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노동자 울리는 민주화운동 보상의 허울 [레이버투데이 2005-08-19 09:45] 광복 60년, 민족화합과 단결을 다짐하고 통일을 기약하는 축제 한마당이 지나간 서울 도심에 조그만 한 무리 노동자들의 간절한 외침이 퍼져가고 있었다.
“빼앗아간 일자리를 돌려 달라.”
“해고자 전원을 복직시켜라.”
아스팔트의 열기가 훅훅 달아오르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뒷문에 자리한 노동자들의 외침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청은 너무도 절절했다.
이들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하다 잔혹하게 짓밟히고 쫒겨난 원풍모방, 동일방직, 한일도루코, 반도상사 노동자들이었다. 이제는 50대 초로의 잔주름이 짙어진 노동자들은 이렇게 지난 8월8일부터 열흘 넘게 농성을 벌여왔다. 여기에는 동아일보에서 해직 당한 기자들과 아직 복직되지 않은 선생님들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이러하였다. 정부와 회사, 한국노총과 섬유노조는 70년대와 80년에 걸친 대량해고와 노동계 정화조치에 대해 사죄하고 해고자를 모두 복직시키고 정부 차원의 불이익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알맹이도 권위도 없는 복직 권고에 코웃음 치는 사용자들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노동자들의 주장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심의위원회 결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2000년 9월부터 명예회복 및 보상을 신청해 2001년초부터 작년 말까지 대부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심의위원회는 명예회복과 함께 복직 및 불이익해소조치를 사용자들에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행정당국의 조처는 극히 미온적이었고 이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2001년 11월에는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124명의 노동자들이 23년 만에 회사로 찾아가 복직을 요구하였다.
올해 들어서도 동일방직, 원풍모방, 한일도루코 노동자들은 각기 회사(원풍모방은 우성모직으로 이름이 바뀌었음)를 찾아가 복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완강하게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심의위원회의 결정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이기 때문에 복직을 시킬 수 없다 … 따지려면 전두환 정권에 따져라”(한일도루코), “회사가 법정관리에 처해 있어 복직을 수용할 수 없다”(우성모직), “27년 전 일은 정당한 합법적 절차를 거쳤고 지금 복직시킬 수 없다”(동일방직)는 것들이 그 이유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30년 가까이 잔혹한 형벌을 감당해온 노동자들은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그간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데 이토록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냉혹하기만 한 것인가?
70년대 나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오로지 민주노조를 만들어 지키고 정당한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아래 자본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똥물을 끼얹어가면서 쫒아냈고 권력기관은 앞을 다투어 이들을 강제연행·투옥·감시·수배·폭행·고문하였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압살한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노동조합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강제로 직장에서 몰아내고 감옥에 쳐넣었으며 급기야는 민주노조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몇몇 노동자들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고통을 당하였다.
거기다가 노동자들은 다른 일자리마저 봉쇄당하여 삶 자체를 위협받으면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블랙리스트라는 저주스러운 사슬 때문이었다. 1978년 섬유노조 위원장이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명단을 전국에 배포함으로써 나타난 블랙리스트는 80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더욱 확대되었다.
기업·노동부·정보기관의 합작으로 1천여명의 노동자 명단을 작성하여 각 사업장과 정부, 정보기관에 비치하여 취업을 차단했던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노동자들에게는 취업거부, 해고, 사직강요, 차별대우, 학대, 전출, 부서이동 등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억압조치가 취해졌다. 노동자들은 '불순한 죄인'의 딱지가 붙여진 채 생존 그 자체마저 30년 가까이 위협 받으면서 참담한 삶을 영위해왔던 것이다.
가진 자, 배운 자에게만 관대한 국가 권력
민주화 시대, 낡은 권위주의가 물러가고 새로운 민초의 시대라고 한다면,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많지 않은 이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먼저 구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자본은 역시 가진 자, 배운 자들에게는 관대하였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잔인하였다.
70년대 이후 해직된 교수님이나 80년 쫓겨난 언론인들은 원직에 복직되었거나 나름대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 전교조 건설투쟁과정에서 해직된 선생님들도 대부분 학교로 돌아왔다. 김대중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도 5·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기름때 묻은 노동자,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노동자들은 법률이 정해준 복직조차도 거부 당한 채 아무런 대응조치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상당히 신장되었다는 지금, 혹시 성급히 지나치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농성 노동자들은 새삼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탄압의 근원은 국가권력, 스스로 한스러운 매듭 풀어주어야
애당초 비극의 근원은 국가권력에 있었다. 70년대 유신독재정권은 국가보위법으로 노동기본권을 박탈하였고 사용자들과 상급노조들은 이를 업고 노동자들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어떤 법률상의 근거도 없이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행정기관들은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해고·고소·고발하면 강제연행·구속·수배·감시하거나 사용자 위주의 판정 해석을 통해 탄압조치들을 합법화하였던 것이다.
이치가 이렇다면 민주화 보상조치는 원칙적으로 정부가 하도록 법을 바꾸어야 한다. 사용자에게는 권고가 아니라 불이익해소조치를 구체적으로 즉각 취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명예회복과 보상이란 치욕스러운 누명을 벗겨내고 원상을 회복시키며 실질의 배상을 해주는데 그 의미가 있다. 회사가 없어졌다고 해서, 회사가 바뀌었다고 해서, 경영이 어렵다고 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노동자들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도록 방치한다면 이미 그 법은 민주화를 가장한 겉치례이거나 기만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국가권력을 남용해 국민의 인권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한 범죄, 그리고 이로 인해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법률을 새로 만들어서라도 배상과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고 “더는 국가권력을 남용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놓고 나 몰라라 하고 심지어는 큰 소리까지 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또한 "우선 피해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여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과, 배상 또는 보상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국가는 앞장서서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고 배상이나 보상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대통령의 언급이 참된 것이 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민주화보상법에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권리가 곧바로 실현되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강제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70년대 이래 불행에 짓눌린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거두어 주고 절절히 맺힌 그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원보 leewb@kls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