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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2승2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방어율 0.73의 '짠물 투구'로 상대 타선을 제압하고 있다.
7경기에 등판해 실점은 딱 1점. 지난달 28일 현대전에서 심정수에게 맞은 홈런 한 방이다.
그 나머지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막아냈다. LG의 성적이 하위(7위)에 처져 있어 마무리 기회가 드문 것이 아쉽지만,
이상훈으로서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1백% 소화하고 있다.
요즘은 상대팀에서도 경기 후반 LG가 앞서면 LG 쪽 불펜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이상훈의 등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만큼 이상훈에게 쏠리는 무게가 커졌다. 이상훈은 최근 LG가 거둔 2승에서 각각 구원승과 세이브를 올리며 팀을 지켰다.
두 경기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마운드 잠실에서였다.
지난 30일 현대전에서 5-5로 맞선 8회 초 1사 2루에 마운드에 오른 이상훈은 1과 3분의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뒤 9회 말 터진 조인성의 끝내기 안타에 힘입어 구원승을 거뒀다. 또 지난 2일에는 서울 라이벌 두산을 상대로 3-2로 앞선 9회 초 마운드에 올라 팀의 '살얼음 리드'를 지켜내 세이브를 올렸다.
마지막 타자 유재웅을 삼진으로 처리하는 순간, 그는 마운드에서 주먹을 불끈 쥔 뒤 허리를 굽혀 땅을 향해 주먹질하는 특유의
'끝내기 세리모니'를 펼쳤고 관중은 기립박수로 그를 축하했다. 잠실에 돌아온 이상훈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 2002년 6월 5일 중앙일보 이태일 기자 -
(3편에 이어)
그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왔고, 그 가운데 LG도 있었다.
어차피 미국을 떠나면 다시 한국, 그것도 LG로 돌아가려던 차였기에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귀국길에 올랐다.
2002년 4월 16일 인천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은
‘돌아온 야생마’ 이상훈
2002년도 시즌 초반 7위를 달리는 등 전망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당신이 복귀한 5월 중순 이후 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한국 땅을 밟은 게 4월 중순이었다.
복귀 전까지 몸을 만들면서 머릿속엔 온통 ‘내가 팀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란 생각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2002년 시즌 초반만 해도 팀 성적이 원체 나쁘다 보니까 팬들은 김성근 감독님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붙이게
일쑤였고,구단 직원들은 그걸 떼기 바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지 아나.
뭔가?
야구를 아주 죽도록 해야 한다는 거였다(웃음). 사실 그해 LG 파란을 이끈 주인공들은 나 개인이 아닌 팀의 선참들이었다.
나를 포함해 최동수, 김정민, 장재중, 류택현, 유지현, 최향남, 성영재, 서용빈 등 선참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야구에서 선참과 베테랑만큼 중요한 존재도 없다.
신인선수가 제아무리 미친 듯 맹활약을 펼쳐도 팀원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FA(자유계약선수)와 외국인선수를 데려와도
성공할 확률은 잘해야 반반이다. 결국, 야구는 기존 선수들이 하는 거다. 구단에서 한 시즌이 끝나고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모두 바꾸겠다.’는 발표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팀에 필요한 건 팀을 통째로 바꾸겠다는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다.
조금만 못하면 감독을 자르고,베테랑은 무시한 채 말로만 ‘바꾸겠다’고 하면 뭐가 바뀌나.
2002년 LG의 돌풍에는 당시 사령탑이었던 김성근(현 SK) 감독의 지도력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김성근 감독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다. 어떤 이에 대한 평가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만 말한다면 그분의 야구야말로 ‘자율’이라는 것이다. (뭔가 생각난 듯) 그래, ‘관리 속의 자율’이란 말이 좋겠다.
김 감독님을 보면 흔히 선수들을 다그치고 본인 방식대로 하길 바라는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자율야구’를 이끌려는 방법이다.
나중에 그런 식으로 혹독하게 배운 선수들을 잘 보면 특징이 있다.
뭐냐고? 김 감독님이 팀을 떠나고 나서도 김 감독님이 계셨을 때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하고 땀 흘린다는 거다. 뭐랄까. 자기만의 규율이 확립됐다고 할까.
(고개를 끄덕이며) 어쩌면 SK 선수들은 김 감독님의 방식에 힘들어하면서도 그걸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SK 선수들이 김 감독의 방식을 즐긴다라.
만약 SK 선수들이 김 감독님의 방식에 반감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 같다. 믿음이다.
믿음. ‘저분의 말을 믿고 따르면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선수단 사이에서 흐르고 있기에 가능한 모습들이라
생각한다.
-헝그리한 감동을 안겨준 2002년 '미라클 LG'
2002년 ‘미라클 LG’를 이끈 김성근 감독. 그해 준우승을
하고도 경질됐다.
거뒀다. 이어 열린 플레이오프에서도 KIA와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행을 결정지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랄 수 있는 당시 LG의 분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내가 LG에 있으면서 감동을 한 적이 두 번이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던 1994년과 한국시리즈에 오른 2002년이다.
1994년의 감동을 언론에선 ‘신바람 야구’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2002년의 감동은 무엇일까.
난 개인적으로 ‘헝그리한 감동’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헝그리한 감동?
그해 LG 전력만 본다면 그냥 그렇게 끝날 팀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라운드에서 진심을 보여줬다.
(한참 침묵하다가) 참…. 당시 경기 끝나고 선수들의 벗은 몸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누구 한 명 온몸에 테이핑하지 않은 선수가 없었고, 치료를 받지 않는 멀쩡한 선수가 없었으니까.
2002년 한국시리즈 대구 원정에서 1승1패를 거둔 LG는 잠실 홈 3, 4차전에서 연패를 당하고 5차전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2승3패로 회생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그때가 눈에 선하다. 그해 부산아시아경기대회로 말미암아 포스트 시즌이 예년에 비해 한 달 정도 늦게 시작됐다.
준플레이오프 때부터 얼마나 춥던지….
프로야구 연감에 형광펜 색인이 새겨질 운명의 6차전. LG와 삼성 양팀은 1회 초부터 손에 땀을 쥘 만큼 명승부를
펼쳐나갔다.역전과 동점, 재역전을 반복하던 이날 경기에서 LG가 8회가 2점을 득점하면서 9회 삼성 공격까지 3점차로 앞서고 있어 7차전까지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9회 내가 (이)승엽이한테 동점 홈런을 맞지 않았나.
기억하기 싫다면 넘어가자.
(손을 흔들며) 괜찮다. 그것도 야구사의 한 부분이다.
당시 상황을 복기할 수 있을까.
9회를 보자. 첫 타자 김재걸에게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맞았다. 다음 타자 강동우는 삼진. 문제는 텔슨 브리또였다.
투스트라이크 쓰리볼에서 몸쪽 공을 ‘팍’ 던졌는데. (허탈한 표정으로) 스트라이크인 줄 알았더니 볼로 판정됐다.
2사 2루와 1사 1, 2루는 하늘과 땅 차이다.
스트라이크 판정이야 내 핑계일 뿐이고. 어쨌거나 다음 타자 (이)승엽이를 병살로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승엽이도 그걸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타석 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이승엽은 20타수 2안타 빈타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신에게 철저히 봉쇄돼 있었다.
그게 야구다. 100번 상대해 99번을 삼진으로 잡아도 1타석에서 홈런을 맞으면 지고 마는.
99타수 무안타에서도 100타수째 홈런이 나올 수 있는. 승엽이를 달리 대타자라고 하는 게 아니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야구는 분위기 싸움이다. 브리또 타석 때 볼 판정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우리 쪽에서 삼성으로 넘어갔다.
(혼잣말로) 그래, 준플레이오프 때부터 너무 무리했는지 몰라. 다들 정신은 살아있는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았으니….
한국시리즈에서 2승4패로 삼성에 패했지만, 그해 LG를 패배자라고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준우승 감독이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부터 LG의 모순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 선발 20승과 37세이브를 달성한 사내
브리또의 타석 때 결정구로 몸쪽 공을 던지지만 심판의
손은 오르지 않았다.
있지만,되레 그것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많았다. 그게 뭐냐? 머릴 기르는 만큼 내 몸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땀 한 방울이라도 더 흘렸다는 것이다.
1993, 1994년 18승과 20승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다. 1997, 2003년엔 각각 37, 30세이브를 기록하며
세이브 왕이 됐다. 그러나 야구연감 개인수상 부문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기란 힘이 든다.
현역 11년간 당신이 받은 상이라곤 1995년 골든글러브가 전부다.
이를 두고 언론과의 불협화음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음, 지금껏 수많은 기자를 만났다. 그 가운데 절대다수는 기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훌륭한 기자분들이었다.
1993년 LG에 입단할 때나, 일본과 미국에서 뛸 때, 한국에서 운동할 때 날 도와주고 위로해준 건 다름 아닌 기자분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100% 나와 잘 맞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사람이 살다 보면 다소의 마찰과 오해도 있을 수 있고.
그러나 그런 마찰과 오해로 당신의 이미지가 왜곡된 부분도 없지 않다.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야구인기가 굉장히 높았다. 당연히 야구기자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지금도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신인 때였다. 시범경기에 출전했는데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신인 땐 다 그런 게 아닌가.
그렇긴 하지. 잘 들어봐라. 주자 만루 상황이었을 거다. ‘딱’ 던졌는데 중견수 앞 안타를 맞았다.
홈플레이트 뒤로 백업플레이를 갔다가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배트를 보니까 신기하게 반쯤 부러진 상태였다.
대개 배트가 부러질 땐 금이 가거나 두 동강이 나지 않나.
그런데 그 배트는 정확히 반만 부러져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배트를 들어서 보곤 바로 내려놨다.
마침 배트걸이 뛰어와 배트를 가져갔고.
(입맛을 다시며) 허허,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무슨?
경기가 끝나고 구단 관계자가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 형편없이 던졌는데 무슨 인터뷰에요”하고 웃으면서 거절하려 했더니
“스타는 맞아도 해야 하고, 안 맞아도 해야 한다”면서 나를 끌고 구장 한편으로 가셨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잘했을 때만 인터뷰하면 그게 선수를 위한 인터뷰지, 팬을 위한 인터뷰겠는가.
이상훈은 여린 사람이다. 강하지만 여린, 그것이 그다
하지 뭔가.영문을 몰라 “네?” 했더니 “아니 오늘 왜 그랬냐고” 짜증을 내지 않나. 그때 나도 모르게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이오”하고 되받아치고
말았다. 아무리 내가 신인이어도 보자마자 반말하고 그렇게 무례하게 묻는 건 아니지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거기선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팀 미팅 때였다. 당시 어느 코치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날 보면서
“이상훈, 조심해” 하며 “선참들은 후배 교육 똑바로 시켜”하고 말씀하셨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알고 보니 그날 신문 한 면에 ‘이상훈 계약금은 최고, 매너는 빵점’이란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인즉슨 ‘이상훈이 부러진 배트를 한쪽으로 치웠어야 했는데 그냥 들었다 내팽개쳤다’는 것이었다.그 기자분이
“앞으로 이상훈에 대한 기사를 3번 더 낼 테니 각오하라”고 구단 관계자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어찌나 그 이야기를 듣고서 열이 나던지.
4년간의 외국무대를 정리하고 2002년 LG에 재입단한
이상훈이 고 유성민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지. 어쨌든 지금껏 수상한 것이라곤 1995년 골든글러브와 한 스포츠전문지에서 수여한 최우수선수상이
전부다. 아, 1995년에 포토제닉상을 빠트렸다.
포토제닉상이라, 휴우-.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난 야구를 하면서 정말 단 한 번도 상이나 기록에 연연한 적이 없다.
(환하게 웃으며) 언론과의 소원한 관계 때문에 얻은 것도 있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때 정확하게 순서를 밟는다든가
기자분들이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는 등 긍정적인 점도 많았다.
- 그라운드의 야생마, 벼랑 끝을 향해 달리다
그리고 빈자리를 이순철 신임감독이 채웠다.
주변에서 “이순철 코치님이 감독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땐 ‘아, 그런가 보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순철 감독님이 사령탑에 오르면서 몇몇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어떤 기사였나.
‘이순철 감독, FA 진필중을 영입하고 싶다.’ ‘진필중 영입 시 더블스토퍼로 가겠다.’
더블스토퍼라.
그때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런 기사가 나갔을 때 이 감독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속으로 ‘신임감독으로서
시즌 구상을 하시는 모양이다’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설령 감독님이 내게 “상훈아, (진)필중이랑 더블스토퍼로 가자”고
하셨어도 내 대답은 하나였을 거다.
“네. 알았습니다. 감독님”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 1면에 이런 기사가 떴다.
어떤?
‘이순철 감독, 이병규에게 주장을 맡기고 싶다.
’ 내용인즉슨 ‘이상훈은 너무 엄해서 선수들이 어려워하니 이병규를 주장으로 올려 팀을 이끌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음.
여기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신문에 또 나와 관련된 기사가 떴다. ‘이순철 감독, 이상훈 군기 잡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이 감독과 껄끄러운 관계였나.
이전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감독님이 되셨을 때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하며)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일련의 기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딱’ 한번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대개 시즌이 끝나면 선수들은 구단 트레이너와 어떻게 몸을 만들 지에 관해 상담한다.
2003시즌이 끝나고 내가 웃으면서 트레이너 형에게 “형, 난 스케줄 주지 마요. 제가 언제까지 어떻게 몸을 만들어 올 테니까”
하고 말했다.그랬더니 트레이너 형이 “알았어. 알았어”하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베테랑은 자기가 알아서 개인 훈련하는 거다.
야구로 밥 먹고 사는데 그 정도도 못해서야 되나. 아, 그랬는데.
그랬는데?
개인훈련을 하고 있을 무렵. 모 코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뜸 “상훈아, 감독님이 ‘왜 이상훈만 운동 안 하느냐’고 물으시더라”라고 했다.
뭐라고 했나.
“코치님. 저 모르세요? 제가 지금 놉니까. 저 지금 개인훈련 중입니다. 안 믿기시면 트레이너에게 물어보십시오.”
코치님도 중간에서 난감한지 “네 말은 잘 알았는데…”하면서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짧게 숨을 토하고서) 선수가 감독님 말을 거역할 순 없지 않나. 코치님께 그랬다. “알았습니다. 단체훈련 나가겠습니다.”
이순철 전 LG 감독이 선수들의 플레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장면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신문에 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기사가 나온 걸 접하게 됐습니다.
만약 감독님께서 신문에 나온 데로 필요 없다거나 혹여 팀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신다면 절 트레이드 하셔도 좋습니다. 진심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 감독이 뭐라고 말하던가.
“넌 트레이드하기도 힘들더라.”
음.
물론 내 감정 수위를 조절해주시려고 하신 말씀이란 건 안다.
실제로 감독님께서 “상훈아, 왜 그렇게 기사에 민감하냐. 그건 기사일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언제 어디서 보자”며 만나자는 뜻을 밝히셨다.
이 감독과 만났나.
팀 미팅 후에 뵙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질 않았다. 1시간 30분인가를 기다렸지만, 감독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바쁘셨을 거로 생각하지만, 당시엔 무척 낙담할 수밖에.
일전 인터뷰에서 이 감독은 “기타가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도 하겠다.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 모 코치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정이 이만저만하니 기타를 가져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이즈음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걸 바로 잡고 싶다.
뭔가?
2003년 LG 팬북을 보라. 내 페이지 두 장 가운데 첫 페이지 사진이 기타 치면서 공연하는 장면이다.
(뭔가를 생각해낸 듯) 1993년 LG에 입단하고 일본 구시가와로 스프링캠프를 떠났다. 구시가와에서 우릴 위해 환영식을 열었는데 그때 내가 구단 대표로 장기자랑을 했다. 장기가 뭐였냐고? 뭐긴 뭔가.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거지(웃음).
스프링캠프 갈 때면 항상 기타를 들고 갔다.
숙소 옥상에서 선수들과 함께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게 우리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렇다고 온종일 칠 것 같나. 아니다.
어떨 때는 기타만 가져가고 손도 못 댈 때도 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치지도 않을 기타는 왜 가져갔느냐”고.
치지도 않을 기타는 왜 가져가서 사단을 일으켰느냐….
SK로 트레이드 되고 나서 지금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는 (이)병규가 그랬다.
“형, 전 형이 트레이드 돼서 정말 속상합니다. 그것도 기타 때문에 트레이드 되신 것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한창 기타로 시끄러울 때 왜 ‘기타는 내 영혼’이라고 하셨어요?”라고. 그땐 아무 이야기도 안 했다.
대학 다닐 때 정말 가난하고 힘들었다.
일주일 생활비가 5천 원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눈을 가늘게 뜨며) 레스토랑에서 숙식하며 일한 적이 있었다.
주방에 딸린 작은 방에서 밤이면 백열등 하나 켜고 한 일이 뭔지 아나.
기타 연주다. 왜? 외로웠으니까. 죽고 싶도록 외롭고 또 외로웠으니까. 그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온 거다.
치지도 않을 기타로 왜 사단을 일으켰느냐고? 기타는 그냥 내 옆에만 있어도 든든한 오래된 내 친구니까.
내 마음속 버팀목이니까.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을 다 이야기해봤자 뭐 하겠나. 그런다고 누가 이해나 하겠나.
결국, 어떻게 했나.
코치님께 그런 말을 했다. “좋습니다. 코치님. 기타를 가져가지 않는다고 칩시다.
그럼 다음엔 머리를 자르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 달에서 한 달 반 동안 신문 1면을 내 이름으로 채우고 나니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나 때문에 우리 순둥이 같은 후배들이 다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LG 팬들은 이상훈이 팀을 떠난 뒤에도 그를 그리워했다.
이상훈을 곡해하지 않고 진정만을 받아들인 유일한 이들이다.
약속장소에 갔더니 술이 떡이 돼서 나타나셨다. 둘이 소주를 마시는데 형의 한마디에 울컥하고 말았다.
뭐라고?
“상훈아, 난 너와 한 팀에서 오래 있고 싶다.” 그 길로 이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독님, 저 이상훈입니다.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트레이드가 되든 그렇지 않든
오해는 정말 풀고 싶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감독님께서도 “그래. 알았다.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연락이 왔나?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전화가…전화가 없었다. 내가 트레이드 될 것이라는 기사만 계속 나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감에 내일 트레이드가 될 것 같았다. 이 감독님께 계속 전화를 드렸지만…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구단 관계자로부터 “이상훈 선수. SK로 트레이드 됐습니다”하는 전화가 왔다.
SK로 트레이드 되고서 가타부타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 감독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인터뷰를 본 적도 없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 감독님은 감독 이전에 내겐 야구선배다. 그리고 무엇보다 LG의 감독님이셨다.
늘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내가 맞춰볼까? 이 감독님이 어째서 날 트레이드 시켰느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이냐. 그거 아닌가.
맞다.
분명한 건 이 감독님이 주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연이 아니었다면.
배후가 따로 있지 않았을까. 배후가. 난 지금도 이 감독님이 주도해 나를 트레이드 시키고 팀을 개편했다고 믿지 않는다.
아, 여기서 꼭 말해둘 게 있다. 나와 관련된 이 감독의 행동이나 말씀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감독님도 감독님의 생각이 있으시고 그건 나한테 아무리 불리하게 전개돼도 존중받아야 한다.
‘누가 잘했다, 못했다’로 접근할 문제도 아니고 이 감독님이 비난받을 일도 아니란 뜻이다.
- 삼손의 후회
SK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 치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이처럼 그는 스스로를 어색해했다
하지만, 난 팬들께 최상의 활약을 보일 수 없는 상태였다.
부진 때문이라면 글쎄. 시즌 초 다소 부진하긴 했지만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삼성과의 문학 3연전에서 2경기
연속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페이스를 끌어올린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5월 25일 2군에 내려갔다.
2군에 내려간 건 내가 “은퇴를 하겠다”고 말하자 구단 측에서 “일단 쉬라”는 뜻에서 행한 배려였다. 그해 기록을 찾아봐라.
18경기에 출전한 가운데 5경기인가가 LG전이었을 거다. 한 경기를 빼놓고 실점을 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을 트레이드한 친정 팀에 대한 설욕을 말하려는 건가.
아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LG 타자들에게 공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러고도 프로선수라 할 수 있는지, 이게 팬을 기만하는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란 생각을 많이 했다.
2군에 내려간 뒤 은퇴 결심을 굳혔다.
당시 SK 조범현(현 KIA) 감독과 프런트가 온갖 노력을 다해 당신의 은퇴 결심을 되돌리려 했다.
6월 2일 광주 백암사에서 조 감독님을 뵙자. 조 감독님이 그러셨다. “상훈아, 차라리 나와 함께 그만두자!”라고.
그래도 당신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음, 난 야구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하지만, LG에서 은퇴하지 못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후회다.
나를 받아준 SK엔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감사하고 미안하지만 난…그게 진심이다.
(눈을 감으며) 지금쯤 LG에서 뛰었으면 (우)규민이 앞에서 (류)택현이와 중간계투에서 열심히 뛰고 있을 텐데….
- 난 ‘전(前) LG 직원 이상훈’
'WHAT'의 리더 이상훈
‘선수를 다시 해보라.’ ‘해설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은퇴하자마자 ‘WHAT’ 활동을 한 건 공연히 나 때문에 야구계가 혼란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꾸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SK와 조 감독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때 야구계와는 담을 쌓고 사는 이처럼 비치기도 했다.
내가? 그런 오해들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 봐라. LG 선수들은 글러브를 끼고 야구를 하겠지만 난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며 이렇게 야구를 보고 있지 않나(웃음).
일전 지인의 사회인야구팀 연습하는 곳에 찾아가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다(웃음).
아마 내가 은퇴 후 지도자가 되지 않아 그렇게들 생각하시는 것 같다. 현재 모 스포츠전문지에서 인터뷰어로 활동하며 얼마 전엔
LG 김재박 감독님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만약 날 원한다면 초, 중, 고, 대학, 프로도 상관없다. 내가 정말 도움이 된다면 정식 코치는 아니고 인스트럭터로 내가 받은 만큼 야구를 위해 뭔가를 돌려주고 싶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상훈은 항상 마운드에 올랐다.
그러나 11년의 선수생활은 너무 짧았다
돕기 위한 ‘2008 LG 러브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날 행사의 백미는 LG가 우승했던 1990년과 1994년 멤버들이 모여
친선경기를 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상훈, 정삼흠, 이병훤, 김태원, 이광은, 김선진 등 추억의 LG 스타들이 죄다 빠져 있었다. 특히나 당신이 빠져 많은 팬이 아쉬워했다. 어째서 거절한 건가.
거절? 무슨 소리! 내겐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올 시즌 잠실 개막전에서도 당신이 시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LG 관계자의 말이 전해졌지만 끝내 무산됐다.
이건 어떻게 된 건가.
내가 시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답답한 듯 물을 마시며) 어떤 구단 관계자로부터 시구와 관련된 전화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어느 프런트와 대화 한번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시구를 검토했다니.
미안한 소리 하나 하겠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당신의 뷰티샵 입구에
LG 사인구를 전시하고, 말끝마다 ‘LG, LG '하는 건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게 뭔지 아나?
(단호한 표정으로) 난 정말 모르겠다.
첫째 이유는 내가 LG 팬이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은 LG 팬이다. 난 LG에서 이름을 알렸고 LG 팬들의 사랑을 먹고 컸다.
아직도 내 이름 석 자를 기록해주시는 것도 LG 팬들이다.
내가 그동안 시즌 중에 LG와 관계된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 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팀이 부진하면 할수록 팬들은 옛날 선수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직에 있는 선수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두 번째 이유는 뭔가.
일전 갑자기 114로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안내하시는 분께 “LG 회장님 실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LG 구본무 회장실 말인가.
(천천히 고갤 끄덕이며) 114에서 회장실은 아니고 비서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래 수화기를 들고 비서실로 전활 걸었다.
그쪽에서 받자마자 “전 예전 LG 트윈스에서 투수로 뛰던 이상훈이란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 잘 계신지 안부전화 한번 드려봤습니다.”하고 말했다.
그쪽에서 “아, 그러세요”하면서 “지금은 통화하실 수가 없습니다만 꼭 전화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정중히 답변해줬다.
그 후 전화가 왔나.
LG 회장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나 같은 은퇴선수에게 전화할 여유가 있으시겠나. 대신 비서실에서 전화가 와 “연락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의 메시지를 전달해줬다. 사실 내가 회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서 전활 걸었겠나. 예전 LG에서 뛸 때 정말 선수들에게 잘해주셨던 기억이 나서, 2군 선수들의 이름도 죄다 외우시던 그분의 야구 사랑이 기억나서, 그래서 전활 드렸을 뿐이었다.
(혼잣말로) 나도…한때는 LG의 전(前) 직원이었으니까.
1995년 선발 20승을 달성했을 시절의 이상훈. 다시 그가
잠실 마운드에서 환하게 웃을 날을, 팬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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