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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시내 동쪽을 감싸고 있는 낙동강 강둑으로는 일제 때 중앙선 철길이 놓였는데 그 철둑은 법흥동 칠층전탑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그리고 낙동강을 유유히 내다보는 전망 좋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성 이씨 종택과 임청각 군자정은 철길로 인하여 행랑채를 잃어 버렸고 지금도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을 감당하고 있으니 그 열악한 환경에서 나라의 국보와 보물이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법흥동 칠층전탑은 어떤 책에는 신세동 칠층전탑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항상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러다 서수용 편저 <안동의 문화재> (영남사, 1995)를 보니 그것을 지정할 때 윗동네 이름을 잘못 알고 쓴 것으로 법흥동이 맞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자리에 법흥사(法興寺)라는 큰절이 있었지만 조선시대 폐불정책 때 안동부(安東府) 내의 절들을 강제로 철폐시켜 폐사가 되고, 무너뜨리기조차 겁나는 이 거대한 칠층전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치해두었는데 그것이 결국은 오늘날 안동의 한 상징탑이 된 것이다." 이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한번쯤 읽어봤을 법한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창작과비평사, 1997) 86쪽에 나오는 얘기이다. 여기에는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이 "국보로 지정할 때 윗동네 이름을 잘못 알고 쓴 것"이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 역시 이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는 듯하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공식지정명칭을 두고 구태여 '법흥동 칠층전탑'이라고 새로 작명하듯이 고집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이 사실을 꼭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유산답사의 가이드북으로 삼고 있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 북부> (돌베개, 1997)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256쪽)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법흥사가 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고, <영가지>의 지도에도 법흥사와 함께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전탑이 있는 자리와 일치한다. 또 <영가지>에는 절의 규모가 세 칸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현재 있는 곳도 법흥동인데 '신세동 칠층전탑'으로 명명된 것은 1962년에 국보로 지정할 때 옆동네 명칭을 잘못 붙여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이 책들이 갖는 명성과 위세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을 달 필요가 없을 듯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신세동 칠층전탑을 일컬어 잘못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개중에는 차제에 이 석탑의 이름을 '법흥동 칠층전탑'이라고 바로 잡자고 문화재청에다 적극적으로 의견제시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명칭이 바로 '옆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여 그리된 것'이라는 얘기는 믿을만한 것일까? 그 주장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이는 지금의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명칭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지정명칭인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은 지난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의 제정과 더불어 기존의 국보지정문화재를 다시 국보와 보물로 나눠 재지정할 때 확정된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이 전탑의 소재지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었을까? <대한민국 관보> 1962년 12월 29일자(호외)에 고시된 새로운 국보지정목록을 살펴보면, 국보 제16호 안동신세동칠층전탑의 소재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읍 신세동 8번지'로 적혀있다. 분명히 신세동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렇듯 신세동에 있는 전탑을 '신세동전탑'이라고 하였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외형상으로 보면 신세동에 있는 전탑이 신세동전탑이 된 것은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여기에 약간의 행정착오가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1962년에 국보 재지정이 이뤄질 당시에 이곳은 더 이상 '신세동'이 아니고 '법흥동'으로 바뀌어 있었던 까닭이다. 말하자면 국보재지정이 이뤄지면서 주소지도 마땅히 '업데이트'되었어야 하는데, 타성(惰性)에 젖어 그 부분이 세밀하게 이뤄지지 못한 점은 분명 있었다(지금은 안동시청에서도, 문화재청에서도 모두 이 전탑의 소재지를 '안동시 법흥동 8-1번지'로 재확인한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이곳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타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행정상의 오류였다. 더구나 이러한 행정착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법흥동칠층전탑'이 되었어야 할 명칭이 옆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여 '신세동칠층전탑'이 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법흥동은 원래 신세동에 포함된 구역이었으므로, 더구나 문화재명칭을 부여하는 기존의 관행에 비춰보면 '신세동칠층전탑'이라고 부르더라도 큰 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나오겠지만 신세동칠층전탑은 오래 전부터 '신세동'에 있었고, 그러한 까닭에 '신세동전탑'이라는 명칭을 얻은 지는 꽤 오래였다.
처음에는 신세동이었다가 나중에 법흥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면, 문화재명칭도 '신세동칠층전탑'이 아니라 '법흥동칠층전탑'이라고 고쳐주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나, 설령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문화재명칭을 쉽게 고쳐주는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그렇다면 이왕에 말이 난 김에 이곳 신세동칠층전탑의 명칭 및 행정구역변경과 관련한 연혁을 한번 되짚어보기로 하자. 고문헌과 고지도에 이곳 전탑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여럿이고 또 그 시기도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맥락의 유물이라는 의미로 처음 채록된 것은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박사 일행이 1912년에 이곳을 탐방할 때에 남긴 조사보고서와 사진자료가 아닌가 한다. 즉 이들 일행이 강원도와 경북 일대를 대상으로 삼아 고적조사에 나선 것은 1912년 가을이었고, 그 일정에 포함하여 안동지역에 머문 것이 그 해 12월 3일부터 5일까지였다. 이 당시의 조사대상과 유물사진목록은 <대정원년조선고적조사약보고>(1914)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조사내역을 엿볼 수 있다. 여길 보면, 안동일대의 전탑은 물론이고 문묘 대성전, 향교 명륜당, 태사묘, 영호루, 영가루, 관왕묘, 법룡사 철불상 등이 두루 보이는 가운데 "읍동칠중전탑(邑東七重塼塔)"이라고 표기된 유물이 보인다. 이것이 지금의 '안동신세동칠층석탑'이다. 그리고 사진목록에 가서는 "읍동(부내면 용상리) 칠중전탑 (고 약 55척)"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세키노 일행의 일정표에 따르면 이 사진을 촬영한 날짜는 1912년 12월 3일이었다. 이 사진은 우리가 흔히 <조선고적도보>를 통해 익히 구경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을 말하는데, 전탑의 바로 옆으로 몇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 있고 또 전탑의 전면에 군데군데 이가 빠진 듯이 허물어져 내릴 듯한 그러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곳을 "부내면 용상리(府內面 龍上里)"로 적고 있다는 대목이다. 신세동도 아니고 법흥동도 아니고, '용상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었더라면, 혹여 지금의 신세동칠층전탑은 '용상리칠층전탑'으로 명칭이 굳어졌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때의 행정구역조정으로 '용상리'는 사라지고 '칠층전탑'이 자리한 동네의 이름은 '신세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4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경상북도 고시 제67호 '안동군면내동리의 명칭 및 구역'에는 "신세리 잔부(新世里 殘部), 용상리 잔부(龍上里 殘部), 용하리 잔부(龍下里 殘部), 율세리 일부(栗世里 一部)"가 합쳐 "신세동(新世洞)"이 이뤄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신세동'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신세리'가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것과 무관하게 '칠층전탑'은 '용상리'였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신세동'으로 소재지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개념은 곧 1914년 7월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금의 '법흥동'과 같은 명칭은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 지명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법흥동이란 지명은 이곳이 '법흥사(法興寺)'라는 절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적인 근거는 확실하지만 공식적인 행정지명으로 드러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듣자하니 1931년 4월에 안동읍 승격과 더불어 '신세동'이 신세정(新世町)과 영남정(嶺南町)으로 분할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왜색지명을 없애는 과정에서 다시 신세정은 '신세동'으로, 영남정은 '법흥동'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의 변천으로만 본다면, 법흥동의 뿌리는 곧 신세동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점에서 옆동네의 지명을 잘못 붙여 오늘날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착오이자 명백한 오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공표되어 '고적급유물등록대장'을 작성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것으로, 여기에 등록번호 제146호 '안동신세동칠층벽탑'이라는 항목이 들어있었다. '전탑(塼塔)'이라는 표현이 '벽탑(벽塔)'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지만, 어느 것이나 벽돌탑을 의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와 아울러 1916, 17년 경의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조선총독부, 1942)에도 '안동군' 항목에 칠층전탑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여기에 소재지가 '안동읍 신세동 법흥(法興)'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자료가 남아있음도 함께 적어둔다.] 그리고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이 유물의 소재지가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신세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조금 더 세월이 흘러 1934년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처음 보물지정이 이뤄지던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이 당시의 보물지정이 결국 1962년 국보보물재지정과정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34년 8월 27일자로 이뤄진 보물지정내역에서 보물 제76호 '안동신세동칠층벽탑'이라 하고, 소재지가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읍 신세동 8번지 잡종지'라고 한 걸 보면, 국보 지정번호만 달라졌을 뿐 기본적인 사항은 해방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해방 이후에 이곳의 지명이 '신세동'에서 떨어져 나가 '법흥동'으로 바뀐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더구나 1962년의 시점에서 본다면 국보재지정 과정에서 이왕에 그렇게 할 바에는 행정구역변경에 따른 지정명칭까지도 바로 잡아주는 등의 행정적인 배려가 필요했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더라도 오래도록 '신세동칠층전탑'으로 널리 알려진 내력에 비춰보면, 신세동칠층전탑이라는 명칭을 그냥 지니더라도 아주 틀렸다고는 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지금에라도 그러한 이름을 고쳐 행정지명에 맞춰주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문화재의 내력 자체를 인정하여 약간 어긋난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용인해도 무방한 것인지는 좀 더 깊이 고민해볼 여지는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왕에 이름을 바꿀 량이면, 구태여 행정지명을 따라 '안동법흥동칠층전탑'이라는 식으로 바꾸기보다는 이곳의 절터 이름이 '법흥사'였다는 사실이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되고 있는 만큼 그냥 '법흥사지칠층전탑'이라는 식으로 고치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조선건축사론의 저자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건축과 석탑 등에 대한 상당한 실측조사 및 사진자료를 남긴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동경제대 건축과 교수)가 일찍이 <건축잡지> 1934년 7월호에 게재한 "경상북도 안동군 및 영주군에 있어서 신라시대건축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이 전탑을 "폐법흥사칠층전탑"이라고 명칭을 붙인 사례가 엿보인다.) 이 부근에서 '법흥사'라는 명문이 든 와편이라도 수습된다면, 이 작업은 훨씬 더 힘을 얻을 것이나 지금까지 드러난 문헌자료만으로도 '법흥사지칠층전탑'이라고 고친들 큰 하자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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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동답사때 여의치 못해 답사를 못했는데 잘읽고 고개를 끄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