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6년생이니 올해로 예순일곱 살이 된다. 그 동안 살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생은 다하며 살아온 세월이 내 나이를 팔십은 먹어 보이게 한다. 자식이 알까 남편이 알까 마음을 졸이면서도, 평생을 살며 가슴에 묻어둔 이 원통함을 이렇게나마 털어놓는다.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서울역 앞 동자동 82번지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언니,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있었다. 아버지가 남의 빚 보증을 잘못선 이후로 셋방살이로 뻔질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한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집에서 함께 산 기억이 별로 없어 어떤 분이고, 무엇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번 나가면 여러 달 안 들어오시고 들어오셨다가도 금새 어딘가로 가셨다. 주로 어머니가 우리를 먹여 살리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남의 집일을 다니며 우리를 키우셨다.
내가 아홉 살 정도 되었을 때 큰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나하고 8년 차이가 났는데 언니가 무척이나 예뻐서 동네사람들이 나보고 네 언니 반이라도 쫒아가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루는 언니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머니는 언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사방을 알아보며 다니셨다. 학교에서 친구들도 언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동네사람들도 모두 걱정을 했다. 어머니는 매일 우시고, 우리 아버지는 잠시 집에 들어와 계시다가 홧김에 다시 집을 나가셨다. 우린 이사도 못 가고 언니가 돌아오기를 애타도록 기다렸다.
그렇게 2~3년이 지나서야 언니는 거지차림을 해 가지고 돌아왔다. 뼈다귀만 앙상한 언니를 구경하려고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몇십 명씩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은 여자가 너무 예쁘면 팔자가 사납다고들 했다. 한번은 내가 어머니 심부름을 나가다가 동네사람들이 언니가 일본놈한테 끌려갔었다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후 우리집은 그 동네를 떴다. 무엇이 불안했던지 어머니는 내가 밖에 나가 놀지 못하게 하셨다. 소공동에 살 때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열한 살인가 열두 살에 1학년이 되었으니 좀 늦은 편이었다. 수표동에 있는 화강소학교에 입학해서 다녔는데 그것도 4학년 겨울에 그만두어야 했다. 홍제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학교는 너무 멀고 월사금 낼 돈은 없고 해서 친구들하고 엉엉 울면서 헤어졌다.
이사 후 언니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머니는 계속 한약만 지어다 먹이고 무당을 불러 병 쫒는 푸닥거리만 하셨다. 그래도 언니는 별로 나아지는 것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온 해 겨울에 죽었다. 외가집이 있었던 금곡에 시체를 묻었다.
당시 큰오빠는 장가를 갔는데 마땅히 하는 일이 없었고 작은오빠는 인쇄소에 다녔다. 난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작은오빠와 친했다. 나는 작은오빠 말이라면 뭐라도 했고 작은오빠도 내 말이라면 다 들어 주었다.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그렇게 좋았던 작은오빠는 스무 살이 갓 넘어 징용을 가게 되었다. 그후 큰오빠는 돈 번다고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결국 부모님과 나만 남았다. 징용간 작은오빠가 히로시마에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유독 친했던 작은오빠가 너무도 보고 싶었고 가난에 짓눌리는 생활에 갑갑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물에 걸려들어
다시 다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 1945년, 내가 열아홉 살 나던 해였다. 양력 정월달이라고 기억하는데 정내회(町內會)에 있는 남자가 와서 집에서 노느니 취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있으면 정신대에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벌고 정신대에도 안 나가니 참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의논해 본다고 했다. 그때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그리고는 며칠이 흘렀는데 또 그 사람이 와서는 빨리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하고 갔다. 그 동안 어머니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는 어머니가 저녁 무렵 들어오시자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취직은 무슨 취직이냐고 하면서 “아이구 큰일났구나, 또 이사가야겠구나” 하셨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혼자 벌어서 먹고 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라도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면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내회 남자 말이 일본에 가게 되면 히로시마에 있는 작은오빠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마음이 더더욱 기울었다.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밤새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몰래 짐을 싸들고 어머니가 일 나가신 사이에 정내회의 그 남자를 찾아갔다. 그날로 바로 그 남자와 서울역에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밤새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리자 그 남자는 나를 일본 남자 두 명에게 넘겼다. 그때서야 더럭 겁이 났다. 학교에서 일본말을 배워 조금 알기는 했지만 일본말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일본말을 하면 그 사람들이 말을 시킬 것 같아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쫒아갔다.
부산에 도착하여 바로 배를 탔다. 배 안으로 내려가니 나이먹은 한국 여자들이 열 명 정도 있었다. 서로들 말을 안하고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다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멀미가 나서 밖이 보이는 곳에 올라가봤더니 집도 산도 하나도 안 보이고 배는 바다 한가운데 덩그마니 떠 있었다. 위에는 비행기 한 대가 떠 있었고. 그때 나를 인계받은 일본 남자 중의 한 명이 오더니 나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따귀를 때리고는 손을 잡아 꺾었다. 아마도 내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때 꺾인 상처 때문에 지금도 손마디가 툭 불거져 나와 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어머니 몰래 나온 것이 너무너무 후회가 되고 이런저런 생각에 서러워 눈물만 나왔다.
그날 저녁쯤 되어 배에서 내렸다. 여덟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에서 내리면서 사람들이 시모노세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낯선 말이었지만 열심히 “세키 세키” 하면서 외웠다. 왠지 불안한 마음에 이곳이 어디라는 것은 알고 있어야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탔다. 다른 한국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와 나를 인계받은 일본 남자 둘만 기차를 탔다. 온통 창이란 창은 다 막혀 있어서 대체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 이제 난 죽었구나. 오빠고 뭐고 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게 깜깜해졌다.
난데없는 첩살이
기차에서 내려 두 일본 남자가 나를 어느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이는 일본 남자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아주 좋아했다. 그들은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데리고 왔던 남자들은 돌아갔다. 주인 남자는 나에게 방 하나를 가리키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집안 형편을 살펴보니 앓아 누워 있는 부인이 있고, 스무 살 정도 먹은 아들이 있었다. 난 방에 들어가서 일하는 여자가 해주는 밥을 받아 먹고 불안한 마음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일하는 여자가 이부자리를 펴주며 자라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들어왔다. 주인은 그 이부자리에 눕더니 나더러 옆에 누우라고 끌어당겼다. 싫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니 일어나 나를 눕히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무서워 반항도 크게 못했다. 머리는 멍멍하고 몸은 뻣뻣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잠자리에서 남자를 어떻게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가 아래로 들어오는데 난 그게 무릎팍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정신이 아찔하였다. 피가 흥건이 나고 밑은 빠지듯이 아프고. 그러고 난 후에서야 난 내가 몸을 빼앗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주인은 계속 나를 데리고 잤다. 주인이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면 그 아픈 짓거리를 안 당해도 되었다. 주인은 아파 누워 있는 자기 부인방에는 잘 안 들어갔다. 매일 밤 그 지긋지긋한 잠자리를 강요당하는 와중에서도 그 부인에게 무슨 죄를 지은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그 주인 여자 마음이 오죽할까 해서.
주인 성은 ‘스하라’라고 했고 아들은 ‘지로’라고 했다. 주인은 군인이었는데 아침에 군복 입고 나갈 때 보면 어깨에는 뻘건 헝겊 위에 별이 달린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집에는 방이 세 개 있고, 마루에 사진과 채찍 그리고 긴 칼이 걸려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말도 있었고. 난 그 집에 머물면서 부인의 시중도 들어주고 집안일을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밥 짓는 일은 못하게 했다. 집안사람들이 나를 학대하지는 않았다.
그 집에 있으면서 폭격소리를 아주 자주 들었다. 주인 남자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니 히로시마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도 일본말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히로시마라는 말을 듣고는 작은오빠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느 정도 무서움이 가신 후 그 주인 남자에게 오빠가 이곳에 있으니 오빠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내가 일본에 갈 때 가져갔던 오빠의 편지를 보여줬다. 알았다고 하면서 손가락 네 개를 펴보이며 이렇게 자고 나면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며칠 있다가 차를 태워 작은오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공장 같은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오빠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은오빠는 나를 보더니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느냐고 하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울며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는 화를 내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을 빠져나가라고 했다. 여긴 살 데가 못 된다고 했다. 한 서너 시간 오빠와 울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주인 남자가 이제 가야 된다고 나를 데리러 왔다. 오빠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작별을 했다.
다시 그 집에 돌아온 후론 그 집 주인 남자의 온갖 비위를 맞추며 제발 조선에 보내 달라고 졸라댔다. 주인 여자에게는 “내가 있으니깐 아저씨가 아줌마한테 안 가지 않느냐. 그러니 나를 조선에 보내면 아저씨가 아줌마를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면서 졸랐다. 저녁마다 주인 아들한테 한두 시간 일본어를 배웠는데 그 아들한테도 졸라댔다. 두 달쯤 지나자 주인 여자도 울화병이 나는 듯 나를 대하는 것이 점점 고약해졌다. 그래도 아침에 눈 떠서부터 저녁까지 옆에서 졸랐다. 내가 조선에 가야 아줌마가 좋아진다고 하면서. 주인 남자는 내 말을 되도록이면 다 들어 주었는데 조선에 보내 달라고 조르면 화를 내기도 했다.
어느날 주인 남자가 아침에 나간 후 주인 여자와 그 아들과 함께 있으면서 난 또 졸랐다. 나를 조선에 보내 달라고. 주인 여자와 아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아들이 나한테 데려다 줄테니 짐을 챙기라고 했다. 그저 고맙고 좋은 마음에 서둘러 짐을 챙겨 그 아들을 쫒아나섰다.
나를 어느 역에 데리고 갔다. 그 아들이 일본 사람 둘에게 뭐라 하더니 나를 그 사람들한테 넘겼다. 그리곤 나를 한번 흘낏 보더니 가버렸다. 일본 남자들이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기에 나는 안 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난 조선에 갈 거라고. 그랬더니 한 놈이 내 허벅지를 냅다 차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끌고 갔다.
보내달라 떼쓴 것이 그저 후회스러워
나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창고같이 생긴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방이 열 개 정도 주루룩 있었는데, 그중 한 방으로 들어가니 한평 조금 넘을 만한 방에 담요 하나만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어떤 일본 여자가 밥을 가져다주고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때 난 ‘아, 주인 남자가 내가 그 집에 있으면 부인에게 미안하니깐 이곳에 머물게 하다가 조선에 보내 주려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주인 남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때가 되니 밥 가져다줬던 여자가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떠다 줬다. 씻고는 오늘 밤이라도 당장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낯선 일본군인이 들어왔다. ‘아, 이제서야 내가 떠나는구나. 나를 데리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군인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누으라 했다. 나는 보따리를 무릎에 얹어놓은 상태로 “저리 가라”고 하면서 손으로 그 군인을 밀었다. 그랬더니 다시 나를 슬슬 달래면서 끌어당겼다. 나는 보따리를 꼭 껴안은 채로 뒤로 떠밀려져서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 이놈이 여자한테 굶주려 나를 보고 이 짓을 하는구나. 이것만 끝나면 스하라한테 나를 데려다주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쳐진다. 내가 조선에 보내 달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안 당했을텐데 하는 후회가 지금껏 든다. 싫더라도 한 놈한테만 그냥 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테니까.
아침 아홉 시 반이나 열 시 정도에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나면, 어떤 때는 점심 전부터 군인들이 오고 보통은 오후가 되면서부터 군인들이 밀려왔다. 일요일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군인들은 나란히 줄을 서 있다가 한 명씩 들어와서는 보통이 5분, 길어야 10분 정도 있었다. 한 놈 나가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밤 열 시경이 되어서야 그 생지옥이 끝났다. 하루에 적어야 20명이었다.
하라는 대로 안한다고 맞기도 엄청 맞고 기절도 숱하게 했다. 그러면 주사 놔줘서 다시 깨어나고. 오줌을 질질 싸고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으면 어떤 놈은 냅다 발길질을 하고 그냥 나가 버리기도 했다.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으면 얼굴 가린다고 맞고, 자기들 성기를 입에 갖다대고 빨라 해서 안 빨면 맞고, 조선말 쓴다고 맞고. 하도 맞다 보니 병신이 됐는지 그저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송장처럼 누워 있었다. 공습 때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모두 없어졌다. 처음엔 무서워서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나중엔 그냥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어떤 놈은 금방 하고 나가고 어떤 놈은 안돼서 질질 끌었는데, 그렇게 몇 십 분씩 진저리가 나게 끌고 나면 난 기절을 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냥 기절하고 누워 있으면 밥해 주는 일본인 아줌마가 와서 찬물로 씻어 주고 미음을 가져다 먹이곤 했다. 거기서 내가 살아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어 때가 되면 밥먹고 시간 되면 군인받고 그저 그렇게 지낸 생활이었다.
입구에서 감독하는 군인이 서너 명 있었는데 자주 바뀌었다. 바람 쐬러 나왔다가 감독하는 놈들에게도 숱하게 맞았다. 군인들은 들어올 때 입구에 있는 놈들에게 뭔가를 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군표나 돈일 것이라는 것은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밥해 주고 빨래해서 가져다 주는 아줌마는 바뀌지 않았다. 빨래라야 걸치고 있는 겉옷 하나였다. 아예 속옷은 안 입고 있었다. 나이가 마흔 살 정도 된 일본인 여자였는데 같은 여자라 그런지 많이 위로를 해줬다. 내가 기절을 자주 해서 그 아줌마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깨어나면서 시모노세키가 어디냐고 나를 거기다 좀 데려다 달라고 하면 말은 안해 주고 그저 걱정말라고만 하면서 피를 닦아 주곤 했다. 비록 일본 사람이었지만 그 아줌마한테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아줌마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줌마는 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봐도 그런 건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얼핏 오사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곳에 있으면서 다른 방에 있는 여자들과는 한번도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 딱 한번 화장실 가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여자가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감독하는 놈 눈에 뜨일까 봐 그냥 지나쳤다. 밖에 나왔다가 감독하는 놈들 눈에 띄면 맞기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방에만 있었다. 밥도 방으로 갖다 주는 것만 먹고.
군인들은 가지가지였다. 와서 개 돼지만도 못하게 지랄하는 놈도 있지만, 몇몇은 추근대지 않고 그냥 옆에서 안고만 있다가 가는 사람,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찾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만 하다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가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었다. 나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내게 잘해 주려고 했던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번 나와 자고는 그 다음부터는 이야기만 하다 가곤 했다. 그 사람은 내 밑이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닦아 주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도 나를 다른 곳에 보내는가 싶어 말을 시켜도 안하고 싫어했다.
하도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얼마 안되어 몹쓸 병이 들었는지 밑이 시뻘겋게 퉁퉁 붓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들어오는 군인이 제각기 삿쿠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끼는 놈도 있고 안 끼는 놈도 있었다. 군의가 와서 주사를 놓아 주었지만 잘 낫지를 않았다. 병든 상태에서도 계속 군인을 받았다. 한번은 어떤 놈이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려고 하다가 시뻘겋게 된 내 밑을 보고 뭐라 욕지거리를 하고는 못 같이 뾰족한 것을 가지고 밑을 찔러 버렸다. 거기에 병균이 옮아 번져서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도 그냥 누워 군인을 받았다. 그 엉망이 된 밑을 보고도 덤벼드는 놈들이 인간 같지 않았다.
약 먹고 주사맞고 치료를 해도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주사인지 한번 맞고 나면 속이 울렁울렁하고 입과 코에 냄새가 올라와 역겨웠다. 군의가 치료를 하면서 약으로 치료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한번은 내게 잘해주었던 장교와 군의가 같이 왔다. 그 장교는 군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를 내보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나를 또 딴 곳에 보내려는 이야기로 들었다.
어느날인가 아줌마가 오더니 내가 조선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너무 병이 심하게 들어 조선에 보내 준다고 했다. 막상 조선에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절을 했을 때 죽게 그냥 내버려두지 나를 깨운 아줌마도 야속하고. 나중엔 그나마 병이 깊어서라도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장교가 나를 나가게 손 써준 것 같다.
살아 돌아오기는 했지만
군의가 뭐라 씌어 있는 종이를 내게 줬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나를 배 타는 데까지 데리고 갔다. 배 타는 데에서 어떤 사람에게 그 종이를 보이고 안내인 하나와 배를 탔다. 타고 나니 그저 ‘이제는 살았구나. 이젠 어머니한테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부산에서 배를 내려 안내인이 기차를 태워줘 혼자 서울에 도착했다. 1945년 양력설을 쇠고 일본에 가서 두 달 동안 스하라 집에 있다가 3월부터 내가 돌아온 7월까지 오사카에서 군인들을 받다가 반년이 넘어서야 서울에 돌아왔다. 서울역에 내렸는데 돈이 수중에 한푼도 없어 걸어서 예전에 살던 다동의 집까지 갔다. 보따리도 하나 없이 걸치던 옷에 조리 하나 신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밑이 아파 몇 번을 주저앉으면서 집으로 갔다.
다행히 식구들은 이사를 안 가고 그 집에 그냥 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발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방문에 걸터앉아 계셨다.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밑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돌아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알까 봐 쉬쉬하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굳이 내게 어디 갔다왔느냐는 것을 물어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간혹 “딸 둘 있는 것을 이렇게 버렸구나” 하시면서 울곤 하였다.
하도 배가 아파 뒹구니 어머니가 만져 보고는 아이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아이가 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꺼내 보니 사내아이인데 얼굴부터 몸 반쪽이 이미 썩어 있었다. 의사는 병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했다. 6~7개월 된 아이였다. 아이는 죽은 채로 내 뱃속에서 근 한달을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마 처음갔던 집 남자 스하라의 씨인 것 같다. 내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는 달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돈을 꾸어와 여기저기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이광수 씨 부인이 하는 산부인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는 어느 정도 깨끗해졌다.
아들에게 전해진 위안부의 상흔
동네에서 다시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래서 어머니가 옆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남자하고 결혼을 시켜 버렸다. 무엇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냥 결혼했다.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곧 해방이 되었다. 치료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해버려 병이 다 낫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몇 개월 살았는데 내가 매독균을 옮겨줬다고 남편을 나를 때리며 내쫒았다. 임신한 몸으로 친정에 왔다. 왠 임신은 그렇게 쉽게 되는지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덜컥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나는 뱃속에 들은 아이도 또 죽어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다 작은오빠가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질 때 화상을 입어 몸이 불거져서 왔다. 오빠는 원자병으로 앓다가 갈비뼈에서 이빨 같은 것이 부스러져 나오더니 다음 해에 죽었다.
작은오빠가 죽은 해 나는 친정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겉으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여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친정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얼굴이 반반하다고 “아이 딸리면 어떠냐? 시집가라” 하면서 친구 어머니가 중신하여 지금의 영감하고 선을 보아 살게 됐다. 애 딸린 여자라고 시부모, 시누이한테 구박도 많이 받고 여러 번 쫒겨나기도 했다. 그 서러움은 말도 못한다. 한겨울에 광목을 빠는데 물을 못 데워 쓰게 해서 찬물에 손등이 터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내가 얼굴이 곱상해서 그래선지 애가 딸려도 그냥 결혼을 했지만 살다보니 마음이 변하는지 집에도 안 들어오곤 했다. 영감이 젊을 때 바람을 피워서 속도 많이 썩었지만 내 꼴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줄줄이 생겨 아이 낳고 시댁식구까지 먹여 살리느라고 이짓저짓 다하며 살았다.
첫번째 남편에게서 난 큰아이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큰아이는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켰다. 그애는 국민학교만 겨우 졸업하고는 안해본 일없이 별별 고생을 다했다. 나가서 거의 빌어먹다시피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내가 감쌀 형편도 아니라 돌봐 주지도 못했다.
그러다 나는 서른이 넘어가면서 불안증이 생기고 정신이 막 혼동되는 증세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영감이 싫어지고 소름이 끼쳐 나가라고 소리도 지르고 발광을 했다. 누굴 중을 만들려 하냐고 구박을 얼마나 받았는지. 그래도 사람소리 텔레비전 소리만 나면 불안하고 무서워서 문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다. 텔레비전에서 총소리를 듣고 몇 번을 졸도도 했다. 사람만 보면 무섭고 무슨 소리만 들려도 떨려 방에 들어앉아 무릎으로 기어다니는 생활을 근 30년간이나 했다. 내가 이렇게 제대로 걸어다닌 게 이제 4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지금도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티반을 계속 먹고 있다.
지금 영감한테서 낳은 자식은 네 명이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모두 자기 밥 먹고 잘 살고 있다. 지금은 막내딸과 함께 사는데 그 전엔 먼저 남편에게서 난 큰 아들 집에 있었다. 그 아들은 국민학교를 겨우 나왔지만 남의 밑에서 이것저것 배운 것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멀쩡히 잘 살다가 마흔 살이 넘어 갑자기 신경발작증을 일으켰다. 그래서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는데 그때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 해서 갔었다. 의사가 가족들은 다 나가 있으라 하더니 나한테 혹시 그전에 매독을 앓다가 낳은 것이 아니냐고 해서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리다 나온 적이 있었다. 그저 내가 죄인이었다. 자식 신세까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 뱃속에서 멀쩡히 나와 성한 줄 알았지 그게 40년 만에 정신병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큰아들은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은 발작을 한다. 제가 더러운 개구녕에서 나와 이렇다고. 의사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런 말을 하면서 작년엔 에미를 죽이겠다고 집안살림 다 집어던지면서 달려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 길로 아들 집을 나와 막내딸 집으로 왔다. 큰아들이 정신병원에 있을 때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그 동안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가슴에 담고서 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지금 신고를 하고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하곤 하지만 행여 얼굴이 알려질까 봐 마음을 졸인다.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어 내 원통한 세월을 마음껏 통곡도 못한다. 만약 내가 위안부로 갔다온 사실을 사돈댁에서라도 알게 된다면 자식들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내가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신경병에 당뇨에 약 없이는 살지 못한다. 남들에게 꺼내 놓지 못하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서 속병 앓으며 사는 것을 누가 알겠나. 죽어 가슴에나 묻어둘 이 원통한 이야기를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