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는 자신이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림에는 항상 이름을 그리스 문자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고 썼다. 그런데도 그는 보통 엘 그레코('그리스인'이라는 뜻)로 알려져 있다.
조국인 크레타 섬은 당시 베네치아 영토였고 자신도 베네치아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는 베네치아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베네치아로 간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세 이후인 1560~66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화실에 들어갔다.
엘 그레코가 이탈리아에서 그린 몇몇 작품은 전적으로 16세기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들은 노인들의 얼굴을 제외하고는(예를 들어 〈소경을 치료하는 그리스도 Christ Healing the Blind〉), 그가 유산으로 이어받은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깊은 공간 속에 인물을 배치하고 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배경건축을 강조하는 기법은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 Christ Cleansing the Temple〉 같은 초기 그림에서 특히 중요성을 띠고 있다.
1577년 봄 처음으로 스페인에 간 엘 그레코는 먼저 마드리드로 갔다가 나중에 톨레도로 옮겼다. 그가 스페인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한 데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42㎞ 떨어진 엘 에스코리알에 산로렌초 수도원을 지으려는 펠리페 2세의 대규모 공사계획을 사전에 알았던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1578년에 외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아이 어머니는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 부인이었다. 헤로니마는 엘 그레코보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그는 헤로니마와 호르헤를 아내와 아들로 인정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 사실은 모든 전기작가들을 당황하게 했다. 엘 그레코가 마지막 유언장을 비롯한 많은 서류에서 헤로니마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크레타 섬이나 이탈리아에서 불행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합법적으로 맞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엘 그레코는 죽을 때까지 톨레도에 살면서, 그 주변지방의 교회나 수도원에서 주문을 받고 바쁘게 일했으며 이름있는 인문주의자와 학자 및 성직자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라오콘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서 받은 첫번째 주문은 톨레도에 있는 산토도밍고엘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중앙 제단과 2개의 측면 제단을 위한 제단화(1577~79)였다. 그가 이만큼 중요하고 규모가 큰 주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베네치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건축양식을 연상시키는 제단 틀의 건축설계도 그가 맡았으며, 중앙 제단에 그린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에서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그의 예술인생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인물들은 앞쪽에 가까이 배치되었고 사도들의 그림에서 색깔은 새로운 광채를 얻었다. 물감을 칠하는 기법과 흰색 강조 부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기법은 여전히 베네치아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조화를 깨뜨릴 만큼 강렬한 색채와 뚜렷한 대조는 분명 엘 그레코 특유의 것이다.
특히 중앙 제단 위쪽에 그린 〈삼위일체 Trinity〉(지금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소장)에는 그가 미켈란젤로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나 있으며 벌거벗은 그리스도의 힘차고 조각한 듯한 육체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측면 제단에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 Resurrection〉에서도 서 있는 군인들의 자세와 잠들어 있는 군인들의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몸의 상체와 하체의 방향이 반대되는 자세)는 그가 미켈란젤로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성동맹 우의화
사람의 모습을 길쭉하게 그리는 엘 그레코의 경향은 이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는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성 세바스티아누스 St. Sebastianus〉가 좋은 본보기이다.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궁정과 맺은 관계는 짧았고 별로 순조롭지 못했다. 〈신성동맹 우의화 Allegory of The Holy League〉(〈펠리페 2세의 꿈 Dream of Philip Ⅱ〉, 1578~79)에 이어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Martyrdom of St. Maurice〉(1580~82)를 그렸는데, 2번째 그림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당장 똑같은 주제로 다른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이 위대한 예술가와 스페인 궁정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필리페2세의 꿈
1590년부터 죽을 때까지 엘 그레코는 놀랄 만큼 많은 작품을 창조했다. 톨레도 지역의 교회와 수녀원에 그린 작품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성가족 Holy Family with the Magdalen〉과 〈성 안나와 성가족 Holy Family with St. Anne〉 등이 있다. 그는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Agony in the Garden〉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렸는데, 여기에서는 이상한 모양과 찬란하고 차가우며 상충하는 색채들이 초자연적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Christ Carrying the Cross)라는 종교적 주제는 그의 11점의 원작과 수많은 모사화에서 다루어졌다.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한 것이 엘 그레코의 후기 작품이 갖는 특징이다.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위해 1612~14년에 그린 〈목자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가 좋은 본보기이다. 양치기와 천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기적을 찬양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는 화려한 색채와 이상야릇한 모습이나 자세는 경탄과 황홀감을 자아낸다.
내용:daum 백과사전
-톨레도의 풍경 |
출처: 여러 생각 원문보기 글쓴이: 머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