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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주이씨양소공의안대군 원문보기 글쓴이: 리보섭
4세약사
의안대군(義安大君) [1348(고려 충목왕 4)~1408(태종 8)]
환조대왕과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화(和)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대광보국 승록대부(大匡輔國 崇錄大夫)이며 태조고황제의 동생이다. 고려 공민왕 때
대장군 으로서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고 우왕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
로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활약하여 1399년(태조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1389년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2년(태조 1)순충좌명(純忠佐命)개국1등공신 녹권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1395년(태조 4) 태조고황제를 모시고 조정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은 <삼봉집(三峯集)>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았다.
1400년(정종 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고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한편 그 해 10월 13일에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 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고?"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1404년(태종 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 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 문 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환조대왕이 1360년 (공민왕 9)에 승하하자 태조고 황제 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한편 공민왕은 태조고 황제를 존경하는 까닭에 정안옹주 김씨의 아들 의안대군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귀한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 김씨에게 드리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지극한 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 김씨에게는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고황제도 공민왕의 이 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구(纏頭: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저차면서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08년(태종 8)에 돌아가니 향년 61세였으며 태조고황제가 승하한 지 다섯달 뒤였다. 1410년(태종 10) 7월 종묘 태조고 황제 묘정에 배향 되었다.
순천군(順川君) [ ?~1419(세종 1)]
대군의 장남이며, 휘는 지숭(之崇)이고 시호는 정소(靖昭)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성군(完城君)으로 봉해졌다가 1878년(고종 15)에 순천군(順川君)으로 재봉군 되었다.
1409년(태종 9) 5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1년(태종 11) 5월 장생전(長生殿)을 수리하고 평양에 있는 태조고황제의 진영(眞影)을 봉영해 와 광연루 에 봉안하고 태조고황제의 진영과 개국공신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1413년(태종 13) 4월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어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를 제수받았다.
1414년(태종 14) 1월 지돈녕부사, 1415년(태종 15) 12월 판좌군도총제사, 1416년(태종 16) 판돈녕 부사, 1418년(태종 18) 6월에 판우군도총제사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2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였다.
6월에 하성절사로 다녀와 임금을 배알하고 중국 황제가 하사한 선물을 전달한 후 며칠 뒤 갑자기 세상을 뜨니 조정에서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장례를 후히 치러 주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완천군(完川君) [1373(고려 공민왕 22)~1406(태종 6)]
대군의 차남이며 휘는 숙(淑), 시호는 제의(齊懿)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완천군은 부친 의안대군과 함께 태조고황제를 도와 개국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 에 숙종대왕은 이런 부자의 높은 공을 기려 '양세원훈(兩世元勳)'이라 친필을 내렸다.
1398년(태조 7)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로 임명되고, 1401년 (태조 1) 좌명1등공신 녹권을 받고 완천군으로 책봉되었다.
1405년(태종 5)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406년(태종 5)10월에 별세했으며, 이 때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제문을 내려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광주군 노우개 일안인데 장남 하령군양(穰)이 계유정난에 3상신(相臣)과 함께 순절하여 실전되었다.
학천군(鶴川君) [1375(고려 우왕 1)~1435(세종 17)]
대군의 3남이며 휘는 징(澄),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학천군(鶴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대군자손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하고 무골 기질이 있었으며 13세에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낭장(郎將)을 지냈다.
1396년(태조 5) 1월 문과에 급제했다.
정헌대부이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1412년(태종 12) 5월 우군총제에 임명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9월 하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태종 17) 7월 동지 돈녕부사에 발탁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좌군도총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7월 표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을 다녀오라는 어명을 받아 북경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10월에 돌아왔다.
1423년(세종5) 5월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25년(세종 7) 중군도총제로 발탁되었다.
1426년 (세종 8) 절일사(節日使)로 3월에 북경에 다녀와서 6월에는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자격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 1432년(세종 14) 3월 판중추원사, 1434년(세종 16) 9월
지돈녕부사로 임명되었다.
1435년(세종 17) 8월에 별세하니 세종대왕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 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영천군(寧川君) [1379(고려 우왕 5)~1431(세종 13)]
대군의 4남이며 휘는 담(湛)이고 영천군(寧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했고 1417년 (태종 17) 우군총제, 1418년(태종 18) 동지 돈녕부사에 제수
되었다.
총녕대군의 세자 책봉 때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라는 특명을 받아 임금께 올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군을 수창궁으로 불러 행차시나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반드시 수행토록 하였으므로 늘 가까이서 임금을 모셨다.
1419년(세종 1) 지돈녕부사로 좌금위삼번 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로, 4월에는 중군도총제로 승진했다.
10월에는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받아 북경을 다녀와서 이듬해 9월에 도총제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평양위선사 지돈녕이 되어 선온(宣醞: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는 것) 을
받들고 떠났다.
1430년(세종 12) 세종대왕은 6월에 4도감을 설치하여 빈전도감(賓殿都監)의 제조로 임명했다.
1413년(세종 13) 12월에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애석해 하며 예조에 명하여 치제케 하고
제문을 내렸다.
또한 부의로 쌀.콩 각 20석을 내렸다.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신일사 앞산에 있었다.
개국1등공신인 의안대군의 아들이므로 나라에서 공의 묘소를 하사했는데, 이 묘소 경내를 한 유생이 범장(犯葬)한 일이 있었다.
이를 처리하는 산송진겅(山訟陳情)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충효사상과 위선사업을 알기 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여 둔다.
"영천군 묘앞에다 범장한 산송에 대한 진정서. 부여 거주 유학(幼學) 리대려(李大呂:大容) 등은 유수(留守) 합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희들 14대조 지돈녕부사공은 개국공신 의안대군의 아들로서 분묘가 광주군 돌마면에 있사온데 산직(山直)을 두어 금호(禁護)하여 내려온 지 근 4백년이 되었습니다.
자손들이 매년 세일사에 성묘의 예를 병행하고 있사온데 뜻하지 않게 지난 신축년(1841:헌종 7)에 한 무덤이 소생의 선묘 앞에 생겨나 탐문한 즉 이는 서울에 사는 잠지구 처의 무덤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대대로 지나온 내력을 충고하고 사리로써 깨우치니 남지구가 사과하며 이장할 뜻으로 사정하더니 다시 옮기어 지돈녕공의 분묘 계하에다 이장하였습니다.
이 어찌 대사부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지난 병오년(1846:헌종12)에 두 차례나 진정하여 즉시 옮기라 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이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각기 먼 시골에 흩어져 천리길에 있아오나 가슴 속에 가득 찬 일념은 오직 위선(爲先)에 있아 옵니다.
금년 3월15일 주상께서 행차하실 때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원통함을 알리었습니다.
마치 천지 부모 같은 큰 은혜를 특별히 입사와 봉심(奉審) 거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첩보를 내리시어 속히 이장하도록 하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병오년에 두 번 진정했을 때 즉시 이장한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6년이 지나도록 파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으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감영과 고을에 올렸던 도형을 연명소장에 동봉하여 유수 합하께 올리옵니다.
원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원통한 울부짖음에 지체없이 선처하여 주시옵기 비나이다.
신해년(1851:철종 2) 4월, 유학 리대여 등 23명 올림"
지금은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1987년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봉하에 천묘하여
신도비와 사우를 세워 봉제사하고 있다.
이장 작업 중 광중(壙中)에서 조선통보 8엽이 출토되어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전천군(全川君) [ ? ~ ? ]
휘는 교(挍), 대군의 5남으로 판교령과 세자시사관(世子侍射官)을 역임했으며 전천군(全川君)으로 봉군되었다.
흥천군(興川君) [1381(고려 우왕 7)~?]
휘는 회(洄), 대군의 6남으로 흥천군(興川君)으로 봉군되었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이 되었다. 1421년(세종 3) 도총제로 임명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흥천군의 장남 보인(保仁)과 5손자(해.심.모.사문.주령)가 모두 화를 입었으며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익천군(益川君) [?~1433(세종 15)]
휘는 점(漸), 대군의 7남으로 익천군(益川君)으로 봉군되었다. 1399년(정종 1) 4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종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경연시독관 배중륜에게 "숙부의 아들 점이 종친으로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범상한 예가 아니다. 네가 집현전 상서사(尙瑞司)와 삼관의 여러 선비와 함께 의안공의 집에 가서 치하하라."고 일렀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과 첨지돈녕부사, 1421년(세종 3) 공조참의, 1425년(세종 7)우군동지총제, 1425년(세종 8) 부유후(副留侯), 1430년(세종 12) 좌군총제, 1431년(세종 13) 동지돈녕부사, 1432년(세종 14) 11월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433년(세종 15) 12월 18일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부의했다. 한편 장남 의산(義山)은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하령군(河寧君) [?~1453(단종 1)]
휘는 양(穰), 시호는 충의(忠毅_, 대군의 적손이며 완천군의 장남이다. 일찍이 조부 의안대군의 후광을 입어 호군에 제수되어 김종서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웟다. 이 때 맺은 인연이 훗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투철한 정신에 입각하여 계유정난 때 함께 생을 마감했다.
1433년(세종 15) 옥구진병마사, 1439년(세종 21) 8월에 의주목사, 1441년(세종 23) 3월에 첨지중추원사, 9월에 중추원부사, 10월에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444년(세종 26) 9월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1446년(세종 28) 6월 동지중추원사, 12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447년(세종 29) 3월 사온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11월에 강계절제사를 제수받았다. 1451년(문종 1)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등극하여 2월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발탁되었고, 4월 지중추원사, 7월 지돈녕부사, 10월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찬성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대왕은 공을 매우 신임하여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직하도록 하고, 대권 문밖을 거둥할 때는 공에게 어가뒤를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도 승하할 때 황보인.김종서와 공 등을 불러 세자가 몸이 약하여 염려되니 세손(단종대왕)을 잘 돌보도록 당부하였다. 문종대왕도 승하할 때 이들을 다시 불러 어린 세자를 도와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1453년(단종 1)에 공은 좌찬성이 되어 어린 단종대왕을 각별히 모셨지만 계유정난으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3상신과 함꼐 순절하였다. 또한 아들 승윤과 4촌 형제 등 의안대군 자손 16인이 이때 절의를 세우다 화를 당했으니 이를 일컬어 숙종대왕은 "일문과절(一門夸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이들 형제들은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동학사 숙모전에 안치되었으며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위차(六宗英位次)에 배식되었다.
1972년(고정 9)에 하령군(河寧君)으로 봉군되었고 12인에게는 시호를 내렸으니 불천위(不遷位)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하릉군(河陵君) [ ?~? ]
휘는 확(穫), 대군의 손자이며 의정부 좌찬성인 하령군의 아우이다.
1872년(고종 9)애 허룽균(河陵君)으로 봉군되었다.
하령군이 절손됨에 따라 1등개국공신 영의정부사 의안대군 종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창성군(昌城君) [ ?~?]
휘는 의경(義敬), 대군의 손자이며 창성군(昌城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鶴川君)의 장남이다.
사정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창선군(昌善君) [ ?~?]
휘는 근생(根生), 대군의 손자이며 창선군(昌善君)으로 봉군되었다.
1468년(세조 14) 7월에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냈으며 행 호분위 중 부사정(行 虎賁衛 中 部司正)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경부인 낙안이씨(樂安李氏)이다.
풍안군(豊安君) [ ?~?]
휘는 효손(孝孫), 대군의 손자이며 영천군의 장남이다.
조산대부 사선 주부를 지냈으며, 증통정대부 호조참의직을 받았다.
1872년(고종 9)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되고 증 영종정경의 봉작을 받았다.
안계군(安溪君) [?~1453(단종 1)]
휘는 보인(保人), 시호는 충장(忠莊).
대군의 6남인 홍천군의 장남으로 곧 의안대군의 손자이며 안계군(安溪君)으로 봉군되었다.
일찍이 목사를 지냈으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4촌인 하령군과 단종대왕을 옹호하다가 아들 7형제 중 막내만 빼놓고 6인의 아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한산군(韓山君) [ ?~1453(단종 1)]
휘는 의산(義山), 시호는 충정(忠貞), 대군의 손자로 익천군의 장남이다.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계유정난 때 의안대군파 16인 중의 한 사람으로 장남 해령군 우경(友敬)과 같이 화를 당했다.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김해김씨이다.
2남을 두었으나 장남은 함께 화를 당하고 차남 해평군이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양군(礪陽君) [ ?~1453(단종 1)]
휘는 승윤(承胤), 자는 장지(長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6종영 중 하령군 양의 장남이다.
1453년(단종 1)에 증광시 정과(丁科)에 급제했다.
헌납 ․ 직강을 지냈으나 아버지 하령군과 동생 여평군과 세 아들이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고종 9)에 여양군(礪陽君)으로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아들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계조(繼祖) ․ 차남 소조(紹祖)
․삼남 장군(將軍) 3형제가 모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이들 3형제도 모두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있다.
여평군(礪平君) [ ?~1453(단종 1)]
휘는 승효(承孝), 시호는 충숙(忠潚).
대군의 증손이요 하령군의 차남이며 여양군의 동생이다.
여평군(礪平君)으로 봉군되었다.
계유정난때 아버지, 형, 조카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시호를 받았다.
1900년(광무 4)에 9대손 경림(慶林)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왕명이 내려졌다.
순창군(順昌君) [ ?~1453(단종 1)]
휘는 승로(承老), 시호는 소민(昭愍).
대군의 증손이며 완천군의 차남인 하릉군의 장남이고 하령군의 조카이다.
일찍이 사마 양시에 급제했다.
1453(단종 1)계유정난 때 함께 화릉 당하여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순창군(順昌君)으로 봉해졌다.
1900년(광무 4)에 왕명으로 14대 족손 재익(在翼)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했다.
순흥군(順興君) [ ?~?]
휘는 수로(守老), 대군의 증손(曾孫)이며 하릉군의 2남이다.
1877년(고종 9)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되었다.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며 대군의 종손(宗孫)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이다.
청릉군(靑陵君) [1426(세종 8)~1486(성종 17)]
휘는 희철(希哲), 대군의 증손이며 청릉군(靑陵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 ․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의 손자이다.
사정공부사(司正公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문평군(文平君) [1428(세종 10)~1497(연산군 3)]
휘는 종윤(從胤), 자는 가계(可繼).
대군의 종손이며 문평군(文平君)으로 봉군되었다.
1449년(세종 31)에 문음으로 충의위에 예속되었다가
사과(司果) 호군(護軍)이 되었다.
1462년(세조 8)에 군기주부와 안주판관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12월에 별세했다.
37년 후인 1535년(중종 30)에 충청병마절도사인 아들 형순(亨順)이 귀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조부 영천군 산소 경내에 있었으나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하에 천묘하여 모셨다.
문양군(文陽君) [1431(세종 13)~1489(성종 20)]
휘는 계윤(季胤), 대군의 증손이고 영천군의 손자이며 문양군(文陽君)으로 봉군되었다.
현령을 지냈다.
묘소가 경기도 성남시 율동에 있었는데 분당 지역 도시 개발로 수용되어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 아래에 이장하였다.
성남시 율동 영천군 및 그 자손들의 묘역은 사패지로 5백여 년 산지기를 두어 세일사(歲一祀)를 모시던 곳이었다.
이장시 묘를 헤쳐보니 석회를 5겹으로 싸고 8척 깊이를 내려가니 내외분의 내관과 외관이 동시제품으로 사방 귀퉁이 먹물선이 뚜fut하고 현령공의 외관 천판(天板)을 열어보니 한지에 연꽃이 사방에 그러져있고 중심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보이는 글이 흑서되어 있었다.
명주필과 명정(銘旌)순으로 놓아져 있는데 한지의 내용을 옮겨 쓰는 동안 종이가 삭아버려 내용 파악을 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 사진으로 찍어 그 자료에서 보면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명주 한 필이 접혀져 있고 EH 명주 한 필 접은 속에 ‘통훈대부 금구현령 리공지구(通訓大夫 金溝縣令 李公之柩)’라 또렷하게 먹글씨로 적혀 있었다.
명정 밑에는 이불로 덮인 채 염습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시신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윤기가 도는 검은 머리카락으로 틀어진 상투와 수염 등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시신도 탄력감을 느낄 정도의 피부 상태가 유지되어 있었다.
염습의를 모두 벗기고 한지와 마포로 다시 개렴하여 이장했다.
훗날 문화재관리국에 알렸더니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연락이 되어 민속발물관 연구실 박성실 박사와 고분자 연구원이 성남이 율동광중에서 나온 염의를 거두어 연구에 필요하다 하여 종중에 보관하고 있는 명주 ․ 명정 ․ 조선 ․ 통보 ․ 염주 등을 민속발물관에 기증하였다.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 관장 석주선 박사와 박성실 연구원 등은 이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 현존하는 조선조 최고의 의상으로 밝혀졌으며 1993년 5월 2일 개관 12주년 기념 연구논문 발표회를 성황리에 가졌다.
화성군(花城君) [?~1453(단종 1)]
휘는 해(諧), 시호는 충목(忠穆).
대군의 증손이며 홍천군의 손자이고 안계군의 장남이다.
아버지와 다섯 동생과 함께 계유정난 때 화를 당했다.
일찍이 대호군을 지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화성군(花城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원주변씨로 아들 석준(碩準)과 석규(碩圭)가 살아 남아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화산군(花山君) [?~1453(단종 1)]
휘는 심(諶), 시호는 희민(僖愍).
대군의 증손으로 안계군의 차남이며 화성군의 아우이다.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하고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화산군(花山君) 에 봉해졌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우성(遇成)이 봉사하고 있다.
화릉군(花陵君) [?~1435(단종 1)]
휘는 모(謨),시호는 희의(僖毅).
대군의 증손이며 안계군의 3남으로 16인 중에 끼어 계유정난 때 부자, 형제들과 함께 화릉 당했다.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어 있다.
화릉군(花陵君)에 봉군되었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민익(民翼)이 봉사하고 있다.
화남군(花南君) [?~1435(단종 1)]
휘는 사문(沙門), 시호는 의민(毅愍).
안계군의 4남이며 화성군의 셋째 동생이다.
계유정난때 화를 당하고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어 있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인섭(仁燮)이 봉사하고 있다.
화남군(花南君)에 봉해졌다.
화평군(花平君) [?~1435(단종 1)]
휘는 주령(注令), 시호는 숙민(肅愍).
안계군의 5남이며 화성군 ․ 화산군 ․ 화릉군 ․ 화남군의 동생으로 화선군의 형이다. 또한 계유정난 때 희생되어 숙종대왕 때 신원되었다.
화평군(花平君)에 봉해졌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3대 족손 주만(周萬)이 봉사하고 있다.
화선군(花善君) [?~1435(단종 1)]
휘는 원상(原祥), 안계군의 6남으로 계유정난에 관계되어 안변으로 유배되었다.
화선군(花善君)으로 봉해졌으며 두 아들이 있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해령군(海寧君) [?~1454(단종 2)]
휘는 우경(友敬), 시호는 충경(忠敬) 대군의 증손이며 대군의 7남인 익천군의 장손이고 한산군의 장남이다.
아버지 한산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관계되어 1454년(단종 2)에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해령군(海寧君)으로 봉군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진주강씨이다.
후손이 없어 왕명으로 12대 족손 환려(煥呂)가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