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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탁한 점토가 현란한 도자기가 되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으며 치열한 전쟁터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열악한 환경을 성실한 노력으로 극복하며 그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너무나 미약한 것들이고 아직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서 이렇게 쓰기를 허용한다.
◉삶을 뒤돌아보며 : 도자기가 되는 과정
그가 초임지점장으로 발령받은 인천검단지점에서 1여년만에 영업규모 은행서열 350등점포에서 50등이내의 점포로 동행역사상 그 유례를 찿아 볼수 없는 발탁인사의 대우 를 받았다 . 영전의 기쁨을 뒤로 하고 대형점포의 실적을 유지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 었다 . 그것도 그점포의 실적의 대부분이 학교 예금및 기관의 거액예금으로 이루어진 터이라 IMF직격탄을 맞은 제일은행이 부실금융기관이라는 낙인이 찍혀 거액 예금이 일시 에 빠져 영업실적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
그는 좌절에 빠져 있을수 만은 없어 역발상의 전환으로 이럴때일수록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향토은행의 면목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그가 재직했던 제일은행 성동지점은 타 지점보다 앞서 IMF 충격으로 실직한 이들을 후원하기 위한 ‘실직자 후원 통장’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고객 사은 초청강좌’를 실시하였다. 이 행사를 갖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어서 감회가 깊었다. 북적대던 청중이 모두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아 그의 지난 50여 년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곰곰 생각해보니 당시의 여건이 사실 그에게는 지나간 많은 어려웠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늘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으로 그 자신을 확인하면서 살아왔다.
“지점장이었지만 그는 원래 현장 영업사원 출신은 아니었다. 경영학 박사이자 금융연수원의 명강사로 금융계에서는 금융 세일즈의 원조 교과서로 취급되는 「금융고객만족의 전력과 실천」의 집필가로 유명한 현장 금융 이론가였다.” 이 내용은 1996년 11월 30일자 조선일보 ‘파워 영업점장’란에 게재된 그에 관한 기사일부다. 지나온 삶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라도 조심스럽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필자는 오히려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삶에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삶의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때는 그에게도 희망찬 인생의 봄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너무나 헐벗고 가난했다. 그때 그는 장래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많았다. 하지만 자연은 늘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 자연의 섭리를 배우라”고. 그 자연은 봄이면 돋아나는 새싹들, 여름이면 천둥번개와 온갖 비바람을 이겨내며 검푸르고 싱싱한 여름가지를, 가을이면 시련을 이겨낸 크기만큼 알알이 결실을 가져다준다. 꿈을 가지기만 한다면 그에게도 자연의 섭리만큼 그 꿈을 이룰 계절이 오리라 믿고 살아왔다. 그 믿음을 가진 후 그는 한 가닥 꿈을 좇아 줄기차게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 사람의 숙명
성취를 위한 그의 노력은 집요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무(無)에서 출발한 그에게는 부지런함과 끈기만이 유일한 밑천이었다. 농사를 지을 때도 나무를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군대생활에서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퇴직이후 지금까지도 그의 집요한 노력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 그에게는 마침표가 없다. 쉼표만이 있을 뿐이다 . 그 끈질긴 노력으로 그는 지금 그가 이루어야 하는 꿈의 많은 부분을 이루어가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미력하지만 그는 석사학위 두 개와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여러 권의 책을 썼고, 그가 직접 개발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많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그가 가는 지점마다 가장 짧은 기간 내에 놀랄만한 영업실적을 올리는 독특한 경영철학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들 말하면서 동료들은 그것을 공개하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독특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음만 있다면!
이 책의 많은 부분도 그러한 내용이다. 그의 평범한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수많은 지식보다는 한 가지 지식이라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이론에만 집착하는 지식장이가 아니다. 그는 온몸을 던져 삶으로 일궈내면서 철저히 실행하는 것만이 성취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은 그런 피나는 노력의 결과와 이를 가상히 여겨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어야겠다는 주위의 많은 따뜻한 손길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그가 은행재직시 강의실에서 10여 년이나 강의 한 이론을 영업현장에서 하나씩 실천했을 뿐이었다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일선 지점장으로 처음 배치 받았을 때 ‘저 사람은 지식만 있어서 실패할 것이다’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그들의 고정관념을 180°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말이다.
그는 그런 세상의 편견을 바꾸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도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해 오지만 이를 일일이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또한 타 금융기관을 비롯하여 대학이나 대학원의 경영학과에서는 사례연구의 대상으로 그 점포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의 사례가 한국생산성학회의 연구논문으로 발표 되기도 했다 . 그들은 하나같이 감명을 얻었다고 했다. 그 점포는 온갖 아이디어들로 충만했다. 그것은 선배들로부터 배운 것에다 하나를 더하여 그의 머리를 통해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을 통해서 실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에서는 직원들 모두가 아이디어로 충만했다.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들을 그는 직원들과 더불어 발로 뛰면서 실행했다.
그는 24시간 영업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은행 영업을 하던 때는 모든 사람이 은행의 통장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최대한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늘 실적으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늘 바빴다. 그래서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좋았다. 그래야 꿈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꾼의 아들 : 무한 잠재력
그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20여리 떨어진 낙동면 운평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곳은 산수가 수려한 아름다운 자연뿐 가난이 운명처럼 덕지덕지 붙은 곳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얘기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경상북도 상주의 낙동면에서, 어머니는 경상북도 의성에서 자란 후 결혼했다. 두 분 다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간신히 한글만 깨우친 상태였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근면한 분이었다. 하지만 마음씨가 모질지 못하고 유약하여 남으로 부터 많은 상처를 입으셨다.
결국 가난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간이 좋지 않아 누렇게 뜬 얼굴로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에게 아버지처럼 유약하고 목표 없는 삶을 살지 말라는 강력하고도 슬픈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긍정적으로 살아온 것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우기는 효자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아버지는 홀로 일어나 집으로부터 20여리나 떨어진 갑장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5일마다 서는 장에 가서 나무를 팔곤 하였다. 어머니도 시집 온 후 논농사, 밭농사 등 일을 많이 했다. 목화 심어 희미한 호롱불밑에서 무명길쌈, 삼나무 심어 삼베길쌈, 누에 쳐서 명주길쌈등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그 결과 마을 앞 13마지기의 논과 밭을 장만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여장부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리 노름꾼들의 유혹에 못이겨 노름에 이끌리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버지의 슬픈 운명 : 위대한 유산
경상북도 상주의 기후는 매우 특이했다. 계속되는 가뭄 흉년이 들면 적어도 3년씩이나 계속되었다. 장마철 비가 오면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개천에 물이 넘쳐 논과 밭을 휩쓸어가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흉년과 장마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곳에서는 흉년이 들때면 아침에는 쑥으로 쑥밥이나 쑥떡을 해먹고, 점심은 칡을 캐 먹거나, 솔가지를 벗겨 허기를 달랬으며, 저녁은 연한 수양버드나무 잎을 따서 보리죽에 넣어 끓여 먹으며 끼니를 읻곤했다. 그것도 부족하면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 찌기미도 먹고 보리 겨로 개떡도 만들어 배를 채우기도 했었다. 그때 하루 해는 왜 그리 긴지 모르겠다.
어느해 그 혹독한 빈곤의 그림자와 , 아버지를 계속 유혹해 오는 노름꾼들의 농간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는 삼촌이 사시던 충북 충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처음 이사간 충주는 그야말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잘 정비된 수리시설 덕분에 흉년을 모르고 사는 곡창지대였다. 조, 수수, 옥수수 등으로 누렇게 익은 황금들판의 알곡들과 느리지만 소위 "충청도 양반 "들의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의 말투들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듬해 봄 초등학교 5학년인 그를 충주 주덕으로 전학시켰다. 아버지는 충주로 이사한 후 제대로 자리를 잡고 당신 손으로 농사를 지어 곡식을 수확하겠다는 푸른 소망을 품으셨다. 그러나 연약한 아버지는 당신의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당신이 뿌린 씨앗이 채 여물기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술과 노동으로 황폐해진 건강은 간을 버리게 했고 결국은 온 몸이 누렇게 뜨는 황달로 애달픈 삶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태수(집에서 부르는 그의 이름) 엄마가 짠 베는 안방에 다 쌓아 놓아도 넘쳐날 만큼 많은데 나로 인한 고생 이루다 말못해 눈을 감을 수 없네”라고 하시며, 어머니 앞에서 후회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운명하셨다.
그 때 어머니는 많이도 우셨다. 그 동안 살아온 삶이 억울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이후에 결코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며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 주시며 가장의 역할을 짊어지고 힘든 농사일을 몸소 하면서 자식들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나가셨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 매사를 기회로
그가 처음 다니던 상주 상영 초등학교는 집에서 10여리가 넘는 곳에 있었다. 학교가는 도중 그리도 고운빛, 모래가 반짝이는 냇가도 건너고 부엉이 울어대는 적막한 산길도 지나면서 휫바람 불어대며 학교에 다녔다. 행여나 몸이 아파 학교에 갈 수 없는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책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뛰며 학교에 다녔다. 이때 도시락은 고추장과 밥이 뒤섞여 비빔밥이 되었고, 양철 필통 속에서는 연필 부딪히는 소리가 덜거덕 덜거덕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꼭 그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격려 같았다. 그가 다닌 상영 초등학교는 상주 초등학교의 분교로 학교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해 누에고치를 쌓아두는 공판장을 대신하는 잠실 같은 곳에서 공부했고 여름이면 나무 밑이나 운동장의 한모서리에 천막을 치고 공부했다.
그는 방과후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소 풀을 먹이며 들에 가서 일을 도와야 했다. 그 일은 초등학교에 시절 내내 계속되었는데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숙제가 없는 날에는 스스로 매일의 학습할 분량을 정해 놓고 예습, 복습을 하곤 했다. 자투리 시간엔 부엌에서 불도 때고, 콩나물에 물도 주며, 채소도 다듬고 집안의 사소한 일들을 거들며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다락에 올라가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누렇고 얇은 마분지에 몽당연필로 옮겨 쓰며, 그 누런 마분지가 검어져 더 이상 쓰지 못할 때까지 공부하곤 했다. 그중 기억을 더욱 새롭게 하는 것은 2학년때와 5학년때는 친구 방학책을 빌려 문제만을 베끼어 제출했다 . 초등학교를 떠난 지 40년이 되던 해 초등학교 동창 체육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아득한 시절의 소꿉친구들을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때 옆집에 살며, 그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달이라는 소꿉친구가 40년 전의 이유를 실토했었다.
그가 다락방에서 밤늦도록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달이 부모님이 “옆집 의식이는 저렇게 밤늦게까지 공부하는데 너는 딱지접기와 구슬치기나 하고 통 공부하는 모습을 못 보니 네 앞길이 뻔한 것 아니냐!”면서 야단을 맞았다는 것이다. 의례 그런 다음날이면 그는 달이에게 골탕을 먹었는데 그때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달이는 그보다 나이도 한 살 위인데다 몸집도 크고 기운이 세서 달이는 늘 가해자이고 그는 늘 피해자가 되곤하여야 했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닌 마을 거동2리는 50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체 향우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선배들 중에는 학교에 가다가 중도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놀다 가자고 유혹할 때가 많았는데, 그는 학교에 빠지지 않으려고 몰래 빠져나와 학교로 달려 가곤 했다. 향우회를 담당하던 선생님은 그와 그 선배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선배들을 야단쳤기 때문에 그 화살은 언제나 그에게 돌아와 동네북처럼 얻어맞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충주로 이사 오기 전까지 4년 동안 한 학기 몸이 아파 며칠 결석한 것 외에는 개근상과 우등상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여름 장마철이면 홍수로 인해 학교로 가는 동서천(東西川)이 넘치기 일쑤였고 학생들도 등교 길에 내를 건너다 떠내려가 익사하는 경우도 있어 아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30리 길을 돌아 겨우 학교에 가면 가물에 콩 나듯 학생들이 와 있었고 이럴 때면 선생님은 “오늘은 임시휴일로 할테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혼자서 왕복 60리가 넘는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와야 했다.
◉미운 오리새끼 꿈을 꾸다 : 정의와 성실을 배움
다른 동료나 선배들은 그를 미운 오리새끼처럼 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바엔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동화되기보다 그것을 뛰어넘어 올바른 행동을 하기에 더욱 힘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충주로 이사와 친척 댁에 머물렀는데 식구가 많아 공부방이 특별히 없었다. 그는 친척 식구들이 잠들면 몰래 일어나 불을 켜고 공부를 했는데 친척 할머니는 석유가 닳으니 불을 끄라고 성화를 하셨다. 겨울밤에도 냉방에 잔 적이 많은데 이불 한 채를 서로 끌어당기느라 새우잠조차도 제대로 못이루기도 했다.
전학한 학교에서도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해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모든것이 낯설기만 하였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동료 학생들로 부터 조롱감이 되었고 땅은 질퍽해서 신발에 황토 흙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자란 상주에 비해 나무와 풀이 적어 삭막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날로 더해가는 외로움은 달랠 길 없었다. 그의 외로움은 같은 반 한 여학생에게 눈길이 가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곤하였다 . 그 당시 교실 바닥은 시멘트였는데 그는 다른 학생보다 30분 먼저 등교하여 그가 짝사랑하는 한 여학생의 책상과 의자, 시멘트 바닥을 말끔히 청소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공부시간에 칠판 글씨도 도맡아 쓰는 바람에 인정을 받아 나름대로 적응되어 갔다. 하교 후 소 풀을 먹이러 뒷동산에 올라갈 때면 그해가 지나기전 매일 아침 책상 먼지를 닦아주던 그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당시의 유일한 목표였다. 2학기가 되자 그 여학생은 자기 아버지의 직장따라 충주시내로 전학을 가 버려 기회를 놓쳐 오랫동안 아쉬움을 달랠 길 없었다.
◉강인하셨던 어머니 : 인내를 배움
그 해 가을 아버지의 별세가 그에게는 큰 충격이 되어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하며 더욱 강인해졌다.
충주로 이사하여 남의 집 문간방에서 살때 공부하다 호롱불에 눈썹을 태우기도 했다. 한번은 초등학교 동창인 박종우의 건넌방에서, 촛불을 켠 채 공부하다 잠이 들어 타 죽을 번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려웠던 환경에도 어머니는 친구들 데려오는 것을 좋아하셨다.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할 때면 고구마도 쪄 주시고, 하얀 윤기가 흐르는 햅쌀밥도 해 주셨다. 그 때 물건너 한재희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그의 집에 와서 먹어가며 공부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룹공부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어머니는 사람 사는 집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이 좋다며 항상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 하였고 별미라도 생기면 항상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셨다. 어려운 살림에도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가을 농사가 끝나면 시루떡을 만들어 50호나 되는 집에 일일이 나눠주곤 하셨다. 그는 그런 심부름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지금도 그는 이웃들에게 또한 그와 관계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매사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데, 그때 어머니로부터 몸소 껶은 것들이 은연중에 그의 생활철학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참사랑이신 선생님의 가르침 : 그의 자전적 이야기 보따리
지금까지 그를 가르쳐준 선생님들의 모습과 존함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이었던 정영수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단다. 왜냐하면 낯선 충주에 와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 처음으로 그 선생님으로부터 생애 중 가장 많은 종아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종아리를 맞은 것이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체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따뜻한 훈계 같아서 그렇다. 그 때 맞은 매가 그에게는 보약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준 좋은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6학년 1반의 담임 이향수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5학년 때까지는 남녀 합반이었으나 6학년 때는 남학생 두 반과 여학생 한 반으로 남녀가 분반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남녀가 분리되자 많은 학생들이 공부할 의욕을 잃고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것은 이성간의 경쟁이 아닌가 한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그를 지도해 주었다. 5학년 때 전학 와서 사투리가 채 가시지 않은 그를 전교 학생회 부회장 후보로 추천해 주셨다. 사모님은 집으로 그를 불러 부회장 입후보 인사말을 외우도록 도와주었다. 제자들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생각해준 분으로 장래 진로지도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였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사범학교가 몇 곳이 없을 때였다. 충청북도에서는 청주사범학교와 충주사범학교 만이 있었다. 사범 병설 중학교에 입학하여 본과 3년을 마치면 초등학교 선생이 될 수 있어서 사범 병설 중학교의 인기가 아주 좋았으며, 거기에 몇 명을 입학시키느냐가 담임의 진학지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때 그의 앞기의 선배들은 6학년 전체에서 2명이 사범 병설 중학교에 합격했었다. 다음 해인 그의 때에는 6명이 합격을 했는데 그반에서 3명이나 되었다. 이향수 선생님은 2년에 걸쳐 5명을 사범 병설 중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이는 모두 담임선생님의 지극한 열정 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의 지도와 열의, 어머니의 정성, 그의 노력이 삼위일체가 되어 그는 드디어 목표한 충주 사범 병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주덕에서 충주 사범병설중학교와는 거리가 40리나 된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쌀 한 됫박 가지고 혼자 집을 나섯다. 친구 집에서 3일을 지내며 시험을 응시하여 1, 2차 관문을 뚫고 합격을 했다. 동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야단이었지만 정작 친척들은 중학교 등록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홀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지 공부하다가 그나마 있는 땅도 팔겠다는 염려를 하셨다. 친척들의 강권에 많은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고 단호 하셨다. 그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는 쌀 네 가마를 팔아 등록금을 내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는 어머니의 강인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가을 하늘처럼 선명하게 다가 오곤한다.
◉중학시절의 꿈 : 현상타파의 응용력을 얻다
학교는 집과 거리가 멀고 교통편도 좋지 않아 매일 통학하기가 어려웠다. 1학년 때는 친구 재희와 자취를 하였다. 이 때 여름에는 생애 처음으로 얼음 통을 어깨에 메고 ‘아이스케키’와 ‘얼음 캔디’를 팔았다. 밤마다 골목을 누비며 “아이스케키, 얼음 캔디”를 외쳤다. 첫날에는 아이스케키와 얼음 캔디를 잘 구분하지 못해 밑지는 장사를 하기도 했다. 2학기 때는 같은 반 친구 동생의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친구 동생이 워낙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해, 그 어머니의 변명은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 집중력이 부족하였다나....,
그것이 부담스러워 그 집을 나왔다.
2학년 때는 한필이와 자취를 했다. 이 때 우리가 먹은 식량은 둘이서 한 달에 밀가루 두 말, 보리쌀 두 말과 쌀 두 됫박이 고작이었다. 제재소에서 나무를 켜고 나온 톱밥과 산에서 썩은 나무 등걸을 땔감으로 구해다가 밥을 지어먹곤 하였다. 학교에서는 중간고사와 학기말 고사를 보았다. 다른 학교는 O. X 등 객관식 문제가 주로 출제되었으나, 특수목적 학교인 그가 다닌 사범 병설 중학교는 논술 문제를 반드시 두 문제씩 출제해 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답안을 쓸 수가 없었다. 그 시절에도 분명 논술고사가 존재 하였다......,
시험공부 할 때면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식은 보리밥조차도 거르기가 다반사였다. 등교하여 시험 보는 날이면 점심시간 지나 코피를 쏟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중학교 3년을 마감하는 3박 4일간의 수학여행도 농번기 가사일에 매여 가지 못했다. 반 친구들은 공주 갑사(甲士)며 부여 백마강이며 수학여행을 떠난 그 시간에 그는 중학생의 몸으로 벼를 베어 지개로 운반하는 최신 버전의 농기계가 되었다. 세월이 지난 아직까지도 동창들 중에는 무슨 이유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는 지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시 또래들의 유일한 꿈은 중학교 3년을 공부하고 사범학교 본과를 마치고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학제 개편으로 교육대학 입시제도가 새로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대학 2년을 나와야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갑작스런 학제 개편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그의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 깨어지고 말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도 고생이었지만, 어머니는 시골에서 동생과 농사를 지으면서 갖은 고생과 설움을 다 당했다. 이제 더 이상 공부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래도 공부를 더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그의 결심은 굳어져 있었다.
◉새로운 농사꾼으로 3년 : 창조와 성취를 배움
그는 학업을 포기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1년 후에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막연하게나마 결심했다, 그러나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3년 동안 그는 농사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공부를 포기하고 농사일을 할 때에는 공부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소화도 안 되어 계속 병치레를 햇다. 이때문에 어머니는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이러다가 사람이 폐인이 될 것 같아 두 달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논 8마지기 정도의 농사였다.
그는 수확을 높이기 위해 산성이 된 모래 논에 진흙을 퍼다 붓기도 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퇴비도 듬뿍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갓 지은 농사이지만 오래된 농사꾼이 지을 때보다 더 많이 수확했다. 역시 농사일은 정말 고되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첫해에 동네 어른들과 보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모내기를 억지로 라도 감내 했다. 숙달이 안 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듯한 아픔을 더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새참 때면 하천 뚝 방의 잔디밭으로 나가 뒹굴기도 하고 간식 때마다 주는 막걸리의 힘으로 겨우 버텼다.
작렬하는 뙤약볕 아래서 논의 김매기를 할 때면 무성한 벼가 얼굴과 팔, 장딴지를 찔러 연한 살을 쓰리게 했다. 삼복더위가 한창인 여름, 보리타작, 밀 타작을 위한 도리깨질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처럼 새벽에 일어나 남들보다 먼저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억척같이 한 농사일 중에 안 해 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소를 몰고 쟁기질을 하는 것은 특히 힘겨웠다. 가을에 벼를 탈곡할 때도 그는 나이가 어려 동네 어른들과 품앗이를 할 수 없었다. 혼자 논 8마지기의 벼를 지게로 옮겨 탈곡을 해야 했다. 새벽녘 동틀때 나가면 저녁 앞이 안 보일 때까지 개울물도 건너고 산등성도 지나 벼를 지게로 져서 옮겼다. 늦가을에 물을 건널 때는 발이 무척이나 시리기도 했다.
(주)품앗이;농번기때 공동으로 자기집 농사일과 다른집 농사일을 돌아가면서 돕는 협동작업 형태
◉전천후 나무꾼 : 막대한 실용지능 획득
그때는 거의가 그랬듯이 마을의 유일한 땔감이 산에서 잘라오는 나무뿐이었다.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소죽을 쑤어야 하고, 일꾼을 얻어 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무의 비축은 필수적인 것이다. 게다가 큰 산이 멀기 때문에 나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되었다. 농번기가 끝나면 거의 매일 지게를 지고 집으로부터 20여 리나 떨어진 먼 길을 나무하러 다녔다. 봄철에는 주로 솔방울을 따고, 여름, 가을, 겨울에는 오리나무, 참나무, 단풍나무를 한 지게 지고 집에 올 때면, 마을은 어찌 그리도 아득히 멀리 보이는지........, 어릴 때 젖 먹던 힘이 다 빠지는듯한 기분이다.
지금은 간혹 동료들과 가까운 산이라도 오르는 것도 몹시 힘이든다. 그러나 당시에는 간신히 지고 일어날 정도로 무거운 나무 짐을 양 어깨에 지고 다니는 일이란 중학교 갓 졸업한 청소년에게는 익숙지 않아 더욱 힘이 들었다. 그의 경우는 초등학교를 나와 일찌감치 나무를 하는 동연배의 프로 나무꾼에 비하면 마치 ‘뱁새가 황새걸음 따라가는 격’이라, 여간 힘 드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견딜만한 했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정말 무척이나 힘들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보고 “의식이 공부 잘 한다고 사범병설중학교에 가더니, 고작 서툰 나무꾼이 될 바에야, 차라리 초 졸로 나무하는 동창생 철수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다”고 비꼬임을 당할 때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맨 정신으로 참기란 정말 힘들었다. 나무를 할 동안에 그에게 닥친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서툴러서 낫으로 손을 베기도 하고, 나무지게를 지고 낭떠러지로 굴러 죽을 번 한 일도 있었다. 때로는 심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어 헤맨 적도 있으며, 눈 속을 헤쳐 나무를 하다가 손 발에 동상(凍傷)이 걸려 고생한 적도 있다. 농사일을 마친 농한기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동녘하늘의 삼태성을 바라보며 , 눈보라가 살을 에는 삭풍을 뒤로 한채 ,10여리가 떨어진 제네리 방죽안 하천보수 공사에 가서 밀가루 몇킬로 그램을 받아오는 노동도 하였다. 농번기를 제외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무지게는 그의 어깨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의 어깨와 허리는 온통 시꺼멓게 멍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무하는 데 빠져드는 슬픈 나무꾼이었다.
◉3년이나 늦은 늦깎이 고교 입학생 : 대기만성 기초
나무하고 농사짓던 3년 간 편지 쓰는 일 외에 펜을 잡아볼 시간이 없었다.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으리라는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3년이 다 지나갈 무렵, 고등학교 입시를 40여 일 앞두고 중학교 선생님이신 집안 친척 어른의 간곡한 학업지속 권유를 받았다. 농사를 짓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고등학교 입시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고교 입시준비를 했다. 다락에 팽개쳐 둔 중학교 교과서와 친척분이 보내준 최신 문제집으로 공부를 해서 기적처럼 충주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그것도 신입생 240명 중에서 11등으로 말이다. 그것은 중학교 시절 밤을 새워가며 남달리 차곡차곡 쌓아둔 실력 때문이었으리라. 아울러 그는 그 자신 속에 있는 잠재능력을 그때부터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깐,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동료보다도 3년이나 뒤늦게 고등학교 정규과정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 초, 중학교로 보면 멀쩡하게 후배인줄 알면서도 정문에서 경례를 부쳐야 하며, 단체기합도 예외가 있을수 없는 등 감내하기가 매우 벅찼다. 어디 이뿐이랴 .
여기서 당시의 고충을 다 틀어 놓을수 없지만 고등학교 수업을 지탱할수 있었던 힘은 당시 생활지도 주임이신 독일어 선생님이신 이종철 선생님의 보살핌이었다. 선생님은 틈날 때마다, 그를 교무실로 조용히 불러 " 너희 선배 반기문(지금은 유엔사무총장님이 되셨지만)은 열심히 공부하여 특히 제2선택과목으로 독일어를 공부해 서울대 외교학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의식이 네가 가정 형편도 어렵고 ,만학인줄 내가 잘 안다 .입주 과외도 소개해 줄터이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에 눈이 번쩍 뜨였다 . 나의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충주의 영어 신동 충주중학교 3학년 반기문의 이름을 누누히 들어 온 터이라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어찌 그뿐이랴 . 또 영어시간이면 김성태 선생님께서 반기문 선배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많은 용기를 주셨음을 실토 하지 않을수 없다 .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맨토가 된 반기문 선배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힘겨운 자취생활, 때로는 통학,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가정교사를 했다. 가정교사를 할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그의 몫을 먼저 공부해놓고, 주인 집 학생을 5시에 깨워 공부시켰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등록금을 제 때 내지 못하여 집으로 되돌려 보내진 적이 있었다. 이때 임시 교무회의를 열어 장학금 명목으로 한 분기 등록금을 대신 받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 후 30년이 지나 처음으로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그의 처지를 알고 담임선생님이 주선하여 혜택을 주셨다. 그는 3년이나 늦은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나이가 또래보다 3~4살이 위인지라 반 친구들의 대소사도 챙겨주고 남의 일을 돌봐주는 등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공부에 전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이때에도 주말이면 시골집으로가서 농사일을 거드는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다.
◉지성이면 감천, 대학생이 되다 : 대성기회
그렇게 정신없이 3년을 보내고 꿈에도 그리던 의젓한 수도 서울의 한 대학생이 되었다. 당시 충주고는 경희대학교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었다. 고교 졸업성적이 상위권에 들고 본교 입시에 합격하여 장학생으로 입학 하는 특전이 주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경희대학교 행정학과에 4년간 등록금 면제 조건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활은 그를 더욱 암담하게 했다.
등록금은 해결이 되었다지만 숙식이며, 교통비, 책값, 용돈이 모두 문제였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고종사촌 형님 댁에서 얻은 식기들로 고달픈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여 비용을 충당하려고 하면 할수록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늘 힘겨웠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회기동 로터리에서 동대문까지에 있는 직업소개소를 뒤져 일거리도 찾았다. 이때 신입생의 낭만은 온데 간데 없고, 한 학기가 끝나면 강의실 뒷좌석에 앉아 흘린 눈물은 그의 학창시절 젊은 가슴열기를 식히곤 하였다.
2학기에는 중화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했는데 그 때 그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경희대 특대생으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의 초등학교 동기생인 정동섭을 만난 것이다. 그는 그를 ‘Joy Mission’이라는 기독교 대학생선교 단체로 안내해 그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때까지 토속신앙속에 있었지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그 다음해인 1969년 초에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세상을 보는 기준이 달라졌으며, 어떤 조그마한 고통도 그에게는 더큰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
◉가난을 이웃으로 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 사방팔면 방어
만학에 줄곧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나이 탓에 대학 1년을 마치고 1969년 5월에 입대해, 1972년 4월에 제대를 하고, 대학 2년에 복학했다. 다시 고달픈 자취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초등학교 동창 장석봉이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어서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중국집 영업이 끝나는 밤10시 이후 간단한 청소를 해주고 식탁 위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녘에 홑이불을 덮고 식탁 위에서 새우잠을 자곤 했다. 한 때 그 친구가 밥을 먹여주기도 했다. 그때 먹은 짜장면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 월세, 지금으로 환산하면 10만원짜리 옆 목욕실 한 칸을 얻어 양 벽에 판자를 걸쳐 책상을 대신하고 다른 한쪽에도 판자를 걸쳐 침대 삼아 잠을 자며 공부를 했다.
당시 거처가 있던 동대문구 이문3동은 저지대라서 여름에 그의 생애 중 가장 큰 장마를 맞아 집이 온통 물에 잠겨 일주일이나 감금된 상태로 보내기도 했고, 그 해 가을에는 중화동 자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도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겨웠다. 연탄불은 꺼지고, 쌀은 떨어지고, 독감에 걸린 데다, 변비로 하혈이 계속되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학기말 고사는 봐야 하고, 이웃집에 물을 길러 가야 하는데 대문은 잠겨 있어서 그야말로 사면초가요 설상가상의 풍광이었다.
그는 아침밥을 거른 채 한 손에는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라는 작은 책자를 한 권 들고 읽으며 등교를 했다. 이때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운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가 당한 현재의 처지에 너무 감사하여 전봇대를 붙잡고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그는 그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현재의 고난은 내일의 희망을 위한 디딤돌이라는 확신과 오늘보다 내일은 더 좋아지리라는 그 꿈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당면한 악조건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첫 직장생활 시작 : 적용의 장 (대양을 향해 기적을 울리는 배)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2월, 그는 제일은행에 입사했다. 대학 4학년 때 그의 뇌리에는 그가 어떤 직장에서 일을 해야 가장 보람을 가질 수 있을까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준은 비교적 안정되고 자기개발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금융기관 입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뽑아주지 않으면 허사이기 때문에 여러 조건을 견주어보니 나이 제한에도 걸리지 않고, 입사 시험의 출제 유형이 그가 공부해 온 것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 제일은행을 목표로 반동급생과 응시하여 나란히 합격했다.
그는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가기 전에 직장생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모토를 찾기에 말이다. 직장생활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 어떠한 일에든지 문제가 생기면, 초기에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문제가 발생하여 더 악화되기 전에 사전 예방으로 막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 좌우명은 ‘모든 일을 시비가 없이 하라’는 성경 말씀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가 처음 발령 받은 곳은 충무로 지점이었는데, 지점장은 그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물어주시고 대졸사원으로서 출납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해 주셨다.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출납 업무를 맡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동전을 바꿔주는 일은 매우 따분해 보이는 단조로운 업무였다. 그러나 아주 열심히 의미를 가지고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계로 옮겼다.
그러나 많은 창구 손님을 맞아야 하는 보통계에서는 손님들의 질문에 업무지식이 부족해 제대로 답변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손님을 피했으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함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 은행의 각종 상품을 종류별로 묶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연수교재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적절하게 응대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보통계 창구에서 고객의 수납을 돕고 있을 때 외환 반에서 근무하던 차장이 메모지를 달라고 하기에 그는 무심결에 새 입금전표 뒷면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 차장은 “전표를 메모지로 쓰면 어떻게 하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날 이후 그는 은행용도품도 절약하며 아껴 쓰는 것이 체질화 되어갔다.
◉아름다운시절 불의를 거부하는 아내를 만나다 : 정의의 사자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배우자를 기다렸다. 그의 아내는 그가 제일은행에 입사하여 직장생활을할 때 만나 사귀게 되었다. 약혼한 이후부터 아내는 그가 숙직하는 날이면 음식솜씨가 빼어난 처제의 손을 빌려 비쩍 마른 그(당시의 몸무게 55kg)를 위해 완두콩을 넣어 쑨 죽을 들고 와서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와 아내는 그 해 5월에 만나 11월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초에는 바쁜 일과로 인해 매일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그는 으레 깊은 잠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아내는 기독교선명회에서 영어를 번역하고 통역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보다 월급이 더 많았다.
하루는 예비군 보충교육 통지서가 주인집으로부터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고발을 당하여 벌금을 물게 될 형편에 있었다. 정상적으로 처리하려면 여러 번 오가야 하는 성가심을 피하기 위해, 동사무소 예비군 담당에게 촌지를 주어서라도 쉽게 해결하려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의 얕은 발상을 아내는 단호히 거부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일 때 예비군 통지서가 나왔으나 주인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했는데 고발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자초지종을 적어서 관계기관에 민원접수를 했다. 이 민원은 관계기관에서 병무청으로 이첩되어, 잘 해결되었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려는 자세로 인해 슬기롭게 승리를 이끌어낸 사례로 기억된다.
◉일을 바쁜 사람에게 시켜야 : 예열 불요
입사후 퇴직할 때까지도 가방 속에 책이나 서류봉투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일 할 때 이런 일 저런 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은행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가리켜 “자기개발의 화신이요 대명사다!”라고 했다. 인력개발부 연수기록을 컴퓨터로 조회하면 그의 연수기록은 매우 길어 기네스북에 오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행원 3년을 충실히 보낸 후 명동지점 외환반에서 근무할 때는 당시 자주 연체하기로 소문난 3곳의 거래처 때문에 퇴근이 밤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한 때 융통성 없게 공부하여 은행 대리 승진의 기초가 되는 보통고시에 불합격하여 동기생보다 진급이 1년 늦어지기도 했지만, 그 후 좌절하지 않고 재기해서 다음 해에 대리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많은 인생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리 승진 1년 만에 그는 외국어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해외연수를 다녀온 후 검사부, 국제영업부, 인력개발부, 외환업무 실을 거쳐 답십리지점 차장으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던 중 은행으로부터 학자금 지원을 받아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으며, 답십리지점 차장 시절 1년 반 동안은 일에 미치다시피 하였다. 당시는 고객을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거웠고, 모든 사람이 은행의 통장으로 보일 정도로 은행일에 몰두하였다. 그곳에서의 근무를 계기로 그의 세일즈 방법이 소문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사례로 그는 연수원에서 금융마케팅스킬(세일즈)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영업 스케일(scale)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처럼 당시 탁월한 지점장 밑에서 고된 훈련을 받은 까닭이었다. 연수원 교수로 근무하면서 그는 강의의 교육적 이론을 더욱 심화, 확대시키기 위하여 은행으로부터 학자금 지원을 받아 다시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연수원 근무시 금융기관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주도하여 차장 직급에서만도 은행장 표창을 3번이나 받았다.
그 이후 그는 저축부 부부장을 거쳐 1996년 8월 초임 인천지역 검단지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거기서 이벤트를 통한 영업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자, 조선일보와 내외경제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 때의 영업활동은 비디오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삼성생명 등 각종 기업에서 직원 연수를 위한 연수 자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S은행의 지점장 교육 자료로, 모 방송국에서는 연수 프로그램 제작을 집요하게 요청했는가 하면, 전국적인 규모에서 사례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그는 동부 영업본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동지점으로 발탁인사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항상 일을 창조하는 신념 : 창조는 사람의 본능
틈만 있으면 그는 자기개발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대리시절에는 민상법 등 통신연수를 매년 한 과정씩 이수하였으며 밤에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교회에서는 2년 코스의 베델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한때는 매월 금융관계 잡지에 기고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이 모든 일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몰두했다. 이렇게 반강제적 테두리 속에 들지 않고는 자기개발을 꾸준히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피나는 노력이 그로 하여금 경영학 및 교육학전공으로 석사학위 2개와 박사학위를 따내게 하고, 여러 권의 책과 많은 논문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갔다.
이러한 자기계발의 계기가 체질화 되어 은행퇴직이후에도 대학교재로 쓰는 경영학원론(공저)과 베스트 셀러가 된"세계를 가슴에 품어라(명진출판)외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한바 있다. 뿐만아니라 최근에는 서울 사이버 대학교에서 사회복지와 상담심리를 복수 전공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시와 수필로 등단하여 한국 문인협회시분과 회원으로 활동중인등 그의 자기계발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한편 직장에서 맡은 일에는 항상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1983년 국제영업부 수입 반 대리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제조업에서는 품질관리(QC: Quality Control) 운동이 이미 확산 시행되고 있었지만, 금융서비스 업종에는 처음 소개되는 시점에 있었다. 당시 그의 은행에서도 QC운동이 제창되어 QC활동의 성과를 발표하는 전국대회가 있었다. 이 때 그는 국제영업부 수입 반 ‘미리내회’의 QC지도 책임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회원들 중에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마인드가 퍼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을 파악하고 실천방법을 찾아내며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QC추진 실천기법을 같이 연구한 결과 사례 발표대회에서 지구별 중간결선과 전국대회까지 우수상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그 이듬해 그는 인력개발부로 이동하여 계속 QC를 지도하였으며, 3년 후 외환업무 실 근무 시에도 QC 지도를 맡아 지도하던 팀이 성과 발표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그는 QC팀을 맡게 되면 팀원들이 공감대를 형성시켜 나가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두어 은행내 포상으로 제주 도 여행과 일본 여행의 두 차례나 다녀 오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항상 새로운 접근 : 사람의 본성
은행에는 아이디어 모집이나 업무제안, 표어모집, 현상논문공모 등의 기회가 종종 주어진다. 이때 그는 바늘 구멍만한 기회만 보여도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1%의 가능성도 그가 당선되면 100%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검사부에서 일할 때 "은행의 사고 예방과 공신력 제고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접하고, 사고발생 원인에 대한 흐름을 파악한 뒤 이를 현실에 접목시키는 과정을 정리해 두었다. 그 다음 검사부를 떠나 인력개발부 근무 시 업무개선실에서 “정화운동 추진에 대한 논문 현상공모”가 있었다. 그는 검사부 때의 자료를 잘 활용하여 행내 논문공모에서 우수상을 차지했고, 한국은행의 전국규모대회에서는 2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도 역시 업무와 관련된 현상 논문에 응모하여 행 내외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열정은 퇴직후 에도 계속되어 교회에서 교회창립주일이나 추수감사절 시작품에도 응모하여 좋은 성적을 나타내곤 하였다.
연수원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제일은행 창립 60주년 기념 신풍운동 전개에 대한 현상논문 공모가 있었다. 1등상은 상금 300만원에 인사가점도 있었지만, 그는 업무와 야간대학원 때문에 응모할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그리고 연수원 교수라는 직분 때문에 일단 참여한다면 다른 부서 직원과는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수원장은 교수실이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참여를 종용해서 부랴부랴 준비에 뛰어들었다.
시작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논리적 분석 결과로 1등을 차지했다. 그것은 연수원의 자랑이요, 교수실의 긍지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상사와 동료들의 기쁨이 되었다. 그는 논문 현상공모 부문에서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영예를 보유하게 되었다.
◉자기 분야의 전공서 저술 : 금융계의 샛별이 되다
그는 책을 출판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틈틈이 그가 맡은 업무 분야에서 일하면서 더 발전해 보려는 생각으로 매일 아티클(article)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하는 일에 이론적 근거를 현실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처음에는 자료를 재구성하는 수준이었으나, 차차 이론을 현실에 접목하는 수준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원고들을 처음에는 은행내 경제동향 지인 사보에 게재했다. 그 후 차츰 범위를 넓혀 새 행원, 금융경제, 금융지 등 행 외 금융 월간지까지 전국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글을 기고한다는 것은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퇴근 후 밤늦도록 원고를 정리하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교정을 봐야 했고, 연재물일 경우에는 새로운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이렇게 하여 <금융> 월간지에 6개월, <새 행원>에는 2년 여 동안 시리즈로 그의 원고가 연재되었다. 그 글이 연재되는 동안 글을 읽는 많은 다른 기관으로부터 원고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후배들로부터 게재된 원고를 구하고자 하는 전화도 많아졌다.
이렇듯 원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한편 그의 글이 후배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국제금융연구원의 김한수 박사의 간곡한 제안이 있어 책을 출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직장 내 학구파이자 모든 일에 열심인 이경업씨와 공저로 「고객만족시대의 금융섭외의 전략과 실천」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어 유동순 과장과 공저로 「고객만족 전략과 실천」이라는 책도 썼다. 이외에도 , 한국능률협회, 한국 표준 협회, 한국금융연수원 교재를 비롯하여 각종 금융마케팅 분야 연수교재의 공동 집필진으로 활동이 넓어졌다. 이처럼 섭외관련 부문에서 많은 저술은 그의 지점장 역할에 필요한 이론을 지원해 주었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무기를 바탕으로 실무에 다양하게 응용해 볼 수 있어 매우 유익했다.
◉꿈을 꾸고 꿈을 실현하는 삶 : 인생의 원형
은행에 입행했을 때 한 선배의 말을 잊지 못했다. 은행원은 도장만 갖고 다니면 된다는 것이었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며 그저 시간 중에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은 한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에 대응할 것을 미리 준비해야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행 이후 사설학원, 직장 내 연수, 통신교육, 외부세미나 등 자기개발에 열정을 쏟아 붓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남들보다 취미 생활이나 가정에 보다 충실한 삶을 살지는 못하였으나 대신에 자기개발에 힘쓰는 사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노력하는 사람, 은행 업무로 표창을 많이 받은 사람,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려고 늘 애쓰는 사람,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 제자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주는 사람 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찢어질 듯 가난했던 시골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무꾼에서 시작하여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경영학박사에, 은행의 지점장, 본부 부장을 거쳐 , 퇴직후 인생이모작으로 대학의 시간 강사, 초빙교수로 변신했다. .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3모작으로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이번 여름 반기문 유엔사무 총장님 한국방문시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UN글로벌임팩트프로그램"에 참석 " 고등교육을 통한 세계의 빈곤퇴치"를 위한 슬로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가 직장에서 , 대학강단에서 몸소 익힌 교육프로그램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3세계를 위해 봉사하기 위한 야무진 다짐하에 지금도 틈틈히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가 퇴직후 10년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영어로 메모한 노트만도 여러권이 넘는 것을 본다면 이꿈 또한 이루어 낼 것이라 확신한다 . 이 모든 것들은 다 그의 삶에서 작은 꿈들을 하나씩 이루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경주하였다. 여기에는 주위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많은 도움과 자극과 도전이 되었다.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면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했다. 만일 중도에 낙심하고 포기해 버렸다면 오늘의 기적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무한한 잠재능력을 찾아 처절한 고통과 부딪히면서 이루어온 삶의 조그마한 결실들을 하나씩 지켜보면서 아직도 그는 못다 이룬 꿈을 향해 그분께 조용히 간구하면서 매진할 각오를 굳게 한다.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그 일들은 그와 그의 직장과 이웃들과 사회에 유용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그는 사명을 다하여 자신의 일을 하고자 한다.
꿈을 가진 자만이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의 삶의 모든 벗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그는 참으로 어려웠던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너무도 긴 고난의 터널이었고, 길고 오랜 세월이어서 그가 어떻게 그 긴 인고의 터널을 통과해 왔는지 까마득할 정도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과거보다 더 발전해 있든지, 아니면 오히려 예전보다 못하여 퇴보해 있든지 두 가지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어떻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하고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면서 자신의 현재를 있게 해 준다. 과거에 기울였던 그의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오늘의 준비가 내일의 그를 만들 것이므로 계속 그를 더 낫게 만들고 있다. 그 긴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항상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없었다면 그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기는 쉬워도 그 세월을 견뎌내는 것은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꿈이 되었으면 하는 조그마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야기의 대상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여느 작은 비닐하우스 월세 집에서 살다가 물난리를 맞아 실의에 찬 고등학생 정군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 형편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그의 지난날의 이야기에 큰 용기를 얻은 정군의 희망찬 모습을 보고 자신이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강동노인종합복지관에서 사회복지 실습을 위해 독거 노인들에게 쌀포대를 메고 지하실까지 계단을 걸으며 전할때는 진정 섬김과 봉사가 무엇인지를 체득한 계기가 되어 이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생생한 사례로 전달해 주고 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 시절에도 그는 배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 그는 책벌레요, 공부벌레요, 일벌레 라고 불리리만큼 공부와 일에 에 전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 학업도 중학교 졸업이 마지막이 될 뻔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3년이나 늦은 고등학교, 서울서 맨몸 대학이라, 낭만보다는 학비 걱정, 생계 걱정으로 강의실 뒤편에서 울음을 삭여야 할 때가 많았다.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할 때는 정말 철저히 고통을 감내하며 노력했다. 그것은 그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절하고 넘어지면서도 꿋꿋이 일어나 걸어온 지난 5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감사의 마음 :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은인
그는 이 시점에 어머니를 머리에 떠올린다. “아, 어머니! 그의 50여 년의 삶이 있게 해주신 어머니! 온 몸으로 부딪치며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주신 어머니! 올여름 이미 작고하신 어머니 가슴에 머리를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싶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큰 절을 다시하며, 그간의 고생에 온 맘을 다 해 감사드리고 싶다. 기나긴 날 동안 인내하며 피어난 노란국화꽃 한다발을 안겨드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가난과 싸우며 어렵게 이 세상을 부딪쳐 온 애틋한 형제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인생의 반려자로서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준 사람들 , 부족한 남편이지만 자기개발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해주고 인내로 감내해 준 아내에게도 전에 없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아들들에게도 누구 못잖은 고마움을 전해주고 싶다. 그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아빠, 그 고생 이야기 이제 그만 하세요.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예요”라고 핀잔을 주곤 했던 아들이지만 남다른 생각이 많아 고마워한다. 또한, 강의실에서 잘도 따라와 준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 Yes Kim으로 인해 행복해진 것보다, 훨씬 더 진하게, 그가 그들 때문에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고 감사하고 싶어 한다. 더 넓은 터에서 다시 만나 함께 일할 날을 기다리면서, 학생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대학에서의 학문에의 길을 열어 주시고 박사 과정 뿐만 아니라 학위취득 이후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 대학 강단활동을 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그의 영원하신 스승, 정암 유세준 교수님과 인천대학교에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이 모든 것 위에 그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와 그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김삼환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감동과 스릴로 가득찬 그의 얘기를 들을수 있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어려움과 역경에 처해 있는 이들, 특히 ‘꿈’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께 함께 계속 매진할 것을 당부한다. 사랑합니다! 함께 계속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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