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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我讀
『6월에 읽은 책들』
강남국 읽음
≪일기일회(一期一會)≫
법정지음 문학의 숲 刊
법정스님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겐 언제나 그랬다. 그의 『무소유』라는 자그마한 문고본의 책을 읽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10대였던가 아님 20대였던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그 책은 여전히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으로 남아있다. 벌써 몇 번을 읽었는지조차 기억도 없지만 몇 십 년의 차이를 두고 계속 읽는 책 중의 하나는 여전히 그 책이다. 그 뿐인가. 법정스님의 대부분의 책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늘 탐독하다 보니 육신은 떨어져 있으니 그분은 늘 내 곁에 계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글은 내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수가 되고 있다. 그이 책 대부분을 곁에 두고 읽고 있지만, 언제 어느 때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그냥 좋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늘 생각하게 된다. 쓸데없는 짐을 참 많이 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그 짐의 부피를 덜어내는 자각과 깨달음을 갖게 하니 그분은 실로 대단한 나의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이 직접 쓰신 책도 좋아하지만 『숫타니파아타』를 비롯한 번역 책들도 좋아하기에 늘 그 책들을 곁에 두고 읽는 편이다. 세월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생명은 일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한다. 그는 우리 시대에 영원한 학승(學僧)이다. 이번에 읽은 『일기일회(一期一會)는 그의 법문집이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단 한 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이라는 해설이 아니더라도 몇 년에 걸쳐 길상사를 비롯한 명동성당, 그리고 뉴욕 맨해튼,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행해진 법문들을 모은 것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한 것이라고나 할까. “단 한 줄도 뺄 수 없는 말씀들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이 될까. 무책임한 법정의 마니아라고 놀려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만큼 그의 글을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그의 사상을 그리 좋아하는지 모른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그대로 밥이 되는 것 같다. 이것저것 깊이 따질 것이 뭣이 있던가.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반성하고 자책하고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늘 자각하게 하니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수년전 나는 그분의 법회에 몇 차례 찾아간 적이 있다. 때마침 「KBS 일요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취재를 하던 중에 하필이면 스님과 악수하는 장면이 정면에서 찍히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강집사가 스님이 나오는 프로에 나왔으니 주위에서 그럴 법도 했으리라. 한번만 나왔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재방송과 몇 년째 부처님오신 날이면 재방송을 틀어대는 바람에 들통산통 다 깨졌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갔다 해서 뭣이 문제란 말인가. 스님의 책을 좋아해서 수십 년을 읽은들 그것이 하나님과 부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일까? 하나님과 부처님은 그렇게 시시한 분들이 아님을 믿는다. 나의 작은 행위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못하는 종교 간의 벽을 허물 순 없을지라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헨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보리 刊
『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해 집이든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헬렌 니어링이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 위였던 스코트를 만나 평생을 해로하는 모습이 우리네 농촌에서 그렇게 흙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노부부를 보는 듯해서 더 아름다웠다. 스물네 살에 스코트를 만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의식을 갖고 한세상 산다는 것은 귀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의 반려자로서 그의 곁에서 남편인 스코트가 하는 모든 일에 협력하는 모습 또한 한국의 숱한 아내들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 편안히 읽을 수 있었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고 한다면 남편이 그냥 평범한 농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남편 스코트는 미국의 산업주의 체제와 그 문화의 야만성에 줄기차게 도전하다 대학 강단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났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가난했던 뉴욕생활을 청산하고 버몬트 숲에 터를 잡고 농장을 일군다. 무려 반세기 동안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모습은 삶의 향기가 아닐 수 없었고 부럽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날 그렇게 사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부(富)나 명예에 크게 탐닉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과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넉넉한 생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박형준 이장욱 엮음 창비 刊
이 책은 창비시선 300기념시선집이다.
201번부터 299번까지 시집 중에서 시 한 편씩을 뽑아 엮은 것이다. 그러니 100명의 각기 다른 시인들의 100편의 시를 읽는 맛은 실로 짭짤했다. 한사람의 시집을 읽는 것도 좋지만 모든 시인의 시집을 다 구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맛을 보는 것은 여간 좋지 않다. 낯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초면의 인사를 나누는 기분으로 한편씩 곱씹어가며 읽었다. 한권의 시집에서 단 한 편을 고른 것이니 어쨌든 최고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물론 선자의 취향에 따른 것이긴 해도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독자의 입장보다 한발 앞서 갔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터. 믿고 읽으려 했다. 김수영의 〈해금을 켜는 늙은 악사〉부터 김선태의 〈조금 새끼〉까지로 구성된 이 책은 작품출전까지 친절하게 표기해 놔서 더 읽고 싶은 시인이나 작품을 고르는데 아주 유용하겠다 싶었다. 오늘날 종교만이 위기가 아니라 시도 위기라는 얘기가 들린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잠자는 시인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대인들은 고독하고 외롭다. 그 외로운 사람들의 등을 다독여 주지 못한다면 시인이 제몫을 다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시를 써야함도 맞지만 시인은 시로 세상을 정화(淨化)시켜야 할 제일 큰 몫(使命)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시를 써야 시인이고 독자는 시속에서 잃은 고향을 만나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시집 김광규 옮김 한마당 刊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1944년)
이 책을 펼치면 맨 먼저 읽게 되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여기서 잠깐 브레히트(1898-1956)라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이 책을 번역한 김광규시인에 의하면 그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던 독일작가라고 한다. 서사극 이론과 탁월한 희곡들을 통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분량의 시를 썼으며 그 영향력은 현대 시문학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이 대표적인 시 47편이 수록돼 있다. 참고로 그는 20세기 서양연극사를 대표하는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이다. 형식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5여년을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후 자기의 작품들과 「서사극」이론을 실제 무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으나 브레히트는 연극 연습 도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원시 제목은 Ich, der Ueberlebende(1944년)이고 이 제목은, 괴테의 " 베르테르"의 한 귀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 책엔 거의 매편마다 각주가 달려있어 이해를 돕는다. 그는 평생 1,200편의 엄청난 양의 시를 썼고 의학도 출신이기도 하다. 반체제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하여튼 그는 시대를 뛰어 넘는 탁월한 인물이다.
≪불과 얼음≫
프로스트 정현종 옮김 민음사 刊
모처럼 만에 외국시집을 읽었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19번째로 나온 이 책은 얼마 전 『광휘의 속삭임』이라는 9번째 시집을 낸 정현종 시인이 번역했다는 것으로 신뢰를 더했다. 정시인의 작품을 좋아하기에(그의 시집을 거의 대부분 갖고 있다) 그가 번역한 작품 또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도 정확한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다행인 것은 오른쪽에 영어원문이 나와 있다는 것이 좋았다. 문제는 시란 그렇게 난해한 언어로 씌여지진 않지만 해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읽을 수는 있으되 번역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의역이 아니어도 직역만으로도 모든 시를 다 섭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하여튼 시집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187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여 94년 첫 시「나비」를 발표한 이후 1936년 퓰리처상을 네 번 수상했고 현대 미국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1963년 사망했다. 그는 40여개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을 만큼 큰 어른이셨다. 다른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외국의 시를 읽을 때도 역시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혼란과 맞서 있는 잠정적 결말〉이라는 자신의 시에 대한 언급은 그이 시 핵심이 아닐까 싶다. 판단 보류 상태인 그이 시들이 오늘 어떤 역할을 할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이 시는 암시적이었다.
≪마주침의 발명≫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케포이북스 刊
강남대학교 국문과 교수인 김행숙(1970~)의 책은 처음이었다. 행(杏)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특이한 탓인지 한번 들었던 이름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는데 언젠가 신문에서도 서평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시를 선정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벌써 오래전 충남 대천에 살 때 행(杏)자가 들어갔던 지인이 있었기에 아마도 그녀의 이름이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1970년생이면 아직 젊은데 이렇게 글을 썼구나 싶어 만만찮은 책값(14,000원)에도 구입해 읽었는데, 젊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 했다. 책을 보니 저자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를 갖고 있고 현대문학으로 등단을 했으며, 2007년엔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충북대 정효구 교수의 『시읽는 기쁨 1~3』과 신경림 시인의 『시인을 찾아서1~2』을 떠올린 것은 나만 이었을까. 하여튼 이 작품은 그런 류(類)의 책이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저자가 각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 취재하고 글을 썼다는 점일까. 독자로서 한사람을 만나고 그의 작품세계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는 것이 쉽지 만은 않으리라. 깊이 있는 드여다 봄은 늘 나의 부러움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도 닮고 싶은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사람의 능력이 같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똑 같이 읽고도 짚어내지 못하는 내 백태낀 안목에 탄식이 나오기도 한다. 이 책엔 열 명의 시인들이 등장한다. 52년생인 이성복, 70년생인 황병승, 68년생인 이원, 70년생인 진은영, 61년생인 박상순, 66년생인 박형준, 46년 생인김명인, 71년생인 강정, 65년생인 이수명, 73년생인 김언 등등 솔직히 이성복이나 김명인 외엔 낯선 이름들이지만 그들은 이미 한국 시단에서 모두들 자신의 위치를 굳힌 시인들이었다. 두 시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젊은 시인들인데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흥미로웠고 타인의 시세계에 접근해 가는 저자의 역량이 느껴졌다. 이성복의 화두는 무엇일까?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詩가 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다보면 풋풋함이 느껴져서 좋다. 저들이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해 한국시단을 더 풍성하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까. 독자적인 시풍이나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시인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시단을 더 넉넉하게 해줄 기대주들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특히 2008년엔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진은영시인의 작품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란 저서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의 시집을 구해 읽어볼 참이다. 이수명시인의 몇 작품도 좋았는데 이런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인들의 작품과 또 그들의 작품을 알게 된다는 것은 여간 좋지 않다. 그만큼 눈뜨지 못했던 어둠이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낯선 저자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늘 새로운 세계를 접목하게 하는 것 같다. 새로운 지인을 한 명 더 사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나는 한권의 책을 그런 마음으로 읽는다. 이번에도 김행숙의 책을 그렇게 만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시인들과도 그렇게 인연을 쌓아갈 것이다.
2009. 6. 22~23
청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