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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홈실 참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설죽선생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석정 김동식 장군의 생애와 사상
서 정 기(동양문화연구소 소장)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가계(家系)
서기 1907년 8월 28일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혁혁하게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고 1910년 12월 27일 장렬하게 순절한 민족영웅 김동식 장군은 조선왕조 철종 5년(1854년) 1월 14일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석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석정(石井)이며 자는 천식(千植)이요 이명은 수신(修臣)이고, 고려말 충신 상촌 김자수공의 18대손이다.
김동식 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순결하여 사랑을 받았으며 상촌공(桑村公)이 일으킨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가풍 속에 학문을 함에 정주학(程朱學)을 위주로 하고 송자(宋子)의 춘추정신(春秋精神)을 흠모하여 일찍이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도학(道學)에 정진하기로 뜻을 세우니 주변사람들이 크게 기대하였다. 약관에 관례를 행하고 결혼을 하여 21세(1874년)에 아들 봉환(鳳煥)을 낳았다.
25세(1878년)되던 해 7월 21일 아버지의 상을 다함에 그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출입을 삼가면서 3년의 복을 입었는데 아버지의 복을 벗기도 전에 어머니 김해 김씨가 또 작고하였다. 그리하여 전후 4년간 오로지 예법책만 읽으면서 근신하며 굴건제복(屈巾祭服)을 벗지 않고 안방에 들어가지 않으며 죄인으로 자처하여 하늘을 보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며 산림학자로 존경하였다. 항상 사서삼경과 소학, 주자가례 그리고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을 돌아가며 읽으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이가 찾아와 서당에 제자가 가득하였다.
시대가 크게 변하여 양이(洋夷)가 침범하고 일제가 날뛰는 어지러운 시국이 되었으나 김동식 장군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공자의 가르침만이 인간이 가야 할 바른 길임을 설파하면서 끝까지 단발령을 거부하고 외래상품을 배척하며 동방예의지국의 전통문화를 고수하였다.
장군이 43세 되던 해, 조정에서 임금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光武) 원년(1897년)이라는 연호를 세우면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청나라 연호를 폐지하며, 삼전도에 있던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항복비를 철거하여 청나라의 종속에서 벗어났다. 이에 장군은 불의와 불법은 반드시 패망하고 역사는 정의의 편이라고 하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석정 김동식 장군의 전적지(지리산 뱀사골)
반제 반침략의 독립사상
병인양요(1866년)에 양헌수 장군이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의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이어 신미양요(1871년)에 어재연 장군 등이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국의 태평양함대와 사투를 전개하여 미국 함대를 구축한 영광시대에 소년기를 보낸 김동식 장군은 어려서부터 민족자주독립 의식이 대단히 강하였다.
특히 효종대왕과 송시열 선생이 은밀하게 계획한 북벌사업의 일환으로 숙종이 축조했던 북한산성, 남한산성, 수원성, 그리고 강화도의 정족산성과 광성보, 초지진, 덕진진 등의 요새가 국가를 수호하는 보루임을 인식하고 문무의 겸비를 주장하였다.
갑오년(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서 척양(斥洋) 척왜(斥倭)를 주장하고 6월에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며 다음해 을미년에는 8도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토벌하는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 하에서, 예절과 음악에만 전념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대비책이 아니므로 스스로 병법을 익히고 지리를 연구하였는데, 특히 『육도삼략(六韜三略)』과『손오병법(孫吳兵法)』, 『소서(素書)』, 『심서(心書)』, 『삼국지연의』 등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그리고 중봉(重峰) 조헌(趙憲) 선생이 왜란(倭亂)에 대비하여 매월 제자와 가솔들에게 피난행군을 실시했던 것을 본받아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는 행군을 연습하고, 제자를 이끌고 깊은 칠장산(七長山) 속에 들어가 생식하는 법을 가르쳤다.
갑진년(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다음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병오년(1906년) 3월에 민종식(閔宗植) 의병대장이 홍주에서 거병하고 4월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의병대장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므로 가세하려고 하였으나, 곧 자파하였기에 이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나라의 독립이 자주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제의 통감정치로 전락하니, 이는 문화적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방력이 허약해서 주권을 지키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난세에는 모든 지식인이 떨치고 일어나서 국토수호의 사명을 완수해야 된다고 생각한 김동식 장군은, 출신신분이나 문벌을 가리지 않고 뜻이 있는 지사와 국가의 장래를 밤낮으로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답을 팔고 집을 줄여서 자금을 만들어 약간의 총검을 구입하여 비밀리에 제자들에게 총기의 사용법을 익히고 무예를 단련시켰다.
특히 김동식 장군은 제자들에게 태껸 등의 호신술을 정밀하게 가르쳤으니, 정의는 불의에게 져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끝까지 살아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려면 반드시 남보다 100배의 공부를 하여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문(文)은 정도를 밝히는 것이요 무(武)는 기도(奇道)를 쓰는 것이니 군사비밀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하고 윤리와 도덕은 천하가 알도록 자세히 설파하여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 시대에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무장투쟁이 마지막 수단임을 고금의 역사로 변증하면서 54세의 김동식 장군은 붓을 들어 상촌공(桑村公)의 절명사(絶命詞)를 크게 써서 결심을 보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 一死吾休恨 九原應有知
“한평생 충성하고 효도한 뜻을 오늘날 누가 있어 알리오
한번 죽어 나의 한을 끝내나니 황천에 응당 아는 사람 있으리라”
을사5륵약(乙巳五勒約)으로 이등박문이 자칭 통감이 되어 역적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만들어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6월에 정미7륵약(丁未七勒約)을 조작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즉각 고종황제를 퇴위시켜 순종을 세워서 연호까지 융희(隆熙)로 바꾸니 이에 나라가 완전히 망했고 정부가 매국노 역적임을 선언하며 광무 11년(1907년) 8월 28일 안성에서 열린 민군회의(民軍會議)에 참석하여 민군의 조직과 진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그날 모인 의병장은 안성군의 김동식(金東植), 죽산군(竹山郡)의 정주원(鄭周源), 그리고 양성군(陽城郡), 평택군(平澤郡), 용인군(龍仁郡), 이천군(利川郡), 진위군(振威郡) 등의 의병장 7명이었다. 이들을 따라온 1만여 명의 의병을 안성으로 집결해 놓고 안성군의 관아(官衙)를 접수하고 하루 종일 토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현 자칭 통감이 조종하는 정권은 우리 민족을 위하는 정권이 아니고 일본의 괴뢰정부이므로 일체의 납세를 거부하고, 미곡의 반출을 금지시켜 국외반출을 막으며, 우리 의병은 인민을 보호하는 민군이므로 인민을 앞장서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민군의 군량과 군수품은 지역의 관장(官長)에게 명하여 관용(官用)으로 조달하되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며, 항상 민중들의 굳은 지지기반 위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을 토벌하고 일본인을 축출하며, 민족을 배반하는 친일역적을 엄중히 징계한다는 기본목적에는 전원일치로 합의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토벌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의견이 속출하여 합의를 보지 못했다.
대체로 통일적 민군조직을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해서 왜적의 심장부를 일거에 도륙하고 친일정권을 타도한 다음 새로운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사람들은 속전속결을 주장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열악한 민군의 무기로 대군의 결전을 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전국의 각 지방이 총궐기하여 왜적을 토벌함으로써 일본군이 결국 스스로 물러가도록 압박을 가하는 지구전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여 밤새도록 토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29일 새벽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습격해 들어왔다. 민군은 대항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며 싸우다가 칠현산(七賢山 : 寶蓋山)으로 후퇴한, 김동식 장군은 아들 김봉환(金鳳煥)과 여러 제자를 주축으로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천을 거쳐 증평을 지나 괴산군 화양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애각(崖刻) 앞에서 모든 대원을 정렬시킨 김동식 장군은 유교(儒敎)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로 건너와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을 건설한 역사적 사실을 설파한 뒤 공자가 『춘추』에서 밝힌 존왕천패(尊王賤覇), 내하외이(內夏外夷), 상선벌악(賞善罰惡)의 대의와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밝힌 국가의 정통성 수호정신과 불타협적 복수론(復讐論) 그리고 송자(宋子)가 의리학(義理學)에서 밝힌 도통(道統) 수호의 시대적 사명론을 높이 받들 것을 다시 결의하고 소를 잡아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은 군사강령을 맹세하였다.
1. 우리는 일본군을 토벌하여, 무력과 술수로 침략해서 우리나라를 멸하며 우리 인민을 말살하는 일본의 죄악을 성토하고 국권(國權)을 되찾아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
1. 우리는 반민족적 매국노를 처단하고 위민봉공(爲民奉公)의 민권정부를 세운다.
1. 우리는 국민을 보호하고 예의도덕을 숭상하여 끝까지 군율(軍律)을 엄수한다.
지리산 민군(智異山民軍)의 영웅적 승리(英雄的勝利)
화양동 계곡에서 확고하게 정신을 무장한 김동식 장군의 민군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편성하고 보은, 영동을 거쳐 무주에 도착하여 덕유산으로 들어가 잠시 험준한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하여 용병(用兵)의 근거지를 살피고 부대를 훈련하였다. 그리고 곧 장수를 거쳐 남원 운봉으로 들어가서 지리산에 요새를 만들어 놓고, 영호남의 유림과 접촉하며 연합전선 구축에 전념하였다.
이때에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이 동복군(同福郡)의 왜적을 소탕한 용맹스러운 300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김동식 장군은 고광순 의병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합동작전을 전개하면서 곡성(谷城), 담양(潭陽), 창평(昌平), 옥과(玉果)로 진출해서 왜적을 요격하고, 9월 10일에는 순창(淳昌)의 왜적을 토벌하여 순창우체국을 접수해서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9월 15일에는 다시 동복(同福)으로 돌아와서 동복순사주재소를 토벌하고 19일에는 구례(求禮)와 영광(靈光)의 일본헌병분견소를 토벌하여 일본인을 소탕하고 무기를 확보하였다. 이어 경상남도로 진출하여 안의(安義)를 거쳐 함양(咸陽)에 주재한 일본군을 토벌해서 대승을 거두고 산청(山靑)으로 내려가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다시 안의로 회군한 민군은 거창(居昌)으로 진출하다가 거창 서북방 월성(月城)에서 진주파견대를 주축으로 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을 가한 다음 지리산(智異山) 칠불사(七佛寺)로 들어가 노고단으로 올라갔다. 다시 10월 4일에 하동(河東) 경무서를 토벌하여 왜적을 소탕하니,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호남지역에 산재하여 살던 일본인이 모두 일본군의 보호구역 내로 도주하였다.
김동식 장군은 전북지역 유림과 주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李錫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달 13일, 이석용 의병장은 3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鎭安)으로 진격, 일본군을 무찌르고 총포와 군복 및 돈과 비단 등 20여 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0월 22일에는 심원암(深院庵) 부근에서 김동식 부대와 이석용 부대가 일본군과 회전하여 왜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때는 이석용 부대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후 두 부대는 순창, 임실, 진안, 용담(龍潭) 등지를 순회하며 일본군경과 공방전을 전개하고 일진회원을 처단하였다.
김동식 장군은 처음부터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며 여러 지역의 의병과 연합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서 일본군을 토벌하여 지리산에 거점을 확보하고 해방지역을 관할하였는데 당시 일본군(日本軍)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당시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전적지 일대를 설명하는 저자
“1907년 9월 상순 광주(光州)부근에서 곡성(谷城), 담양(潭陽), 창평(昌平), 옥과(玉果)에 걸쳐 민심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10월에 이르자 드디어 한 부대의 의병은 순창우체국을 습격 약탈하고 15일에는 약 200명의 의병이 동복(同福)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9일에는 구례(求禮), 영광(靈光)의 헌병분견소가 습격당했는데 이 폭도의 수괴(首魁)는 김동식(金東植), 고광순(高光洵) 등으로 전라남북도에 있어서 의병의 선구자(先驅者)였다.”
(朝鮮駐屯軍司令部 편 ‘朝鮮暴徒討伐誌’ 제4편 제2장 4. 전라남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독립운동사자료집’3)
“9월 전라도에서 봉기하였던 김동식(金東植), 고광순(高光洵)의 부대는 1907년 10월 경상남도로 진출하여 거창(居昌), 안의(安義) 부근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진주(晋州) 경무 고문의 격파가 여의치 않아 진해만(鎭海彎)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를 산청(山淸), 안의(安義)방면으로 파견하고 남원(南原)수비대를 안의(安義)방면으로 급행시켜 그와 책응케 했다.”
(上同書 제4편 제3장 3. 경상남도 및 그 부근에서의 토벌)
“진안(鎭安)부근에 의병 약 300명이 집결해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전주(全州) 수비대는 20일 특무조장 이하 30명을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조사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용담(龍潭), 삼가(三街), 고산(高山)부근을 수색하다가 22일 심원암(深院庵) 부근에 의병집합의 보고를 받고 동지로 향하여 전진중 의병 약 100명과 만나 이를 공격 그 15명을 사살하고 남방으로 궤주시켰다. 이 폭도의 수괴(首魁)는 김동식(金東植) 이석용(李錫庸)인데 그 출몰은현(出沒隱現)이 대단히 교묘하였으니 그들이 어느 지역을 토벌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그 시일을 약속하고 일제히 집결하여 토벌하고 군사작전이 끝나면 다시 집합할 장소와 시일을 정한 다음 몇 사람씩 분산하여 양민(良民)으로 가장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예봉(銳鋒)을 벗어나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上同書 제4편 제3장 4. 전라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작년 10월 경상남도 지리산 부근을 근거로 한 수괴(首魁) 김동식(金東植), 고광순(高光洵)이 인솔하는 의병은 진주(晉州)파견대에 의하여 그 소굴을 전복당하고 고광순 이하 약간을 잃어 일시 그 지방은 정온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년에 들어서자 김동식(金東植) 의병대장은 의연 지리산 부근에 잠복하여 교묘하게 그 종적을 감추면서 은근히 그 세력부식에 노력하고 있었고 또 의병대장 기삼연(奇三衍)은 전라남도 함평(咸平), 담양(潭陽) 부근에서 활동을 개시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上同書 제5편 제2장 6.경상남도 및 전라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1908년 봄에 이르러 호영양남민군(湖嶺兩南民軍)의 선구자 김동식(金東植)장군은 호남창의회맹소 도통령 김용구(金容球) 그리고 전북의병대장 이석용(李錫庸) 및 호남지역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심남일(沈南一), 전해산(全海山), 강무경(姜武京), 안진사(安進士), 이학사(李學士) 등의 용감무쌍한 부대와 연합하여 지리산에 병영을 세우고 장벽을 설치하여 방책(防柵)을 만들며 지리산 뱀사골 달궁에 병기창을 세워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해서 총과 탄약 그리고 양곡을 비축하여 영구지책(永久之策)을 강구하므로써 그 전력을 극대화하여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일본군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일본인을 모두 구축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것은 호영양남의 산림학자양반과 전체 민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룩한 영웅적 승리로써 김동식장군의 덕의와 지략과 신망으로 이룩한 결정체임과 동시에 우리 2천만 동포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하여 자유?평등?해방을 성취하는 역사의 기념탑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보복 살육전을 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백주에 양민(良民)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소개지를 배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호기(好機)를 잡으면 곧 자객적(刺客的) 행동을 감행하여 총기, 탄약, 재화를 약탈하고 혹은 허(虛)를 틈타 저격, 내습을 하는 등 그 은현출몰(隱現出沒)은 미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순사주재소는 거의 전부가 습격을 당하였고 양민(良民)을 위협하여 조세(租稅)를 횡령하고 재류 일본인 및 그 사역(使役)하에 있는 조선인은 대개 폭도의 독수(毒手)에 목숨을 잃어 다년간의 사업경영을 포기 하고 그 근거지로 퇴각하여야 하게끔 되었으므로 농업이 번성하였던 전라 양도는 이제 바야흐로 황무지화 되었다.
그뿐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던 그 고장의 본토인 양민(良民)도 의병의 위압에 눌려 그들에게 가담하여 교통의 방해가 빈번하였으므로 첩보의 소통이 방해되어 군대의 행동도 극히 곤란을 느껴 일야(日夜)로 그들을 소탕하는데 노력을 하였으나 그 효과는 현저하지 못했으니 이 역시 만부득한 일이었다. 그리고 의병은 2월 이후 화승총(火繩銃)의 개조에 고심하여 4월 초순경에는 거의 대부분 뇌관식(雷管式)으로 개조하였다.
(上同書, 제5편 제3장 전라남북 양도에서의 토벌)
당시 일본군의 막강한 정예부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항하였으니 침략군 사령관인 일본육군대장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일본군 6사단, 13사단, 보병 제3여단과 일본헌병 5,000명, 경찰 5,000명을 합세하고도 연전연패하였다. 일본정부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자칭통감(自稱統監) 이등박문을 면직하고 부통감 증미황조(曾彌荒助)로 대체하여 추가병력을 지원해, 서기 1909년 8월부터 소위 남한 대토벌작전이라는 극악무도한 보복살육전을 획책하였다.
이에 지리산을 거점으로 호영양남민군(湖嶺兩南民軍)을 총지휘한 김동식(金東植) 장군은 역전의 용사를 독려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독립전선을 사수하였는데 9월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일본군과 혈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의 작전을 저지하면서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또한 호남민군(湖南民軍)의 피해도 적지 않아 60여명에 이르는 용감무쌍한 우리 의병장이 5,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장열하게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니 서기1909년 9월 26일 무안군 발다면(發多面) 전투에서 김동식(金東植)장군의 외아들인 김봉환(金鳳煥) 의병장도 포로가 되었다.
호남의 독립전쟁은 일찍이 전쟁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치열한 혈전이었으니 일본군이 지나간 곳은 마치 태풍이 휩쓸듯이 폐허의 잔해만 남았으나 호남민군(湖南民軍)은 그칠 줄 모르는 활화산(活火山)처럼 다시 불기둥을 뿜으며 솟구쳐서 탁월한 전략전술로 침략군을 요격하며 격멸하니 그 사상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라남북도에 2개월간 불꽃 튀는 독립전쟁으로 초연이 가득한 속에 10월 26일 이범윤(李範允) 장군이 간도(間島)에서 일으킨 대한독립군의 좌익장(左翼將) 안중근(安重根) 중장(中將)이 하얼빈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 대죄인(大罪人)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총살했다는 희소식으로 사기충천한 호남민군(湖南民軍)은 더욱 장렬하게 일본군을 토벌했고 일본군도 병력을 증파하여 각 지역의 경비를 더욱 삼엄하게 하였다.
10월의 호남전쟁에서도 연일연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불행하게도 그동안 일본군 500여명을 사살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던 심남일(沈南一)장군과 그 전군장(前軍將) 강무경(姜武景) 의병장이 1천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여 10월9일 능주(綾州)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고, 또 29일에는 나주(羅州)전쟁에서는 호남의병장으로 용맹을 날리며 500여명의 일본군을 도륙했던 전해산(全海山)장군이 부하 모천년(牟千年)의병장, 이강년(李康年)의병장과 1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포위되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강진(康津)전투에서 의병 3,000명이 전사하고 또 각 지역의 전투에서 의병장 60여명과 2,000명의 의병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9~10월 두 달 사이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호남민군의 수가 1만을 헤아렸으니 호남의 인구도 반으로 줄었으며 풀과 나무도 모두 시들어버린 쓸쓸한 가을 벌판에 호남민군의 전력 역시 반으로 줄었다.
장렬(壯烈)한 순절(殉節)
그러나 김동식(金東植) 장군은 호남창의대장 문태수 장군과 전북의병대장 이석용 장군과 연합하여 지리산의 본영을 굳게 지키고 재기를 도모하여 흩어진 부대의 재편성에 노력하였다.
일본군은 더욱 잔인무도한 살육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피살자의 수에 상응하는 전과를 올리기 위해 엉뚱하게도 의병이 활동한 지역의 무고한 양민(良民)을 닥치는 대로 무수하게 살해하고 방화하면서 보복살육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13도 민군은 주민의 피해를 고려하여 촌락이 전혀 없는 광야나 산속에서만 일본군을 토벌하여야 되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였다.
더욱이 1910년 4월부터는 항일독립전쟁의 주도세력인 유림(儒林)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술책으로 일본군경은 전국에 걸쳐 산림학자양반(山林學者兩班) 10만명과 유생(儒生) 110만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특별감시하면서 수시로 수색하고 탄압하여 범죄인처럼 취급하며 일반인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니 의병의 세력이 극도로 제한을 받게 되었음에도 13도 민군은 시종여일 용감무쌍하게 타격전을 전개하므로 일본은 대군(大軍)을 파병했어도 혼전만 거듭하는 전황을 크게 고민하다가 통감 증미황조(曾彌荒助)의 무능으로 결론을 내리고 즉각 해임한 다음 일본 육군대신 사내정의(寺內正毅)를 통감으로 임명하고 부통감은 산현이삼랑(山縣伊三郞)으로 경질하며 일본군 2사단을 추가로 증파하였다.
장장 3년동안 불철주야 산과 들을 누비며 일본의 학대에 시달리는 우리 민중의 고통을 목격하고 또 찬란한 우리 문화가 여지없이 붕괴되는 참상을 목도하면서 오로지 독립전쟁의 승리만이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여 영광스러운 역사를 재창조하는 길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항상 민군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옳지 못한 길은 천금이 생겨도 가서는 안되고 옳은 길이면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가야만 된다는 정의로운 진리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은 13도 민군의 장병은 이미 정의의 화신이요 나라의 수호신이며 독립전선의 영웅이었다.
일본에 대한 원한이 많을수록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뜨거워지고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커질수록 동포에 대한 동정심은 깊어져서 차마 눈을 뜨고 퇴락하여 적막한 촌락을 지나갈 수 없었다. 이미 나라가 망하였으니 그 누가 고단하고 빈약한 서민대중을 보호할까! 이제는 오직 우리 민군의 승전보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이 땅에 남아 있는 1천5백만 동포를 생각할 때에 시각을 다투어 일본군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3도민군은 용왕분투하였으니 민토(民討)가 아니고 천토(天討)였으며 한국독립전쟁이 아니고 아시아의 독립전쟁이었다.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金東植)장군은 지리산에 집결한 호영양남민군에게 훈시하기를 “우리는 지금 사악한 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의 총칼을 든 것인즉 우리 민군(民軍)은 천하정의(天下正義)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신성하고 그 책무가 막중하니 각자 자애(自愛) 자중(自重)하여 아름다운 명예를 끝까지 더럽히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러나 역적 이완용(李完用)과 자칭 통감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마침내 소위 한일합방협정(韓日合邦協定)이라는 것을 조인하고 서기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군주(君主) 명치(明治)가 소위 합방조서(合邦詔書)를 발표하여 대한독립(大韓獨立)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버리니 많은 의병장이 피폐할 대로 피폐한 이 땅을 떠나 만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의 기회를 기다렸으며 양심적 지식인들은 실망하여 삶을 포기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이때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조선왕조가 외척의 세도정치(勢道政治)와 개방망국(開放亡國)에 이르는 역사를 서기 1876년부터 1910년까지 44년간 편년체로 엮어『매천야록(梅泉野錄)』을 편찬하면서 13도민군의 독립전쟁일지를 기록하다가 9월 6일 합방소식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자결하였다.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계가 이미 멸망했도다. 가을 등불에 책을 덮고 옛날 역사 생각하니 세상에 지식인 되기 어렵도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서 13도 민군이 취할 수 있는 길이란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독립전쟁을 계속하는 의로운 투쟁뿐이었기에 호영양남민군의 영도자 석정(石井) 김동식(金東植) 장군은 57세 노장(老將)으로 흰 눈이 내리는 12월까지 일본의 간악한 도적행위를 성토하며 전 국민이 총궐기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다가 의기가 꺾인 장병을 독려하고 실의(失意)에 빠진 인민을 격려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7일 마지막으로 훈시하여 ‘주역’(周易)의 곤복(坤復)의 논리를 설파하고 머리를 바위에 쳐서 장렬하게 자결하여 끝까지 지리산(智異山)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으니 그 훈시는 다음과 같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인간은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 남이 모독하고 나라는 스스로 분란을 일으킨 다음에 남이 침략한다고 하였으니, 이 순간 우리는 이 말씀을 되새겨서 끝까지 우리만은 한국이 멸망했다는 생각을 털끝만치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 끝까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정신만 가지고 있다면 한국은 독립을 되찾을 것인즉 그대들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모르는가!
천지(天地)의 음양운수(陰陽運數)는 돌고 돌아서 소인(小人)의 음기(陰氣)가 극성할 때도 있고 대인(大人)의 양기(陽氣)가 극성할 때도 있는 것인데 소인들의 음산한 세력이 극성할 때에 바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의 양강(陽剛)한 싹이 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므로『주역(周易)』에서 박괘(剝卦)의 다음에 곤괘(坤卦)가 오고 또 곤괘(坤卦)의 다음에 복괘(復卦)가 온다고 설파했으니 사시(四時)의 변화하는 절기로 비유하면 박괘(剝卦)는 9월로서 아래의 다섯 음효(陰爻)가 위에 있는 하나의 양효(陽爻)를 박삭하는 현상이고 곤괘(坤卦)는 10월이니 순음(純陰)의 음기가 득세하는 현상이며 복괘(復卦)는 11월 동지(冬至)달이니 아래에서 일양(一陽)이 발동하여 위로 다섯 음효(陰爻)를 축출하기 시작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박괘(剝卦)에서 소인배들의 세력이 극성한다고 경계하였고 복괘(復卦)에서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보라고 격려하였는데 주자(朱子)는 또 서암도간시(瑞巖道間詩)에서 박곤(剝坤)의 시기에 절의(節義)를 지키라고 노래하였으니 ‘바람이 높고 나뭇잎이 떨어진 늦가을에, 날은 저물어 나뭇가지에 단풍잎도 드물거늘, 오직 푸르고 푸른 골자기 속에 나무가 있어, 세모의 혹한에 마음과 일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구나.’ 라고 하였으며 역시 곤복(坤復)의 시기에 희망을 가지라고 주자(朱子)는 또 강매시(江梅詩)를 노래했으니 ‘큰 눈이 내려 하늘과 땅을 닫았고, 극성한 음기(陰氣)가 아득히 차가운 물가에 퍼졌으니, 그 누가 강남(江南)의 봄소식을 미드리오 만, 이미 명년(明年)의 봄은 시작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진리는 영원히 변함이 없어 장차 천도(天道)가 변하고 인간의 양심(良心)이 되살아난다면 사악(邪惡)한 일본은 반드시 멸망하고 우리 한국이 독립하여 아시아의 아름다운 윤리도덕이 회생할 것임을 확신하여 여러 장병은 항상 자애자중(自愛自重)하며 하소연 할 데도 없는 우리 민족을 보호하고 협동해서 춘추정신(春秋精神)으로 기어코 원수를 갚아 오늘의 치욕을 씻도록 크게 도모하라. 우리의 투쟁사는 하늘이 보고 있고 또 지하에 있는 독립전쟁의 영령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나라를 빼앗긴 겨울 산 속에서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金東植) 장군의 자결은 독립군장병의 비통이고 나라를 잃은 민중의 경악이었다. 장군의 휘하 장병들은 전북의병대장 이석용(李錫庸) 장군과 상의하여 태극기로 관을 덮어서 엄숙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지리산 줄기에 은밀하게 안장하여 호국의 신으로 받들며 독립전쟁의 필승을 맹세하였으니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를 당하여 산림학자양반으로서 분연히 궐기해서 장장 3년 5개월 동안이나 불철주야 무장 항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다가 끝내 장렬하게 순절한 김동식 장군의 기상은 항일독립사상의 극치로써 역사에 길이 빛나는 민족의 얼이라고 할 것이다.
항일 독립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지리산 능선
1907-1910 독립전쟁의 역사적 의의(意義)
19세기말로부터 20세기초에 이르는 서구열강(西歐列强)의 침략정책에 편승한 일본의 군주(君主) 명치(明治)와 군국주의(軍國主義) 세력은 서기 1902년 1월에 체결한 영일공수동맹과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에 고무되어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을사5륵약(乙巳五勒約)과 1907년 7월에 발표한 정미7륵약(丁未七勒約) 및 그 비밀부수각서(秘密附隨覺書)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주권(主權)을 약탈(掠奪)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아시아가 몰락하는 이 때에 우리나라의 최익현(崔益鉉) 의병대장(義兵大將)은 국가신의론(國家信義論)을 주장하면서 대마도(對馬島)에서 아사(餓死)하였으며 일본의 유림(儒林) 서판풍(西坂豊)은 평화공존론(平和共存論)을 주장하고 또 중국의 유림(儒林) 반종례(潘宗禮)는 한(韓).청(淸).일(日)의 3국협력론(三國協力論)을 주장하면서 모두 우리나라에 와서 일본군경의 철수를 호소하며 차례로 보신각(普信閣)에 올라가 투신자결하였다.
동양의 평화를 길이 보장하여 동방예의문화(東方禮義文化)를 수호하려는 우리나라의 산림학자양반(山林學者兩班)은 분연히 궐기하여 해산군인(解散軍人)과 힘을 합쳐 총 30만 의병(義兵)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선포하고 연일연전하니 일본 통감부는 즉각 서당(書堂) 폐쇄령을 발표했다.
10만의 산림학자양반(山林學者兩班)과 110만의 유생(儒生)의 열렬한 지원 아래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장장 3개성상(三個星霜)에 걸쳐 대한독립을 위하여 결사항전 했던 많은 의병(義兵)가운데 가장 혁혁한 공적을 세우며 왜군(倭軍)의 주력부대와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민군 지휘자는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호영양남민군(湖嶺兩南民軍)을 총지휘한 석정(石井) 김동식(金東植) 장군과 13도민군원수부(十三道民軍元首府)의 총대장 이인영(李麟榮), 군사장(軍師長) 허위(許蔿),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 이강년(李康?) 장군이 유명하였다.
서기1905년 을사5륵약을 강제발표한 뒤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5년간 13도에서 우리 민군(民軍)이 항일독립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위대한 투쟁은 우리나라 5,000년 민족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빛나는 항쟁사였고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조직적 무장투쟁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義兵)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관군(官軍)과 합세하면서 명(明)나라의 지원이 있었지만 구한말(舊韓末) 13도민군(十三道民軍)은 관군(官軍)이 이미 강제해산을 당했고 또한 정부도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오히려 민군(民軍)을 적대시했으며 더욱이 외국으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이 없었고 또한 많은 친일파와 일진회원이 들끓은 가운데 오직 유림(儒林)과 민중만의 은밀한 지원과 협조에 의지하여 장구한 투쟁을 계속했던 것이니 납세를 거부하고 토지대장을 불태우며 일본 통감부를 소탕하여 이완용 괴뢰정권을 전복하려고 도모할 뿐만 아니라 미곡 수출을 반대하고 외래상품불매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의 토지 침탈 및 그 지주 경영을 반대하여 일본인 대농장과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 징수원을 처단하고 나아가 일본인 관리는 물론 일진회원과 친일파 관리를 단죄하여 민족의 정기를 높이 선양함으로써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것이다.
불타는 애국심과 정확한 시국인식에 기초하여 반제(反帝) 반침략(反侵略)을 주장하며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여 백전백승하였으니 아직 우리 독립군이 사방에 건재했던 1911년도에 일본군의 통계에 나타난 것을 보아도 13도민군이 일본군과 전투한 연병력이 14만명이 넘고 우리 민군의 토벌 횟수가 3,000여회였으며 일본군이 확인한 우리 민군의 전사자만도 17,779명이라고 밝혔다. 일본군의 피해도 이에 못지않았으므로 이를 보복하려고 일본은 포로가 된 우리 민군의 장수를 모두 내란죄로 얽어 사형시켰으며 그들이 노획한 총 만해도 1만정에 육박한다고 하였으니 당시 양총 1정을 사는데 소 한 마리가 소요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민주, 민권, 민생을 쟁취하기 위하여 민족영웅들이 불타는『춘추(春秋)』정신을 드날려 민족의 역량을 총동원한 독립전쟁으로 재평가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