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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7. 土 曇, 雨 上海, 杭州
오늘부터 일주일간의 黃山과 武夷山 여행이 시작된다. 일찌감치 출발시간 2시간 반 전인 오전10시 반에 인천공항에 12명의 동행이 반갑게 모였다. 권중연, 이상설, 이문형, 백상목, 남해붕, 윤태식, 서진, 정순환과 한홍섭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 京畿 동기들, 서로 스스럼없는 친구들끼리라 밝은 기분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우리나라 발전의 모습을 보고 새삼스럽게 감격을 했는데 두 시간도 안 되어 날아와 상해 浦東空港에 내려 대기하고 있던 導遊 尹승걸씨의 안내로 3시간 걸려 버스로 고속도로를 쾌속으로 달려서 杭州에 도착하면서 그동안의 중국의 발전에도 많이 놀랐다. 13억 중국인이 이런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지속하면서 惹起될 에너지 環境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西歐式 발전모델을 따라간다면 地球가 몸살이 날텐데 중국인들이여 자제해주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 시간 동안 버스여행을 하면서 윤승걸 씨는 거의 쉬지 않고 上海와 浙江省의 歷史와 제반사항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高速成長에 따라 人民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向上은 했지만 이에 부수되는 不動産, 貧富隔差 등의 문제는 중국에서도 例外는 아니다. 機上서 읽은 신문에는 官吏들의 부패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杭州는 春秋戰國時代의 越나라땅이고 宋朝의 수도이기도 했던 유서깊은 곳이고 西湖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관광객이 많이 모여두는 곳으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人口가 요즈음 특히 부쩍 늘어 육백오십만이나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옛날 보던 중국대도시의 궁기가 별로 보이지 않고 잘 짜여진 市街에 즐비한 고층건물들이 印象的이다. 오후 5시 좀 지나 杭州에 도착했는데 서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길이 많이 맥힌다. 저녁 먹으러 가는 식당에 가는데도 市內를 한 30분은 돌은 것 같다. 이 동네 음식이 맛있었는지 먼 길 와서 시장했던지 미리 준비되었던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서울서 가져온 소주와 이 동네 맥주와 “소맥” 칵테일해서 마시는 것도 피로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식후에 宋城歌舞쇼를 관람했다. 張藝謀 감독의 제작비 百億, 등장인물 3백명의 超豪華가무쇼인데 중국의 傳統문화와 곡예 그리고 신기술이 적절히 조화된 秀作으로 보였다. 宋朝의 榮華, 岳飛 장군의 전쟁, 이 지역의 傳說 등이 영상과 가무로 나타나는데 어찌나 우리 관광객이 많은지 모든 안내와 영상물에 어김없이 中, 英, 韓, 日 四個國語가 나온다. 아리랑 가무쇼 프로그램이 참 아름다워 반가웠다.
음악과 의상도 중국 것이 기본이지만 주변국가 소수민족, 서양, 서역의 색깔도 섞인 것이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어 있었다. 무희들도 아름다워 중국역사의 四代美人 가운데도 으뜸이었다는 西施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을 뇌리에 떠오르게 했다. 막이 내릴 때 보여주는 자막(給我一天還爾千年)이 적어도 이 한 때는 천년 세월 앞에 이 한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 모두가 뜨뜻하게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宿所인 新西萊大酒店까지 가는데 고만고만한 市街를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왔다. 모두 지루해하며 졸고 있는데 이렇게 답답할 때는 늘 특유의 익살로 좌중의 분위기를 만드는 이상설 군이
이거 간 데를 한 시간 동안 뱅뱅 도는 거 아니야?"
하며 큰소리를 내어 모두 한바탕 웃음으로 하루의 피로를 날렸다.
2009. 3. 8. 日 晴 杭 州
稀壽를 바라보는 나이들이지만 동기들끼리의 여행은 중국안의 이런 저런 불편까지도 모두 웃을 거리가 되고 서로 늙어가는 데는 보이지 않고 내내 학창 때 기분으로 즐기며 지낼 수 있어 참 좋다.
호텔직원이 아침 6시 Morning Call을 깜박해서 윤승걸 씨에게 야단을 맞았지만 누가 깨우지 않아도 그 시간에는 벌써 기상할 나이의 우리다. 아침식사 하는 일이 이번 여행의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중국인들이 경제발전에 따라 여행을 많이 해서 국내 관광단이 식당을 새벽부터 밀물같이 밀려드는데 마치 굶주린 군대의 침공 같다. 지척의 친구들과 얘기 나누기 힘들 정도로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지고 접시에 뭘 담으려면 좌우에서 손이 삐쳐 들어오고 밀어제치고 마치 전쟁터에 온 것 같다. 손에 잡히는 것이면 재빨리 접시에 채워 배를 채우는 일로 朝食을 때워야 했다.
食後에 버스로 西湖에 가서 城皇廟 관람을 한 다음 한 30분 동안 遊覽船을 탔다. 城皇廟는 宋朝 周信王이 세운 것인데 왕의 실수로 참수한 한 관리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 관리가 징수한 세액이 너무 적어 횡령한 것으로 오해를 해 사형을 집행했는데 그 후에 왕의 꿈에 죽은 관리가 자꾸 나타나서 더 자세히 알아보았더니 관리가 백성을 위해 면세를 해준 善行이 알려진 것이다.
5층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杭州와 西湖의 전경이 시원히 내려다보인다. 대부분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크기만 했지 별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수목과 풍광 사이 여러 구조물이 잘 어울리게 들어서 있어 잠시나마 좋은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날씨는 아직 쌀쌀한 편인데 동백꽃은 지기 시작하고 벌써 매화꽃이 봉오리를 터뜨려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이어서 淸河坊 옛 거리를 한 시간 가까이 거닐었다. 여느 관광 거리와 마찬가지로 토속기념품과 음식점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는데 중국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 많아 돌아다니기 지루하지는 않았다. 한홍섭 군이 사준 武大郞炊餅을 맛보았는데 납작한 月餠 맛이 괜찮았다. 미인 潘金蓮과 남편 武大 사이의 얘기가 중학교 때 읽은 水湖志에 나온다는 것을 내가 까맣게 잊은 것을 한 군이 크게 놀라워했다. “호기가 그 얘기를 모르다니...” 하며 친구들에게 자랑도 해주었다. 관광시장바닥이지만 자그만 물건 하나 음식 하나에도 많은 얘기가 숨어있을 것이다.
이어서 蘇東坡가 지었다는 蘇堤에서 유람선을 타고 서호 유람을 반시간쯤 했다.
그토록 많이 서호 경관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어와 기대감이 컸던지 큰 감탄사는 많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배안에서 친구들이 가져온 각종 酒類가 흥취를 북돋아 친구들과 흥겨운 뱃놀이를 할 수 있었다. 서호하면 蘇東坡를 연상하게 되는데 이제는 사람들 너무 많고 느긋하게 지내고 갈 시간 없으니 그런 시감이 쉽게 떠오를 사이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유람 후에 호숫가 공원을 거니는 것도 참 좋았지만 꼭 일행을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자연을 마음껏 즐기는 데에 제약이 된다. 오늘은 단장격인 이문형 군이 무리에서 벗어나 한동안 헤매며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다. 그 과정이 내내 화제가 되어 모두 많이 많이 웃게 해주었으니 이군은 단장답게 모든 단원에게 톡톡히 서비스를 해준 셈이 되었다.
점심은 한식으로 했는데 量이 푸짐해서 黃山까지 오는 세 시간의 버스 여행 전에 흐뭇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 좋았다. 어제 저녁 중국집에는 양이 적었고 오늘 朝食도 정신없이 먹은지라 우리 음식 맛보다도 양이 더 반가웠다.
황산으로 옮겨오면서 여행안내가 許영택씨로 바뀌었다. 연변출신의 조선족으로 서글서글한 30대 젊은이다. 허씨는 황산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우리에게 쉬도록 일찍 안내를 마쳤다. 과연 거의 모두가 눈감고 쉬는 모습을 보였다. 고속도로가 2년 반 전에 건설되었는데 그전에 6시간 이상 걸리던 것이 이제는 3시간 안에 항주서 황산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屯溪老街에서 30분쯤 왔다갔다 구경한 후 宿所인 黃山 國脉大酒店에 旅裝을 풀고 한 40분 쉬다가 식당에 한 10분 걸려 버스타고 가서 중국식으로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도 가져온 양주, 소주와 이 동네 黃山白酒를 사서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일찍 호텔에 돌아왔지만 다시 외출하지 않고 씻고 읽고 일기 쓰고 TV 시청을 하면서 취침시간을 기다린다.
2009. 3. 9. 月 晴 黃 山
黃山市도 人口가 150万이나 된다는데 杭州에서 하루 지내고 와서인지 한적한 기분이 든다. 마침 식사도 어제와 같은 전쟁 없이 차분하게 잘 먹을 수가 있었다.
黃山風景區로 이동하기 전에 보석가게에 들려야했다. 쇼핑하는 것은 일행 모두가 질색인데 관광사에서는 몇 번 일정에 꼭 넣어야한다니 할 수 없이 쫓아가는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가게에 각양각색의 값진 돌과 세공품, 진주 등 억지구경이 지루했다. 모두 열쇠고리, 휴대전화 고리 같은 싸구려만 사서 안내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우리 은퇴노인들이라서...” 란 말로 모두 얼버무린다.
풍경구 입구에는 관광객 상대의 큰 동네가 들어서 있는데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옛날의 뒷간이 아니고 현대식 토일레트에서 모두 생리문제도 고민 없이 解憂하고 꽤 괜찮은 택시 3대에 나누어 타서 고도 5百米를 20余分에 타고 올라가서 고도 896의 雲谷寺에 이른다. 이곳서 空中纜車를 타고 高度 1660m의 白鵝峰까지 약 3.5km를 7분余를 가면서 黃山의 奇巖絶景을 감상했다. 운 좋게 날씨가 화창해서 골짜기 밑까지 환히 보였는데 안내는 雲海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했다. 淸代의 趙士吉이 寄松 怪石, 雲海, 溫川을 황산 4절로 꼽았는데 기송 괴석을 한도 없이 많이 본 것만도 대성공이었다. 黃山에는 1万2千峰의 3倍나 되는 3万6千峰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 가장 높은 蓮花峰 1864m과 天都峰 1810m은 오르지 못했지만 백아봉에서 가깝게 바라볼 수 있어 이곳서 기념사진도 많이 찍고 記念酒도 들었다. 아직 곳곳에 녹지 않은 눈덩이가 남아있지만 햇볕 화사해서 따뜻한 봄기운마저 느껴지는 날씨에 맑은 공기와 수려한 경관이 멀리 날아온 보람을 느끼게 했다. 이런 기암절벽의 절경이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과정은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먼저 즐길 수 있으니 사람의 감성이 참 좋은 것이다. 이 절경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스스로 실망해 붓을 꺾었다는 시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이 좋은 순간 순간들을 그 때마다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백아령에서 飛來石을 거쳐 宿所인 黃山西海飯店까지 두 시간 정도의 산행은 아주 즐거웠다. 층계를 많이 올라왔지만 대체로 급히 오르는 길은 없고 우리 같이 70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알맞은 것이었다. 西海大峽谷 丹霞峰 入口 등에도 올라본 후 宿所인 黃山西海飯店에 旅裝을 풀었다. 깊은 산중까지 가는 길도 잘 정리되어있고 숙소도 아주 一流水準의 호텔이다. 年間 3千萬의 관광객이 黃山을 찾는다니 投資를 엄청나게들 하나보다.
17세기초에 明代의 지리학자요 여행가 徐霞客이 黃山을 찬양한 句節이 호텔입구 옆 돌벽면에 괜찮은 글씨의 行草로 적혀있다.
薄海內外無如微之黃山 박해내외에 황산같은 산이 없고
登黃山而后天下無山觀山矣 황산에 오른 후에는 천하에 볼 산이 없다
서하객은
“五岳歸來不看山 黃山歸來不看岳”
- 오악을 보고 평범한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황산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그 오악도 눈에 차지 않는다. -
이란 유명한 말도 남긴 바 있다.
日沒 구경하기 위해 호텔식당에서 5시 반에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했다. 지난 이틀 동안 먹은 중 가장 푸짐하고 훌륭한 중국요리였다. 식사 후 서해대협곡 근처로 걸어가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으니 그쪽이 잔뜩 흐려져서 일몰은 보지 못했으나 동쪽 하늘에 휘영청 떠오르는 월출이 볼만했다.
긴 하루 끝이라 7시 좀 지난 이른 밤이지만 뜨뜻한 물에 몸담아 목욕하는 대로 잠자리를 찾는다.
2009. 3. 10. 火 晴 黃山, 宏村, 西遞
자정 좀 지나서 잠이 깼다. 옆방에선 친구들이 한바탕 술자리를 늦게까지 편 모양인데 우리내외는 세상모르게 숙면을 했으니 너덧 시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일출시간이 6시24분인데 일찍 일어난 우리 내외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한 50분 전에 캄캄한 로비에서 集合해서 獅子峰 가는 길 중턱의 猴子觀海의 아주 좋은 자리를 맡아 일출을 잠시 기다렸다. 새벽길 산책으로 20여분간의 알맞은 거리였다. 먼 동쪽 하늘에 구름이 살짝 지었지만 매우 멋있고 아름다운 日出을 보았다. 黃山의 그 유명한 怪石절벽 위로 솟아오르는 불구덩이의 장관을 많이 많이 디카와 비디오에 담았다. 우리만 보고 넘기기 아까운 장면들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조식을 마치고 40분 정도 산행해 어제 내린 백아령 纜車장에 가서 纜車타고 내려왔다. 어제 올라갔던 길이지만 아침 햇살에 비추이는 황산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感興을 불러일으켰다. 버스로 하산해 또 다른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달려 世界文化遺産인 宏村 마을 관광을 했다. 明淸代부터의 오래된 촌락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一千余의 住民이 아직도 살고 있는데 이곳은 정말 재미있게 돌아보아서 시간을 너무 짧게 잡은 것이 아쉬웠다. 上下水시설도 옛날 그대로이고 사람 두엇이면 가득 찰만한 좁은 골목길 양옆에 흰색 벽에 검정기와 지붕의 집들이 계속 늘어있다.
집들마다 관광객 상대의 상점들이 있는데 물건들이 조잡해서 별로 사고 싶은 것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동네 분위기가 고색창연하고 정감이 있어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는데 그 규모와 호화로움에 입이 떡 벌어진다.
안내에게 집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五品館이라고 답해서 한편 더 놀랐다. 이 동네 지방관장의 벼슬에 고작 五品이니 대궐 근처에 가면 보이지도 않을 사람이었을텐데 지방관리들의 苛斂誅求를 상상할 수가 있었다. 지금같은 情報化 사회에서는 가능한 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의 큰 연못의 빨래터, 곳곳에 햇볕에 말리고 있는 돼지 넙적다리, 여러 가지 나물 반찬 등이 옛날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의 인기영화 “臥虎藏龍”이 촬영되었다고 입구의 연못을 건너는 돌다리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하면 잠시 구경하고 지나가는 우리 모습도 다 영화 속의 스치는 하나의 장면이겠지.
점심 후 비단가게에 들리는데 비단 제조과정에 패션쇼까지 보여주며 장사를 하는데 물건들이 비싸고 크게 사고 싶은 것이 없다. 조선족 점원들이 졸졸 따라다녀서 부담이 많다. 여행비 절감을 위해 여행사가 어쩔 수 없이 포함시킨다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쇼핑시간이 단체여행에는 제일 괴롭다. 이어서 西遞民家마을을 돌아보았다. 宏村과 함게 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된 이 동네는 대체로 宏村과 비슷한 형태인데 明淸代의 民家 140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입구에 明朝神宗의 表彰으로 세워진 故文光牌坊이 눈길을 끈다.
중국식 3층 기와지붕에 높은 돌기둥으로 높이 올라간 문인데 여기저기 글씨와 정교한 조각이 보기 참 좋다. 이런 동네를 거니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옛부터 내려오는 동네에 아직도 사람들이 사는 것을 지켜보는 감흥은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맛과도 같다. 나도 지금 외할머니와 부모님이 살다 돌아가신 바로 그 방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저녁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동네 앞에 梅花와 木丹이 활짝 피었다. 잠시 앉아서 봄을 즐기다가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도 시간이 많이 남아 두 시간짜리 마사지를 했다. 4층이나 되는 마사지 집 4층에 걸어 올라가 한방에 두 명씩 들어가서 마사지를 받는데 피로도 잘 풀려서 좋고 마사지 아가씨와 신나게 중국말 연습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黃山 - 邵武 구간 야간 침대열차는 예상한대로 전쟁터 같다. 우리 12인 일행도 3층 침대 두 칸에 나눠 硬臥室에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칸막이뿐이지 문도 따로 없어 마치 피난민 열차같다. 이런 거 다 괜찮지만 뒷간이 불쾌하고 붐비는 것은 우리같이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말한 대로 그래도 1.4 후퇴 때의 열차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니 웃으며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다. 소등이 되는 10시까지는 한데 모여서 가져온 술을 마시며 담소한다. 나도 바로 옆 칸의 50대된 일본 친구와 어울려 담소를 나누거나 우리 일행과 술도 같이 들다가 소등되기 전에 2층 침대에 기어 올라가 눈을 감는다. 이런데서 옷 입은 채로 빤지 오래된 것 같은 이불 뒤집어쓰고 숙면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눈감고 쉴 수 있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한다.
2009.3. 11. 水 雨, 曇 武 夷 山
밤새도록 기차가 달려서 9시간 만에 아침 6시쯤 邵武驛에 도착했다.
대기해있던 버스로 2시간쯤 달려 武夷山의 호텔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체크인은 하지 못하고 로비에 짐을 놓고 1층의 洗手間에 들어가 아침 일들을 각자 알아서 해결했다.
그리고 호텔 식당서 조식을 하고나니 모두 새 기운을 찾아 世界自然文化遺産인 武夷山 구경을 종일 잘 했다. 邵武에서 버스로 두 시간 이내에 武夷山에 올 수 있었는데 2년 전만 해도 포장이 안 되어 그 두 배 이상은 걸렸다고 한다.
무의정사, 무이궁 엄청난 크기의 천유봉 바위에 천개 가까운 계단을 안내는 40분 걸려야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중간에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충분히 감상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올라가도 30분도 걸리지 않았으니 누구나 우리를 古稀를 바라보는 노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돌과 산과 물이 오랜 세월 거쳐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이 이런 漢詩가 잘 나타내주고 있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曲曲山回轉 峰峰水抱流
천유봉 거쳐서 武夷淸谷 지나서 내려오는 2시간여의 산행은 어려움 없으면서 황산과는 또 다른 아름답고 자연의 위대함을 만끽하는 감흥으로 가득 찼다. 이런 곳이니 朱熹가 隱居하며 주자학을 펼칠 만 했을 것이다. 그런 도사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해서 민중을 억압하고 나라를 쇠퇴하게 했던 홍진의 명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세상을 자연스럽게 제대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내려와서 九曲溪 竹筏(대나무 뗏목) 유람을 했는데 2시간 가까이 우리가 神仙이 된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시와 전설을 만들게 했다. 朱熹의 武夷九曲歌가 대표적인 것이라 하지만 어찌 이 기분을 온전케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玉女峰 지날 때 6인승 竹筏 뒤에 앉아있던 이문형이 오늘이 內子의 생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나는 농담조로 한마디 해서 모두를 웃겼다.
“술에 취하고 경치에 취하고 오늘 생일 맞은 할머니 미모에 취하고”
이것 이상의 생일선물은 없을 것이다. 아홉 구비를 돌며 유구한 세월은 한결같이 흐르는 맑디 맑은 물결, 올라다보면 수많은 전설이 얽힌 기암절벽, 우리 말고 신선이 따로 있을소냐 하는 생각이 든다.
뗏목 유람을 점심 전에 했기 때문에 식사시간이 오후 2시 반쯤으로 늦어졌다. 식사 때 내가 내자의 생일턱으로 武夷山白酒 한 병을 샀다. 矮胡食付라는 식당인데 아주 크고 주위경관이 수려한 데에 있다
이 동네에는 차밭이 많은 것이 유명한데 식후에 어김없이 차 쇼핑 하는 데를 가야 했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식당에 두고 가서 그것 찾으러 다시 식당에 갔다 오느라 안내양의 차 소개하는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호텔에 들어가 한참 쉬다가 근처 식당에 걸어가 저녁 식사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친다. 좀 흐리기는 했지만 외출하기 좋은 날씨가 계속 되더니 이제야 부슬비가 내린다. 호텔의 가게가 열려 있어 관광 안내책 세 권을 샀더니 점원 아가씨가 武夷山茶를 아주 솜씨 있고 운치 있게 끓여주어서 한홍섭 내외와 아주 기분 좋게 마시고 객실을 찾았다.
2009. 3. 12. 木 晴 武 夷 山
호텔 조식 후 水簾洞 風景區에 가서 水簾洞 三賢寺 大紅袍를 둘러보았다. 좋은 산행길도 되는데 수렴동과 차밭을 올라갈 때 계단이 좀 많은 건넛가에 별로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날씨도 햇볕에 따갑지도 않고 온화해서 걷기 최상이었다. 水簾洞은 높이가 한 100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치 거대한 발을 걸친 것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다. 참 묘하고 보기 아름다운 광경이다. 안내가 이 멋있는 곳의 지질학적 설명이라던가 틀림없이 있어야할 전설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어 좀 실망이다. 틀림없이 무슨 얘기가 있을 것이다.
수렴동의 절벽아래 朱子 劉子翬 劉甫를 모신 삼현사라는 사당과 주자학 관련 기념물들이 있는데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설물 보다는 그 안의 설명 패널들을 좀 자세히 보면 주자학의 고장에 대해서 정리해 볼 기회가 되었을 텐데 그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 일대는 차나무가 언덕 밭이 한 참 올라가도록 층층으로 심어져 있다. 3백년이상 된 대홍포차는 중국최고급차의 일종이라 한다. 그 가운데 바위 중간에 크게 자란 나무 하나는 이곳 사람들 말에 의하면 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大紅袍에 관한 전설도 나중에 관광 안내서를 사서 보니 참 재미있는 것인데 현지에선 잘 아는 이가 없었다. 水簾洞 풍경 관광을 마치고 이 동네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다음에는 下梅古民居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청나라 양식의 마을로 우리 민속촌 비슷한 성격이나 이 마을에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가운데 개천이 흐르고 양쪽 변에 木林로 차양된 거리가 있고 길 안쪽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개천의 수직으로 좁다란 꼬부랑 골목이 거미줄같이 이어져있다. 대장간, 대나무 세공 등 민속적인 일하는 사람, 여기저기서 도박하는 모습, 돌아다니는 토종닭 雜犬들..모두가 우리 예전에 겪었지만 기억에 가물거리는 모습이다. 마을 끝에는 밭들로 이어져있는데 똥지게 거름 주는 농부, 그곳서 응가 하는 아이들, 깨끗하지 않은 물에 아낙네들이 빨래도 하고 과일이나 야채도 씻고 하는 어렵게 사는 모습도 보인다.
상해 행 비행기가 밤 11시 10분에 떠나기로 되어 있으니 오후부터는 시간이 많이 남는다. 중국식당에서 아무리 늑장을 부려도 7시를 넘기지 못한다. 이 이른 시간에도 우리 테이블만 남았으니 종업원들이 우리가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눈치를 보여준 것이다.
식사 후에 발 마사지를 한 시간 동안 받고 아침에 짐을 맡기고 다른 호텔의 로비에서 또 시간을 보내면서 일기도 쓰고 관광안내서도 읽었다. 무이산 공항에서 한 시간이나 연착이 되어 새벽 1시가 훌쩍 넘어야 상해에 도착했다.
2009. 3. 13. 金, 雨(上海), 晴(서울)
상해공항에 안내가 버스를 갖고 나와 한 시간쯤 달려 신장강대주점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지난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는 대로 피로한 몸을 침대 속에 묻어버리는데 內子는 역시 여자인지라 한참동안 부스럭댄다. 6시 반쯤 다시 內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으니 나는 서너 시간은 숙면을 한 것 같다.
上海空港 출발시간이 12시 반이니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일찍 서둘러야 했다. 여행사에서 또 가게 한 군데를 들리도록 일정에 넣은 것이다. 8시 반에 호텔을 떠나 공항 근처의 고무제품가게에 들려 고무로 된 침구제품 가게에 들려 장장 40분간을 지루하게 머물러야 했다. 중국동방 공항은 어젯밤도 오늘도 어김없이 한 시간 연착이라 공항에서도 하릴없이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행장은 아주 크고 중국 것으로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긴 시간을 보내기엔 가게들 물건들도 조잡스럽고 힘들었다. 인천 공항에 내리니 집에 온 기분이다. 여행을 마친 때마다 내외간에 나누는 말이 똑같다. “꿈같이 다녀왔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 주자학의 산실, 明淸代의 文化遺産과 接하고 나서는 우리 안이 뭔가 더 알차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우리 인생이 하나의 여행일진대 주어진 시간을 순간순간 알차게 진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집에 오니 반가운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의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으니 뭘 먹어도 괜찮은 내 속도 시원해진다. 내 집이 역시 최고다.
첫댓글 여러분들이 같이.. 뜻있는 여행.. 좋아 보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 내쉬일곳은 집 내집 뿐이리...
... 아 _ , 오래 기다린 보람 ! 이렇게 자세한 여행보고서 (기행문)을 올리시려니 ... ㅎ ㅎ ㅎ ! 모두들 너무 좋아 보입니다. 경치도 경치려니와 ! (속편 기다려도 될라나 . . .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 ㅎ ㅎ ㅎ ! )
Nero 황제께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posting 1834 와 1843 을 클릭하면 에러가 뜨고 Internet Explorer 가 닫아 버립니다. 내 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바이러스 프로그람도 매일 업데이트하고 말웨어 프로그람도 계속 작동 중이니 ... 바이러스나 말웨어 문제는 아닌 것 같고 ... ? 혹시 Nero 황제께서 무슨 새 java routing 을 하셨나 ?
김호기 학형이 여행기를 자상하게 너무 잘 써서 동참하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버리게 되었소이다.
아하 _ , 우리 105(백오) 선생께선 비교문학 공부 잘 되 가시는지요 ? 가내 모두 안녕하시지요 ? 그런데 _ 문학교실에는 멋있는 여학생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 ㅎ ㅎ ㅎ !
김호기님의 文才가 실로 母傳子傳이구려! 꼭 한번 한무숙님 문학관에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한 번 놀러오라고! 우리 동네 맛있는거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