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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복음비판 스크랩 [참고자료] 교회 트랜스포메이션 운동의 위험들 요약
한산 추천 0 조회 35 11.08.08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교회변혁운동의 문제를 다룬 Tricia Tillin의 "변혁하는 교회"라는 글의 결론 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영문 원문은 여기에<<있습니다.]

 

위험들을 요약하며

 

새로운 개혁

 

셀교회와 교회성장운동의 기본적인 문제는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부흥의 분출을 위한 "새로운 가죽부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파 교회 조직들이 역사적(전통적) 메시지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새로운) 교리들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변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운동의) 리더들은 일찍부터 인식해 왔다. (따라서) 그들은 원하는 참여자들을 잘 훈련된 군대로 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 속으로 옮기기로 계획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996년 5월 C. 피터 와그너가 개최한 "포스트(後)교파(Postdenominational) 교회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검토된 계획을 안다. 이 집회는 목회자평생교육원, 글로벌하베스트미니스트리, 그리고 AD 2000 and Beyond 기도트랙들이 함께 후원했다. 거기서, 신사도 어젠다를 대중에게 나르기 위해, 교회를 셀구조로 옮기려는 결정이 굳어졌다. 그 셀들은 우편번호와 도시 구역에 따라 조직되며, 포스트교파 교회의 리더십과 피라미드구조의 계층구조(하이어라키) 아래 속하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현대 "사도들"이 이것을 관할한다!

 

와그너는 수년간 이런 운동, 부흥과 신사도와 셀교회로의 변환, 모두의 중심인물이 되어 왔다. 그의 리더십 사이트<<에 가면 많은 셀교회 리더들의 이름 외에도, 그들의 어젠다인 교회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증진하기 위해 네트워킹하고 있는, 다른 "선지자들"과 부흥(운동)의 주요 이름들을 볼 것이다.

 

(지면 관계 상 이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링크로 대신한다.[링크 생략하오니 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라이즈(Arise)" 매거진에 나온 신사도개혁이라는 기사는 이렇게 코멘트한다:

종교개혁 이후 가장 위대한 변화가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지역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통적 교파구조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으며 새로운 종파간(interdenominational) 연합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우리에게 세계 추수를 가리키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이것을 연구하도록 이끈 것은 이 기독교 일각에서의 엄청난 성장률이었으며, 그리고 이 성장의 다수가 젊은 세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고 와그너는 결론짓는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필할 새로운 가죽부대이다. 전통적 시스템을 버리고 보다 관계적인 유형의 조직(= 셀교회)을 받아들이는 더 많은 사람들을 나는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반대에 대한 태도

 

이 셀교회로의 움직임은, "대사명을 완수하고" 교회를 사도와 선지자들과 기타 오중사역자가 다스리는 (소위) 참된 구조로 재배열하기 위한 유일한 요건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도들과 네트워킹하지 않거나 교회를 셀(구조)로 옮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리더십으로부터 심한 말을 받는다.

 

예언들이 이 운동을 뒷받침하며, 옛 "사울형" 리더십은 "다윗"에게 항복하고 전통적인 리더십은 끝나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되풀이해서 본다. 지역 목사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교회를 도시 사도들과 네트워킹하고 그들을 통해 지구(글로벌) 교회에 연결하라는 굉장한 압박을 받고 있다.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죽어 나가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거나, 제거되고 교회를 잃을 것이라고 한다.

 

저항은 부질없 

 

윌리엄 베컴 아래에서 "고급 셀 훈련"을 받았으며 5년간 이행(移行 transition) 과정에 있는 호주 교회를 도와 온 데이비드 후드는 말하기를, 종교적인 사람들은 패러다임 쉬프트에 오랫동안 저항하는 사람들이며, 변혁 과정에서의 대부분의 말썽을 그들이 일으킨다고 한다.

 

그는 그들을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 비유한다: "예수는 이 땅에서 그분의 사역 도중 굉장한 반작용에 부딪치셨는데, 이것이 누구를 통해서 왔는지 주목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왔다. 예수의 승천 후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던 사도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으며, 사탄은 그가 전통에 묶어둔 사람들을 사용해서 여러분에게 반항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종교와 전통에 도전하는 데에 있어서 타협이 없었다."

 

아니다. 예수는 거짓교설에 도전하는 데에 있어서 타협이 없었다. 그분은 진리로 인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에 반대한 유대인들은 실은 종교적 의식과 율법주의에 묶여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생각에서 진리의 자취를 제거한 것이다.

 

재조직되는 지구 교회를 추진하는 대형트럭에 감히 저항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바리새인"이나 "종교적"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이다. 전통적인 리더십은 멸시당하고 작은 독립교회들은 모습을 바꾸든지 ?겨나든지 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개혁을 마치면, 우리는 불법적이거나 교만하거나 독립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을 인정할 것이며, 몸에 맞춰질 것이며, 언약의 사랑 속에서 걸을 것이다." (론 우드 "조직 종교를 떠나며")

 

왕국을 불러 들이기

 

수시로 강조했듯이, 이 운동과 교리 전체의 목적은 소위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천년 통치가, 다만 주 예수의 육체적(물리적) 재림 없이 그 이전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너무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코멘트하겠다.

 

하나님의 통치와 국가들의 개종(또는 순종)은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다. 성경은, 왕이신 예수에 의해 변혁되고, 그분을 주와 머리로 삼은 그분의 백성들의 지상 통치에 의해 공의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영광들에 대해 가득 차있다.

 

하지만, 꽤 최근까지 이런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가운데 육체적 오심 후에 성취되는 것으로 복음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마땅히 여겨져 왔다. 그때까지는 예수께는 세상의 "왕"의 직위가 주어지지 않고, 그분은 단지 신자들의 "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실 뿐이다.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선십, "늦은 비"와 후천년설의 혼합물인 걱정스러울 만한 이단적 교리가 부활해서, 예수의 재림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영광의 임파테이션-영광운(쉐키나 glory cloud)-을 통해서 세상의 교회가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셀에서는]...그들이 그리스도의 참 몸이 됨에 따라 성령의 운동을 체험함으로 그들은 새로운 조직 속으로 잠기게 (침례 baptizo) 된다. 그들은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위한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에서의 그분의 일을 성취하는 데에 사용된다." ["사람이 만든 그리고 성령이 만든 셀들" - 랄프 네이버]

"그리스도"로서, 변화된 영광의 부활의 육체를 받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사람들은 무적이며, 전지하며,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으며 교회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길을 예비하러 이집트에 먼저 간 요셉에 비유되며 약속된 땅으로 향해 요단강을 건너가도록 백성들을 이끈 여호수아와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과정은 지금 시작되고 있으며,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사도들의 커버링(보호) 아래 신적 권위 하에 종속되어 순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유일한 선택은,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 "가죽부대"를 이에 맞춰 개조해 주고, 또한 멤버들을 제자화하고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손쉬운 도구를 제공해 주는 셀교회 시스템이다.

 

물론 당신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전체 계략이 멋지게 들리게끔 만들어 줄 몇몇 성경 구절들과 이상적인 미사여구로써 입막음 당할 것이다. 왜냐 하면, 진짜 알맹이는 "이행(移行)"을 거치고 "베일을 넘어" 통과한 신뢰받는 제자들을 위해 유보되어 있기 ?문이다.

 

일치가 요구된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교회는 사악한 자의 일들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발전소이다. 이것은 지금 무기고 속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일치를 께우고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도시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기)

 

"사악한 자의 일들을 파괴하려고" 오신 이는 진짜로 예수이시며, 우리는 단지 들으려는 누구에게든지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말고, 일치가 진정 교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난 이천년간 명백한 완전한 일치를 가지지 못했던 교회가 불쌍하다!

 

(제대로) 통역하면, 이 주장은 다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을 같은 교리에 충실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한 리더십 아래에 두지 못하면 세계를 개종(회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립심은 지배하려는 자들에게는 위협이다.

 

서로에 대한 권위(권한)를 갖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의 "권위"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장로들이 무리에 대해 "권위를 가진다"든지 또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지체)을 제자화한다는 말씀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는 권위를 갖는 이들은 하나님, 천사들과 악령들, 그리고 세상에서 왕들과 통치자들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신자들이 다른 신자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는 말은 없다.

 

예수 안에서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에게는 악령과 그의 일, 그리고 일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권위(권한)를 가지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절대로 다른 크리스천들에 대한 권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위가 주어진 사람들은 오직 왕들과 통치자들뿐이다 - 그들은 하나님이 교회 장로에게(는) 명백히 금지한 방식으로 "당신 위에 군림한다"

 

하지만 셀교회에서는 권위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는 피라미드 방식으로, 엄격하게 집행된다. 교회들은 서로 맞물리고 네트워킹되는 셀(교회)들과 도시 교회들고 재편되고 있으며, 모두는 함께 일치되어야 하고 사도의 권위 하에 놓여져야만 한다! "일치는 권위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 속 일치된 교회의 장로들은 영적 권위를 가진다. 그들이 기도할 때 도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도시의 문 위에 앉는다. 분열된 장로들은 감소된 권위를 갖거나 아예 권위를 갖지 못한다. 불일치는 효과적인 집단(corporate 집합) 기도를 방해한다"며 론 우드는 "도시 속의 교회"에서 말한다.

 

나는 엘리야가 혼자였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의 그의 권위가 감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난 교회의 조직적인 후원 없이 단독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선교 사역과 기타 기독교 노력에서 주요한 영향을 주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돌파구들을 연 것은 많은 경우 (아는 사람들의 반대에 종종 부딪친) 탁월한 개인들의 작업들이었다!

 

분리는 영적 권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특히 교리적 오류로 말미암은 분리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명령하시듯) 오류로부터 철회하는 것은, 교리를 정화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져감으로써, 실제로 우리의 권위를 증대시킬 수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고 따르는 한 사람이 도그마의 로보트에 불과한 수천명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

 

일치는, 일치된 믿음이 참 복음의 믿음일 경우에만 가치가 있다. 다른 어떤 종류의 가르침 속의 일치는 교회에 치명적이 될 것이다. 반면에 자립은,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지 뿌리 뽑을 수 있도록 이의와 의견차이와 가르침의 검토를 허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는 오늘날의 구호다. 일치 없이는 임무가 "달성되지 못한다"는 말을 되풀이 해서 듣는다. 일치된 목소리, 마음과 목적 없이는 우리는 교회를 장악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영"을 불러 내리지 못한다. 이 교설은 성경보다는 뉴에이지의 "임계질량(critical mass)"과 세계 두뇌(World Brain)와 훨씬 더 많은 관계가 있다. [역자주. 임계질량: 일정 양 이상이 모여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 이를 가능토록 하는 결정적인 양. 여기서는 인류(정신)의 양을 뜻함]

 

개인보다 공동체

 

"공동체" 아이디어는 셀교회 모델의 또 하나의 위험표지판이다. 랄프 네이버에 의하면, 개개인의 개인적 구원은, 비록 시인했다고 하더라도, 공동체 속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완성되거나 완수되지 못한다.

 

뉴에이지 용어에서의 "공동-일치(코모뉴니티)" 또는 공동체(코뮤니티)는, "전체선(善)"을 위해서 그리고 동일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커다란 (종국적으로는 세계적인)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서, 사적 개인적 자신들을 (그 안에) 포함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말이다. 개인들은 커다란 수레바퀴 속의 톱니, 거대한 기계의 살아있는 로보트 파트로 격하된다.

 

당연히 이런 기계들은 명령 없이는 작동하지 않으며, 그런 명령은 "머리"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개인의 사고와 신념이 없고, 모두가 (사고 없이) 복종해서 아무 생각 없이 명령 대로 수행하는 곳이다.

 

종교적 "공동체" 개념과 이 땅에서의 왕국 수립하려는 공동체의 과제,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세상적 표현으로서의 공동체의 역할, 이런 사상들은 뉴에이지의 사상들과 생각만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셀그룹을 형성하는 집단은 상당한 가치의 변화를 거쳐야만 한다...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수하신 작업의 결과임을 우리 모두는 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또한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룹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만든 그리고 성령이 만든 셀들" - 랄프 네이버]

이 땅에 집단(corporate) "그리스도-몸"을 낳는다는 개념, 그리고 그 공동체 속에서 단순하게 작동하는 세포(셀)가 된다는 개념은, 세상을 다스릴 영적 "집단 그리스도(corporate christ)"가 온다는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커지게 될 때 "하나님(신)의 집"은 기독교적인 것에서 매우 멀리 떨어지는 의미를 가진다.

 

개개의 크리스천들은, 불경건하고 학대적이고 비성경적으로 여기는 모든 것에 저항할 자유를 가져야만 한다. 그럼에도 셀에서는, 그들의 사고와 행동의 개인적인 자유는 공동체의 선(유익) 속으로 분해되었다.

 

교회 마케팅하기

 

많은 수의 사람들을 유인하려는 요구는 방법론의 변화를 야기시켰다. 이제 세상 시장의 도구들이 교회를 은근히 팔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시리즈의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 다루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면 "니치 마케팅, 관중에 이끌린, 풀서비스 교회들: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영문)<<를 읽기 바란다.

 

마찬가지로 염려스러운 것은 죄에 데해 관대한 것과, 편안하고 안이하며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는 교회를 만들려는 시도이다. 교리를 가르치고 검토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분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특별히 금지되며, 죄("잘못")는 얼버무려지고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조된다.

 

G12 셀그룹의 멤버십 코스에서의 발췌는 요점을 보여준다:

리더학교 코스넘버 12, 레벨 2 "역동적이고 성공적인 셀을 의한 원리"

 

4. 교리에 대한 토론은 없다. 그것들은 분리적이다. (로마서14:1 1 디모데서 6:20-21) 우리는 말씀 위에 생명을 세우기 위해 여기에 있다. 교리적 이슈에 대한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5.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부정적 코멘트를 허용하지 말라. (누가복음 6:37)

7. 사랑 안에서 리드해라.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요한복음 3:16) 사랑은 사람을 받아들이지만 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셀그룹은 안락(위안)의 섬이 되어야만 한다.

 

감시와 추적

 

조용기(Cho)는 1984년 심지어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도 셀시스템을 통해서 그의 50만 멤버 (지금은 훨씬 크다) 교회의 모든 사람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Cho는, 모든 리더가 다른 리더에 책임이 있고 그(다른 리더)는 또 다른 사람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셀교회에는 모든 멤버들의 활동과 진전을 기록하는 정교한 감시 시스템이 있다. 모든 사람-목사들의 목사로부터 갓 신입까지-은 감시되고, 목양되며, (행동을) 설명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정상적인 셀그룹 보고서에는 주간 셀그룹 출석자, 다음 집회장소, 구원받은 사람들, 그리고 기타 중요한 세부사항이 포함된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심지어 멤버들과 행사들 그리고 활동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보고서를 산출하는데 사용되는 셀처치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까지 존재한다.

 

(그룹 상담과 코칭을 수록하는 리포트 산출에 관한 내용 일부 생략)

 

당신이 시스템에 저항할 경우 당신에게 불리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당신이 당신의 "목자"와 사적으로 나눈 민감한 개인정보가 기록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는 것에 대해 당신은 편한하게 느낄 것인가?

 

다른 인기 있는 셀교회 프로그램인 EXCELLERATE와 CELLTRAK이 (랄프 네이버의) TOUCH 웹사이트에서 팔리고 있다.

 

CellTrak의 컨텐츠는 다음 것들을 포함한다:

  • 셀멤버와 셀들에 대한 완전한 추적
  • 멤버 기록, 자녀, 과거사, 특기, 배경과 훈련 데이터
  • 비멤버들의 접촉 추적
  • 활동적인 멤버, 모임, 시작일과 모임시간의 셀 프로파일
  • 주간 셀활동 데이터의 신속한 입력
  • 빌트인 리포트들
  • 멤버 데이터를 기부 프로그램에 송출하기

과거 80년대에 코플랜드 미니스트리가 그들의 뉴스레터 구독자들 모두에게 (카드파일로 보관하기 위한) 모든 개인적 상세정보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거절했다!!) 그래서, 셀교회가 모든 멤버들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사이, 큰 기관들과 교회들 그리고, 전 지구에 걸친 신자들과 인종 그룹들을 데이버베이스화 하려는 세계기도센터 같은 글로벌리스트(세계주의자)들의 "선교" 센터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콜로라도 스피링즈에 위치한 세계기도센터<<는 두 명의 기독교 리더가 앞장서고 있는 초교파적 활동이다. 그 두 명은 글로벌 하베스트 미니스트리의 C. 피터 와그너와 뉴라이프처치의 테드 해가드이다. 세계기도센터(WPC)는 기도실, 영적도해 저장소, 강의실, 강당, 그리고 기도와 영적전투와 신사도개혁과 예언사역과 어노인팅 오일과 미술품들에 대한 광범위한 물건들을 갖추고 있는 서점을 가지고 있다.

세계기도센터가 왜 필요한가? 교회 역사상 전세계의 신자들을 연결하는 것은 가능한 적은 없었다... 전세계에 걸친 기도의 필요에 대한 자료와 정보로 완비된 신경센터는 중보자들이 현명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셀교회 구조와 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따라서, 프라미스키퍼스, 기도의 등대들(Lighthouses of Prayer), 베다니 세계기도센터, 브리게이더(Brigada)와 기타 글로벌리스트 기관들 같은 벤처들의 데이터베이스와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통합기술에 대비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장차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킬 지구적 데이터베이스-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인종 그룹에 따라 조직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의 근거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받아 들이고 있는 메시지를 채택하라고 설득하기가 더 쉽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성장 섹션에서 논의한 동질성의 원칙)

 

반대에 견디도록 만들어지다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는 말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직의 (구성)단위는 우리가 셀(세포)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이것은 무자비한 자가증식을 하며, 파괴하기가 유난히 힘들며, 큰 조직이 중앙에서 약해져서 급격히 시들을 때에도 지방의 삶의 강렬함을 유지할 수 있고, (중앙)정부의 세력에 반항할 수 있고, 현상을 비틀어 열 수 있는 적절한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대 기독교를 들던, 16세기 칼빈주의를 들던 또는 현대 공산주의를 들던 간에, 이것(셀)은 이를 통해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문명의 역사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약속된 길이라고 보여진다." (허버트 버터필드, '역사 속 개개인의 역할')

여기서 선할 수도 악할 수 있는 셀들의 잠재성에 주목하라. 정부 권위에 반항하고, "현상을 비틀어 열고", 그리고 "역사의 새 장을 여는" 것은 때로는 모두 선한 일일 수 있겠다. 하지만 만약 이 모델이 그릇된 손에 들어가 그릇된 목젝에 사용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셀과 인터넷 과의 유사성은 놀랍다.

 

인터넷은 원래 전시 또는 재난시에 필수적 통신의 지속을 보장해 주는 군사장비로서 고안되었다. 단순한 일렬방식의 데이지 체인 모델은 노드 하나만 파괴되어도 쉽게 붕괴할 수 있음을 당국자들은 인식했다. 네트(그물) 모델은 보다 더 효과적이다. 만일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노드들이 제거되면, 통신은 손실 또는 손상된 노드들을 우회해서 목표 노드까지의 대체 루트(노선)를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인터넷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교회는 네트(NET)로서 리모델링되고 있다. 즉 각 노드(셀 또는 교회)는 두 개 이상의 링크(연결고리)를 통해 네트에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링크가 고장나도 - 또는 하나의 셀이 변절해도 - 이와 상관 없이 메시지는 전파되고 증대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반대자에 의해 동요되지 않으며 일부 셀들이 제거되어도 영향받지 않는다.

 

이단을 다룰 때에는 셀들은 매우 어려운 과녁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한 개개의 노드 또는 일단의 노드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대처한다고 해도 전체로서의 구조를 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셀교회 구조를 러시아에 도입하는 것과 관련된 코멘트는 이 점을 보여 준다:

이들 세 개의 다른 집회들의 장점은, 정부가 교회에 강요하는 모든 변화들을 통해 셀 교회로 하여금 기동성과 유연성을 갖도록 허용한다는 점이다. 만일 정부가 모든 대중 집회를 금지시켜도 셀교회의 주 기능인 "셀 그룹"들은 손상되지 않는다. 이 두번째 날개인 셀 교회는 셀 리더들, 구역 관리자들, 구역 목사들로 이루어지며, 그들은 그들의 일의 주요 부분을 계속 수행한다. 교회는 지속된다! 회중들은 일요일에는 그들 구역에 있는 300명 이하 객석의 문화시설에서 모일 수 있다. 그들은 지시가 주어지면 이 문화시설에서 저 문화시설로 이동할 수 있다. 지시는 셀들을 통해 빠르게 조용히 알려질 수 있다. (셀교회 자원 네트웍)

우리는 셀교회운동이 매우 광대하며 성장 중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위의 관찰이 맞다면, 무슨 방법으로도 이것을 멈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흥에 참여하고, "대사명을 완수하는 데" 참여하는 수 천개의 교회가 이제 셀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이것은 불신자를 복음전도하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매우 탁월한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맞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교회건물보다 가정에 오기 훨씬 쉬울 것이며, 회심자들은 셀 멤버 모두를 아는 곳에 머물러 일대일 제자화 또는 양육(카운슬링)을 즐기게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선하게 또는 악하게

 

다시 말하지만, 이 셀 모델은 선하게도 또는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만약 이것이 그릇된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에 사용된다면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잘못된 시스템 하에 회심하고 거기에서 제자교육(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이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염려스러운 최초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셀에 속한 친한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의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 교회 멤버십과는 달리, 셀 안에서의 모든 변절 또는 반항의 징조는 바로 알려져서 장로들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셀을) 나가거나 옮기려는 요구는 개인적인 배신으로 여겨질 것이며, 떠나려는 결정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잃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셀 시스템은 감시와 추적을 위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으며, 위에서 보았듯이 멤버들의 사생활의 꼬리를 잡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지적한 바와 같이 집단적인 죄의 고백 또는 장로들에 죄를 고백(고해)하는 것은 참여자들을 위험하게 만든다. (고백한) 죄와 결점들은, 그들이 성급하게 셀을 떠나려고 할 때, 불순종하는 멤버들을 교묘하게 위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셀 멤버들 간에 이루어지는 친밀한 "나눔(셰어링)"도 그럴 수 있다. 이는 (부흥의) 파도를 일으키려는 멤버들에게는 단지 너무나도 위태로운 것이다!

 

군사적 구조와 혁명

 

정확하게 똑같은 병법이 (미국) 패트리어틱(극우 애국주의자) 그룹과 기타 장소에서 사용되고 있다. 최근까지 온라인에서 볼 수 있었던 "자유민병대(Free Militia 시민군)"의 "군사교범"에서는, 이런 조직-셀 그룹으로서의 조직-에 당면한 문제들을 설명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다음에 나오는 주장들이 얼마나 많이 셀교회에서 되풀이되는지 보라!

 

매뉴얼의 "2.3.1 셀 구조" 부분은 말한다:

자유민병대 조직을 인도하는 기본 규칙은 중앙집중적인 원칙과 계획, 그리고/하지만 분산적인 전술과 행동이다... 이 핵심 문장이 뜻하는 것은 민병대 전체가 같은 목표에 헌신해야하며, 공동체를 함께 수호하도록 조직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부분의 타협이 전체를 타협하지 않도록 특정 전술은 각 요소에 맡겨져야 한다.

 

자유민병대의 서로 경쟁하는 두가지 관심사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방법은 모든 요소들을 "셀"로 조직하는 것이다. "셀"은 함께 훈련받고 협력하는 8명의 그룹으로서, 민병대의 광범위한 목적들에 있어서 중요한 특정 목표 또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셀(세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셀이 살아있는 조직의 기본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 성장과 번식이 살아있는 세포(셀)에 기초하듯이, 모든 민병대의 "생명"은 셀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셀 멤버들의 정체는 셀 내부에서만 그리고 직속 상관에게만 알려진다. 모든 기본 훈련은 셀 안에서 이루어진다.

 

왜 셀 구조인가? 군사 작전은 팀웍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더 큰 조직을 구성하는 각 팀들은 다음 몇가지 이유 때문에 작아야만 한다: 작은 사이즈는 동지애를 촉진한다. 대부분의 경우, 셀 안에서 함께 훈련받고 작업하고 싸운 사람들은 서로 뭉치며, 비록 셀 전체적으로는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이동할 수 있더라도, 셀 자체는 변치 않는다. 이것은, 유효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멤버들 사이에서의 개인적 친밀함, 신뢰와 충성심을 발전시킨다.

 

작은 사이즈는 개인화된 훈련을 허용한다. 각 멤버를 알고 자주 접촉함으로써 셀 리더는 각자를 그에게 맞는 수준과 속도로 동시에 훈련시키면서 팀 내부의 강력한 응집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작은 사이즈는 손쉬운 소통과 조정을 뜻한다. 셀 리더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명확한 명령을 쉽게 전달할 수 있다. 고위 명령 집단은 명령의 체인을 통해서 각 군인들과의 직접적인 연락 없이도 전체 민병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2.3.3 셀로 이루어진 중대:

셀은 자유민병대 내의 가장 작은 조직 단위이다. 더 큰 단위(부대)들은 같은 명령(체계) 하에서 함께 조직된 셀들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4개의 셀이 소대를 이루며, 중위가 소대를 이끈다. 4개의 소대는 중대를 이루고, 대위에 의해 리드된다. 이 시스템은 다음 조직도에 의해 설명된다. [조직도는 셀교회 문헌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처음에는 하나의 셀로 시작했을 것이다. 신참이 합류하면, 노련한 사람들은 승진하고 새로운 셀이 형성된다. 결국, 소대, 중대, 심지어 대대(4개 중대)가 형성될 것이다.

 

모든 기본훈련은 소대장의 감독 하에서 전투 셀 내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개인 전투 기술, 팀 전투 기술에서의 훈련을 포함한다. 특정한 명령 또는 지시가 명령 체인을 통해 전달되어 전투 셀에 의해 수행된다. 전투 셀이 주그룹에서 격리될 경우, 게릴라 전법을 사용해서 스스로 싸움을 계속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섹션의 주요 아이디어는:

  • 셀은 함께 훈련받고 협력하는 8명의 그룹으로서, 민병대의 광범위한 목적들에 있어서 중요한 특정 목표 또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 자유민병대에서, 타인과의 당신의 접촉과 노출은 직속 명령계통에 한정되어 있으며 위아래로 두 계급(단계)에 한한다.
  • 자유민병대에서, 당신은 명령 계통에 있어서의 당신에 대한 직접 권위(권한) 선 상에 있는 상관에게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
  • 기본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기호 또는 감각과 관계 없이 실제 전투에서의 준비와 수행에 관한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위 매뉴얼은, 셀교회 조직이 매우 조직적인 군사 활동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군사용어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요엘의 군대)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며 특별히 젊은이들은 혁명가들로서 훈련받도록 부름받고 있다.

 

과거 1990년에 이 "종말 군대"는 이렇게 호출받았다. "당신 역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위대한 일을 성취할 혁명가들의 군대를 다듬고 계신다." (제이 로저스) 그리고 오늘날 이 혁명 이야기는 사도/선지자 운동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예언적 장로들의 사도위원회"의 일인인 신디 제이콥스는 2000년 8월 "교회를 향한 급진적 형명가들"을 부르는 "혁명을 향한 예언적 부르심"을 내었다.

 

올해 "더 콜 레볼루션(혁명)"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예수 혁명"의 필요성을 말했다. "예수 혁명의 발화점으로 운명지어진 젊은 세대 속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헌신과 나실인의 기름부음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무엇이 목적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군사전투를 위해서나 또는 이런 방법으로 "나라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다. 복음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이 주를 개인적으로 알고 그분께 복종토록 배우기만 한다면, 교회 안이나 또는 밖에서나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많은 다양성과 심지어 의견의 불일치도 교회 안에서 용인할 수 있으며, 그룹들은 서로 전혀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그래도, 구원의 메시지의 선포라는 주된 임무는 계속되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데려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지배는 약간 다른 접근법 - 일치, 사람의 권위에의 순종 그리고 타이트한 조직 - 을 요구하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하려는 (예를 들어, 하나님은 소수만 구원받을 것이며 예수 재림 전에 많은 사람들이 배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을 회심시키려고 하는) 인위적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절망과 환멸만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 - 이를 대치하거나 이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경건할 수 없으며 참된 영원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당기는 "열매"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 모든 종교는 새 멤버를 모은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진짜로 보이는 거짓 복음이 선포되고 거짓 왕국이 세워지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주신 유기적인 일대일의 영적 일치와는 거리가 먼 거짓 일치가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요구하시는 것, 또는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입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알거나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이 즉각적인 관능적 만족과 쾌락의 세상에서 그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오직 성공과 승리에 대한 것뿐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정직한]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참]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이사야 3):9-10)

(성경은 항상 "긍정적"이거나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닌 반면에) 흥분, 자아성취와 "긍정적" 메시지를 찾는 신자들은, 셀교회와 (신)사도개혁이 - 지구적 규모로 보면 - 조종과 세뇌의 방법임을 알지 못한 채 그 속으로 끌려갈 것이다.

 

많은 - 장로들을 포함한 - 사람들이 진지하고 열성적이고 영혼구원을 구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며, 나는 여기서 복음전도와 제자도에 종사하는 선의의 목사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동기는 훌륭하더라도 교리와 방법론은 틀렸다.

 

그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지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정신과 사상과 이상이 만들어낸 것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미리 결정한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몇개의 성경구절을 찾는 것은 기만적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 의해 시작되고 허용되어야만 한다.

 

너무 늦기 전에 리더들은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한 사람을 구원하고 성경적인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거짓 교리를 따르도록 수 천명을 감화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하 부분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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