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운동’(聖潔運動, Holiness movement)은 19세기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신앙운동으로 그 특징은 신자로 하여금 죄 없고 완전하고 거룩한 그리스도교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회심의 경험을 크게 강조하는 성화(聖化) 교리에 있다. 이 시기에 태동한 많은 성결교회는 유사 감리교 분파에서부터 오순절 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편 성결운동이 유럽에서 확산되어갈 때, 그 양상은 미국적 상황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유럽 성결운동에서도 미국 성결운동에서와 같이 현저히 나타나는 중요한 연관점이 있는데, 이는 완전주의와 경건주의적 태도에 의한 체험적 신앙의 강조에서 나타난다. 영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의 부흥은 무디(D.L. Moody)의 사역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분명하고, 1875년에 케직(Keswick)에서 시작된 성결운동은 개혁주의 전통의 빛 안에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케직의 성결론은 피어슨(A.T. Pierso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마이어(F.B. Meyer) 같은 유명한 사역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전 세계로 번져갔다.
한편 한국 성결운동의 본산지는 용강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라 하겠다. 용강군은 평안남도 서남단에 자리한 13개 면을 가진 군으로 면적이 745㎢이고 1910년 당시 인구는 남 53,075명, 여 53,114명 합계 106,189명으로 당시 평안남도 전체인구의 약 14%를 차지하고 있었다. 호수로는 20,756호로서 평안남도 내의 51개 시, 군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군이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서북인은 성격이 강하여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적으로 문, 무 고관에 등용될 수 없는 실정에 있었는데, 1780년(정조 4년)에 용강군 출신인 홍경래가 소위 반란을 일으켜 서울의 양반 탐관오리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었고, 1866년(고종 3년)의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용강군 지방이 타 지방보다 예수교 수용이 빨랐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토마스 목사가 전한 중국어 성경이 용강군 강서 지방의 해안 지대에 많이 배포되었던 까닭에 용강군 일대가 타 지방보다 예수교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평양에 주재하며 선교하던 마포살열 목사와 노보을 목사에 의해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일찍 전도되어 많은 교회와 예수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감리교회 제1대 총리를 지낸 양주삼 목사와 감리교 신학교의 교수와 국회의원을 지낸 정일형 목사 또한 용강군 대대면 출신이었다.
조선 땅에 복음전도관(현 성결교회)을 세워 성결운동을 시작한 선구자들 중 상당수의 인물들이 용강군 출신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성결의 은혜를 갈망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도쿄성서학원에서 2-3년 동안의 수양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성결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 중에서 김상준, 김혁준, 강태온, 안동원 등 4명은 모두 용강군 출신이다. 그리고 1913-1925년 사이에 경성성서학원에서 수양을 마치고 한국성결교회의 기반 인물이 된 이들 가운데에도 용강군 출신이 10여명에 이른다.
특히 용강군의 ‘의성 김씨’들은 한국 성결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중 하나인 김상준 전도사 외에 김혁준 전도사, 김석준 전도사, 김병선 전도사는 모두 용강군 출신 의성 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양반들로서 한국 성결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용강군 출신 의성 김씨 가운데는 특히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서울 보성학교를 나와서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마침내 임시정부의 의정원 15대 의장을 지낸 김봉준과 독립운동가였던 김극준과 김정숙, 김덕준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교육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 특히 종교계에서 복음전도관(성결교회)의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이 많았다.
용강군의 ‘새주리 강씨’들 또한 일찍이 예수교에 귀의하여 성결운동의 선각자적 역할을 하였다. ‘새주리 강씨’의 유래는 정묘와 병자호란의 사변으로 ‘진주 강씨’의 중시조 ‘강 원’ 공이 용강군 새주리로 정착하면서 유래되었다. 새주리 강씨의 선조들은 비록 낙향하기는 했지만 지방부호로서 양반 행세를 하면서 대대로 지주로 살았고, 강직하고 검소한 가풍이 확립되고 유교의 모든 미덕을 철저히 지켜서 수신제가의 관념이 강하였다.
그리고 특히 신학문을 숭상하여 서양문물 유입 가운데 일찍이 예수교에 귀의하여 한국 성결운동의 선구자들을 여럿 배출하였는데 강태온 목사, 강태즙 목사, 강시영 목사 등이 그들이다. 용강군 귀성면 노하리에서 출생한 강태온 목사는 3.1운동 때 33인에 들지는 못하였지만 민중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해방 뒤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에게 통일의 방안까지 제시하는 등 언제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였다. 강태온 목사와 동향에서 태어난 강시영 목사는 강태온 목사의 6촌 조카로서 김상준 목사의 전도를 받아오던 중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어 성결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강태즙 목사 또한 위의 두 강씨와 동향(同鄕)으로 강태온 목사와는 집안 형제뻘이 되는데 강태즙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강씨 집안의 외손인 김상준 목사의 영향이었고 강시영 전도사의 권유에서 비롯되어 초기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여 무교동교회와 규암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성결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청주 한씨’ 한익찬 목사도 평남 용강군 삼화읍 출생으로 한국 성결운동 선구자의 한 사람이다. 한 목사는 5살 때부터 15살 때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35세에 강태온 전도사의 권유로 서울에 상경하여 고향 선배인 강시영이 공부하는 경성성서학원에서 학업하고 3년 후 졸업하여 아현복음전도관에 부임, 한국 성결교회의 창시자이며 같은 고향 사람인 김상준 목사와 함께 사역하게 되었다. 한 전도사 부부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아현복음전도관은 1년 동안에 크게 부흥하였고 한 전도사의 헌신적인 목회생활은 은산, 홍산, 무교동, 안성 등 가는 교회마다 성결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한국 성결교회의 초기 복음전도관시대 교역자 중 용강군 출신이 19명으로 전체 남자 전도인(교역자) 수의 25%에 이르렀다. 다음은 한국 성결교회의 초기 복음전도관 시대 용강군 출신 교역자 명단이다. 김상준, 김혁준, 강태온, 안동원, 강시영, 김석준, 한익찬, 김병선, 곽재근, 송애경, 노희진, 강지환, 정동국, 정달제, 박달문, 김승만, 차승하, 장종식, 최용근 전도인 이상 1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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