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서사 문학 속의 매화
1.매처학자
매화에 얽힌 일화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중국 송나라의 임화정(林和靖) 곧 임포(林逋)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연을 향한 그리움으로 벼슬살이와 처자를 버리고 서호(西湖)에서 은둔하면서 오직 매화와 학을 벗 삼아 살았다. 이렇게 한 평생을 산 임포를 가리켜 사람들은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한나라 매복(梅福)의 고사가 있다. 매복은 한나라 초기에 왕망의 난정에 저항하며 세상을 등지고 은일거사로 살다 신선이 되었다. 매복은 매화와는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그의 성이 매화와 동일하다. 아마도 이러한 연관으로 후일 서사 문학 속에서 매화의 상징성이 신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다.
2.조사웅과 나부지몽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 동쪽에는 매화의 명소로 이름난 나부산(羅浮山)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수나라의 조사웅(趙士雄)은 나부산을 구경하다가 날이 저물어 산기슭에 있는 매화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는 꿈속에서 미녀로 변한 매화나무의 정령을 만나 정을 나누었다 한다.
이 일화를 후대 사람들은 ‘나부지몽(羅浮之夢)’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글에서 남녀 간의 정사를 일컫는데 사용하는 비유어 ‘운우지몽(雲雨之夢)’과 더불어 이 말은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조사웅이 꿈속에서 만났던 매화의 정령을 ‘나부소녀’라 하는데 이 말은 후에 미녀를 가리키는 상징어가 되었다.
3.임경업의 탄생설화
매화가 미녀를 상징하는 예는 한국의 구전설화 중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임경업(林慶業) 탄생 설화’이다. 남한산성 서쪽 등성이에는 임경업 장군의 조상 무덤이라고 알려진 커다란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임경업의 조상 중에 조실부모하고 걸식하며 떠돌던 총각이 있었다. 어느 날 산속에서 날이 저물자 총각은 민가를 찾아갔다. 그러자 한 예쁜 여자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임 총각은 그 미녀와 하룻밤을 지냈다. 알고 보니 미녀는 5백 년 묵은 암구렁이로, 용왕의 딸이었다. 용왕의 딸은 이튿날 승천하며 자신의 비늘 세 개가 떨어진 곳에 묘를 쓰라고 총각에게 당부했다. 총각은 암구렁이의 비늘이 떨어진 곳을 찾았더니 비늘들은 세 그루의 매화나무로 변해 있었다. 총각이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매화나무 밑에 무덤을 쓰니 그의 후손에서 임경업이 나왔다.
이 설화에서는 용녀의 매화나무로의 변신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용녀의 신체의 일부, 곧 비늘이 매화나무로 변했다는 설정은 매화나무가 미녀의 화신임을 알려 준다.
4.매화나무와 휘파람새
고려 초에 매우 훌륭한 도공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었는데, 혼인을 사흘 앞두고 갑자기 죽고 말았다. 슬픔이 너무나 컸던 도공은 좀처럼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 수 없었다. 어느 날 도공이 약혼녀의 무덤을 찾아갔더니 무덤가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돋아나 있었다.
그는 그 나무를 집 뜰에 옮겨 심고 그녀를 대하듯 사랑했다. 어느덧 늙어 백발이 된 도공은 자기가 죽은 뒤에 매화를 가꾸어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 도공이 죽은 뒤 그의 주검 옆에는 예쁜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릇을 열자 그 속에서 예쁜 새 한 마리가 나오더니 매화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 그 새가 바로 휘파람새였다.
휘파람새는 남자의 넋이고, 매화나무는 여자의 넋이다. 예부터 봄철에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와 한겨울 추위를 이겨 내고 봄날을 찬양하듯 지저귀는 휘파람새는 매우 밀접하게 시인 묵객들에 의하여 묘사되어 왔다. 더구나 꽃과 새는 여자와 남자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함께 봄의 재생을 알려 주는 매화와 휘파람새가 남녀의 환생으로 나타남은 매우 그럴 듯한 것이다.
5.사랑하는 두 남녀의 화신
옛날 한 마을에 딸을 둔 부자가 살았다. 그는 딸이 장성하자 적당한 곳을 택하여 시집보내려 했으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부자의 딸은 한 마을에 사는 가난한 집 아들과 사랑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알게 된 부자가 그들의 결혼을 응낙했을 리 만무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 마침내 두 남녀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그들은 결국 서로 부둥켜안은 채 숨지고 말았다.
그 후 두 사람이 죽은 산 속에는 차디찬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빨간 매화꽃과 하얀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빨간 매화꽃은 처녀의 화신이요, 하얀 매화꽃은 총각의 화신이다. 이는 두 남녀가 죽음으로써 완성시킨 숭고한 사랑의 결실을 매화나무로 상징화한 것이다.
6.임금의 사랑과 매화의 수난
어느 봄날, 한 임금이 산책하다가 곱게 핀 매화의 자태에 함빡 취했다. 이를 곁에서 본 매화라는 궁녀가 자신도 역시 매화이지만 아직 꾀꼬리가 날아온 적이 없는 가련한 신세임을 슬퍼했다.
이를 가련히 여긴 임금은 그 후 매화라는 궁녀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것을 시기한 무리들의 간계로 매화는 역적 무리들과 밀통하여 임금을 죽이려 한다는 참소를 받아 처형되었다.
매화에 대한 증오심으로 임금은 전국의 모든 매화나무를 없애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 먼 시골에서 매화나무를 끔찍이 사랑하던 한 소녀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몰래 매화를 키웠다.
결국 발각되어 심문을 받게 된 소녀는 이 나무는 여느 매화와는 다른 홍매화라고 우겼다. 관리들이 소녀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동안, 소녀는 매일 밤 손끝을 찔러 피를 내 매화나무의 꽃망울에 흘려 넣었다. 결국 소녀는 과도한 피를 흘린 탓에 죽고 말았으나 놀랍게도 활짝 핀 매화는 그때까지 전혀 보지 못하던 홍매화였다.
매화라는 궁녀의 맑은 마음과 소녀의 붉은 마음의 결합을 통해 매화의 청절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화이다.
매화라는 이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정절 의식의 실천자임을 드러내는데 이는 곧 매화의 상징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7.일지매와 의적
매화와 관련된 이야기로 의적 ‘일지매’도 빼놓을 수 없다. 일지매는 도둑질을 한 후 자신의 내방 사실을 알리기 위한 징표로 ‘매화나무 가지’를 놓아두었다고 한다.
일지매 이야기에서 매화나무 가지가 무엇을 상징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매화가 반가운 손님을 뜻한다는 것과 자신을 단순한 도적이 아닌 지조와 절의를 지키는 의적임을 상징적으로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매화 신데렐라
후지 산이 바라보이는 마을에 모니타(盛田)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부유했으며 어여쁜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관음보살에게 빈 보람이 있었는지, 어느 날 무릎에 매화 한 송이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는 예쁜 딸을 낳았다. 모니타의 딸은 9세가 되는 해에 어머니를 잃게 되었고, 모니타는 친척들의 성화에 못 이겨 3년 뒤 새 장가를 들게 되었다.
딸이 14세가 되던 해에 모니타는 며칠간 집을 비우게 되었다. 모니타가 딸 때문에 전 부인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던 모니타의 후처는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딸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계모의 청을 받고 모니타의 딸을 산 속으로 끌고 간 남자는 차마 딸을 죽이지 못하고 산 속에 버려두고 돌아왔다.
혼자 남겨진 모니타의 딸은 관음보살에게 빌며 산 속을 헤매다가 등불을 밝힌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동굴에는 괴물과 노파가 살고 있었다. 모니타의 딸은 노파의 이를 잡아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자 노파는 1알을 먹으면 20일 동안 배가 고프지 않는 알약 3알과 입으면 노파로 변신하는 옷을 선물로 주었다.
동굴에서 나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마을에 내려온 모니타의 딸은 노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츄나곤(中級言:옛 일본의 관직명)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츄나곤의 아들이 관저로 돌아오던 중, 노파 모습의 옷을 벗어 버린 아름다운 딸을 보게 되었고,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 뒤 모니타의 딸은 아버지도 만나고 츄나곤의 아들과도 좋은 인연을 맺었다. 왜냐하면 모니타의 딸은 많은 역경을 겪게 되지만 매화를 꿈에서 본 뒤 태어난 경사스런 운명의 주인공인 것이다.
매화는 다른 꽃에 비해 향이 짙고, 꽃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꽃이다. 또한 꽃이 떨어진 뒤에는 열매를 맺어 반드시 나중에라도 행복을 얻는 운명이다. 결국 매화가 모니타의 딸의 운명이고, 매화가 그녀 자신인 것이다.
9.매화전
문학 작품 속에서 매화는 두 가지 경우로 등장한다. 즉 소재나 등장인물로 나타난다. 한국의 고전 소설에서 매화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매화전(梅花傳)』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발단 부분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장단골 연화동 명문가에 김주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술이 매우 높았으나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책읽기와 글쓰기로 세월을 보내다가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겨우 딸 하나를 낳아 그 이름을 매화라고 했다. 김주부는 관리들의 음해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자신의 외동딸에게 남복 차림을 시켜 황해도 연안 땅으로 보내고, 자신은 부인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으로 들어갔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부모와 헤어진 매화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동네를 찾아 들어갔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조병사댁 시비 옥란의 눈에 띄어 그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조병사에게는 삼대독자인 양류라는 매화와 동갑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매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찬탄하나, 남장한 탓에 그녀가 여자인 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이 작품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매화이며 남주인공은 양류이다. 매화는 잘 알다시피 이른 봄 그 어느 꽃보다도 먼저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양류 역시 재빨리 잎을 돋워 봄소식을 전한다. 따라서 이 두 식물은 시인들에 의해 흔히 봄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처럼 매화와 양류는 병칭되는 경우도 흔하고, 이를 의인화할 때는 매화는 여성으로, 양류는 남성으로 됨이 보통이다. 이 작품의 전개부를 좀더 살펴보자.
어느 봄날 두 사람은 봄 경치를 구경하며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한다. 먼저 양류가 말한다. “양류는 먼저 봄빛을 얻었는데, 매화는 어찌 즐거워하지 않는가?” 그러자 매화도 화답 시를 지어 보낸다. “나비는 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원앙새는 물을 얻지 못했구나!” 이에 양류는 매화가 여자임을 알아채고 기뻐한다.
남주인공은 별 의미 없이 두 사람의 이름을 넣어 시 한 구절을 읊었는데, 여주인공은 화답 시구를 통해 자신의 성별을 드러낸 것이다.
‘나비’와 ‘꽃’ 또는 ‘새’와 ‘물’은 진부하리만큼 전통적인 남녀의 상징어이다. 이 작품은 결국 두 남녀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작품 속의 주인공 매화는 봄날의 매서운 꽃샘추위를 이겨 내고 만개하는 고매, 청절한 매화꽃의 이미지를 잘 드러내 준다.
10.강릉추월
고전소설 『강릉추월(江陵秋月)』에도 매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매화가 소재로, 길상(吉祥)을 알리는 대상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상징성은 너무나 사적(私的)이다.
이 작품에서는 매화가 두 번 등장한다. 즉 첫 번째는 남녀 주인공 이춘백과 조낭자가 혼인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집 뒤뜰에 있는 해묵은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춘백의 아버지 이 진사가 매우 기뻐하는 대목에서이고, 두 번째는 춘백 부부가 낳은 아들 운학이 도둑에게 납치되어 장해룡이란 이름으로 변성명되어 양육되고, 장성 후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중 우연히 이 진사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들은 조손간(祖孫間)임을 알지 못한다. 그때 마침 뒤뜰에 있는 고목에 매화가 피자, 이 진사는 매화가 피는 것을 보니 경사가 있을 징조이나 자기 집안에는 그런 일이 있을 까닭이 없으니 아마도 해룡이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하며 기뻐한다.
여기에서 첫 번째는 후일의 부귀영화를, 두 번째는 과거급제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러한 매화의 상징성은 작가가 이 진사라는 인물을 빌려 토로한 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통적 상징성을 띤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11.유여매쟁춘
고전소설 중에 매화가 주류적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는 『유여매쟁춘(柳與梅爭春)』과 『화사(花史)』를 들 수 있다. 그 밖의 작품들에는 매화가 나타나기는 하나 부차적 인물이거나 소도구로써 사용된다.
『유여매쟁춘』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봄의 대표적 식물인 매화와 버드나무를 등장시켜 ‘쟁춘(爭春)’하는 내용이다. 이 한문소설은 현재 많은 이본(異本)이 전하고 있고, 각 이본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의 편차가 심한 편이지만, 전체적 의미는 비슷하게 전개된다. 한 이본의 예를 들어 내용을 살펴보자.
매생(梅生:매화)과 유군(柳君:버들)은 서로 사귄 지 오래 되었다. 어느 봄날 둘은 동군(東君:봄의 신)을 맞이하려 했다. 유군이 앞장서겠다고 주장하니 매생도 응낙했다. 이윽고 동군을 만나 유군이 맞으려 하는데 매생이 앞장서 나아가 맞이했다. 이에 유군은 매생이 약속을 어겼다고 나무라고, 누가 앞서야 하는지 겨루어 보자 했다. 매생이 응낙하자, 유군이 먼저 자신의 여섯 가지 장점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야기했다.
이에 매생도 자신의 여섯 가지 장점을 들어 이야기했다. 둘의 다툼은 석 달이 되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동군 앞에 나아가 판결을 듣기로 하나, 동군은 어느새 수레를 타고 훌쩍 떠나 버렸다. 그러자 유군과 매생은 서로 다투기를 그만 두고 마주보며 웃고 봄을 양보하게 되었다.
어떤 이본에서는 버드나무와 매화나무가 청의자(靑衣者)와 소복자(素服者)로 되어 있기도 한데, 이는 대유법(代喩法)을 사용한 것으로 결국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이 작품에서 매화와 버드나무는 서로 계절적인 선행을 다투다가, 봄이 떠난 후에야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다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2.화사
임제의 작품이라 하는 고전소설 『화사(花史)』의 도(陶)나라 편도 실은 매화를 상징화한 것이다. 이 부분에 등장하는 임금 도열왕(陶烈王)은 눈 속에서 핀 매화를 일컫는다. 도열왕을 일컬어 ‘성은 매(梅), 이름은 화(華), 자는 선춘(先春)이며, 나부(羅浮) 사람으로 고공사(古公?)의 장남’이라 하는데, ‘선춘’은 곧 ‘이른 봄’이요, ‘고공사’는 ‘매화의 그루터기’를 말한 것이다.
그 밖에 『사대기(四大記)』, 『오화전(五花傳)』, 『화왕전(花王傳)』 같은 가전 작품들에도 매화는 봄의 꽃으로서 ‘은일지사(隱逸之士)’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13.일본소설 겐지모노가타리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나오는 여러 꽃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보라색 꽃이다. 그것은 겐지(源氏)의 어머니인 기리쓰보(桐壺) 천황의 총애를 받은 후궁 기리쓰보코이(桐壺更衣)의 기리(桐:오동나무의 꽃이 자색이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와카무라사키(若紫:이름에 紫가 들어가 보라색을 상징한다), 아버지인 천황의 아내이자 의붓 어머니이며 젊은 시절 겐지의 비밀스런 연인이었던 후지쓰보(藤壺)의 후지(藤:등나무 꽃의 색깔이 자색이다) 등 가장 중요한 여성들이 모두 보라색 꽃으로 상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이안 시대에 가장 사랑받았던 꽃 중의 하나인 매화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어디쯤에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겐지의 가장 못생긴 애인 스에쓰무하나(末摘花)가 나오는 첫 장(章)일 것이다. 즉 나중에 겐지의 아내가 되는 와카무라사키(若紫)가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스에쓰무하나(末摘花)를 상징하는 꽃의 최대 결점은 꽃 색깔이 빨갛다는 점이다. 스에쓰무하나 곁에서 막 돌아온 겐지가 그 코가 빨간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와카무라사키한테 해 준 다음, 와카무라사키가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겐지는 같은 빨간 꽃(末摘花는 홍화라고 한다)이라도 매화꽃처럼 훌륭한 것도 있구나 하고 엉겁결에 견주어 본다. 『만요슈』에 나오는 매화는 모두 백매인데 이처럼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홍매가 사랑을 받게 되고,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매화도 화사한 홍매이다.
겐지의 구애를 끝까지 거절한 아사가오노사이싱(朝顔の薺院)이라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신분, 취미, 인품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조향(調香:향을 배합하여 색다른 향을 만드는 기술. 당시 일본에서는 귀족 집안의 여성이 갖추어야 할 자질 중의 하나였다)에도 뛰어났고, 서도에도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도 꼽혔던 여인이다. 나중에 황후가 되는 겐지의 딸의 성인식이 거행될 때 아사가오노사이싱은 매화 가지를 곁들인 와카를 겐지에게 보낸다.
이는 겐지의 구애는 거절했지만 그의 딸을 위해서 글을 써 주는 등 친분까지는 저버리지 않는 헤이안 시대 귀족 사회의 교제의 미덕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그런데 겐지는 답신 와카를 붉은색의 색지 위에 써서는 홍매 가지를 곁들여 보냈다. 겐지가 와카와 함께 보낸 매화 가지는 연심(戀心)을 암시하는 것이고, 아사가오노사이싱이 보낸 매화 가지는 친구로서의 교제를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인식은 매화 축제(宴)의 형식으로 열렸으므로 조향(調香)을 다투게 되었다. 그 때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겐지의 아내)가 뛰어난 솜씨로 매화 향을 만들어 내었다. 게다가 ‘매화가지’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는 등 정취를 더해 갔다. 이렇듯 매화는 헤이안 귀족의 생활을 색과 향기, 심지어는 소리(音)까지도 물들이는 풍물이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여성으로 비유되는 매화는 신분이 높고 취미가 고상하며, 기품이 가득하고 정결한 여인이란 인상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은 홍매로서 아련하고 요염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시에 감돌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