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 신지식
빨강머리 앤을 읽었던 십대의 내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앤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떠오르는데 빨강머리 앤을 번역한 신지식 선생의 관한 기사가 조선일보에 나 관심있게 읽었다.
무라오카 하나코는 1952년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그린게이블스 의 앤'을 최초로 번역하면서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앤 열풍'을 일으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영어를 배우고 번역가의 길로 나아갔던 여주인공 하나코는 지진과 전쟁을 너머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했다. 무라오카는 8명의 형제 자매중 6명이 입양됐을 정도로 어려웠던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도쿄로 유학을 떠나고, 영어를 배워 교사, 번역가로 성공하면서 자신이 번역한 '빨간머리 앤'의 앤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1953년 봄, 휴전 직전 서울, 페허 속에서도 청춘들은 읽었다. 당시는 6,25사변 뒤끝의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당시 이화여고 국어 교사이던 신지식 선생은 인사동 헌책방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하셨다.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1908년작 Anne of Green Gabls. 초록 지붕의 앤)을 일본의 무라오카 하나코가 옮긴 것으로, 나는 빨강 머리 앤을 읽었으니 신지식 선생이 일본판을 번역한 것을 읽은 것이다.
독신 남매 매슈와 마릴라에게 입양된 고아 소녀 앤이 상상력으로 절망을 이겨낸 이야기를 신지식은 홀린듯 읽어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이화여고 주보 '거울'에 이 책을 연재했고, 1963년 창조사에서 정식 출간했다. 빨강머리 앤은 그렇게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빨강머리 앤이 클로즈 업된것은 3월 11일 한.캐나다 FTA가 타결된날 박근혜(62) 대통령이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 초청만찬사에서 "빨강머리 앤"에는 진정한 친구는 항상 마음으로 통하는 친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3월 18일 압구정동 자택에서 수차례 사양 끝에 인터뷰에 응한 신지식(82) 선생은' 번역은 했지만 자랑스럽지는 않다' 라고 말했다. 일본어 판을 중역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번역의 정도(正道)는 아니죠. 하지만 중역(重譯)이었으면 어떠랴.
누구에게나 희망을 가질수 있는 책을 번역했다는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
1960년대에 티비가 처음 공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소녀들은 라듸오 방송으로 하는 일일 연속극을 듣고 다음 날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주기 바빴던 때였으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 화신 세탁기가 처음 나왔는데 세탁기를 사고서도 웬지 못미더워 손빨래를 한참 했었다.
신지식선생은 외로워 그 책에 빠져 들었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2차 대전 때 만주에 있었어요. 부모님은 지린성(吉林省)에 계시고, 저와 저와 여동생은 다렌(大連)의 기숙사에 있었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폭동이 일어났어요. 부모님께 가려는데 기차가 끊겨 발이 묶였어요.
근 반년을 떠돌다 겨우 서울서 아버지와 상봉했는데 심장이 약한 어머니는 피난 열차에서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 열여섯 그때부터 마음속에 슬픔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박혔어요
책이 위로가 되었습니까
부모가 없는데도 발랄하고, 상상력 풍부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앤이 내겐 실존 인물처럼 여겼었지요"
이화여고 주보에 책을 번역해 소개하셨는데요
"정말로 절망 같은 시절이었으니까. 6,25 직후라 부모 잃은 아이, 집 없는 아이, 불행한 학생이 너무너무 많았지요. 그들에게 내가 위로받앗던 "빨강머리 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과연 아이들이 좋아할까 걱정했는데, 주보가 배부되는 화요일 점심시간이면 교실이 그걸 읽느라 조용해진다는 거예요
1963년 "학원" 편집장 출신인 최덕교(1927~2008) 창조사 대표가 제안하여 처음에 "빨강머리 앤' '앤의 청춘' 두권을 한권으로 묶어냈고, 2년여에 걸쳐 모두 다섯 권으로 완간했죠. 1984년 개정판에서 분책(分冊)해 열권으로 다시 냈지요
1963년 봄 초판 서문에 신지식은 썼다. " 앤과 같은 불쌍한 고아가 많은 우리니나라에서, 저는 이 책이 조금이라도 그러한 소년 소녀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있을까 생각하면서, 나의 사랑스런 친구 앤을 소개합니다."
신지식은 49세 때인 1979년 장편동화 '열두달 이야기'로 한국문화예술원제정 제1회 아동문학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당시 한 신문은 "신 여사는 53년 부터 그의 모교인 이화여고에 줄곧 몸담고 있는 처녀 선생님'이라고 보도했다.
ㅡ' 빨강머리 앤' 은 선생님 인생에 어떤 존재 입니까.
"커다란 위안이었죠. "저는 책을 번역하면서 완전히 앤이 되었다 나왔어요. 앤을 통해, 그 상상력을 통해 저는 전쟁의 우울함을 극복하고 소생하였습니다."
ㅡ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 맨 마지막 장 '길이 굽어지면' 거기서 앤이 보여주는 긍정이 참 좋아요. 팔십평생 살아보니 그런것 같아요.
아, 이건 끝이로구나' 싶다가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새 길이 열리기도 하고...
친 아버지 같은 매슈가 죽자, 앤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교편을 잡기로 결심한다. 마음을 굳힌 앤의 말을 신지식은 이렇게 번역했다.
"내가 퀸 학원을 졸업하고 나올 때는 내앞에 길이 똑바로 뚫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몇마일 앞까지도 뚫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지금은 굽어진 모퉁이에 온 거예요. 이 길이 굽어지고 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반드시 나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