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릉을 찾아서
경주문화원에서는 1997년 7월부터 11월까지 신라문화유산해설사를 대상으로 신라문화해설 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한 바 있었다. 그때 필자도 교육에 동참할 행운을 얻었는데, 진평왕릉을 둘러보고는 깊은 감명을 느낀 나머지 다시 한 번 꼭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그러다가 그만 깜빡 잊고 지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영애의 결혼식을 보문관광단지 내에 있는 ○○회관에서 치른다는 청첩장을 받아들고,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 결혼식장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곧장 진평왕릉이 있는 보문마을로 차를 몰았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시내 쪽으로 오다보면 왼편(시내 쪽에서는 오른편)에 보문마을이란 푯말이 보이고 들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보문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으로 왕버들ㆍ포구나무ㆍ소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숲을 이루고 있고, 그 끝자락에 진평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진평왕릉은 벌판에 있는 능이다. 신라왕릉 가운데 평지에 있는 능은 여럿 있으나 벌판에 자리하고 있는 능은 진평왕릉 뿐이다. 왕릉의 지름은 38m이고, 높이는 7.6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흙으로 덮은 무덤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 석렬(石列)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겉으로 들어난 것은 몇 개뿐이다.
정양모 선생(전 경주국립박물관장)은“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장항사 절터, 에밀레 종소리, 진평왕릉, 이 세 가지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막상 이곳에 와보니,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다. 진평왕릉은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처럼 봉분이 우람하지도, 김유신 장군묘나 괘릉처럼 12지상이나 무인상도 없다. 그런데도 왕릉으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 마치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따스한 정감을 주고 있는 능이다.
진평왕은 24대 진흥왕의 손자이다. 진흥왕에게는 동륜(銅輪)과 금륜(金輪, 또는 舍輪)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륜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 아우인 금륜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 분이 25대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러나 진지왕은 즉위한지 4년 만에“정치가 어지럽고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白淨)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바로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이다. 진평왕은 12세에 즉위하여 65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시조왕 다음으로 54년이란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남산성을 쌓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왕경 방어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중국의 수나라ㆍ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평왕은 신체가 무척 장대하였는데,『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진평왕은 키가 11척의 장신이었다. 제석궁에 거동했을 때 돌계단을 밟았는데,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그러자 진평왕은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하였다. 이것이 왕경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옥대(玉帶)를 전하였고, 왕은 종묘의 큰 제사를 지낼 때는 항상 이 옥대를 사용하였다. 그 후 고려왕이 신라 공격을 계획하면서 “신라에는 세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는데, 무엇을 말하느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첫째는 황룡사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고, 둘째는 그 절에 있는 9층탑이며, 셋째는 진평왕의 천사옥대(天使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예찬하여 “구름 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는 임금의 곤룡포에 두르기가 알맞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이 세가지 보물의 존재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 사신은 옥대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핀잔을 듣고 돌아갔고, 이 이야기를 들은 경순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침 황룡사에 나이 구십이 넘은 노승으로부터“이는 진평왕이 두르던 것으로서 지금 남고(南庫)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창고를 열었으나 갑자기 풍우가 일고 날이 캄캄해져서 찾지 못하였다. 경순왕은 목욕재계하고서야 옥대를 찾을 수 있었는데, 고려에 항복한 이듬해인 937년(태조 20년) 5월에 이를 왕건에게 바쳤다고『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 선덕여왕이다. 재작년 5월부터 12월까지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어 시청률이 30%를 웃돌 정도로 인기를 모았고 그로 인하여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 경주는 관광특수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드라마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지만-역사를 왜곡한 점이 너무 많았다. 예컨대 덕만과 천명공주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시조왕(박혁거세) 때부터 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聖骨) 남자의 씨가 마른다(御出雙生 聖骨男盡)는 예언 때문에 부득이 쌍둥이 딸 중 하나인 덕만을 몰래 궁 밖으로 내 보냈다든가,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한 것은 순전히 작가가 꾸며낸 상상력에 다름 아니다.『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성골의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덕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성골이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화랑세기』<필사본>에 의하면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언니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13세 풍월주 용춘편에 의하면,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나 태상태후(진흥왕비)의 명령으로 진지왕의 두 아들(용수와 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ㆍ덕만과 함께 궁궐에서 자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명공주는 용춘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신라 사회에 숙부와 조카 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천명공주에게 싹튼 사랑의 대상은 용춘이었으나, 그는 공주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었다.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남자 중에는 용숙(龍叔)같은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용수와 용춘 중에서‘젊은 아재(叔)’란 뜻으로 용숙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야왕후가 이를 잘못 알아듣고 진평왕에게 “천명이 용수를 좋아하고 있다.”고 알려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고 용수를 천명공주의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왕후가 천명공주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천명공주는 그만 사랑하는 용춘이 아닌 형 용수의 아내가 되고 만 것이다. 용수의 아내가 되어서도 용춘에 대한 천명공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한편 13세 풍월주가 된 용춘은 많은 업적을 쌓고 있었다. 용춘이 풍월주로서 큰 업적을 이룩하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천명에게 왕위 계승권을 양보하라고 권했다.『화랑세기』는‘이 때 천명공주가 효심으로 순종하여,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했다’고 적고 있다.
영국의 윈저(Windsor, 1894~1972)공이 심슨(Simpson)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마저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천명공주 역시 사랑하는 용춘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것이다.
천명공주가 출궁함으로써 왕위는 자연히 용춘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선덕공주(덕만)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언니가 즉위한다면 모르겠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용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없다.”면서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용춘이 자신의 사신(使臣)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평왕은 선덕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이 정도의 배포라면 왕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선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진평왕릉 맞은편이 낭산이고, 그곳에 그의 딸 선덕여왕이 묻혀 있다. 진평왕릉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두 부녀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덕만아!”
“예, 아버지.”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말이야. 지금 생각해 봐도 잘 한일 같아. 네가 김춘추, 김유신같은 인재를 중용하여 통일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비로소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너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선덕여왕’방영 이후 너 요즈음 인기가 짱이라면서…?. 니 덕분에 날 찾는 사람도 부쩍 늘어 심심치 않단다. 난 지금 열 아들 부럽지 않단다.”
“아버지도 참…”
첫댓글 재미있내요. 추석잘 보내세요
네, 고마워요. 늘 건강하시고요
서수인씨 통화를 좀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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