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항구(港口)에서 123
- 남이섬 기행 -
“남이섬에는 남이가 없고 물결 소리만”
- 03. 9. 22(10년 전 가을) <<검찰가족>>지 기고
새벽 북한강 위에 남이(南怡) 섬이 홀로 떠 있다. 강 따라 늘어선 자작나무,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산발을 하고 강 바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자작나무 숲 사이로 영혼처럼 피어나는 물안개, 그 속에서 뱃사공이 천천히 그물을 던지고 있다. 영혼을 건지려는 의식인가.
가평 쪽 선착장에서 남이섬 선착장까지는 배로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데, 배를 타고 남이섬에 가 닿으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장군의 무덤을 만난다. 남이는 세종대왕의 누이가 낳은 아들로, 10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로부터 ‘이시애의 난’, 여진족 등을 평정한 공로로 20대에 병조판서에 임명된 새파란 장군이자 장관이었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어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면서 “장검(長劍)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보려던 남이의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는 그러나, 세조의 승하와 더불어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결국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그의 넋은 한강을 거꾸로 흘러 금강산 만폭동까지 가려다가 도중에 넋을 놓고 이 섬에서 쉬게 된다. 흐르는 강물 소리에 나그네 넋은 따라 울고, 그를 따라 함께 온 설움은 수양버들처럼 흐느낀다.
북한강 자락에 묻어 놓은 그 새파란 한(恨), 그 물결 소리만이 남이섬을 떠돌고, 남이섬에 남이는 없다. 남이 장군의 진짜 묘소는 대부도 가는 길에 있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 있다. 남이의 시신은 물론 남이가 남이섬에 유배된 기록도 없다. 그가 끼친 아무런 자취도 없는 섬을 사람들은 그를 기려 남이섬이라고 부르고, 돌무더기 위에 봉분을 쌓은 뒤 그의 무덤이라 이름 붙인 뒤 처량한 젊은 넋을 달래고 있다.
비록 남이섬에는 남이가 없지만 자연의 숨소리는 쉼없이 흐르고 있다. 10만평이 훨씬 넘는 섬 중앙 부위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그 너른 들판에 자연 그대로의 동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섬에서 풀어놓고 기르는 토끼들이 토끼굴을 드나들며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고, 제철을 만난 청설모도 잣, 도토리, 밤을 찾아 나무 가지 사이로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 섬을 주인처럼 휘젓고 다니는 타조들은 사람들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음식물을 주워 먹는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타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라치면 타조는 못이긴 듯 휘청거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타조를 쫓아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남이섬 선착장에 내려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중앙로 격인 잣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홍수를 이뤄 이리저리 오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게 된다. TV 드라마 “겨울연가”(중국에서는 「冬季戀歌」, 영어로는 ‘Winter Sonata’)의 인기가 韓流 熱風을 이끌어내어 중국, 동남아, 일본 등지로부터 온 관광객들이 한국 관광객 숫자를 능가하고 있어 남이섬은 바야흐로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잣나무 숲길이 은행나무 길과 만나게 되는 십자로(十字路)에 서는 순간, 사람들의 심장은 갑자기 멎게 된다. 금맥을 발견한 듯한 기쁨, 그런 탄성이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하늘하늘 가을 바람에 금가루가 뚝 뚝 떨어져 내리는 듯, 황금나무에 다가가면서 사람들은 함부로 발을 딛기가 두렵다. 최인호(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겨울나그네”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 은행나무 길은 은행이 온통 길을 뒤덮는 늦가을이면 길을 금으로 도금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잠시간 황금에 도취된 눈을 들어 십자로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겨울연가”에서 최지우, 배용준 두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면서 돌아다녔던 메타세콰이어(Metasequoi, 落羽松의 일종) 숲길이 나온다. 열길 물속으로 들어가듯 푸른 하늘을 향해 빨려들 듯 시원하게 솟구친 아름드리 나무, 그 붉은 열주(列柱, 기둥)들을 따라 거니노라면 어느새 파란 강물을 만나게 된다. 하늘과 땅과 강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곳,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있어 본 사람은 알리라.
아쉬움을 떨치고 발을 돌려, 십자로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노 젓는 뱃사공’이 있는 강물과 마주치게 되면, 오른쪽으로 몇 발짝 발걸음을 옮겨 보라. 눈사태처럼 눈부신 갈대꽃, 그 하얀 그리움이 당신에게 뭉클 안겨온다. 무더기로 피어난 갈대들이 쑥부쟁이, 들국화의 하얀 점들과 어우러진 장관은 한 폭의 눈 덮인 설원(雪原)이다.
이 가을에 일찌감치 겨울의 맨살을 살며시 엿보고 나면, 그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 보라. 별장과 방갈로가 강을 따라 늘어서 있고, 그 속에서 새어나오는 도란도란 속삭임과 연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굴피나무 숲, 수양버들 숲을 지나다, 밤나무와 전나무, 편백나무 숲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면, 한 달에 한번씩 잔잔한 음악을 선사하는 섬 음악회의 무대인 “숲속 무대”가 있다. 이곳에는, 정신을 맑게 하고 신경조직을 이완시키는 ‘피톤치드’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적합하다. 되도록 옷의 양을 줄여 그곳을 거닐다보면 그 옷의 양만큼 도심에서 가져온 스트레스가 가볍게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변을 따라가다 선착장을 만나면 중앙로로 다시 들어가지 말고 계속 전진해 보라. 오솔길을 따라가다 모래톱을 만나면 탁 트인 곳에서 문득 가을 산을 만나게 된다. 붉은 술을 단 채 다채로운 훈장을 달고 선 장군 같은 가을 산, 그 장엄함이 부담스러우면 다시 강변을 따라 숲을 만나보길 권한다.
언뜻 보면 포플라나무처럼 생겼지만, 튜립처럼 생긴 꽃이 핀다고 하여 튜립나무(Tulip Tree)라고 불리는 튜립숲길에서 떨어져 내리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잎이 강물을 노랗게 염색하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되리라. 그 틈에서, 밤이면 사랑을 나누러 달맞이 갔던 달맞이꽃도 해맞이를 나와, 노란 그림자를 강물에 드리우고 있다.
섬에 해가 진다. 가을 산이 강물로 내려오고 어느덧 붉은 기운이 세상을 곱게 물들인다. 낙엽 하나, 낙엽 둘, 낙엽 셋 이렇게 많은 단풍들이 떨어져 내리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도 고운 오색 물이 들까. 가을은 깊어 가는데 남이(南怡)의 설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철벅철벅 물소리 아래로 별빛이 내려와 고단한 남이와 함께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