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창조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의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만들기 시작하신 첫째 날부터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여섯째 날까지 매일 당신이 만든 세상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Good)”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좋았더라(Good)”라는 단어는 원어적으로 육체적, 정서적, 영적으로 결함이 없는 완전한(perfect)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한 명령을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시고, 그들이 죄를 짓기 전까지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완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죄가 인간으로 인해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조금씩 타락하기 시작했다.
지난 달 지상파 방송에서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왕따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모여 학교 폭력과 그 연장선인 왕따를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등한 입장에서 다루면서 그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이게 그려냈다. 이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요즘 가장 문제시 되고 있는 키워드인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가해자에게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그들 역시 피해자와 동일한 범주의 또 다른 피해자라는 인식을 새롭게 심겨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이 프로그램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교육을 통해 변화시킴으로써 이들 모두 우리가 사랑해야할 자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필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다시 생각이 났다. 지금은 가해자요, 피해자로 서 있는 학생들이 본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완전한 형상으로 만드신 귀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 학생들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모태에서부터 그들을 지으시고 만지심으로 그들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학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 부정적인 환경들을 접하면서 어떤 이들은 점차 가해자의 모습이 되어갔고, 또 어떤 이들은 점차 피해자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가해자이던 피해자이던 학생들이 지금의 현재 모습이 되기까지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살펴보면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가해자였던 학생들의 학교 폭력의 원인은 심리적, 개인적, 사회적, 구조적 원인들을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논의는 두고서 우선 시선을 한 개인으로 좁혀서 면밀히 원인을 살펴보면, 국내외 여러 논문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원인으로 높은 긴장상태를 들 수 있다. 그들이 가치 있게 여겼던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나, 부모나 형제를 상실했을 때. 또,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만드는 자극을 그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해 학생들은 이런 심리적 상태들을 해소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학교 폭력 가해자 학생들 중 상당수가 지나치게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거나, 일상화된 체벌이 있는 환경에서 생활한 경험, 아동학대의 경험, 그리고 학교에서 교사의 언어적·신체적 처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반면, 피해자였던 학생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들도 가해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학생들이 대부분인 피해 학생들은 한, 두 번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강하게 저항하지 못함으로 인해 왕따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부모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부모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다. 학교 폭력의 피해를 부모나 교사에게 알렸을 때 오히려 피해를 경험한 학생이 야단을 맞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피해 학생들에게는 대화의 창구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해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더라도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 끌어안으면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이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자율적인 의사를 주어 에덴동산의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짓게 하고 그들의 관리를 맡기셨다. 모든 피조물이 이 다스림에 순종하며 따르도록 하나님이 그 구조를 만드셨고, 아담은 이를 충실히 수행할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태에서부터 허락하신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은 완전한 상태이다. 그런데 사회 구조적인 다양한 부정적 환경과 더불어 어른들의 잘못된 욕심과 비뚤어진 자녀에 대한 사랑, 바쁜 일상으로 인한 무관심이 우리 자녀들을 ‘보시기 좋은 상태’에서 많이 벗어난 현재의 상태로 오게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본래의 상태로 우리 자녀들을 회복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다. 소극적이거나,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이거나, 과격하거나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들의 현재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학생들에게 미래를 향한 비전도 중요하고, 대학을 위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것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 그것이야 말로 우리 학생들이 다시금 그들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게 하는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하나님을 그들 가슴 깊숙이 심겨 주어야 한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셨는지, 그로 인해 그들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확실히 알려주어야 한다. 그 안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도록 부모이고 교사인 우리가 안내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가치가 우선이 되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위의 두 가지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을 담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알고 그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구해하는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선한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을 창조하셨던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면서 그들을 인내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품어야 한다.
필자는 기대한다. 하나님의 선한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게 피어날 그 날을.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날 그 날을.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형상대로 우리 아이들이 다시 회복될 그 날을. 그 안에서 참된 자유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나갈 그 날을. 기대하며 기도한다.
업코리아 박진희 교사(2013.3.21)
첫댓글 가정에서부터 아이들을 사랑으로 이해해 주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