪽으로는 조문국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4m, 넓이 2∼4m인 금성산성과
어린이가 흔들어도 흔들리는 흔들바위, 울창한 송림사이를 흐르는 금성산, 비봉산 계곡과 신라시대
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가 있다. 또한 여기에는 통일신라의 석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금성산 아래 탑리에 있는 국보 77호인 오층석탑을 비롯해 관덕리 삼층 석탑, 빙산사지 오층석탑 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변화를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비봉산과 연계한 등산로도 개설되어 있다.
[산행안내]
금성산(530.1m)과 비봉산(671.8m)은 산행들머리 마을인 산운리에서 올려다 볼 때 마치 서로 독립된
산처럼 보이지만 정자골을 중심축으로 하여 서로 쌍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금성산쪽이 부드러운
능선과 호젓한 송림숲을 걷는 산책로 수준이라면 비봉산쪽은 단애를 이룬 암릉길로 이어지게 되므로
분위기 또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자골을 중심으로 말발굽 형태를 한 금성산, 비봉산을
연결하는 산행로는 4~5시간 정도면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금성산 일대로는 곳곳에 옛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음으로 해서 이정표와
안내판이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지만 비봉산 일대로는 단 하나의 이정표도 찾아볼 수 없다.
산행초입이 되는 68번 국도변 산운리 산운초등교 도로변의 <수정사 2.5km> 안내판을 따라 5분 정도
(2.7km) 차로 이동하면 금성산 등산안내도가 있는 영천이씨 납골묘에 이른다. 주변 공터에 차량 3대
정도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고 조금 더 지나치면 승용차 정도는 길가에 주차가 가능하다. 여기서
계속 직진하게 되면 용문지를 지나 수정사까지 약 2km의 거리로 절집까지 차량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등산안내판에서 왼편 넓은 길로 접어 들어서게 되면 얼마지 않아 우측으로 철문이 설치된 용문정
진입로다. 이 지점에 또다른 등산안내판이 서 있다. 정면 넓직한 솔숲길로 접어들어 서서히 경사도를
높여가면 5분만에 "동래정씨" 무덤터를 지나치게 된다. 길은 초반부터 제법 숨이 가쁠만큼 거친 편이
다.
무덤터를 지나 약 4~5분 정도 더 올라서게 되면 산성터가 시작된다. 초입부로 안내판이 서 있다.
이제부터 옛 산성터를 끼고 올라선다. 이 산성터는 금성산성 또는 금학산성터로 불리워지고 있고
삼국사기엔 조문산성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옛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이 신라와의 항전때
쌓아진 것이라 하니 유구의 세월 속에서도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산성터를 끼고 10여분 더 올라 로프를 잡고 석축을 올라서게 되면 "금학산성관측대"를 알리는 조그마
한 나무팻말을 만난다. 이정표에는 해발 450m " 관망대"로 적혀있다. 이쯤에 서게 되니 이름 그대로
봉황이 날개를 편 양 건너로 비봉산이 우뚝하고 골짜기 안쪽으로 수정사도 모습을 드러낸다. 계속되
는 오르막에서 10여평 정도 되는 공터인 '병마훈련장"을 지나 다시 10분 정도 올라서면 넓은 원형헬
기장이 있는 금성산정상(530.1m)에 이른다. 납골묘에서 35분이 소요되었다.
넓은 공터를 이룬 정상부는 금성산 명당터에 대한 옛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무덤터를 파헤친 듯
움푹 패여 들어간 웅덩이가 두 개가 보이고 있다. 동쪽 건너로 보이는 비봉산의 산세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정상에서 왼편(서쪽)으로 20m가량 숲길을 따라 내려서면 금성면 일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멋들
어진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금성면은 옛 부족국가였던 조문국의 수도가 터 잡은 곳이라 한다.
중앙선을 타고 가며 탑리에서 올려다 보던금성산을 오늘은 금성산에서 탑리를 내려다 본다. 경상도
외진 곳 탑리일대가 넓게 펼쳐져 보여 과연 옛 부족국가가 터 잡을 만한 풍요로운 땅이다.
의성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표석을 뒤로 하고 북동능선을 이어간다. 삐죽삐죽 능선에 자리한 입석
몇 개를 지나 200m만 나서면 건들바위 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건들바위(흔들바위)는
주등산로를 벗어나 왼편 사면아래 9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급비탈을 내려서자 이내 사면에 우뚝
솟아오른 건들바위다.
일반적인 흔들바위의 형상에서는 약간 벗어난 거대한 입석처럼 보이고 흔들어 봐도 요지부동이다.
바위 오른쪽 아래로 배나무골로 내려서는 뚜렷한 내림길과 금성면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
다.
급비탈을 되 올라와 계속되는 능선길을 이어간다. 솔숲사이로 의성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오붓한 길이
다. 왼편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는 바위모둠터가 있는 산봉에 올라서자 건너로 550봉이 지척이다.
이 산봉을 지나치자 완만하던 능선길이 슬쩍 내려서는가 하더니 용문정갈림길이 있는 첫 번째 잘록이
로 내려선다. 4거리 안부를 지키고 있는 이정표는 왼편은 샘터를 거쳐 기도원 가는길, 오른편은 용문
정, 봉수대는 직진방향으로 800m를 알리고 있다.
금성산 주릉은 부드러운 솔가리가 쌓인 오솔길로 마냥 이어진다. 비록 아름드리 소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되는 솔숲길에선 마음마저 평온해진다. 용문정 갈림길을 지나 10여분 가량 솔향기에 취해
오르면 금성산의 실질적인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550봉에 이른다. 걸터앉기 좋은 돌바위 하나가 볼
록 솟아 있고 주변 평지로는 솔가리만 수북하다.
잠시 내려서면 "영니산봉수대유지" 란 팻말과 석축의 흔적이 있는 봉수대터다. 친절한 안내판엔
봉수의 전달경로가 적혀있다. 봉수대를 지나 3분만에 우측으로 희미한 갈림길 하나를 보내고 직진하
자 다시 3분만에 좌우로 내림길이 있는 4거리 안부를 지나친다. 나무를 감고 있는 분홍띠지에 씌여진
비봉산 방향 화살표를 따른다.
길은 바로 앞으로 나타나는 산봉 우측 허리길을 타고 간다. 안부를 지나 15분 만에 전망이 트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바위봉에 자리잡은 소나무 한그루가 이채롭다. 여기서 길은 우측(동)으
로 급하게 꺽어들며 내리막으로 치 닫는다. 금성산주릉에서 비봉산을 잇기 위해 납짝 업드려 다리역
할을 하는 능선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바위봉에서 15분 후 노적봉을 향하는 지능선 하나를 흘려낸
길은 바로 앞 산봉 하나를 왼편으로 트래버스 한 후 나무 간판 이정표가 서 있는 수정사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 길이 수정사행이고 비봉산은 직진방향이다.
수정사를 들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꾸준한 오르막을 15분 가량 부지런히 올라서자 블록헬기
장이 있는 비봉산정상(671.8m)이다. 춘산면, 가음면 일대가 넓게 펼쳐져 보이고 의성군 최고봉인
선암산(878.7m)도 건너다 보인다.
헬기장을 지나쳐 4분만에 남쪽 건너로 보이는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서너평정도 되는 공터를
이룬 이 두 번째 봉이 헬기장이 있는 비봉산보다 조금 높아 보이지만 어디에도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
가 없으니 지나친 헬기장봉우리가 주봉인지 이 두 번째 봉우리가 주봉인지 아리송하다.
올망졸망 멧부리를 차지한 바윗길을 지나 큼직한 바윗돌이 있는 세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 일대
로는 왼쪽 아래로 단애를 이룬 절벽지대를 이룬 암릉길이다. 기실 비봉산 주봉일대는 고만고만한
높이의 봉우리 세 개가 연립해 있으므로 삼봉산이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금성산쪽이 부드러운 육산
이라면 비봉산쪽은 천길 벼랑을 이룬 암산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편이다.
비봉(飛鳳) 이란 말은 산의 형상이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옛날 이 산
남쪽에 봉황이 날아와 아름다운 소리로 울었다 하여 남쪽 마을 이름이 가음(佳音)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아름다운 봉황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고만고만한 길을 잇던 산길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수직
절벽으로 변한다. 약20m 가량 로프를 타고 내려오면 공터를 제공하고 있는 안부 우측으로 수정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정면으로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가 가풀막지다. 하지만 뒤돌아 본 암벽지대
의 경관에 힘든 줄 모르고 올라선다.
이어지는 암릉날등에서는 지나온 금성산을 건너다 보기도 하고 왼편 가음일대를 번갈아 휘둘러 보는
맛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비봉산을 출발하여 약40분 만에 6이봉에 선다.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20m
만 나서면 또 한번의 절경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가음지(양지못)가 지척이고 오른편으로는 소나무암
릉 건너로 금성산이 우뚝하다.
남서쪽아래로는 산불감시초소가 내려다 보인다. 전국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경관
이다. 시원한 바람을 가슴 깊이 받으며 한참을 쉬어가야 할 곳이다. 6이봉에서 산불초소까지는 20여
분 정도가 소요되고 산불초소직전으로 길게 띠를 이룬 화산지형 암벽아래로 푸른 물결 찰랑이는 용문
지가 또 한번 시선을 잡아둔다.
날머리를 향하는 길에선 산불감시인에게 귀동냥한 호랑이 굴을 들러 보기로 한다. 감시초소에서
50~60m가량 내려서면 주등산로 우측으로 희미하게 산허리를 타고 가는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이 바로
호랑이 굴로 향하는 길이다. 주등산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30m가량 나서게 되면 길이 딱 끊어지면서
발 아래로 동굴 입구가 있다.
사람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바위틈 사이를 낮은 포복으로 2m가량 기어들어가면 좁다란 통로가
이어진다. 허리를 바짝 숙이고 10m가량을 더 전진하게 되면 장정 서너 명 정도는 충분히 기거할 수
있는 공터가 나타나고 일어서서 활동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암흑천지 동굴속 천장엔 박쥐가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낯선 침입자에겐 무관심한 듯 깊은 잠 속에 빠
져있다. 동굴 답사를 위해선 필히 손전등을 휴대해야 한다. 일명 호랑이굴에 들어와 본 것은 이번 산
행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호기심 많은 산객이라면 한번쯤 신선한 경험을 체험해 볼 만하다.
동굴을 빠져나와 15분 가량 급비탈을 내려서면 용문지 제방 아래 등산로 이정표가 있는 도로변에 내
려서게 되고, 100여m후가 처음 출발했던 납골묘이다.
금성산-비봉산을 연결하는 산행은 송림 가득한 육산과 암산의 묘미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고 동굴까
지 들러 본다면 하루 산행으로는 대만족이다. 비록 신라때의 고찰 수정사를 둘러보지는 못하는 아쉬
움은 있지만....
[금성산의 전설]
금성면 탑리리는 옛날 삼한시대 조문국의 고도로서 많은 고적이 산재해있는 것과 고려 말 문익점 선
생이 목화를 처음 시험 재배하여 성공한 곳으로도 유명하나 금성산의 전설 또한 빠뜨릴 수 없다.
금성산은 남으로 산운리를 감싸 안고, 서쪽으로는 탑리리를 끼고 우뚝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가마 모양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명 가마 산이라고도 하며 중앙선 철도를 지나가는 이는 누구나 차창
밖으로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 산은 옛날부터 다음과 같은 진기한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만약 금성산 산정에 묘를 쓰면 석
달 동안 이 산을 둘러싼 지역 일대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갑자기
운수가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고종 때 이 지방에 심한 한발이 든 적이 있
었다. 나라를 통틀어 보아도 전국 각 지방에는 비가 내려 가뭄이 말끔하게 가셨는데 이 지방만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논과 밭은 메말라 갔고, 곡식은 타죽어 가니 농민들은 죽어 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탄식하며
비를 기다리다 지쳤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농민들은 금성산 산정에 모였다. '금성산을
파헤쳐라'고 외치며 모여든 인근 주민의 수는 수백이 넘었다.
사실 이 산은 밖에서는 깎은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으나 산꼭대기는 그 넓이가 600~700평이나 되는
모래밭이다. 성난 주민들은 모래금을 찾듯이 산정을 뒤졌다. 그 결과 깊이 10m의 땅속에서 조그마한
석곽을 발견하니 주민들의 울분은 한 순간에 폭발되고, 석곽 속의 사람 머리는 산 아래로 팽개쳐졌
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진동하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뒤덮어 버리고 그렇게도 목마르게 기다리던
단비가 산과 들, 논과 밭에 함뿍 내렸다고 한다.
무덤을 쓴 사람은 그 후 모 지역에 가서 재수 대통하여 무더기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 고향에서
논과 밭, 과수원을 사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금성산 음덕에 보답할 것을 결심하여
학교가 없는 금성면에 학교를 세우는 등 큰 사업을 하였다고도 한다.
지금도 가뭄이 심하게 들면 주민들은 이 산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산을 파헤치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성산을 명산이라고 일컫는다. 또, 이곳에 조상의 묘를 쓰면 큰 부자가 된다는
풍수지리설을 믿고, 밤중에 남의 눈을 피해 암매장하여 거부가 되는 큰 꿈을 탐하는 자가 있다고
하나 부질없는 생각이리라.
참고문헌 : 유증선 『영남의 전설』
[산행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