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관세음보살상은 당(唐) 오도자(吳道子)와 이백시(李伯時)이후로는 오승(吳僧) 범륭 무종(梵隆茂宗)스님이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그러므로 효종은 일찍이 그를 칭찬하였 다.
물결도 일지 않고 불꽃도 잠잠하니 범륭의 뛰어난 그림 덕명에게 내리노라. 水波不動 火光不興 梵隆妙絶 授之德明
그리고는 내시[中官] 황덕명(黃德明)에게 하사하였다. 범륭스님에게 지협(至犀)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도 관음상을 잘 그렸으며, 근래에 들어서 는 민( )땅 덕원(德源)스님의 필치가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당시의 고관 사승 상(謝丞相), 태사(太師) 조언유(趙彦逾)등이 모두 그가 그린 관음상에 찬을 쓴 바 있는데 사 승상의 찬은 다음과 같다.
보고 들음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가부좌한 채 앉았으니 붓끝에서 그려져 나와 모양에서 `나'를 보느냐 하네 천백억 개의 몸이 가할 것도 불가할 것도 없으니 중언부언 게를 쓴다는 것은 엄연히 군말에 불과하리.
조태사의 찬은 다음과 같다.
생각을 뛰어넘어 관음상 그렸으니 붓끝에서 현묘함을 이루었네 진면목을 깨달으면 지혜의 빛이 온 누리에 두루 빛나리 만일 모습으로 도를 구하면 모습을 보고 선한 생각이 생겨나 생각 생각 모두 순수하고 온전하면 참모습은은 여기에서 나타나리다.
57. 백당 남아(柏堂南雅)선사의 대중법문
백당 아(柏堂南雅)선사는 민( )사람이며 나암 정수(懶菴鼎需)스님의 법제자이다. 처음 자 택사(紫택寺)의 주지로 있을 무렵 불조(佛照德光)스님이 냉천사(冷天寺)의 주지로 있었는데, 서로는 숙질(叔姪)사이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특별히 가서 덕광스님을 보좌하며 2년 동안 좌 원(座元)으로 힘쓰니, 많은 형제들이 그를 따랐으나 남아스님은 성품이 강직하여 덕광스님이 그를 꺼려하였다. 그 후 용상(龍翔) 영암사(靈巖寺)의 주지를 하는 동안 그의 도는 크게 떨쳤다. 스님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였다. "서봉산(瑞峰山)산마루 서봉정(棲鳳停)곁에 한 그릇 묽은 죽으로 서로 의지하며 백군데 기운 누더기를 머리에 덮어쓴 채 앉아 있는데, 이조(二祖:慧可)는 삼배를 올리고 제자리에 서 있 으니, 이미 제자들이 빙 둘러 있구나. 비린내나는 달마 늙은이가 가죽과 뼈를 모두 나누어주 니,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나머지 무리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나의 이러한 이 야기로 여러 스님의 꾸지람을 피할 수 있을른지……. 그러나 안목을 갖춘 이는 가려낼 것이 니, 하마터면 죄인을 오랫동안 취조하지 않아서 꾀만 늘려줄 뻔했다." 또 이렇게 말하였다. "자주빛 고사리는 여린 주먹 펴고 죽순은 가지가 돋히는데, 버들꽃 다한 뒤에 녹음 우거지 네. 분명한 달마의 한마디 말을 꾀꼬리는 나뭇가지에서, 제비는 둥지에서 재잘댄다. 여기에 투철히 보고 믿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제방 어디를 가든지 분명 밝은 창 밑의 첫 자리를 마련 해 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용상(龍翔)의 문하에서는 일격에 쳐 죽일 것이다. 무슨 까닭인 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대체로 승려와 속인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 기 때문이다."
58. 근본이 단정하며 / 광교 회(廣敎會)스님
광교 회(廣敎會)스님은 사천 사람으로 석두 회(石頭自回)스님의 법제자이다. 처음 호국사 (護國寺)의 차암(此菴守淨)스님에게 귀의하였는데, 한 행자가 철판같이 고집을 피우면서 떠 나가자 모두 송을 지어 그를 전송했다. 당시 회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괜스레 두 주먹 휘두르며 저처럼 떠나가니 한덩이를 만들어 가지고 속히 돌아오게나 삼봉 정상에 다시 걸망을 걸을 땐 어지러운 봄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리. 空奮雙與?去 打成一片早回頭 歸來 在三峯頂 惱亂春風來未休
도반들이 모두 이 송을 애송하였다. 그는 후일 운거산(雲居山) 천복사(薦福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항상 2∼3백여 명의 대중이 살았다. 이는 그의 근본이 단정하여 지말까지도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59. 백장야호화두에 붙인 게송 / 삼봉 인(三峰印)선사
삼봉 인(三峰印)선사는 무주( 州)사람이며 깨달은 경지가 뛰어났다. 일찍이 `백장야호(百 丈野狐)'에 대하여 송하였다.
떨어지지 않는다느니 어둡지 않다느니 함은 사람을 속이는 죄 어둡지 않다느니 떨어지지 않는다느니 함은 오랏줄 없이 묶이는 꼴 가엾어라 버들강아지 봄바람 따라서 곳곳에서 이리저리 나부끼는구나. 不落不昧誣人之罪 不昧不落無繩自縛 可憐柳絮逐春風 到處自西還自東
총림에서 이것을 애송하는 이가 많았다. 순희(淳熙)초 내가 산음(山陰)능인사(能仁寺)에 있 을 무렵 서암사(瑞巖寺)의 위당 법윤(葦堂法潤)스님과 함께 그분이 설법한 곳을 찾아가 보 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후일 그에 대한 도독(塗毒智策)노스님의 송을 살펴보니,
큰 횃불을 잡아들고 허공을 불사르니 달마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하여 눈이 멀고 귀가 먹었도다. 秉大火炬 燒太虛空 遠磨不會 眼 耳聾
고 하였다. 이는 더욱이 인스님의 이마 위에서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60. 대나무를 노래함 / 자득 혜휘(自得慧暉)선사
자득 혜휘(自得慧暉:1097∼1182)선사가 장로사(長蘆寺)조조(祖照)스님의 회중에 있을 무렵, 대중 요사채에서 대나무를 가꾸다가 문득 송 한 수를 지었다.
그 높은 절개, 깊은 구름마저도 감추지 못해 그윽한 님, 작은 창가로 옮겨 심노라 신령한 뿌리 서기어린 입새 뭇사람 놀라게 하여 맑은 바람이 푸른 하늘에 돌게 하도다. 高絶深雲藏不得 幽人移向矮窓前 靈根瑞葉驚群目 將著淸風動碧天
이 송은 즉흥으로 우연히 지은 글이지만 사람들은 앞다투어 애송하였다. 만년에 유두사(乳 竇寺)에 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80여 세 고령이었지만 뜻밖에 칙명을 받들어 정자사(淨慈 寺)의 주지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가 그때 지은 `죽송(竹頌)'은 자신에 대한 예언이라 하였 다. 이에 대중과 작별하면서 상당법문을 하눼?
한결같이 산중에 머문 지 40년 늙으막에 날마다 한가한 생각 뿐이었는데 오늘 아침 뜻밖에 군왕의 부름을 받아 학인들을 작별하고 옛 관문을 떠나가네. 구름은 무심히 산마루를 나가고 날개짓에 지친 새는 옛 둥지로 돌아온다. 득의양양 돌아올 뒷날에 솔바위 속에서 손님이니 주인이니 모두 잊으리. 一住山中四十年 老來無日不思閑 今朝誤被君王詔 珍重禪流出故關 雲無心而出岫 鳥倦飛而知還 他年得意歸來也 賓主相忘松石間
남병산(南屛山)에 와서 조동종(曹洞宗)의 종풍을 크게 일으키고 후일 설두산 쌍탑암(雙塔 庵)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과연 그가 떠나면서 한 말처럼 되었 으니 이를 두고 `마음에 두고 있으면 뜻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마음에 잊 지 않으면 그것이 곧 뜻이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