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룬을 알아보기에 앞서
룬에 얽힌 이야기는 신비로운 마법에 휩싸여 있다. 16세기 기독교에 의해 금지된 이래 룬 문자에 대한 지식이 상당 부분 근절된 것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룬rune'이라는 말 자체가 애당초 노르웨이 고어나 영어의 고어로 '비밀secret' '미스터리mystery'라는 의미의 'run'을 그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속삭임whisper'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룬 문자는 인간과 신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상징체계였다. 과연 누가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상징체계를 만들었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왜 많은 사람들이 룬 문자를 마법과 예언의 언어라고 믿는 것일까? 여기서 안개에 싸인 룬의 세계로 한발자국 들어가 보자.
2.언제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룬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BC 1~2세기경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고트족이 라틴문자(고대 로마 시대의 공용 알파벳)와 이탈리아 북부의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룬 문자를 발달시켰다는설이 가장 유력하다. 게르만어를 에트루리아 문자로 표기한 BC 2세기의 경우 네가우 비문과 BC 1세기의 잘러베르크 비문이 이 이론에 신빙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고대 라틴 문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갔듯이 초기 룬 알파벳의 필기방식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도록 되어 있었다. 모양도 둥근 부분이 거의 없고 모난 선만으로 구성되고 있는점을 제외하면 라틴 문자와 흡사하다. 룬이 그런 모양으로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처럼 보인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고 있던 당시, 북쪽 지방 야만인(고트족)들은 적어도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다. 또한 목공예는 그시대 남자들이 흔히 익히는 기술이었다. 룬 문자의 모양은 바로 그들의 언어를 칼로 새기기 쉽도록 변형한 결과인 것이다.
선사시대의 암각화에 다산의 상징으로 쓰였던 고대 알파벳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믿음과 제사의식에 깊은 관련이 있었다. 룬문자 역시 구어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니지만 신가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체계였다. 즉 신탁의 상징체계였다.
초기에 룬 문자를 주조하는 기술은 스승이 입문식을 거쳐 도제에게 까다롭게 전수했다. 그럼에도 룬문자에 대한 지식이 퍼저 나감에 따라 그것은 죽은 자를 기리는 기념비에 운문의 형태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상업적인 교역을 할 때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3.고대 룬 문자는 어떤 글자일까?
다른 알파벳과 고대 룬문자의 기본적인 차이는 각각의 룬 문자가 하나의 '소리'와 '의미'를 가지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이도)는 여행을 뜻했고, 죽음 이후의 영혼의 여행과도 관련되었다.
(안수즈)는 신호와 메시지와 연관되었고, 신의 말이 나오는 근원으로서의 입과, 강의 입구, 누르웨이의 신인 로키(Loki)와 관련되었다. 룬 문자가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풍부했으며, 따라서 룬 문자 알파벳이 스물여섯 영어 알파벳과 같은 모태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룬 문자에는 확실히 고대의 그림문자나 표의문자의 흔적이 간직되어있으며, 중국의 한자와도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人은 두 다리를 벌리고 선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에 옆으로 한 획을 더하여 大가 되면, 인간이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룬 문자 알파벳에서 '보호'를 뜻하는 '알기즈'는
로서 大자를 연상시킨다. 원래, '알기즈'는 엘크의 뿔을 나타내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 말하자면 '네 뿔과 내 뿔'을 나누는 경계선을 뜻했다. 다음 표들은 고대 룬 문자의 전통적 이름과 의미들이다.(클릭으로 확대)
4.룬 문자의 형성과 발달
4세기경, 북유럽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룬 문자는 상인들과 탐험가들, 전사들에 의해 주변 대륙으로 폭넓게 전파되었다. 당시 북유럽의 노르웨이,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사용되었으며, 중서부 유럽에서는 고트족과 게르만족이, 그리고 서유럽의 앵글로색슨족도 이에 합류했다.
자연히 '공통의'룬 문자 알파벳이 요구되었다. 그로 인해 스물네 글자가 근간이 된 게르만 룬 문자가 개발되었고, 룬의 배열에서 그 최초의 여섯글자 fupark(라틴 알파벳 순서와는 현격하게 차이가 남)를 따서 이를 '푸사르크'라고 부르게 된다.
엘더 푸사르크는 각각 여덟 글자씩으로 이루어진 세 그룹으로 나뉘는데, 각 그룹은 노르웨이의 신들인 '프레이르' '하갈' '티르'로 명명되었다.
후에 퍼저나간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버전으로 개량되었는데, 이런 다양한 룬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으로 쓰인 스물네 글자의 게르만 룬 '엘더 푸사르크'가 생겨난 때부터 서기 8백년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앵글로 색슨족이 5,6세기경부터 11,2세기까지 사용한 올드 잉글리시 룬 '앵글로색슨 푸사르크'가 있는데, 게르만 룬으로는 표기할 수 없는 고대 영어의 발음들을 나타내기 위해 새로 아홉 글자를 덧붙여 총 33글자가 되었다. 그리고 8세기부터 12,3세기경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아이슬란드에서 쓰인 올드 노스 룬 '영거 푸사르크'가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앵글로색슨 족처럼 새로 글자를 만드는 대신 하나의 글자로 하여금 복수의 음가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영거 푸사르크는 열여섯 글자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밖에 룬 문자의 변이형으로 헬싱게 룬 문자, 만 섬 룬 문자, 점자 룬 문자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르딕 문자에서 변형된 것이다.
이 놀에서 주로 다루는 룬 문자는 이중 가장 오래된 룬 문자인 공통 게르만 룬 '엘더 푸사르크'를 따르고 있다.
5.왜 룬 하면 마법을 떠올릴까?
원래 룬 문자는 주술을 위한 조각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한 문자였다. 무언가에 룬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주문이며 원하는 것을 현실로 가져오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뼈나 딱딱한 나뭇조각, 가죽이나 돌 위에 여러 가지 재난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보호를 받기 위하여, 치료를 위하여, 사랑을 얻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검은 날에 보호의 룬을 새기거나, 반지에 지혈작용을 하는 주문을 새겨 넣거나, 나뭇조각에 사랑의 주문을 새기는 식이었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러한 룬 문자에 대해 오딘 신이 거인 미미르와 싸워 한쪽 눈을 잃어가며 얻은 지혜의 샘의 물을 먹고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레이(Thomas Gray)의 송시 <오딘의 하향>에는 룬 문자를 주문으로 사용한 데 대한 일절이 있다.
「북쪽 나라를 향하여
세 번 그는 룬 문자로 노래를 새기고
세 마디 무서운 말로 저 사자의 잠을 꺠우는
소름끼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텅 빈 땅 속에서
기분나쁜 소리가 올라왔다.」
또한 옛날에는 룬 문자를 새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룬 마스터'가 따로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또 그 타이틀은 누가 부여했는가? R.I.페이지의 <잉글리시 룬 입문(Introduction to Engligh Runes>*에 나오는 다음의 한 대목이 그것을 조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몇몇 경우, 룬 마스터는 자신의 일과 거래에 적절한 하나의 언어로서 룬 문자를 알고 이를 돌에 새기는 것에 익숙한 '석수'였던 것 같다. (‥‥) 하지만 초기에 룬 문자가 주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면, 룬 마스터는 매우 섬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초자연적인 힘을 부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이런 형태의 룬 마스터다.」
또 한 가지, 8세기에 쓰인 앵글로 색슨의 시 '베어울프'에서 덴마크의 귀족 에스헤르는 왕의 '룬위타runwita'라고 불리는데, 이는 '왕이 신뢰하는 측근'이라는 뜻이었다.
룬에 대한 마법적 믿음은 이러한 오랜 신탁의 전통과 권위로부터기인했다.
(R.I.페이지,<잉글리시 룬 입문Introduction to English Runes>, methuem, 런던, 1973, P.117.)
6. 일상생활 속의 룬
룬 문자가 새겨진 공예품은 매우 신성한 물건에서부터 아주 실용적인 물건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방면을 망라한다. 날씨와 조수, 수확, 사랑과 치유에 영향을 미치는 주문, 저주와 저주를 제거하는 주문, 다산의 기원, 출생과 죽음에 관련된 다채로운 내용들이 룬 문자로 새겨져 있다. 동전에서 관에 이르는 룬 문자에 관련된 수많은 발견물들은 당시 보통사람들에게 마법적 룬의 사용이 어느 정도까지 중요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도 단순한 룬 주문쯤은 알고 있었음은 물론, 공적,사적 이익에 관련된 문제에 룬은 자주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방 신들에 대한 예배가 그리스도교에 떠밀려 사라져감에 따라, 룬 문자 알파벳은 '통속 라틴어'문자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룬 문자는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중세기에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대개 나무판자 위에 불에달군 인두로 새긴 룬 문자 달력이 사용되었다. 이 달력에는 교회의 성일聖日뿐만 아니라 씨를 뿌리고 거두는 시기도 새겨져 있어 농부들에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543년, 네덜란드의 해군 제독인 모겐스 길덴스체른은 룬 문자로 일기를 썻다고 한다. 30년 전쟁 중에는 스웨덴의 야콥 드라가르디에 장군이 군사적인 메시지를 암호화 하는 데에 룬 문자를 사용했다.
노르웨이의 베르겐 항구 지역이 화재로 불에 탔던 1855년 이후, 룬 문자가 새겨진 스틱, 루나케플리runakefli와 다른 룬 문자 조각품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 루나케플리들은 대체로 부적으로 쓰였고, 소유자의 표시가 되어 있으며, 사랑의 편지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에는 '내가 스타방게르에 살때 잉게보르그는 나를 사랑했다'는 서글픈 내용이 적혀 있는 것도 있었다. 베르겐 항구의 화재로 발견된 룬 스틱 문구들의 다양함에 대해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다.
「베르겐에서 발견된 룬 문자 조각품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문, 아베 마리아, 대천사의 이름들,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기도문 등 신의 가호를 비는 것과 악마의 침입을 막는 액막이용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나는 원조와 보호를 바라는 룬 문자를 새겨왔다. 한 번은 꼬마요정을 막기 위해, 두 번은 거인을 막기 위해, 세 번은 괴물을 막기 위해서 룬 문자를 새겼다...' 라고 새겨진 것도 있어서 주문 같은 것을 새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베르겐의 유물들을 보건대 바이킹들이 활약하던 후대에는 룬 문자가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을 가리지 않고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사실 룬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스웨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홀란드의 성가대석 벽면에는 '목회자라면 당연히 룬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라고 새겨져 있어 룬 문자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웅변해준다. 서부 스웨덴의 외딴 지역인 달라르나의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늘날에도 룬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노르웨이의 북쪽 외딴 지역인 핀마르크의 랩족들도 룬 문자가 그려진 북을 오늘날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7.룬의 전승과정
룬 문자는 9세기부터 110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노르웨이 사람들에게서 앵글로색슨이 사는 영국으로, 아이슬란드로 건너갔다. 룬 문자가 새겨진 암각화나 비석 등이 러시아, 콘스탄티노플, 오크니 제도, 그린란드,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됨으로써 노르웨이 사람들의 탐험이 얼마나 멀리까지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킹 룬 문자는 북반구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족의 지혜를 전수하기 위해 사용한 문자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중 신앙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그리스도교 전파의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후 덴마크가 그리스도교 국가로 불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거의 10세기가 걸렸을 정도다.
'이중 신앙'의 기간으로 알려진 그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와 이교가 우호적으로 공존했다. 이중 신앙의 증거들은 바이킹과 앵글로색슨 초기의 예술, 시, 명각 등에서 발견된다.
특히 그 시기의 위대한 예술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8세기 경의 프랑크 왕국 보성상자이다. 우아한 고래뼈로 만들어진 이 보석상자는 가로 23센티미터, 세로 19센티미터, 높이 13센티미터의 아주 작은 크기로 성경과 노르웨이 신화가 룬 문자와 로마자로 함께 새겨져 있다.
스코틀랜드의 덤프리스갤러웨이 주 루스웰 교회에 서 있는 높이 5.48미터에 달하는 돌 십자가는 8세기 초 북움브리아 예술의 탁월한 예에 속한다. 그 십자가 위에 묘사된 성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명각 역시 룬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시 속의 화자는 십자가의 나무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니
많은 이들이 예스를 뵈러
머나먼 곳에서 서둘러 달려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보았노라.」
-신세계의 바이킹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5백 년 전, 아이슬란드의 젊은 상인이었던 비아르니 헤리울프손은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신세계의 해변을 보게 되었다. 노르웨이 탐험대의 역사와 그들이 북아메리카를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두 사가Saga(중세 시대 북유럽에서 발단한 산문 문학 - 원서 역주)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는 <그린란드 사람들의 전설The Saga of the Greenlanders>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1백여년 뒤에 씌어진 <에이리크의 전설Eirik's Saga>이다.
후자는 훨씬 세련되고 진취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거기에는 비아르니가 북아메리카를 발견했으며, 그 사실을 별명이 '행운아'인 에리크의 아들 레이브 에릭손에게 알려서 업적을 완성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 중 일부는 콜럼버스의 날보다 3일 앞선 10월 9일을 '레이브 에릭슨의 날'로 정해놓고 축하한다. 또한 아이슬란드의 역사학 교수인 고故 욘 요한네손의 노고 덕분에 비아르니 헤리울프손을 아메리카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복원하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990년경 레이브는 비아르니의 배를 사서 35명의 선원들과 함께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에 나섰다. 그는 항해 도중 겨울에도 서리가 내리지 않고 풀이 시들지 않으며 야생 포도 덩굴이 자라고 있는 뭍을 발견하고 그 지방을 빈랜드('포도주의 땅'이라는 뜻)라 이름 지었다.
<에이리크의 전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해변을 지나치면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청명했다. 풀잎에는 이슬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이슬을 손으로 훑어서 입술에 대보았다. 달짝지근했다. (중략) 호수나 강에는 어디에나 연어가 지천이었다. 그들이 일찍이 본 것보다 훨씬 더 큰놈들이었다. 그 나라는 기후가 너무나 온화하여 가축들에게 먹일 겨우살이용 꼴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겨울에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고 풀들도 시들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날씨와 농작물 등으로 미루어 '전설에서 말하는 그 빈랜드가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린란드 사람들의 전설>에는 토르핀 카를세프니라는 부유한 상인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1005년경 또 다른 탐험대가 다시 '빈랜드'에 간 사실을 언급한다. 일부는 3년 동안 거기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에 토르핀의 아내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스노리 토르핀슨은 아마도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아이였을 것이다.
북아메리카 그린란드 킹기그토르수아크의 섬에서 발견된 14세기 초엽의 룬 문자 비문은 이들 탐험가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길 때 적어도 1300년까지는 룬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병하고 있다.
-빈랜드의 룬 문자 조각사들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어느정도 깊이까지 들어갔으며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안타깝게도 바이킹 탐험가들이 남긴 자취는 불분명하고 적어서 그들이 통과한 여정의 증거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는 11세기 바이킹족이 건설한 아메라키 대륙 최초의 유럽인 식민지 유적으로,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州 뉴펀들랜드 섬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란세오 초원이 학자들이 동의하는 최후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뉴잉글랜드로 추정되는 '빈랜드'에 룬문자 조각사들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사가에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메인 주의 스피리트 폰드에서 오하이오 주의 러쉬빌에 이르기까지, 또한 오클라호마의 여러 유적지 등 미국 전역에서 폭넓게 유물들이 발견되었지만 학자들은 그런 것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의문시한다. 유명한 켄징턴 룬 석비를 비롯한 많은 룬 문자 석비들이 학자들에 의해 가짜로 판명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에는 책 한권으로도 부족하기에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룬 문자 유물 중 가장 기념할 만한 켄징턴 룬 석비에 대해서만 간략히 이야기하겠다.
미네소타 주의 더글라스 군에 있는 켄징턴 읍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이 석비는 1898년 가을 발견되었다. 이 석비는 높이가 78.7센티미터, 너비가 40.6센티미터, 두께가 15.2센티미터, 무게가 98킬로그램이 넘으며, 그 무게만큼이나 진위 여부가 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왔다.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인 에릭 발그렌은 그 문제에 천착하여 <켄징턴 룬 석비: 미스터리가 풀리다The Kensington Rune Stone: A Mystery Solved>*에 자신의 주장을 담았다. 그는 켄징턴 룬 석비가 날조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 주요 논지는 어휘가 왜곡되었고 어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네소타 주에 사는 스칸디나비아 후손들은 대부분 켄징턴 석비를 진짜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 의해 정성들여 조각된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석비에는 인디언들을 보고 놀란 노르웨이인 탐험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서부의 빈랜드에서부터 탐험 여행을 하고 있는 8명의 고트 사람과 22명의 노르웨이인.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북쪽으로 하룻길의 여행을 하여 캠프를 했다. 하루 종일 거기 있으면서 고기를 잡았다. 집에 돌아오니 10명의 남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우리를 재난에서 구해주었다. 10명의 남자들은 바다에서 우리 배를 돌보기로 되어 있었다. 이 섬에서부터 14일이 걸리는 여행. 1362년.」
14세기에 누르웨이인들은 미네소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상상력의 불꽃을 지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뉴펀들랜드에 정착한 것으로 시작된 바이킹 탐험대는 허드슨 만을 지나 넬슨 강의 남서쪽으로 나아간다. 넬슨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윈니펙 호수에 이른 노르웨이인들은 호수를 횡단하여 레드 강 하류에 이른다. 그곳은 오터 테일 즉, 브와 드 수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여정이 그러했다면 탐험대는 켄징턴 석비가 발견된 지점과 근거리에 위치하게 된다.
그 외에 메인 주 남부 케네백 강 입구 아래의 '스피리트 폰드 넘버 원'이라고 이름 붙은 돌처럼 연대측정이 불가능하여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이처럼 현재 북아메리카에 남아 있는 수많은 룬 문자 명각들이 바이킹의 북아메리카 식민지화를 충분히 입증해주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에 룬 문자를 쓸 줄 알고 거기에 정통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근거로는 충분해 보인다.
(에릭 발그렌, <켄징턴 룬 석비:미스터리가 풀리다The Kensington Rune Stone: A Mystery Solved>, 매디슨, 위스톤신 대학 출판부, 1958.)
8.현대 문화와 룬 문자
영국 문학에서는 윌리엄 콜린스의 송시, 호레이스의 월폴, 매튜 아널드, 토머스 하디의 작품에서 룬 문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M.R.제임스의 고전적인 유령 이야기인 <룬 카드의 비밀Casting of the Runes>은 1911년에 출판되었다. J.R.R.톨킨은 <반지의 제왕The Load of The Rings>에서 자신만의 룬 문자를 고안한 바 있다. 최근 룬 문자에 대한 관심이 부활함으로써 룬 문자 공예에 관한 책들도 영국, 이탈리아, 독일, 미국에서 다수 출간되었다. 앨리스 워커의 소설 <나의 사원Temple of My Familiar>의 주요 등장인물인 '수엘로Suwelo'는 '온전성의 룬'(24번째 룬, 소우웰우)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추Foucault's Pendulum>에는 예루살렘에서 샤르트르, 스톤헨지에 이르는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성지들을 바인드 룬 문자로 두루 포괄하는 흥미로운 사실이 소개된다. 에코에 따르면 그것은 '처녀 자리'를 연상시키는 형태이다.
룬 문자에 관한 주제는 현대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케이스 자렛이 자곡ㄱ하고 앨빈 에일 리가 안무를 맡은 <룬 태양으로의 행진Runes Solara March>, 카노의 앨범 <룬Runes>, 질르 리브의 <운조Wunjo>등이 대표적이다. 이스로 툴의 앨범 <검과 야수Broadsword and The Beast>의 커버는 룬 문자로 장식되어 있다. 레드 제플린의 '영원한 전투The Battle of Evermore'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마음의 안정을 부르는
마법의 룬 문자가 황금으로
쓰여있네.」
그 노래가 나오는 앨범인 레드 제플린 4집은 흔히 '룬 앨범'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회화 및 조각 부문에서도 룬 문자를 작품 속에 형상화시킨 10여 명의 작가가 있다. 아담한 시골집을 갖는 풍토가 유행함에 따라 보석 공예라든가 수공예품, 아름답게 깎아 만든 룬 스톤 등의 장식품에서도 ㄹㄴ 문자를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룬 문자는 영화에서도 새로운 역할을 맡기 시작하고 있다. 블레이크 에드워드의 <피부 속 깊숙이Skin Deep>라는 영화에는 불에 탄 자신의 집의 잔해에서 룬 장식품을 찾는 한 여성이 나온다.
어떤 형태의 신탁이든 거기에는 그 시대의 문화가 반영되어있다. 룬 문자에는 서구 사상 속에서 일어난 신탁의 상징체계가 들어 있다. 영국의 마을에서든, 노르웨이의 랩족 셔먼이든, 오딘 신을 찬양하는 밴드에 의해서든, 아이슬란드에서부터 텍사스의 오스틴에 이르기까지 룬 문자는 동시대의 문화 속에서 새롭게 변형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본연의 고색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다. 바이킹의 룬 문자가 서구 사회의 신탁으로서 다시 한 번 그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이제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섭리인 것이다.
9.인용자료 출처
<랄프 H.블룸, 유영일 옮김 "지혜의 거울 룬카드">의 내용을 참고로 하여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