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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찾기 스크랩 백제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盧)
솔잎하나 추천 0 조회 32 14.12.31 08: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

 

 

 ▲동아시아 고대 금속 공예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백제금동대향로

 

유 물 명 칭 : 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

종         목 :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 1996. 05. 30

국적/시대  : 한국(韓國) 백제(百濟)

재        질 : 금속(金屬) 금동(金銅)

용도/기능  :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제례(祭

                禮) 향로(香爐)

출  토  지 : 충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문양/양식 : 동물문(動物文) 봉황문(鳳凰文)

소장 기관 : 국립1(國立1) 부여(扶餘)

 

 

서기 660년!

‘한(恨)많은 왕국’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망국의 왕자 한 분이 일본으로 피란한다.


그는 일본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둥지를 틀어 백제마을을 가꾸었다.

 

마을사람들은 신다이(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1993년 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실로 1,330 여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 이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날,

바로 그 곁에서는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숨쉬는 듯한 용과 봉황


향로의 이름은 처음에는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였다.

 

향로의 받침엔 龍, 꼭대기엔 鳳이 장식됐잖아요.

 

또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蓬萊·方丈·瀛洲) 중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를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 동고(銅鼓), 종적(縱笛), 소(簫)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또한 뚜껑 전체가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이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 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이 향로는 어디까지나 중국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 오히려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한나라의 박산향로

   (연꽃에 새겨진 한 사람은 무예를 수련하는 모습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동물을 타고 달리고 있다.

    27 마리 동물 가운데는  날개가 달린 물고기, 악어, 황새 등이 보인다.)

 


 

연대는 역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후반, 즉 위덕왕(재위 554~597년)때 만들어 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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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해설 감상*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백제 금동 대향로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 막 피어난 듯한 연꽃

▲봉황부분

 

1993년 12월 12일 백제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백제왕의 무덤이 여럿 모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의 능산리 유적지 공방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백제 왕실에서 사용되었을 법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된 것이다.

 

이 향로는 1400여 년의 시간을 넘어 겹겹이 쌓인 기와 조각 더미 밑에서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인들이 적의 침입을 피해 서둘러 숨겨놓은 듯하다.

 

향로란 나쁜 냄새나 기운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는 도구이다.

 

인도에서는 약 4000 년 전, 동북아시아에서는 2300 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백제 주변국에는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과 'ㅗ' 모양의 다리, 잔처럼 생긴 몸체를 갖춘 박산향로가 널리 만들어졌다.

 

백제 금동 대향로도 박산향로의 기본 형태를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백제인의 생각과 기술이 합쳐져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된 것이다.

 

높이 62.5 ㎝, 최대 지름 19 ㎝인 이 향로는 크게 4 부분으로 나뉜다.

 

맨 위의 봉황 장식 아래는 산악도로 장식된 뚜껑과 연꽃이 장식된 몸체, 몸체를 물고 있는 용 받침으로 이루어졌다.

▲상단부분

 

본체의 가운데는 테두리의 흐르는 구름 문양을 경계로 위쪽은 산악도, 아래쪽은 연꽃이 가득한 물의 세계로 구분이 된다.

 

산악도에는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람과 신선 등 12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3 마리의 호랑이와 사자ㆍ원숭이ㆍ멧돼지ㆍ코끼리ㆍ낙타 같은 많은 동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중간부분

 

또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새와 동물도 있다.

 

곳곳에 있는 폭포와 나무, 불꽃 문양, 귀면상은 산악도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고 있다.

 

그 아래에는 5 명의 음악가가 완함, 북, 거문고, 배소, 피리를 불고 있다.

 

거문고는 고구려, 완함과 배소는 서역, 북은 남방의 악기이다.

 

이처럼 다양한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열린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5 개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은 조용하면서도 아늑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아시아 고대 금속 공예의 최고라는 평가

 

향로의 몸체 부분은 용이 활짝 핀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중하 연화(蓮花)부분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 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고, 잎마다 27 마리의 짐승과 2 명의 사람이 돋을 새김으로 장식돼 있다.

 

용은 한쪽 발을 치켜들고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만들어 안정감 있게 향로를 받치게 되어 있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 나온 뿔은 두 갈래로 나뉘어 목 뒤까지 뻗어있고,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용을 형상화한 받침대 부분


이 향로는 백제 사람들이 도교와 불교를 믿었고, 다양한 음악과 놀이를 즐겼으며 해외와 활발하게 교류를 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열도를 크게 개척하고, 고구려도 쉽게 넘볼 수 없었던 백제의 힘은 이러한 기술과 문화에서 나온 것다.

 

일찍부터 바다를 적극 활용한 백제는 다른 나라로부터 앞선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쏟았다.

 

기술자, 예술가들에게 박사, 공, 사 등의 호칭을 주고 높은 벼슬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기술자와 문화 예술인을 높이 대우했기 때문에 수준 높은 기술과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할 백제 금동 대향로인 것이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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