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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본으로 본 국문소설 베스트 10선
국문소설을 읽을 때면 한문소설과는 사뭇 다르다는데 가끔씩 놀라곤 한다. 그것은 언어의 감칠맛이다. 그 맛이 여간한 게 아니다. 특히 국문소설에서 감정이 적절히 투사된 언어들은 읽는 이들에게 꽤 흥미를 주었을 성싶다. 운율 또한 한문소설과는 고소설을 읽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한문소설을 해독하며 읽는 데서 오는 긴장감보다는 툇마루에 앉아 나른한 오후의 졸음을 즐기는데서 오는 아늑함이라 할까. 여하간 국문소설에는 그런 너그러움이 있다.
이 국문소설을 공부하며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는 구렁덩덩신선비를 듣던 내 시골 하늘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참 별도 많았고 그만큼 꿈도 많았다. 국문소설에는 그러한 정내가 향기롭다.
<조웅전>
이본 1위 <조웅전>
완판본 <조웅전>(『한국고대소설총서』3, 이화여자대학교, 1960, 영인본)
원본을 보냅니다.
1991년 걸프전쟁(Gulf War)을 생중계하며 CNN 방송 기자가 한 말이다. 잔혹하고 비정한 전쟁의 한 장면을 불꽃놀이에 비유하고 있다. 조선의 군담소설, 어쩌면 조선을 살아갔던 민중들에게 그것은 종이에 글로 쓰인 한 폭의 불꽃놀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문필사본 241, 방각본 178, 활자본 31, 총 이본수 450 편, <조웅전>의 이본 결과는 그래서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조웅전>은 그래 <춘향전>․<구운몽>의 이본수를 따돌리고 우리나라 고소설 중 가장 이본이 많다.
세 마당: 작품론의 <조웅전> 참조
<조웅전>에는 특히 7언의 삽입가요가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그 중에는 88구나 되는 장편도 있다. 아마도 대중들의 기호에 맞게 통속화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정서를 환기시키는 작가의 소설적 장치라고 여겨진다.
시를 이용한 이러한 소설적 장치는 소설의 문예적 성격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이 시로 연인들 사이의 애정 또한 필연적 연분임을 상기시켜준다. 이것은 부모의 허락 없는 혼인관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아래는 조웅이 장진사의 딸이 탄 거문고 한 곡을 듣고 읊은 곡이다.
그 곡조에 이르기를,
십년을 공부하여,
천문도를 배운 뜻은,
월궁에 솟아올라,
항아를 보려함이었더니,
속세 인연이 있었지만,
은하수 오작교가 없어,
오르기 어렵도다.
소상강의 대를 베어,
퉁소를 만든 뜻은,
옥두꺼비를 보려하고,
달빛 아래 슬피 분들,
지음(知音)을 뉘 알리오?
두어라, 알 이 없으니,
먼길 나그네의 근심과 회포를 위로할까 하노라.
<유충렬전>
원수 분심을 못 이기어 호왕을 두 쪼각 내여 간을 끄내 입에 넣고 씹다
3대 군담소설?
<조웅전>․<유충렬전>․<소대성전>이다. <유충렬전>은 국문필사가 103, 방각본이 25, 활자본이 15, 합 143 편의 이본이 존재한다. 이본의 수로 <조웅전> 바로 뒤를 따르는 군담소설이요, 국문 소설 전체로도 이본으로 보아 <춘향전> 뒤를 이을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소설이다.
<유충렬전>은 군담소설 2기에 해당된다.
또한 조수삼趙秀三(1762 ~ 1849)의 추재집秋齋集 <전기수傳記叟> 조에는 <소대성전>․<소인귀전蘇仁貴傳> 등의 작품명이 발견된다. 특히 이러한 군담 소설들은 방각본으로 출판되었는데, <금령전>․<현수문전>․<소대성전>․<장경전>․<조웅전>․<유충렬전>․<양풍운전>․<장풍운전> 등이 그러하다. 더욱이 이러한 작품들은 사장된 작품들의 발굴과 함께 1910년대 이후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읽히게 되었다.
군담(軍談)소설에 대하여 ‘군담’ 즉, 전쟁이야기가 주된 줄거리가 되는 일련의 소설을 말한다. 임진․병자 양란 이후 발생하여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한글 소설의 한 유형이다. ‘영웅소설’과 ‘군담소설’은 영웅이 등장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것은 같으나 인물의 특성과 관련된 용어가 영웅소설이고 군담소설은 특히 군담이라는 소재의 공통성에서 수립된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군담소설은 17세기,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사회 전체에 충격을 초래한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때가 군담소설 제1기이다. 제1기 군담소설은 실재한 역사적 사실들을 담고 있다. <임진록>․<임경업전> 등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제2기 군담 소설은 17~18세기에 창작된 군담 소설들이다. 예술적인 환상과 허구에 기초하여 창작된 작품들을 이른다. 점차 군담에 충신과 간신 사이의 갈등, 본처의 자식과 계모 사이의 갈등, 남녀의 만남에 기연기봉(奇緣奇逢) 구성이 많다. <소대성전>․<조웅전>․<유충렬전>․<이대봉전>․<현수문전>․<황운전> 등이 2기에 해당한다. 이들 작품들은 방각본으로 출간되었다. 제3기는 구활자본소설이 등장하면서 나타난다. <홍계월전>․<김진옥전>․<장국진전>․<권익중전>․<곽해룡전> 등이 이에 속한다. 군담소설들은 대부분 플롯의 유사성이 두드러지는데,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영웅적 활약을 드러내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입신하게 되는 일대기적 구성에 그 특징이 있다. 군담 소설의 작가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조선조 사회 후기에 형성된 몰락 양반 또는 중인 계층으로 추측된다. 또한 인쇄, 대여 등의 상업적 집단의 발달로 보아 부녀자, 평민 등 다양한 독자층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충렬전>의 줄거리를 보자.
중국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1488~1505)에 주부(主簿) 유심(劉尋)의 아들 충렬은 골격이 준수하고 문장과 병법에 통달하였다. 유충렬의 아버지는 간신 정한담(鄭漢潭)과 최일귀(崔一貴)의 모반심을 충간하다가 오히려 연북(燕北)으로 유배된다. 한편 정한담 일파는 후환이 두려워 충렬의 집을 불지르고 모친까지 살해한다. 그 후 충렬은 강승상(姜丞相)에게 구원되어 그의 사위가 되나, 장인 역시 천자에게 충간하다가 유배당하자, 자신은 도승 밑에서 수학하면서 후일을 기다린다. 마침내 충렬은 정한담이 호국(胡國)과 밀통하여 황성(皇城)을 쳐서 천자를 사로잡고 항복을 받으려 할 때 반군을 쳐 없애고 나라를 바로잡는다.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이 된 유충렬은 아버지와 장인도 구하고 부귀공명을 길이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유충렬전>은 주인공과 그 가족의 고행 및 군담(軍談)을 엮은 영웅소설의 하나이다.
<유충렬전>은 <주몽신화(朱蒙神話)>에서 이미 그 구조가 확립된 영웅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전형적인 귀족적 영웅 소설로서 <조웅전>과 함께 조선후기 영웅 소설과 군담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적 구조를 가장 충실히 유지하고 있는 이런 유형은 주몽신화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소설에까지 이어져 이인직의 <혈의 누>에서 미약하나마 재생되고 있다.
천상계의 예정에 의한 지상계의 모든 갈등과 그 해결, 집단적인 공동선(共同善)인 충(忠)이라는 교리의 추구, 개인적인 이익보다 공동선을 앞세우는 공동체적 인물상 등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와 아울러 주인공의 행위는 실세 회복 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한담과의 정책 대결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유심의 가문이 유충렬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다시 세력의 회복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유충렬의 고난과 시련, 전란 속에서의 충성과 그에 따른 부귀영화를 통해 실세한 양반 계층의 권력 회복의 꿈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현직 고위 관리 유심의 외아들로서,
(나) 부모가 산천(山川)에 기도하여 늦게 얻은 아들이며,
(다) 천상인(天上人)의 하강(下降)이기에 비범한 능력을 지녔고,
(라) 간신 정한담의 박해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마) 구출자인 강희주를 만나 그 사람의 사위가 되고, 다시 도승을 만나 도술을 배운 다음 (바) 정한담이 외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사) 그 위기를 극복하고 고귀한 지위에 올라 부귀를 누렸다.
특히 <유충렬전>의 첫 부분에는 출생 과정에서 유충렬이 천상계(天上界)에서 자미원 장성으로서 익성(정한담)과 싸운 바 있다는 작품 전체의 전개에 대한 복선(伏線)을 제시하여 두 인물이 지상계(地上界)에서 대결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보자.
유충렬은 전형적인 영웅상이다. 자신에게 닥치는 대부분의 고난을 극복하지만 천신의 도움도 많이 받는다. 국가에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는 충신의 전형이다.
충렬의 모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여인으로 의지가 굳세다.
정한담과 최일귀는 간신과 악인의 전형이다. 고소설에는 악인이 참 많이 나온다. 하기야 인간으로서 DNA가 같다고 모두 인간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 저들의 악행은 참으로 악인답다. 이들을 당쟁에서 패배하여 권세를 잃은 계층의 의식을 대변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심과 강승상은 충신의 전형으로 가문이 몰락하는 비운을 겪는 것을 당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사람들의 소망을 반영된 인물로 읽을 수 있다.
이를 도표하면 아래와 같다. 대부분의 군담소설들은 이 구조에 지명이나 이름만, 부수적인 인물만이 다르다.
↱ 유충렬측(선인형)
↳ 정한담측(안인형)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토록 단순하지 않다. 선악이 분명한 사람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인물이지 결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작가에 의해 창조되었고, 여기에는 당대 작가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유충렬전>에는 또 여러모로 당대의 현실이 반영되어있다고 본다.
이 소설의 성공 배경에는 병자호란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가달의 정벌을 둘러싼 유심과 정한담의 대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와 반대파인 주화파의 대립, 호국(胡國)에 의해 황제의 가족들이 포로가 된 것은 강화도의 함락으로 왕실의 인물들이 포로가 된 것을 뜻한다. 또 유충렬이 단신으로 호국을 정벌하고 통쾌한 설욕을 한 것은 병자호란 때 당한 고통과 패배 의식을 소설을 통해 복수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임경업전>이나 <박씨전>과 그 맥을 같이한다.
다만 <조웅전>에서도 보았지만 유충렬의 잔인함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유충렬전」이 비교적 중기의 군담소설이기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오랑캐(호)에 대한 적개심이 아직 팽배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오랑캐 왕의 간을 꺼내어 씹어 먹는 엽기적인 모습에 일반 백성들까지 잔인하게 제거하는 유충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원수 분심을 못이기여 번개같은 장성검으로 호왕을 두 쪼각을 내여 간을 끄내 입에 넣고 씹은 후 성중에 들어 가 약간 남은 군사를 다 죽이고 그 중의 사오 명만 살리어 길을 인도하라 분부하고”
(북한고전문학총서 유충렬전 20권, 태학사, 1994.)
한 가지 더 짚으며 이 글을 마친다.
정한담과 당쟁에서 패배한 유심의 집안이, 유충렬에 와서 옛날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당쟁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사람들의 소망을 투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곧 유심의 그룹을 충신으로 설정하고 정한담의 그룹을 역적으로 설정한 작자 의식은 바로 당쟁에서 패배한 실세층의 의식을 대변한 것이다. 참고로 <유충렬전>은 정한담을 생포하는 고장과 유충렬이 강낭자와 결연하는 과정이 <설인귀전>과 유사하다.
저 시절도 그러했겠지만 지금도 정치권의 파당과 사리사욕은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이다. 저러한 작태가 고유한 한국인의 풍토병임을 이 고소설을 읽어 앎을 한 재미로 여겨야 될 지는 잘 모르겠다.
<춘향전>
2000에 개봉한 감독 임권택, 이효정, 조승우 주연의 <춘향뎐> 포스터.
완서계서사에서 간행한 <열여춘향슈졀가>를 비교적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그동안 <춘향전>은 1923년 일본인 감독 (早川孤舟)에 의해 한국 최초로 제작된 이래 16번이나 만들어 졌다. <춘향전>은 영화 외에도 희곡, 창극, 텔레비전 등 다양한 매체로 수차례 만들어졌다. 물론 거의 흥행성에서 성공하였으니, 그 재현 대상과 재현 방식이 다를지라도 <춘향전>이 상업적인 가치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변강쇠전>도 영화로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춘향전>과 비할 바 못 된다.
<심청전>
처량 교과서라 불린 <심청전>
<심청전>은 국문 필사본이 144 편에, 국문 방각본이 79 편, 국문 활자본이 34 편이나 된다. 국문 소설 중, 이본으로 단연 4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고소설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이다.
<심청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거타지, 인신공회, 맹인 득안 등의 전래한 설화를 창극화한 판소리를 다시 소설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설화를 소설화한 작품은 민중에 의해 첨삭되기에 이를 ‘적층적 성격’이라 부른다.
<심청전>은 희곡적으로 결구되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의 제수(祭需)가 될 때까지이며, 후반은 환생하여 왕비가 되어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가 다시 눈을 떠서 행복하게 살 때까지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에다 유교의 효, 도교의 신선 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조가 <강상련>이라는 신소설로 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몇 마디를 첨부해야겠다.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20세기 초엽 신교육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하였던 신소설 작가이다. 그는 <자유종>에서 “춘향전은 음탕 교과서, <심청전>은 처량 교과서요, 홍길동전은 허황 교과서”라고 폄하하였다. 그리고 <춘향전>을 <옥중화>로 <심청전>을 <강상련>으로 개작하였다. 이 신소설 <심청전>은 광동서국에서 4판까지 신구서림에서는 11판까지 찍어냈으니, 그 인기를 어림직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조가 개작하였다는 ‘강물 위의 연꽃’ <강상련(江上蓮)>은 충남 서생 출생으로 개화기 가야금 병창의 명인인 심정순(沈正淳,1873~1937)의 구술을 그대로 받아 적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정순 창본 <심청가>와 이해조의 <신소설>에서 다른 점은 이해조가 허두 부분만 소설적으로 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보면, 이해조가 그렇게 <심청전>을 처량 교과서라고까지 폄하할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그가 ‘신소설’로 쓴 것이 실은 고소설 <심청전>과 이웃한 판소리 <심청가>를 받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에 말이다.
따지고 보자면 모든 세상사가 다 이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옛것을 배워 이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세상의 정연한 이치이다.
<심청전>의 이본은 상당수가 있는데 그 중, 전주에서 간행한 완판본만 6종이나 되고 그것도 여러 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주 지방에서 <심청전>의 인기를 이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심청전> 내용이야 다들 알겠지만 그래도 몇 자 적어 본다.
황주 도화동의 심학규와 곽씨 부인은 기자정성을 하여 딸 심청을 낳았다. 그런데 심학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였고, 곽씨 부인은 청을 낳은 후 몸조리를 잘못하여 죽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의 인품을 기려 장례를 치러주며, 젖동냥을 다니는 심봉사를 측은히 여겨 청에게 젖을 먹여 준다. 심청은 잔병 없이 성장하여 육칠 세가 되자 아버지를 앞에서 인도하기에 이르고, 십일세가 되자 인물과 효행이 인근에 자자할 정도이다. 십 오세에 이르러서는 길쌈과 삯바느질로 아버지를 극진히 공양한다. 인물이 뛰어나고 재질이 비범한 청을 장승상 부인은 수양딸로 삼고자 하나 청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거절한다. 어느 날 늦게 돌아오는 딸을 마중나간 심학규는 개천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때 그곳을 지나던 몽운사 화주승이 그를 구해주고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고 귀뜸해준다. 이후 심학규는 자신의 어리석은 약속으로 고민한다. 이를 알아차린 청은 남경 상인들에게 자신의 몸을 판다, 청은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대가로 받은 공양미 삼백 석을 몽운사로 시주하고, 아버지에게는 장승상 댁의 수양딸로 팔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배가 떠나는 날이 되자 청은 승상 부인을 찾아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한다. 뒤늦게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심학규는 원통해 하지만 별 수가 없다. 인당수에 당도한 남경 상인들은 제를 올린다. 청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걱정하면서 인당수에 뛰어든다. 바다 속에서 청은 용궁으로 모셔지며, 후한 대접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곽씨 부인을 만난다. 꿈같은 용궁생활을 하다가 청은 연꽃을 타고 인간계에 나온다. 남경 상인들은 귀국하던 도중에 바다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한다. 그 연꽃을 건진 남경 상인들은 상처한 송 천자에게 이를 바치는데 그 꽃 속에서 청이 나온다. 천자는 청을 황후로 맞아 대례를 치른다. 청은 행복한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일이 걱정이 되어 전후 사정을 말하며, 천자는 맹인 잔치를 벌인다. 뺑덕어미와 살던 심학규는 잔치 소문을 듣고 황성으로 떠난다. 도중에 뺑덕어미의 농간으로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경한 심학규는 맹인 잔치에서 황후가 된 청을 만나 눈을 뜨고 부원군에 제수된다.
<심청전>에 대한 기록은 이미 조수삼의 추재집에도 보인다. “전기수는 동문 밖에 살고 있다. 언과패설(국문소설)을 구송하는데, <숙향전>․<소대성전>․<심청전>․<설인귀전> 등의 전기이다.”라는 대목이다. 이때가 이미 19세기를 전후이다. 그렇다면 조선후기 독서대중은 왜 이 <심청전>을 읽었을까?
<심청전>의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불공에 따른 극락왕생 또는 불교적 재의(齋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대체로 심청의 효를 주제로 보고 있다. 고종 때 진주부사를 지낸 정현석(鄭顯奭)은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 “<심청가>는 눈먼 아비를 위해 몸을 팔았으니 이는 효를 권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효의 성격에 대해서 논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주제에 대한 강조뿐 아니라 작품 중에는 당시 하층민이 겪어야 했던 가난과 가치관의 소멸로 평범한 의미의 효도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나 심청은 효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래서인지 경판본 <심청전>에는 뺑덕어미가 나오지 않는다. <심청전>에서 뺑덕어미는 15살 먹은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판돈을 심봉사를 갖은 꾀로 꾀어서는 몽당 써버리고 황봉사와 함께 줄행랑을 놓는 마음보 고약한 여인이다. 이본마다 다르지만 완판 71장본 <심청전>에서 이 뺑덕어미의 품성을 어림짐작하고 효 문제로 넘어 가겠다. 열다섯 어린 몸을 판 돈이 뺑덕어미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심봉사에 의해 저렇게 없어진다.
마을 사람들이 심맹인의 돈과 곡식을 착실히 늘려서 집안 형편이 해마다 늘어갔다. 이때 그 마을에 서방질 일쑤 잘하여 밤낮없이 흘레하는 개같이 눈이 벌게서 다니는 뺑덕어미가 심봉사의 돈과 곡식이 많이 있는 줄을 알고 자원하여 첩이 되어 살았는데, 이년의 입버르장머리가 또한 보지 버릇과 같아서 한시 반 때도 놀지 아니하려고 하는 년이었다. 양식 주고 떡 사먹기, 베를 주어 돈을 받아 술 사먹기, 정자 밑에 낮잠자기, 이웃집에 밥 부치기, 마을 사람더러 욕설하기, 나무꾼들과 쌈 싸우기, 술 취하여 한밤중에 와 달싹 주저앉아 울음울기, 빈 담뱃대 손에 들고 보는 대로 담배 청하기, 총각 유인하기, 온갖 악증을 다 겸하였으되, 심봉사는 여러 해 주린 판이라, 그 중에 동침하는 즐거움은 있어 아무런 줄 모르고 집안살림이 점점 줄어드니, 심봉사가 생각다 못해서 물었다.
"여보소, 뺑덕이네. 우리 형편 착실하다고 남이 다 수군수군했는데, 근래에 어찌해서 형편이 못 되어 다시금 빌어먹게 되어 가니, 이 늙은 것이 다시 빌어먹자 한들 동네 사람도 부끄럽고 내 신세도 악착하니 어디로 낯을 들어 다니겠는가?"
뺑덕어미가 대답한다.
"봉사님, 여태 자신 게 뭐요? 식전마다 해장하신다고 죽 값이 여든두 냥이요, 저렇게 갑갑하다니까. 낳아서 키우지도 못한 것 밴다고 살구는 어찌 그리 먹고 싶던지, 살구 값이 일흔석 냥이요, 저렇게 갑갑하다니까." (완판 71장본 <심청전>)
‘서방질 일쑤 잘하여 밤낮없이 흘레하는 개같이 눈이 벌게서 다니는 뺑덕어미와 딸을 잃고도 저런 뺑덕어미와 동침하는 즐거움 때문에 집안살림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는 심봉사의 모습이 그려진 대목이다. 이러한데도 이 <심청전>을 효로 읽어야할까? 좀 떨떠름하지 않은가.
그래 효에 대해서 좀 짚어봐야겠다.
‘동방의 예의지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는 일찍이 이 효에 대한 문헌기록을 쉽게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지금의 대학격인 국학(國學)에서 『효경』 이 필수과목이었고, 『삼국사기』에 보이는 <향덕(向德)>․<효녀 지은(知恩)>․<설씨녀(薛氏女)>․<탁영전(卓英傳)> 등이 모두 효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중, 가장 엽기적인 효 이야기인 <탁영전>과 개화기 소설인 <신단공안>3화 두 편만 보자.
<탁영전>은 경상도 고령 땅에 살았던 탁영과 그의 부인인 송씨의 효를 기린 전이다. 내용은 이렇다.
이들 부부의 노모가 병이 깊은데, 한 중이 와서 9대 독자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고 한다. 그러나 9대 독자는 오직 절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부부의 아들 밖에는 없었다. 부부는 아들을 집으로 불러 자는 틈에 그 어미가 간을 꺼내어 노모에게 먹인다. 물론 노모의 병은 낫고 어미는 슬픔에 잠긴다. 몇 개월 후 죽은 아들이 살아 나타나고. 이 때, 중이 다시 등장하여 효성에 감동한 천지신명이 아들의 형용을 만들어 준 것이라 한다. 이러한 내력이 있는 효자의 비각을 내가 보고 탁효자와 송씨부인 같은 이는 세상의 ‘사표’가 됨직하여 세상에 알린다는 내용이다.
자식의 간을 꺼내어 노모의 병 치료에 쓴다는 부부의 엽기적 행위도 그렇지만, 이를 비각으로 새기고, 또 그 내용을 모든 이들이 본 받아야한다는 ‘사표(師表)’라는 말에 더욱 소름끼친다. 어찌 저 부모를 세상 사람들이 따라야할 ‘모범 인물’인 사표로 보아야한단 말인가.
<신단공안>3화는 악승의 음란으로 빚어진 살인 사건과 효녀의 살신성인을 다룬 개화기 소설인데, <탁영전> 못지않게 섬뜩하다. ‘신단공안’의 뜻은 ‘범죄사건[公案]’을 ‘귀신처럼 해결한다[神斷]’는 의미로, 1906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한문현토체 소설이다. 모두 일곱 작품이 옴니버스식으로 실려 있는데, 이 3화는 그 중 한 편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순조 때 공주에 최창조라는 이가 부인 황씨와 혜랑이란 딸과 살았다. 창조의 아우 창하는 아름다운 김부인과 살다 요절하고, 김부인은 일청이란 중을 불러 남편의 영혼을 달래게 한다. 사단은 여기서 일어난다. 이 일청이란 중이 하라는 염불은 안 하고 미망인인 김부인을 탐하게 된다. 그러나 김부인이 응하지 않자 죽여서는 목을 잘라가지고 절로 사라진다. 죄는 뜬금없이 시아주버니인 최창조가 뒤집어썼고, 고문을 이기지 못한 창조는 허위자백을 한다. 사건이 상급관청으로 넘어가고, 피살자의 목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겨 잘린 머리만 찾아오면 죄를 면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일청이 숨겨 논 김부인의 머리를 찾을 수 없고, 급기야 창조의 딸 혜랑이 자기의 목을 어머니에게 잘라 달라하여 관청에 바친다. 사건의 중대성을 파악한 관가에서 다시 수사하여 중 일청을 잡고 효녀의 정문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제 목을 잘라 아버지의 무고한 옥사를 해결한 효녀 이야기이다. 효가 저토록 변질되었으니, 엽기라 아니할 수 없다.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다
이 효는 고려 말 『명심보감』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한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륜행실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발간, 반포되었다. 『삼강행실도』에 는 글을 모르는 이들도 보라고 글과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어머니의 악창을 치료하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는 향덕(向德)은 가벼운 경우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황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제 몸을 공양미 300석에 팔아 인당수의 제물로 바치는 극단의 효의 표본 심청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효를 강조하게 된 데는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여성은 임진․정유왜란(1592년,1597년)과 정묘․병자호란(1627년, 1636년)을 거치면서 더욱 옥죄어 들었다. 조선은 미증유의 전란과 명의 멸망, 청의 건국 등 주변국의 소란스런 흥망과 나란히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집권층은 조선식 성리학을 중심으로 더욱 체제를 공고화하였다. 지배질서 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으로 삼강오륜의 강화와 효자, 충신, 열녀에 대한 포상, 과거제에 의한 양반 가문 중심의 정치인 양성, 그리고 명에 대한 춘추대의와 북벌책 등을 집요하게 폈다. 그 중 하나가 극단의 효였다.
사실 이황(李滉, 1501~1570) 선생까지만 해도 효가 이정도로까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이황 선생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자(慈)이고, 자녀가 부모를 잘 받드는 것이 효(孝)이다. 효자의 도리는 천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선(善)의 으뜸이 된다.”라는 정도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물론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즉 ‘내 몸과 피부와 터럭(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어 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마침이라’고한 것에도 어긋남은 물론이다. “순(舜) 임금이 아버지 고수(瞽瞍)에게 하듯”이란 말이 있다. 순의 아버지 고수와 계모는 순을 학대했다. 아버지 고수는 순을 매일같이 때렸는데, 순은 참고 맞다가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갔다. 그것은 큰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 아버지에게 불효가 될까 해서였다고 한다.
<심청전>에서 효를 잃게 보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소효(小孝)라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대효(大孝)를 어긴 셈이다. <열녀전>에서 남편을 따라 죽는 자학의 열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의 못된 가치가 깔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심청전>을 읽는 것은, 파리대가리만한 검은 활자에 박혀있는 저러한 못된 사회적 억압을 찾는 독서여야만 한다. 15살짜리 딸자식을 팔아 눈을 뜬다는 소설은 다시는 없어야한다.
효에 대한 흥미로운 결과 하나
마지막으로 효의 대상에 대한 흥미로운 결과가 있어 하나 소개한다.
효의 대상을 조사해보니 아들과 아버지가 35%, 아들과 어머니가 43%, 딸과 아버지가 8%, 딸과 어머니가 6%로 나타났다.(차준구, 「한국 전설에 나타난 효의 문화정신의학적 고찰」, 『신경정신의학』18~1(별책), 1979, p.82.) 이 논문에서는 효를 심리학적으로 살펴 효의 1차적 동기를 근친상간 즉, 이성(異性) 부모에 대한 사랑과 그 죄의식에 의한 자기처벌적인 요소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그렇듯 동양에서 이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기에 꼭 맞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효를 동양 사상의 중심 덕목이라 여기는 것은 예로부터 면면히 내려오던 정신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심청전>처럼 딸이 부모에게보다는 아들이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이러한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치마폭 아이인 ‘마마보이’라는 말은 있지만, ‘파더걸’은 없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하지 않을까한다.
어찌됐든 <심청전>의 효는 현대인들에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준다.
<오륜행실도>의 ‘석진단지’.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의 주인공인 유석진은 조선왕조 때 고산현의 아전이었는데, 부친이 악질에 걸려 날마다 발작하여 기절하니 사람으로서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석진은 밤낮으로 모시기를 게을리 않고 사방으로 의원과 약을 구하다가 그 병에는 산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무명지를 잘라 지시대로 하니 부친의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것이다. 화면에 두 채의 집을 크게 그렸는데, 뒷채에는 아버지가 기절하여 누워있고, 앞채에서는 석진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있다. 초가집 지붕의 황색과 수목의 녹색과 윤곽을 그린 검은 색이 강렬하게 대비되어 화면을 다채롭게 구성하고 있다.
<적벽가>
“남의 옷으로 깃을 장식하는 까마귀다.”
이 말은 하바드 스펜서가 영국의 세익스피어를 공격한 말이다. 세익스피어는 외국의 설화나 작품에서 취재하여 많은 명작을 남겼다. 하바드 스펜서는 바로 이러한 세익스피어의 다른 작품 차용을 못마땅해 한 것이다. 독일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인 <파우스트>는 유명한 작품만도 5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 독일전설인 <파우스트>을 차용한 여러 작품 중 하나다.
우리 고소설에 이러한 견해가 있는 것이 <적벽가>라는 판소리계소설이다.
<적벽가>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 또는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 ~ 1884)가 이를 고쳐 지은 판소리의 이름이다. 이 <적벽가>는 완판본으로 <화용도(華容道)>라는 소설이다. 하지만 신재효의 작품인 <적벽가>는 이전의 완판본인 <화용도>와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우선 <화용도>가 사건이 주가 되고 인물이 종이 되는 반면, <적벽가>는 인물이 주가 되고 오히려 사건이 종이 된다. <적벽가>는 이렇게 사건을 적게 다루면서도 이에 등장하는 인물의 심리 표현과 행동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반면 <화용도>에서는 평면적인 사건만을 길게 나열할 뿐 인물의 심리 묘사가 등한시 되고 있다. 즉 <적벽가>는 삼고초려, 장판교 대전, 동남풍 비는 것, 적벽 대전, 화용도 패주 등의 삽화는 <삼국지연의>에 있는 것이지만 원작의 내용을 상당한 정도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군사설움’과 ‘군사점고’ 등이 그렇다. 학자들은 <적벽가>가 <화용도>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여기서 찾는다.
다만 유의할 것이 있어 몇 마디 더 얹는다.
<적벽가>는 판소리와 가깝고, <화용도>는 소설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곤란하다. <적벽가>라한 것 중에도 소설화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화용도>라 이름 붙여진 것 중에서도 판소리를 지향하는 교차 현상도 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옛날에는 판소리 사설을 <화용도타령>이라고 부르기도 했었기에 이 이분법은 실상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적벽가>라 함은 <화용도>를 포함한 것을 지칭한다.
판소리 <적벽가>가 생겨난 경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어느 경우도 가능하다.
㉠<삼국지연의>→적벽대전을 그린 소설→판소리 <적벽가>
㉡<삼국지연의>→판소리 <적벽가>→적벽대전을 그린 소설
대충 <적벽가> 줄거리를 들어보자면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 삼고초려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하여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500도부수를 거느린 관운장을 만나 구차스럽게 목숨을 빌어 화용도를 빠져나가는 장면까지이다.
이와 같이 <적벽가>는 분명 <삼국지연의>를 모태로 하여 지어진 작품이나, <삼국지연의>에 없는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기존의 인물을 변화시키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영웅들의 쟁패인 만큼 보통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벽가는 이름 없는 병사들을 다수 등장시켜 그들의 사연을 토로하게 한다.
또 조조를 소심하고 비겁한 인물로 희화화하여 매우 희극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다. 조조의 모사인 정욱은 마치 <춘향전>에서 ‘방자’와 같은 인물로 변용시켜 이러한 조조를 한껏 비웃는다.
언급했다시피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와 대치하여 싸우던 적벽대전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변용한 것이라 하였다.
아래 부분은 <적벽가>중 유명한 군사 설움 대목으로, <적벽가>의 원전인 <삼국지연의>에는 없다.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와 대치하여 일전을 벌이기 직전의 상황, 이른바 적벽대전의 전야에 조조의 군사들이 제각기 설움을 늘어놓는다. 이들의 설움은 고향의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전쟁터에 나온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이어서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설움이다. 더욱이 이들은 다음 날이면 제갈공명의 동남풍을 이용한 주유의 화공에 죽거나 부상당할 운명이어서 그 슬픔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또한 반전사상이 나타나 있는 것도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애 정욱아 날 보아라, 목 있느냐?"
아래는 신재효본 <적벽가>의 한 장면이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하여 도망하다 어리석게도 화용도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조조가 한참 도망타가, 장비 점점 멀어지니 방정을 또 내떨어,
"이애 정욱아 날 보아라, 목 있느냐?"
"목 없으면 말하겠소?"
"장비가 홀아비냐?"
"좋게 아들 낳아 장포(張苞)도 명장이라우."
"그 낯바닥 검은 색과 그 눈구멍 흰 고리에 어떤 계집이 밑에 누어 쳐다 볼거나. 내 통이 크지마는 만일 꿈에 보았으면 정녕 지녈키제."
말하며 가느라니 앞에서 가던 군사 아니 가고 품(稟)을 하여,
"앞 길이 두 갈랜데 큰 길은 좋사오되 형주(荊州)로 가자 햐면 오십 리가 더 있삽고 작은 길 화용도(華龍道)는 오십 리가 없사오니 산이 험코 길이 좁아 구렁텅이 많사옵고, 산등에서 내가나니 어느 길로 가오리까?"
"화용도로 들어가자."
제장이 여짜오되,
"내가 나는 곳에 정녕 복병 있을 테니, 왜 그리 가자시오?"
"병서 아니 읽었느냐? 허즉실 실즉허(虛則實 實則虛)라, 제갈량이 얕은 소견 산머리에 연기 피워 복병이 있는 듯이 내가 그리 아니 가고 큰 길로 갈 것이니, 큰 길에 복병하여 꼭 잡자 한 일이나 내가 누구라고 제 잔꾀에 넘겠느냐? 잔말 말고 그리 가자."
제장이 추어,
"승상의 묘한 국량(局量) 귀신도 알 수 없소."
옆에 따라오는 군사 입바른 말을 하여,
"왜 저렇게 알거드면 황개의 사항서(詐降書)와 방통(龐統)의 연환계(連環計)에 그리 몹시 속았는고. 살망을 저리 떨고 무슨 재변 정녕 나제."
앞에 가던 말과 군사 아니 가고 자저(자저)하니 조조가 재촉하여,
"왜 아니 간다느냐?"
군사가 여짜오되,
"산은 험코 길 좁은데 새벽 비가 많이 와서, 구렁에 물이 괴고 진흙에 말굽 빠져 암 만해도 갈 수 없소." 조조 호령 크게 한다. "군사라 하는 것이 산 만나면 길을 파고, 물 만나면 다리 놓아 못 갈 데가 없는 것을 수렁에 물 괴었다 지체를 한단 말가?"
군사를 동독(董督)하여 길가에 나무 베어 깊은 구렁 높이 메우고 좁은 길 넓힐 적 에, 장요 허저 서황 등은 칼을 쥐고 옆에 서서 게으른 놈 목을 베니, 상창기곤(傷瘡飢困) 남은 군사 밟혀 죽고 칼에 죽고, 날은 차고 배는 고파 손 발 시려 우는 말이, "
적벽강에서 죽었더면 죽음이나 더운 죽음, 애써서 살아 와서 얼어 죽기 더 섧구나."
처량한 울음소리소리 산곡이 진동하니 조조가 호령하여,
"죽고 살기 네 명이라 뉘 원망을 하자느냐."
우는 놈은 목을 베니 남은 군사 다 죽는다. 처량한 울음소리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니, 엄동설한 이 시절에 새가 분명 없을 터나 적벽 오림 호로곡(葫蘆谷)에 원통히 죽은 군사 원조(寃鳥)가 되어 나서 조조의 허다 죄목(罪目) 조롱하여 꾸짖는다.
벽오서로봉황지(碧梧棲老鳳凰枝) 저 봉황이 꾸짖는다.
"편체문장(遍體紋章) 이내 몸이 덕(德)빛 보고 내려오다 남훈전(南薰殿) 소소 풍류(簫韶風流) 날아 내려 춤을 추고, 기산(岐山) 아침 날에 날아가서 울었더니 너같은 역적놈이 천하를 탁란키로 세상에 못 나가고 이 산중에 숨었노라."
월상비취(越裳翡翠) 무소식 저 비취가 꾸짖는다.
"문 무 주공 성인덕화(聖人德化) 천무열풍음우(天無烈風淫雨)키로 교지남(交趾南)에 월상씨(越裳氏)가 공 바치러 가올 적에 이 몸이 따라가서 좋은 상서(祥瑞) 되 었더니 너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 인군(人君)을 구박하여 천시재변(天時災變) 종종 하니 이 산중에 숨었노라."
자고비상월왕대(자고飛上越王臺) 저 자고가 조롱한다.
"여보소 조맹덕아, 불의지사(不義之事) 저리 하고 자네 부귀 오랠손가. 동작대 봄 바람에 이교녀는 간 데 없고 낙목한천(落木寒天) 슬픈 바람 내가 올라 춤을 추세. 산량자치 시재(山梁雌雉 時哉)로다. 끌끌 우는 저 장끼 나의 뜻이 경개(耿介)하 고 오색 문채(文彩) 고운 고(故)로 우리 임금 곤의수상(袞衣繡裳) 나의 형용 그 려 내니, 너 입은 홍포 위에 이내 몸 그릴 생각 생심(生心)도 먹지 마라."
농산앵무능언어(농山鸚鵡能言語) 저 앵무가 말을 한다.
"적벽강 패군들아, 너의 고향 어느 곳이고? 객사전장(客死戰場)했다 하고 일봉서(一封書)를 써서 주면 너의 집 도장(堵牆) 안에 날아가서 내 전하마
." 어사부중오야제(御史府中烏夜啼) 저 오작이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내 소리를 잊었는가. 월명성희(月明星稀) 깊은 밤에 요수삼잡(繞樹三잡) 높이 떠서 싸우면 망하리라 내 아니 일렀는가. 내 소리 안 믿다가 저 골이 웬 꼴인가."
까욱가욱 울고 간다. 상유황리심수명(上有黃리深樹鳴) 저 꾀꼬리 노래한다.
"객사전장(客死戰場) 저 장졸아, 너희 고향 잊었느냐. 너희 아내 너 기다려 네 얼굴 보려 하고, 사창전(紗窓前)에 졸다가 내 노래 한 소리에 꾸던 꿈 깨었다고 날 원망 을 하더구나. 꾀꼴롱 꾀꼴롱."
유작유소 유구거지(維鵲有巢 維鳩居之) 저 비둘기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사백년 한나라가 까치 집이 아니어든 공연히 뺏으려고 내 재조를 하려 하니 아무런들 될 것이냐. 꾸우륵 꾸우륵."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저 따오기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간신 행세 부끄러워 황개의 호통 소리 그리도 무섭던가. 홍포조차 벗었으니 나 입은 것 빌려 줄까. 따옥따옥."
각향청산문두견(却向靑山問杜鵑) 저 두견이 슬피 운다.
"사장백골(沙場白骨) 저 원혼아, 천음우습(天陰雨濕) 깊은 밤에 고국산천 바라보 며 추추(추추)히 우는 소리 나와 함께 불여귀(不如歸)라. 귀촉도 귀촉도."
저 쑤꾹새 조롱한다.
"욕심 많은 조승상아, 만종록(萬鍾祿) 좋은 고량(膏梁) 무엇이 부족하여 불의 지사(不義之事) 하려다가 기갈이 자심한가. 이 산중 적막하여 먹을 것 없었으니, 쑥국 이나 먹고 가소." 이리 가며 쑤꾹 저리 가며 쑤국. 저 비쭉새 조롱한다. "통일천하 너를 주랴. 아나 옜다 비쭉. 이교녀를 너를 주랴. 아나 옜다 비쭉. 협천사 (挾天子) 호령 제후 역적놈이 너 아니냐. 아나 옜다 비쭉. 짐살국모(짐殺國母) 족멸 충신(族滅忠臣) 네 죄목을 뉘 모르리. 아나 옛다 비쭉."
저 검정새 조롱한다.
"여보소 조승상아, 자네 형용 못 보거든 나를 보고 짐작하소. 볼수록 유복하지."
대가리 까딱까딱, 꽁지는 까불까불, 이리 팔팔 저리 팔팔. 비거비래(飛去飛來) 뭇새 들이 온 가지로 조롱하니, 조조 제 역(亦) 무색하여 한 말 대답 못하고서 먼 산만 바라볼 제, 수목 삼삼 깊은 틈에 은은히 섰는 장수 신장은 팔척이요, 붉은 낯 채수염에 가만히 서 있거늘 조조가 보고 깜짝 놀라 마하(馬下)에 떨어지니 정욱이 묻자오되,
"승상님 평생 행세 어양도 하 많아서 웃기도 하 잘하고 울기도 하 잘하고, 불시에 좋아하고 불시에 나자하니 측량을 할 수 없소. 즉금(卽今) 하는 저 재조는 남 도르 잔 궤술(詭術)이요, 적벽강 불에 간담(肝膽) 놀라 지랄병을 얻으셨소. 왜 공연히 앉 았다가 솔방울 모양으로 뚝 떨어져 굴러가오."
조조가 손을 들어 수풀 사이 가리키며 정신 없이 말을 하여,
"나무 사이 보이는 게 정녕 관공(關公)이제."
"승상님 혼 나갔소? 그것이 장승이오."
"얘야, 장승이면 장비(張飛)하고 일가(一家) 되냐?"
"십리 오리 표하자고 나무로 깎아 세우니 화용도 장승이오."
조조의 평생 행세 만만한 데 호기 내어 나무로 깎았으니 말 못할 줄 짐작하고 호령을 크게 하여,
"너, 그놈 잡아 오라."
그래도 장령이라 어쩔 수가 있나. 추운 군사 손을 불며 장승 빼어 들여 놓으니, 조조 소견 만만커든 적벽 오림 호로곡에 무한히 당한 분(忿)과 여럿에게 받은 욕을 만만한 장승에게 모두 풀자 시작하여, 봉초(捧招)하는 죄인같이 문목(問目)하여 묻는구나.
"살등(煞等) 너의 신이 공산의 노목으로 사모(紗帽) 품대(品帶)하였으니 무슨 벼 슬하였으며, 낯이 저리 붉었으니 웬 술을 그리 먹고, 눈을 몹시 부릅뜨니 홍문연(鴻門宴) 번쾌(樊쾌)러냐. 콧마루가 높았으니 한 고조의 후신이냐. 입 있어도 말 못하 니 예양(豫讓)의 탄탄(呑炭)이냐. 뱃바닥에 글 썼으니 손빈(孫빈)의 궤술(詭術)이 냐. 수염이 좋았으니 염참군(髥參軍)이 되려느냐. 뻣뻣 서서 절 안하니 주아부(周亞夫)의 군법이냐. 수림간(樹林間)에 우뚝 서서 대승상 가시는데 문안도 아니 하고 마 음 놀랜 죄가 만사무석(萬死無惜)이니 장찬(粧撰) 말고 직고(直告)하라."
조조의 행동과 정욱의 비아냥이 그려져 있는가하면, 군사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모습과 이러한 어리석은 조조에 대해 추운 날임에도 새들이 와서 꾸짖는다. 이 새들은 적벽 오림 호로곡에 원통히 죽은 군사들이 혼령이었다.
물론 조조는 제 꾀에 넘어가 이제 이 화용도에서 관우와 휘하 5백 명의 칼 든 군사를 만나게 된다. 이미 제갈공명이 이 화용도 좁은 곳 높은 뫼에 불을 놓아 간사한 저 조조를 연기로 유인하라고 관우에게 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라면 연기 보고 복병인가 짐작하고 그리 올 리가 없겠지만, 꾀 많은 조조는 제 꾀를 믿기에 허장성세라 하고 그리 올 것이라 짐작한 것이었다. 우리 속담에 자신만만하며 웃다가 언제 망신을 당할지 모른다는 ‘조조는 웃다 망한다’나, 지나치게 재주를 피우면 결국 그 재주로 말미암아 자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조조의 살이 조조를 쏜다’는 이러한데서 연유하였다.
항우는 고집으로 망하고 조조는 꾀로 망한다: 고집 세우는 사람과 꾀부리는 사람을 경계하는 말.
<적벽가>의 이본을 <화용도(華容道)>라는 함은 조조가 패주한 이 길 이름을 딴 것이다.
잃듯 <적벽가>는 <삼국지연의>에 없는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기존의 인물을 변화시켜 <삼국지연의> 영웅들을 보통 병사들로 변용하여 그들의 사연을 토로하게 한다. 이것은 판소리계 소설이 영웅 이야기가 아닌 민중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외국 문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서민 의식을 반영한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적벽가>는 크게 보아 삼고초려, 강능 피난, 박망파 싸움, 장판교 싸움, 군사 설움 타령, 적벽강 싸움, 화용도로 구성되는데, 바디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참조) 김현주 외, 『적벽가』, 박이정, 1998.
김현주 외, 『적벽가전집』1, 박이정, 1998.
<삼국지>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로 <수호전>․<금병매>․<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기서의 하나로 꼽힌다. ‘사대기서(四大奇書)’란, ‘네 권의 기이한 책’으로 명나라 때에 나온 네 권의 걸작 소설을 말한다. <금병매> 대신에 <비파기>를 넣기도 한다.
<삼국지>의 화려한 부활이다. 이 소설은 현재 컴퓨터 게임, 만화,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 진(晉)나라 때에, 진수가 지은 위·오·촉 삼국의 정사를 다룬 역사서 『삼국지(三國志)』는 이미 고구려시대에 들어 왔고, 소설로서의 <삼국지>인 원나라 때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고려시대에 들어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쓴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줄여 부르는 명칭으로 선조 초에 이미 들어왔다.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는, <전상삼국지평화>의 줄거리를 취하되 진수가 집필한 역사서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으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소설로 펴낸 작품이다.
이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는 이후 수많은 속본(俗本)들을 낳았다. 명나라 말기에 이지(李贄, 1527~1602)는 <삼국지통속연의>에 평을 붙여 <이탁오선생비평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를 만들었고 1679년(강희18년)에 모성산(毛聲山)과 모종강(毛宗岡) 부자가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기초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고 문체(文體)를 간결하게 다듬어 <삼국연의(三國演義)>를 간행하였다. 오늘날 번역되는 <삼국지>는 대부분 이 모종강 부자의 <삼국연의>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삼국지통속연의>가 1569년 이전에 유입되어 국내에서 출간되었으니 『조선왕조실록』(1569년 선조 2년 6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이때 출간한 판본은 명나라에서 1522년에 나온 <삼국지통속연의>가 아닌가한다.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과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도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에 출판된 판본이 제주도라는 점이다. 이 판본을 간행한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간기(刊記)에는 분명 “세재정묘탐라개간(歲在丁卯耽羅開刊”이라고 적혀있다. ‘세재정묘’는 1627년, ‘탐라’는 제주이고, ‘개간’은 처음으로 간행‘하였다는 뜻이다. 제목은 <신간교정고본대자음석삼국지(新刊校正古本大字音釋三國志)>이다. 숙종 때 간행된 <삼국지>는 <관화당제일재자서(貫華堂第一才子書)>, 20책이다.
<삼국지연의>를 번역하거나 번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진다. 물론 사대부만이 아니라 부녀자나 민간에서도 폭넓게 읽혔다. 그 방증 자료로는 <광운장실기>‧<장비마초실기대전>‧<조자룡실기:산양대전>‧<대담강유실기>‧<화용도실기>‧<적벽대전>‧<삼국대전>‧<몽결초한송:제마무전:마무전> 따위의 이본을 파생시킨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뒤에서 살펴 볼 시조나 소설, 속담 등에서도 <삼국지연의>는 도처에 등장할 만큼 우리 소설사뿐만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그 영향은 크다. 이렇듯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충효와 의리를 강조하는 조선의 유교적 지배이념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19세기 문인인 이우준(李遇駿,1801-1867)의 사대기서에 대한 평을 보자. 이우준은 사대기서에 대해서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금병매>이다. 이 소설은 서문경이 한 집안에 첩을 들였는데 방자하게 행하며 총애 받는 자가 각각 금(金), 병(甁), 매(梅)라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서로 투기하고 미모를 다투며 각각 13성의 지방말로 서로 희롱하였다. 이것은 한 집안을 예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두 번째는 <수호전>이다. 송강 등의 108명이 양산박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북두성과 지살성의 수에 응하여 탐관오리와 불의의 재물을 약탈하고, 산동을 교란시켰으며 천하를 횡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통제할 수 없었고 관군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으며 宛子城(완자성) 요아와(蓼兒洼)가 적국을 만들었다. 이것은 한 나라를 예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세 번째는 <삼국지연의>이다. 천하가 혼란하여 삼국과 같은 때가 없었다. 오, 위, 촉나라가 서로 대치하여 대신과 맹장이 비와 구름과 같이 많았다. 제갈량이 삼분을 잡은 것은 신기한 묘산이니, 그 설이 매우 많다. 이것은 천하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무릇 한 집안이면서 나라가 되고 천하가 되니 더욱이 더할 것이 없다. 작자가 허구를 가지고 가공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그 뜻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또 기이한 이야기가 있으니 <서유기>이다. <서유기>는 대체적으로 황당한 이야기이다. 당 태종이 위징에게 추천을 받아 도량을 지었다. 당시 법사는 삼장이었다. 그는 제자 손오공, 사승, 저팔계 등을 데리고 서역 천축국으로 가서 불경을 가지고 오면서 그가 겪은 81난의 일을 말한다. 소위 삼장은 사람의 몸을 말한 것으로 사람이 비록 체구를 가지고 있으나 마음을 쓰지 않으면 지각운동은 없어진다. 그러므로 손오공은 마음에 비유한 것으로 마음은 원숭이이다. 손오공은 원숭이의 화신이고 영대 방촌산 사월삼성동에서 태어났으며 시호는 제천대성이다. 한번에 18000리를 가고 여의봉을 사용하여 옥경을 어지럽혔고 향안을 때려 부수었다. 그는 진실로 방종하고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아무 때나 출입하는 자이다. 옥황상제가 신도로써 설교하고 그에게 긴고(緊箍:손오공 머리에 두른 테)를 채웠으며 오행산 석혈에 구금시켰다. 오행이라는 것은 인의례지신이니, 마음을 제어하는 것으로 이 같은 것이 없다. 소위 사승은 날뛰는 말로써 저팔계의 비유로 그를 욕망에 비교한 것이니, 이것은 대체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비록 우언으로 기탁하였지만 그 본의를 파고 들면 대단히 합리적이기에 사대기서라고 하였다. 『몽유야담』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소장본)
이 글로 미루어 보면 이우준은 사대기서를 통독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이렇게 중국소설에 대하여 상당한 독서수준을 보였다.
<소대성전>
소대성인가 잠만 자게
<소대성전>에서 소대성은 밤낮으로 먹는 것과 잠만 일삼는 위인이었다. 아예 이것이 우리의 속담으로 되었다. <소대성전>이 국문 방각본 중 최초의 간행이라는 연구도 있으니 그 인기를 어림작할 수 있다. 물론 <조웅전>․<유충렬전>과 함께 <소대성전>은 3대 군담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대성전>은 조선시대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까?
군담소설에 대한 최초기록은 대마도 역관 소전기오랑(小田幾五郞,1754~1831)의『상서기문(象胥記聞)』 ‘조선소설’에 보인다. 『상서기문(象胥記聞)』에 수록된 소설로는 <장풍운전(張風雲傳)>․<구운몽>․<최현전(崔賢傳)>․<장박전(張朴傳:<張伯傳>일 듯)>․<임장군충렬전(林將軍忠烈傳)>․<소대성전(蘇大成傳)>․<소운전(蘇雲傳)>․<최충전(崔忠傳)>․<사씨전(泗氏傳:<謝氏南征記>일 듯)>․<숙향전(淑香傳)>․<옥교리(玉嬌梨)>․<이백경전(李白慶傳)>․<삼국지> 등이다.
이때가 정조 18년 1794년이다. 이 시기가 군담소설 1기이다.
<소대성전>은 조선시대에 인기를 끌던 작품임은, 건너다보니 절터라고 이미 저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 고소설사에서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렸을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소설 중에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목판본으로 찍어낸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조동일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 <소대성전>은 1위인 <춘향전>, 2위인 <조웅전>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4위가 <구운몽>, 5위가 <심청전>임을 볼 때, <소대성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실감이 난다.
이옥(李鈺, 1760 ~1813)의 글(『담정총서』 권28, 「봉성문여」)에도 “긴 밤에 소일거리하라고 언패를 가져왔는데 <소대성전>이라고 씌어 있다.”라는 기록과 조수삼(1762∼1849)이 쓴 <추재집>을 보아도 그 인기를 알 수 있다. <추재집>에는 조선시대에 직업적으로 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받던 사람 즉, 전기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전기수는 동문 밖에 살고 있다. 한글로 된 소설들을 입으로 외는데, <숙향전>·<소대성전>·<심청전>·<설인귀전> 등이다.
낭독하던 소설 중에 <숙향전>․<심청전>과 <소대성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직업적인 낭독자인 전기수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골라 읽어서 관심을 끌고 소득을 높이려고 했을 텐데, 그 목록에 <소대성전>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람들이 듣기를 즐겼다는 것을 나타낸다.
<소대성전>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속담이 그것이다. <소대성전>에서, 자신을 알아주던 이 승상이 세상을 뜨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과거 공부도 그만두고 누워서 잠만 자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서 파생된 속담이라 하겠다. 이런 속담이 생길 만큼 당시의 독자들이 이 작품을 아주 광범위하게 읽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하겠다.
이제 <소대성전>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명나라 때 병부상서를 지낸 소양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영보산 청룡사 노승에게 시주를 하고 외아들 대성을 얻는다. 대성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내려온 인물로 어려서부터 비범했다. 부모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고아가 된 대성은 집을 떠나 품팔이와 걸식으로 연명한다.
청주 땅에 사는 이 승상은 한 기이한 꿈을 꾸고, 월영산 낚시터에서 잠자던 소대성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온다. 이 승상은 소대성의 인물됨이 비범한 것을 보고 딸 채봉과 약혼하도록 한다. 부인과 세 아들은 소대성의 신분이 미천함을 들어 혼인을 반대하다가, 혼례를 올리기 전에 이 승상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소대성을 박해하고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한다.
소대성은 자다가 자객의 침입을 도술로써 피하고, 집을 떠난다. 방황하던 소대성은 영보산 청룡사로 가, 노승의 도움으로 병법과 무술을 공부한다.
한편, 채봉은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는 어머니의 권고를 물리치고 소대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소대성이 청룡사에서 공부한 지 5년이 되는 해에 호국이 중원을 침공한다는 천문을 보고 이를 안 소대성은 노승에게서 보검을 받고, 이 승상이 꿈 속에서 지시한 대로 갑주를 얻고, 한 노옹으로부터 용마를 얻어 중원으로 떠난다. 소대성이 중원에 이르러 적군을 격파하고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 황제를 구한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소대성을 대원수로 임명하니 소대성은 호국 왕을 항복시키고 개선한다. 황제는 소대성을 노국왕에 봉한다. 노왕이 된 소대성은 청주로 가서 채봉을 맞아 인연을 성취하고, 노국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다.
소대성전의 이본은 현재까지 모두 49종이 전한다. 필사본 34종, 방각본 12종, 구활자본 3종이 남아 전한다. 군담소설인 <용문전>은 등장인물과 서사적으로 볼 때, <소대성전>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누군가가 <소대성전>을 읽고 속편을 지은 것이다.
필사본의 경우는 한 작품을 한 사람이 필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필사한 것도 있고, 개인이 필사해서 소장하던 것이 있는가 하면 전문 필사자에 의해 필사되어 세책가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대여해 주더 것도 있다. 필사본은 이처럼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돌려 읽혀지기도 했지만 방각본이나 구활자본에 비해서 대중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또 구활자본의 경우도 방각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윤문의 과정을 통해 출가된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현존하는 이본들은 대체로 19세기 후반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르러서 소대성전은 대체로 방각본의 형태로 독자의 기억 속에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방각본의 경우, 방각한 지역에 따라 경판본과 안성판본, 완판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울 지역에서 각판된 경판본은 총 7종으로 백순재 소장본과 국립도서관 소장본을 제외하면 모두 외국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성판본 1종은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완판본 4종은 우리나라에 있다.
경판본과 완판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알려졌으나, 지역적 특성과 수용층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전승되어 나갔다는 게 새로 밝혀졌다.
경판계는 상업적 여건에 의해서 인쇄본 중심으로 전승되었는데 일군은 판수를 줄여서 이윤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독자층에게 유통되었으며, 일군은 독자의 취향에 부합해 가면서 ‘영웅의 입공’을 중심으로 내용이 변모되어 갔는데 이들은 비교적 부유층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들 가운데 가장 흥행 가능성이 있는 이본은 활자화하여 유통되었다.
완판계는 내용이 부연되면서 장면이 확대되어 갔다. 지인지감에 의한 결연 부분이 주로 확대되면서 원수가 변하여 은인이 되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된 이야기로 정착되었다. 이 책에서 모본으로 삼은 것은 완판 33장본이다. 도남문고 소장본이다.
경판계와 완판계의 차이는 수용층의 차이에서 기인되는데 주로 중인과 상민을 대상으로 한 경판계의 경우는 방각본을 중심으로 유통되면서 19세기 후반에 흥행하던 영웅군담소설류의 구조와 의식에 경도되어 갔으며, 완판계의 경우는 ‘가난한 사위 박대형 설화’와 같이 원수를 은혜로 갚는 내용을 유지하면서 당대의 소설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소양을 갖춘 필사자에 의해서 개별적인 개작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두 계열은 오랜 기간 전승되면서 한편으로는 영웅군담 소설의 형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소설의 형태에 접근해 가면서 고전소설의 전승사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영웅적 삶을 그린 소설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인공의 영웅적 삶은 ‘영웅의 일생’이라는 영웅신화에서 추출된 서사유형을 근간 구조로 하고 있다.
영웅이란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개인의 이익이나 행복을 위해서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수행하고, 그 결과 집단의 추앙을 받게 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여 개인적 가치보다도 집단적 가치를 우선하여 실현하고 성공한 인물이 영웅이다.
영웅은 그가 소속한 집단의 범주에 따라 씨족의 영웅, 부족의 영웅, 민족의 영웅, 국민의 영웅으로 나눌 수 있고 특정 집단의 권익보다도 모든 인류를 위해서 공헌한 인물을 문화영웅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대체로 정형화된 삶을 사는데, 신화에서 추출된 영웅들의 일생은 ① 고귀한 혈통, ② 비정상적 출생, ③ 시련(기아), ④ 구출자에 의하여 양육됨, ⑤ 투쟁으로 위업을 이룸, ⑥ 고향으로의 개선과 고귀한 지위의 획득, ⑦ 신비한 죽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영웅의 일생은 일찍이 고구려 건국신화인 〈주몽신화>에서 구축된 것으로서 영웅소설에서도 계승되고 있는데, 임진·병자 양란을 거친 조선조 후기에 많은 영웅소설이 출현하였다. 영웅소설 작품으로는 〈소대성전>·〈장풍운전>·〈장백전>·〈황운전>·〈유충렬전>·〈조웅전>·〈이대봉전>·〈현수문전>·〈옥루몽>·〈남정팔난기>·〈정수정전>·〈홍계월전>·〈김진옥전>·〈곽해룡전>·〈유문성전>·〈권익중전>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외적의 침략이나 간신의 반란으로 인해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 조정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주인공은 명문대가의 후예로 천지신명께 기자치성을 드린 결과 잉태되어 탄생하며, 어려서 부모와 분리되어 고난을 겪다가 구출자를 만나고 도승을 만나 신이한 도술과 무예를 습득하고 국가 위기에 출현하여 국난을 평정하고 고귀한 벼슬을 받으며 헤어진 가족과 재회하여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영웅성은 바로 전쟁에서 발휘되는데, 군대의 지휘자로서 탁월한 무예와 뛰어난 지략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출하며, 국가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처럼 국가적인 공훈을 세울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 추구에도 소홀하지 않아 천상에서부터 정해진 배필과 인연을 성취하고 부모의 원수를 갚고 간신의 박해로 훼손된 가정을 복구하며 자손을 영귀하게 한다.
이처럼 한국 고전영웅소설은 국가 차원의 가치와 가정 차원의 가치를 아울러 실현하고 있다.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은 대부분 도선적 신비주의에 근거한 허황한 도술에 의존하여 주술적으로 전개되며, 왕권의 수호에 기여하고 그 보상으로 천자로부터 작록을 받는다. 따라서 주인공은 국권의 상징인 천자를 위하여 충성하는 종속적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이러한 작품은 주로 한글로 쓰여졌고 필사본·방각본·구활자본으로 유통되어 널리 읽혔다. 영웅소설이 출현하게 된 동인은 조선후기의 여러 가지 시대 상황과 관련을 가진다. 임·병 양란 이후 국난을 당할 때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국민의 기대가 확산되었다. 아울러 당쟁으로 권력투쟁만 일삼다가 국가 위기를 당해서는 무능을 드러낸 집권층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면서 백성들은 권력층의 갱신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전쟁소설 〈삼국지연의>가 전래되어 널리 읽히면서 무사적 영웅의 호쾌한 활약과 전쟁 이야기가 문학의 흥미소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한글이 보급되어 한글로 쓰여진 문학을 향유할 소설 향유층의 기반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 의식에 부응하여 영웅소설은 18세기에 출현하여 1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20세기 초까지 계속 창작되고 출판되었다.
영웅소설은 주인공이 남성인 작품과 여성인 작품, 그리고 남녀 영웅이 함께 등장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소대성전>·〈조웅전>·〈유충열전>·〈장백전> 등은 남자 주인공이 활약하는 작품이고, 〈옥루몽>·〈황운전>·〈이대봉전>·〈권익중전> 등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모두 장수로 등장하여 전란을 평정하는 활약을 하며, 〈정수정전>·〈홍계월전> 등에서는 여성 영웅이 남성보다도 우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평민들이 탐독하던 대중소설로서, 조선후기의 문학적 관습과 평민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소대성전>은 영웅소설의 일종이다.
이른바 다음과 같은 ‘영웅의 일생’이라고 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일생’은 모두 7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대성의 일생도 이 7개의 단락으로 잘 요약된다. ‘영웅의 일생’ 구조에 따라 소대성의 일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소대성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사는 전직 병부상서 소양의 아들이다.(고귀한 혈통)
2. 소양 부부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영보산 청룡사 노승에게 시주하고 얻은 외아들이다.(비정상적인 출생)
3. 동해 용자의 하강이며, 어려서부터 비범했다.(탁월한 능력)
4. ㉠부모가 죽고 가산이 탕진되었다. 품팔이와 걸식으로 연명하였다. ㉡이 승상이 세상을 떠나자, 이 승상 부인과 아들들이 박해하고 자객을 보내 죽이려 했다. ㉢이 승상의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다.(기아)
5.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본 이 승상이 구출해 공부시키고 사위를 삼으려고 했다. ㉡자객을 죽이고 이 승상의 집에서 나왔다. 용왕이 보낸 동자의 인도로 영보산 청룡사로 갔다. 노승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무기도 얻었다. (구출자를 만남)
6. 외적이 침입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다시 위기를 만남)
7. 외적과 싸워 이기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했으며, 헤어졌던 이 소저와 다시 만나 고귀한 지위에 올라 부귀를 누렸다.(위기를 극복해 승리함)
〈소대성전>은 〈홍길동전>보다는 뒤에 나왔고,〈조웅전>과 〈유충렬전>보다는 먼저 이루어졌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대성전>이 지닌 대중소설로서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소대성전」에서 가장 큰 흥밋거리는 단연 소대성이 자객과 외적을 물리치면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객과의 관계에서는 주인공이 상대방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고, 외적과의 관계에서는 주인공과 상대방이 대등한 위치에 있어서 흥미롭다. 소대성은 도술을 부려 자객을 여유있게 죽이고, 감회를 담은 편지 한 장을 벽에 붙여 놓고 처가를 떠나니 영웅의 늠름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살해할 계획을 꾸몄던 처가족이 두려움을 갖게 되니 그들에 대한 간접적인 보복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이 부분의 양자의 팽팽한 대결에서 오는 긴장보다는 소대성의 비범한 능력에 대한 경이감이 독자에게 더욱 흥미의 요인이 된다.
이에 비해, 외적격퇴 부분은 대결의 양상 자체에서 오는 긴장감이 흥미의 요인이다.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는 주인공이 탁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일거에 물리치지 못하고 세 번의 고비를 거쳐서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고비는 주인공이 전장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두 번째 고비는 소대성이 군사인 ‘모셰징’의 멸시와 저지 때문에 바로 적과 싸울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세 번째 고비는 소대성과 호왕의 대결에서 일어나는 승패의 기복에서 생긴다. 처음에는 소대성이 적군을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으나, 계속되는 호왕의 반격과 계략으로 소대성은 자결을 마음먹기까지 하고, 천자는 피로써 항서를 쓰게 되는 위기에 이르기도 했다.
자객퇴치 부분의 경이적 흥미나 외적격퇴 부분의 고조된 흥미에 비한다면, 구박하던 처가족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의 흥미는 상당히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가족과의 갈등을 받아들인 이상 이 부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흥미도 독자는 당연히 기대할 것이므로 소설은 이를 충족시켜 줄 필요가 있다. 독자에게는 역전이 예상되었던 바나 처가족에게는 뜻밖의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놀라움이나 안타까움이 크면 클수록 독자는 더욱 많은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처가족의 반응을 극대화시켜 나타낼 수 있는 기법의 개발이 요청된다 하겠는데, <소대성전>에서는 처가족이 선망하는 대상인 노왕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처가족이 모르게 위장한다는 속임수의 기법을 마련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결국 민담에서와 같은 역전이 유발하는 흥미는 약화되었으나, 소설은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워 그 흥미를 유지시키려 했다고 하겠다.
둘째, 주인공이 지닌 특별한 성격이다. 주인공 소대성은 비범함을 지녔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비범함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 작품에는 그 능력을 알아보는 이 승상과 그렇지 못한 이 승상의 부인인 왕 부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서 이 작품을 재미있게 한다.
소대성은 어려서 부모가 다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되어 걸식하는 처지로 몰락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천정배필인 이채봉의 부친 이 승상의 지인지감(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으로 채봉과 혼인하기로 언약하지만 이 승상의 죽음으로 혼인에 문제가 생긴다. 곧 소대성의 걸인 형상 속에 감추어진 비범성을 알아볼 능력을 가진 이 승상과 그럴 능력이 없는 왕 부인의 갈등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꾀죄죄한 소대성의 행색 속에 감추어진 비범성을 알아본 이 승상은 소대성을 집으로 데려와 딸 채봉의 배필로 삼으려하는 데 반해 왕 부인은 걸인에 불과한 소대성에게 귀한 딸을 주려는 이 승상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다. 이채봉이 태어날 때 월궁 선녀가 나타나 하늘이 정한 짝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짝이 누구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승상은 그 짝을 소대성으로 본 반면에 그렇지 못한 왕 부인은 소대성을 다만 걸인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딸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었다.
소대성과 이 채봉이 이 승상의 주선으로 혼인을 약속한 상황에서 갑자기 이 승상이 죽자 그 동안 이 승상의 처사에 불만을 가졌던 왕 부인은 아들들과 합세하여 소대성을 쫓아낸다. 이 때문에 소대성과 이 소저의 혼인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여기서 소대성은 자신이 지닌 감추어진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저들의 생각을 바꾸어 사랑을 이룰 수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공을 세움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은, 어렵게 살아가는 자신과 고난을 겪는 소대성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은 주인공 소대성이 영웅적인 활약으로 그 감추어진 비범성을 발휘해 혼인도 하고 출세하는 것에 자신들을 투사함으로써 욕망을 대리로 충족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셋째, 아주 중요한 대목에서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여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였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여 흥미를 유지하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호왕의 침입으로 황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이야기를 중단하여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켰다가 주인공 소대성을 등장시켜 그 위기의 황제를 구하도록 했다.
그 장면은 황제가 호왕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는 위기의 상황이다. 앞에는 장강이 막고 있는데 추격병은 급히 달려오고 있다. 강을 건널 배도 없고, 장수들이 나가 대적했으나 모두 호왕에게 죽음을 당한 상황이다. 이제 황제는 자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살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는 글을 써서 바쳐야 할 판이다. 더욱이 곤룡포 자락을 뜯어서 혈서로 항복하는 글을 써야 할 만큼 절망적이고 비통한 순간이다.
이렇게 슬피 울었다. 그러자 오랑캐 왕이 천자가 탄 말을 찔러 거꾸러뜨렸다. 황제가 땅에 굴러 떨어졌다. 오랑캐 왕이 창으로 천자의 가슴을 겨누며 꾸짖었다.
“죽기 싫으면 항복하는 글을 써서 올려라.”
천자가 급하게 대답하였다.
“종이도 붓도 없으니 무엇을 가지고 항복하는 글을 쓴단 말인가?”
오랑캐 왕이 크게 소리 질렀다.
“목숨이 아깝다면 곤룡포를 찢어 거기에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써라.”
하지만 차마 아파서 그러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그 울음소리소리가 구천(땅속 깊은 밑바닥이란 뜻으로,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가는 곳을 이르는 말)에까지 사무쳤다. 그러니 어찌 하늘이 무심할 수 있을까?
이처럼 황제를 철저하게 위기에 빠뜨리고 나서 서술자는 이야기의 관심을 갑자기 소대성에게로 돌린다. 곧 결정적 위기를 설정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가 그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 다음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그 대목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때 소대성은 장안으로 가서 오랑캐 왕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겸한이 군대를 이끌고 와 있었다. 소대성이 분노하여 겸한을 단칼에 베고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중간 생략)
강을 건너가서, 멀리 바라보니 천자가 강가에 넘어져 있었다. 소대성이 우레 같은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다.
“오랑캐 왕은 우리 임금님을 해치지 말라.”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호왕이 기겁하여 도망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처 말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소대성의 청총마가 오랑캐 왕이 탄 말을 물고 칠성검이 오랑캐 왕의 머리를 베어 말 아래 떨어졌다.
이처럼 극적 위기의 상황을 설정한 다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주인공 소대성을 등장하도록 한 것은 독자의 감정을 극도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줌으로써 감정을 자극하여 통쾌감을 맛보도록 함으로써 흥미를 유지하려는 대중소설적 기법이다.
특히 직업적으로 소설을 읽어주던 전기수가 청중들 앞에서 <소대성전>을 읽다가 중간에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대성전>이 전기수의 돈벌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작품을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기수는 이처럼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부풀린 후 긴박감이 고조된 순간에 이야기를 중단하여 돈을 받도록 <소대성전>의 줄거리를 구성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였을 것이다.
<소대성전>이 어찌나 인기 있었는지 <용문전(龍門傳)>이란 작품까지 나타났다. <용문전>은 경판과 완판의 내용이 상당한 변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완판본은 소대성의 소개로 시작해서 결말도 그의 죽음으로 끝맺고 있고, 아예 <소대성전>의 말미에 “니 뒤말은 하권 용문젼을 사다 보소서.”라고 명시해 놓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모든 속편이 그렇듯이 <용문전>은
전편이 <소대성전>의 명성을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용문전>은 19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나왔다. <낙성비룡>이란 소설 또한 <소대성전>의 아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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