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양천(陽川)은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 때의 재차파의현(薺次巴衣縣)을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되었습니다.
고정리양천허씨정려(高井里陽川許氏旌閭)
정려는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나 효자, 열녀의 집 앞에 나라에서 세운 붉은 문 입니다. 이 곳은 김장생의 7대 할며니인 허씨의 정려에요. 허씨는 태조91392~1398 재임)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 김간과 결혼을 하였는데 17세의 나이로 혼자가 되었어요, 이에 친정부모가 재혼 시키려 하자 시댁이 있는 연산지방에 아들을 데리고 와서 훌륭히 키우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세조 13년(1467)에 정려를 세웠어요. 이 후 광산 김씨 가문에서 김장생, 김집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었습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입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공암촌(孔巖村 : 경기도 김포시 양천)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어요.
태조는 그 공(功)을 가상히 여겨 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 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어요.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조형물 전면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올랐어요.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손 굥(珙)은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부(元傅)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습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어요. 종(琮)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도적(盜賊) 장영기(長永奇)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공(功)을 세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어요.
조형물의 좌측면
장신(長身)으로 궁마(宮馬)에 뛰어났고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종(琮)의 동생 침(琛)은 1475년(성종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세자(世子)의 총애를 받았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珊定 : 쓸데없는 글의 글자와 글귀를 깎고 다듬어서 잘 정리함)했다.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친 그는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항상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며 학문(學問)이 깊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어요. 뿐만 아니라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 생활로 주위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습니다.
뿌리공원 조형물 우 측면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옥(頊)은 종(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 추대사건에 관련, 원주에 유배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허씨가문(許氏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초당(草堂) 엽(曄)과 미수(眉叟) 목(穆)을 빠뜨릴 수 없다. 엽(曄)은 군자감부봉사(軍資監副奉事) 한(瀚)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어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과 허자(許磁), 구수담(具壽聃) 등으 무죄를 논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형물 뒷면
그의 슬하에 4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특히 난설현(蘭雪軒)은 규수시인(閨秀詩人)으로 이름이 나서 황진이(黃眞伊),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여류(三代女流)로 꼽혀왔어요. 늦게 결혼하여 금슬이 원만치 못했던 그녀는 친정의 겹친 화액에 따른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며 독특한 시세계(詩世界)를 이루었답니다.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미수 목(穆)은 한강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워 당대의 석유(碩儒)인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었던 이름난 학자로 학문(學問), 문장(文章), 그림, 서예(書藝)에 뛰어났의며 특히 전서(篆書) 능하여 동방(東方)으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습니다. 그가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읊은 시(詩)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가무불가음 (無可無不可吟)
한 번 가고 오는 것이 이치가 있나니(一王一來有常數)
온갖 이치도 처음에는 둘이 아닌 것 (萬殊初無分物我)
이 일 이 마음도 같은 것 (此事此心皆此理)
누가 그르고 누가 옳단 말인가 (孰爲無司孰爲司)
조형물의 전면 글 내용
영의정(領議政) 적(積)은 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어요. 그 외 선조(宣祖) 때 명의(名醫)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준(浚)은 16년의 긴 세월 동안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韓醫學)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고 , 숙종(肅宗) 때 화가(畵家)인 숙(俶)과 과학자(科學者) 원(遠)은 한말(韓末)의 의병대장(義兵隊將) 재욱(在旭)과 함께 양천허씨(陽川許氏)의 가문을 자랑되게 하였습니다.
조형물 뒷면의 내용
허가바위
허가바위는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으리라 추측 되는 강가에 있는 천연적인 바위동굴입니다.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굴이 속한 강서구의 최초 이름은 "제차파의현"인데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 "파의"는 바위라는 의미로 강서구의 최초 이름이 이 곳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어요.
이 곳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어, 이 굴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릅니다.
돌림자(항렬)표
#뿌리#공원#족보#양천#허씨
[출처] 양천허씨 돌림자 유래 |작성자 batt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