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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느 해에 적었는지 기억도 아련하지만
참 열심히 적었었던글입니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넘어 와서
미래를 적은 unhappy ending의
논픽션과 픽션이 가미된 글입니다.
경험담과 가상의 일을 더불어 엮어서
어줍잖게 집필했던 글이었지만
이제는 절필을 선언하고 글을 쓰지 않고
예전에 쓴 글들을 이렇게 베껴 적는 일로 소일을 합니다.
원고지 1.000매 분량을 옮겨 적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쉬엄쉬엄 옮겨 적는데
끝까지 읽어 주실 분은 없을 듯 하지만
시간이 나는대로 옮겨적도록 하겠습니다.
다 옮겨 적은 후, 정리하여서
이야기 별로 소제목을 따로 나누어서
읽기 편하도록게 하겠습니다.
목청 높이 돋구어서 서론에 한 마디 외친다면...
"어레인 '고구려제국' 화이팅!"
"삐삐~...
삐삐~..."
시간은 어느 듯 자정이 다가온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삐삐가 발악하 듯 계속 운다.
"삐삐~...
삐삐~..."
귀찮아서 확인을 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삐삐는 울고 또 운다.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부모님이 잠든 방에 있는 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잠을 깨울 것 같아서
츄리닝 차림으로 동네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담배연기를 밤하늘에 흩날리면서 걸어 갔다.
"여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물레방아주점입니다."
"네, 호출하신 분을 찾는데요,
제 삐삐번호는 012-584-4857입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위의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대화 속을 뚫고
나의 삐삐번호를 말하면서
삐삐를 한 사람을 찾는 마이크소리가
전화기 저 쪽 너머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이윽고...
"여보세요...오빠예요?
나, 혜미..."
술취한 목소리가 전화기 저 편에서 들려왔다.
"엉, 혜미구나...
그런데 왠 술집이야?"
"오빠, 나 술 많이 마셨어,
오빠 보고 싶어서 삐삐했는데..."
"이런,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러냐?"
"뭐...
요즈음 술집은 새벽까지 하는걸..."
"뭔 일 있어?
이 시간까지 술집에 니가 있고..."
"그냥...
힘든 일이 있어서..."
"..................."
"오빠보고 싶은데...
좀 나와줄래요?"
"시간이 좀 그런데...알았어, 곧 가께,
술은 그만 마셔라, 알겠지?"
"네...
빨리오세요"
전화를 끊고 다시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탔다.
10분만에 혜미가 있는 물레방아주점을 갔다.
자정이 넘어가는데도
주점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마지막 노래를 준비하는
이름없는 통기타가수가
손가락에 낀 삐코를 빼고는
음울한 기타소리를 내뿜으며
슬픈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오른쪽 제일 끝 구석자리에
눈이 동그랗고 보조개가 오른쪽만 들어가는
혜미가 앉아 있었고
반 쯤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내가 다가가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준다.
분홍빛 원피스에
길게 빗어 내린 머리칼이 조명에 빛났고
퇴근을 하고 바로 여기로 왔는지
아직도 병원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그는 간호사였다.
"오빠, 안녕...
빨리도 왔네..."
"그래...
이 시간에 너가 어찌 술집에 있니?"
혜미의 맞은 편에 앉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냥, 속상한 일도 있고 해서...
오빠~ 한 잔 하셔야지..."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소주를 재털이에 부으며
가늘고 하얀 손으로 나에게 소주잔을 건넨다.
"그래, 한 잔 주라"
혜미는 이미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인데 이미 반병은 마셨는지
반 쯤 담긴 소주병을 들고
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넘친 소주가 내 손가락을 거쳐서 탁자로 떨어졌다.
"이런, 오빠 미안...
내가 좀 취했나 봐"
"아냐, 괜찮아,
아이고... 이 아까운 술~"
손가락에 묻은 소주를 빠는 시늉을 하고
잔 가득 담긴 소주를 들이켰다.
"자, 안주~
아~하고 입벌려 봐요"
"오늘 왜 이러냐, 안하던 행동을 다하고.
내가 먹을께..."
"아니, 오늘은 내가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
아~ 해요..."
"오늘 너 많이 이상하다, 왜 그러냐?"
"그냥... 아~해 봐요, 빨랑~
부끄러우니까 빨리~"
뭔가 이상했지만 할 수없이
포크 가득 찍힌 야채셀러드를
받아먹고는 혜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오늘 무슨 일있지?"
"일은 무슨..."
말끝을 얼버무렸다.
"무슨 일이야, 이야기 해 보렴"
"아니야, 아무일도 아니예요,
술이나 한 잔 주세요"
"너, 취했어...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아니, 남은 것만 같이 마시고 가요,
한 잔 더 하세요"
혜미는 술이 취한 게슴프레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잔을 건네고
소주병을 들고 탁자에 놓인 잔에
또 다시 술을 넘치도록 부었다.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넘친 소주를 휴지로 닦으면서
나는 혜미를 빤히 바라다 보았다.
내 눈길을 의식한 혜미도 나를 올려다 보며
특유의 미소로 베시시 웃으며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불렀을 뿐이라고...
음악이 잔득 깔린 주점으로
사람들은 한명씩 빠져 나가고
우리는 마시던 소주를 다 마시고
다시 한 병을 주문해서 비우고 있었다.
"저, 손님...
저희들 문닫을 시간인데요"
웨이트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아, 네...
곧 일어나겠습니다."
"혜미야~
이제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네....."
계산대에 계산을 치루고
조금 비틀대는 혜미를 살짝 안으며
그 녀의 핸드백을 대신 들었다.
"오빠~"
"응...왜?..."
"우리가 만난지 몇 년이나 됐지요?"
"글쎄,
너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으니까...
만 8년이 다 됐네"
"세월 참 빠르네,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응, 그렇네,
우리 택시타고 가자"
"오빠~"
"응?"
"나, 술 좀 깨게 걸었으면 하는데..."
"너 많이 취했어,
걷기 힘들 것 같은데?"
"아냐, 좀 걸으면 깰거야"
"그래, 그럼 잠시만 걷자,
불편하면 말해라"
"엉......"
늦가을의 찬기운이 몸을 감싼다.
따스한 주점 안에 있다가 찬공기를 받으니
술기운이 온 몸에 뻗혔다.
잔잔한 삶의 테두리에서
조용히 다가온 혜미는
나와 만난지 어느 듯 8년이 넘어 간다.
내가 27살이니깐 혜미는 25살이다.
어여쁜 여고 1학년생으로
내가 다니던 교회에 그 녀가 처음 나왔고
그렇게 우리는 교회에서 처음 만나서
몇 년동안 마음이 변하지 않은 채
서로를 사랑하며 긴 세월을 이어왔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혼자 교회회보를 만들고 있을 때
어느 밤인가 그 녀가 와서
밤샘으로 책을 만드는 나를 도와서
이틀을 같이 꼬박 같이 밤을 샌 적이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
우리는 난로도 없이 등사하는 프린터방에서
추위와 싸우면서 얼어가는 손을 불며
그렇게 책을 만들었었고
그 책을 완성하는 날,
우리는 기쁨에 겨워서 축하파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분식집에 가서
배터져라 만두랑 찐빵을 먹으면서
서로에 대한 추억을 키웠었다.
그 애는 정말 예뻤다.
세월이 지나서
나는 교회를 떠났고
그 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공부를 무척 잘하는 모범생으로 그의 꿈을 펼칠 때,
나의 연이은 대학의 낙방과
삶에 대한 회의를 따라다니면서 스스로를 방치했고
그저 고개숙인 사람으로 변했었다.
그렇게 세월을 좀먹고 있을 때,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하여
온갖 일을 다하면서도
하루살이마냥 살다가 급기야
강원도 영월행 버스를 타고
'옥동광업소'라는 탄광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 해 추석 때,
부모, 형제가 그리워서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명절 앞에 차표가 없었기에
일단 대구를 거쳐서 집으로 가리라 마음먹고
콩나물시루같은 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하여
주차장을 옮겨서 몇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산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사람들 틈에 부댓기며
버스는 달려서 마산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내리는 사이로 나는 버스를 내렸고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마산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 듯 밤11시...
그래도 곧 집에 갈 수 있다는 마음에
고향의 밤바람은 시원하기만 했다.
택시를 타기 위하여
택시 정류소에 서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안녕하세요, 오빠!"
"어, 너는...!"
"오빠,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 혜미예요, 강 혜미라구요~!"
"그래, 정말 혜미네,
오래간만이다, 야~"
"오빠, 너무 반갑네요, 이게 몇 년만이예요?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엉, 그냥 여기 저기 다녔어"
"그런데, 오빠...
왜 그렇게 살이 빠졌어요?"
"그렇니?
그냥 일하면서 살다보니깐..."
말끝을 흐렸다.
"너는 어디 갔다오니?"
"저, 대구에서 대학다녀요.
아까 버스 안에서부터 오빠를 계속 봤는데요,
말을 걸려고해도 사람들이 너무 많고
서먹해서 말을 못걸었어요"
"그랬겠구나...
그런데 대구에서 학교다녀?"
"네, K대학 간호과예요
내년에 졸업반인데요"
"서울로 학교를 갈줄 알았는데..."
"그렇게 됐어요,ㅎㅎ"
"그래...
일단 택시를 타자"
"네"
우리는 서있는 택시를 탔다.
"아저씨, 갑시다"
시외 요금을 적용해서 8천원을 달라고
기사아저씨가 말을 했다.
택시는 어느 듯 혜미네 동네에 섯다.
만원짜리를 기사아저씨에게 건네고
잔돈은 팁으로 그냥 드렸다.
"내가 바래다 줄께"
"괜찮은데요..."
"뭐... 금방인데,
가자~"
서먹한 마음으로 아무런 말도없이 우리는
나란히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혜미의 집 앞에 섯다.
"오빠, 기억나세요?"
"뭐?......"
"오빠가 나 생각나면
우리집 앞에 오셔서 하모니카를 자주 불렀었는데..."
"그럼, 생각나지,
그 때가 참 좋았었는데..."
"저는 아직도 오빠의 그 때 모습이 생생해요"
"그렇니?
어땟는데?"
"너무 너무 좋았죠.
특히 제가 막 잠들 때 오셔서 하모니카를 불러주시면
바로 잠이 들곤 했었는데,ㅎㅎ"
"그랬구나...
늦었는데 이제 집에 들어가렴"
"아뇨, 오빠 가는 모습보고 들어갈래요"
"난 뒷모습 보이는 거 싫어하잖아, 들어가라"
"그래요,
그럼 저 들어갈께요"
"그래, 안녕..."
육중한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꺼내 물고 밤하늘로 날리며
혜미의 집이 시선에서 멀리 사라질 즈음,
멀리서 나를 부르는 혜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오빠..."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혜미가 달려온다.
"왜? 무슨일이 있니?"
"아니고요...
오빠연락처를 안물어 봐서..."
"내 연락처?"
"네......"
"나, 기숙사에 있어서 연락하기 힘들건데..."
"그래도 가르켜 주세요"
하면서 혜미가 볼펜이랑 종이를 건낸다.
대강 적어서 줄려고 하다가 설마 연락을 하겠냐는 생각에
바로 적어줬다.
"강원도 국번이네요?"
"엉, 강원도 영월에 있어"
"무슨일 하시는데요?"
"그냥...그런 일이지 뭐...
나 내려갈께"
"네, 가세요, 꼭 연락드릴께요"
나는 등을 돌려서 가던 길을 걸었다.
이런, 등을 보이고 말았네...라고 생각하면서
혜미의 시야를 의식하면서 1년만에 집에 왔다.
손과 목에 나 있는 상채기를 보시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면 맞아주셨고
명절이 지나서 내가 갈려고 하자
가지말라고 몇 번이나 잡으셨지만
6개월만 더 돈 많이 벌어서 오겠노라고
만류를 뿌리치고 웃음을 보이면서 그렇게 강원도로 다시 갔다.
가을이 지나고
그 해는 초겨울부터 지독하게 눈이 많이 내렸다.
검은 석탄산이 하얀 눈으로 내내 덮혔었고
녹을 줄 모르는 눈길 위로
하루에 6번 왕복하는 시내버스도 끊길 때가 많았다.
시린 인생의 굴곡점에 서서
늘상 외로움을 안고 사는 탓에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지하 1.500m 갱도에 사는 큰 쥐들과
기숙사를 가로질러서 다니는 작은 쥐들과
일렬로 늘린 합판집에서 사는 꼬마들,
그리고 밤마다
기숙사와 붙어 있는 교회에서
간혹 나오는 복음음악뿐...
한달 꼬박 일을 하면
28일만근수당, 피복비, 기타 합치면
60여만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갱도안에서
오가라는 기계로 석탄덩어리에 구멍을 뚫고(천공작업)
그 구멍 안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밀어 넣고
심지에 담뱃불로 불을 붙일 때
나는 언제나 죽음을 맛본다.
누구나 한 번은 죽을 목숨을 가지고
지독한 석탄을 마시면서도
끊질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와
절망이 늘상 교차하여서
나는 점차 말을 잃어 갔고
숱한 아픔의 사연을 가슴에 안고서
이 곳까지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기막힌 사연들을 가슴에 묻고
언제나 그들처럼 허무를 곱씹으며
외톨이처럼 살았었다.
어느 날인가,
일을 마치고 화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갱도를 나왔다.
그 날은 날씨가 제법 따뜻했는지
아침 8시에 근무를 들어가서
8시간을 꼬박 일하고 밖을 나오니
눈이 녹아서 길 옆 도랑에 맑은 물이 흘렀기에
몸을 숙이고 손을 씻고 있는데
멀리서 반장이 불렀다.
기숙사 바로 옆에 있는 판자집에서
딸 둘을 혼자 키우시는 반장님.
"네, 무슨일이신지..."
"누가 너 찾아 왔어.
마을회관에 가 봐라"
"네? 저를요?"
"그래, 목욕탕가지 말고 바로 가 봐.
무척 반가운 사람인 것 같던데..."
"누구지?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밧데리를 반납하고
온 몸에 묻은 석탄을 털면서
마을회관으로 갔다.
멀리 보이는 마을회관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고
조금 더 다가가서 보니 혜미였다.
얼른 몸을 판자집 사이로 숨기고 말았다.
저 애가 여기까지 왠 일이지...
불안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더니
뇌리가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된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기숙사 목욕탕에 가서
몸에 묻은 석탄을 말끔히 씻어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내 방으로 갔더니 반장님이랑 혜미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임마,
씻지말고 바로 회관으로 가라고 했잖아!"
반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게...
좀 그렇네요..."
"오빠!"
반가움때문인지 슬픔때문인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혜미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
어찌 알고 여기까지 왔니?"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줄 알아요?
수 백번도 더 했단 말이야!"
"그랬니?...미안하게 됐다.
보다시피 여긴 이래서 전화받기 힘들어...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어쩐일이라니요?,
내가 오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무슨말이니?
니가 왜 날 생각하냐?"
"......."
"나는 간다,
두 분 말씀나누세요"
"네, 감사했습니다."
"반장님, 가시게요?"
"감사는 뭘요,
그래 가야지, 계속 있으랴,ㅎㅎ
내일 일요일이니까 좋은 시간 보내라"
"네......"
반장님이 가시고
나는 어찌할바를 몰라서 혜미만 바라보았다.
어쩐일일까, 왜 왔을까...
혜미도 말을 잃었는지 나를 올려다 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오빠...
힘들지 않아요?"
"힘들긴...
이젠 적응이 되어서 편해"
"말로만 듣던 이런 곳에 오빠가 있다니...
뭐하는 거예요, 도데체가......"
그 녀가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거지...왜...
"살아 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팔자가 됐네,ㅎㅎ"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럼 웃지 말고 울까? ㅎㅎ"
"하여튼 미워 죽겠어"
"미워 죽겠다니,
언제 니가 날 좋아나 했더냐? ㅎㅎ"
"그래요! 나, 오빠 좋아해요, 아니
오래 전부터 오빠를 사랑했었어요!"
"자슥,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거야, ㅎㅎ"
"농담요?
농담아니니까 웃지말고 잘 새겨서 들으세요,
오빠처음 볼 때 교회단상에 서서 사회를 보고 계셨는데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빠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누구보다도 씩씩했고 착했으며
너무도 좋은 사람으로 나에게 항상 남아서
몇 년을 짝사랑만 했었어요.
아침에 눈뜨면 다가오는 오빠모습,
공부를 해도 오빠모습,
잠을 잘 때도 항상 오빠를 가슴에 안고 잤어요,
이게 제 마음이예요, 이제 됐어요?"
또박또박하게 말을 끝낸 혜미가
와락 내게 안긴다.
그리고 서럽게 통곡하 듯 운다.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춘기 소녀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사랑했었고
그 사랑의 열정을 키우며 아파했을 혜미의 모습에
그저 처량한 지금의 내 모습이 역겨웠다.
난, 왜 몰랐을까...
"그만 울어, 됐어...그만 뚝!"
혜미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난, 왜 전혀 눈치를 못챘지?"
"바보...
오빤 바보니까...
진정한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건줄 알았는데
사랑을 하면 할 수록 가슴만 더 아팠어요.
이젠...
이제는 오빠를 놓지 않을거야"
나는
순수한 마음을 이미 잃어 버렸고
날개잃은 새마냥 정처없이 떠돌면서
나를 학대하는 방랑자일 뿐이었다.
나약한 내 영혼을 결코 탓하거나 버리지는 않겠지만
너무도 맑은 혜미에게 나를 들킬 수도 없었고
그를 받아들일 아무 것도 없었기에
나는 혜미를 밀쳐내야한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혜미야~..."
"네......"
"너...
너무 늦게 왔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걸."
"네?"
"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니가 너무 늦게 찾아 온 것같아"
"거짓말하시네.
반장님께 다 들어서 오빠 생활을 조금은 알아요.
일끝나면 방에 가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시내에도 안 나가고
다방에도, 당구장에도 안간다는 말을 다 들었어요"
"......"
그랬다.
작은 탄광촌에 있는 편의시설이라곤
다방,구멍가게,당구장이 전부였고
TV도 기숙사내 식당에만 있어서
방 안에서 두문불출만 했었다.
어쩌다 시내를 나가게되면
그저 배회만 하다가
책 몇 권 사서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니...
들킨 냉가슴이 아팠고
갑자기 닥친 일이라 정리가 되질 않았다.
"나, 옷 갈아 입어야하는데...
내 방에 들어갈래?"
"네, 들어가요, 오빠..."
언제 울었냐는 듯이
그 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옷갈아입게 잠시 뒤돌아서 앉아라.
나 속옷까지 다 갈아 입어야하니까 절대로 돌아보지말어,
충격받는단다,ㅎㅎ"
"네...
슬쩍 돌아봐야지,ㅎㅎ"
"됐다, 다 갈아 입었어.
바로 앉아라"
"알아요,ㅎㅎ"
"이런 다 봤구먼,ㅎㅎ"
"ㅎㅎ..."
"우리 시내에 나갈래?
여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아니, 오빠 일하는 곳에 한 번 가 봐요"
"봐야 좋을 것도 없어.
참, 할머니 한 분이 밀주담구셔서 파는데
그 곳에 가서 한 잔 할련?"
"밀주가 뭐예요?"
"아, 그냥 막걸리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요?
그럼... 가요"
석탄을 가득 실은 화차가 다니는 철길 옆으로
우리는 반 쯤 녹은 눈길을 걸었다.
산 중턱에 있는 밀주할머니(우린 그렇게 그 분을 불렀다) 집이
언덕을 돌자 보였다.
"저기야"
"어? 초가집이네요"
"그래, 안에 들어가면 따뜻해,
할머니가 파전을 맛나게 하시는데 먹어보면 반할걸,ㅎㅎ"
꼭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삼삼오오 모인 동료들이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형아닙니까? 어서오세요,
손님이 오셨나보네요?"
같은 작업2반 동료들이 있었다.
"네, 고향에서 동생이 찾아 왔네요"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동생분이 상당히 미인이시다,ㅎㅎ"
"안녕하세요"
혜미가 나직히 인사를 했다.
"네네, 반갑네요,
이 형~ 우리 합석해요,
우리는 곧 일어날건데 미인을 보면서 한 잔 하게요,ㅎㅎ"
"네...
그럴까, 혜미?"
"네, 그래요"
그 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TV에 나오는 사극있잖어"
"엉..."
"꼭 그 곳에 나오는 주막같아요"
하고 혜미가 나직히 말했다.
"나도 처음왔을 때 그런 기분이 들더라,ㅎㅎ"
동료 두 분이 앉아 있는 술상에 가서 앉으며
할머니에게 주문을 했다.
이윽고
노릿노릿하게 잘 익힌 파전이 나왔고
직접 담구신 밀주에 서서히 취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
선배님"
"네, 이 형"
"시내가는 막차가 몇 시에 있지요?"
"9시 30분으로 알고 있는데...
할머니,
막차가 몇 시예요?"
"9시 45분이 막차야"
"네...
할머니 그럼 그 앞차는 몇시예요?"
내가 되 물었다.
"8시야..."
"네...
혜미야, 여긴 잘 곳도 없으니까
8시 차타고 우리 시내로 가자"
"오빠가 알아서 해요"
"선배님,
저희들 차시간 때문에 이만 일어서야겠는데..."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여편네한테 뜯기게 생겼는걸,ㅎㅎ
그럼 같이 일어나죠"
"네...
할머니 우리 계산얼마예요?"
"늙은 내가 계산이 되냐?
너희들이 계산을 해야지"
할머니께서 웃으시면서 대꾸를 하셨다.
"이 형~, 내가 계산할께요.
보자... 막걸리 5대, 파전 4개니깐
1.500원씩 계산하면 14.500원이네"
"아닙니다, 제가 내겠습니다.
할머니 여기 돈 있습니다"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내 자리에 먼저 합석하자고 했으니까
이건 제가 냅니다, 양보하세요,ㅎㅎ"
"아, 이러면 안되는데..."
"다음에 이 형이 한 잔 사면 되죠.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
선배의 고집에 양보하고 말았다.
"송구합니다, 선배님,ㅎㅎ"
"아저씨~ 잘 먹었어요"
"아니구, 오늘 동생분때문에
술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즐겁게 보내시고 잘 가세요"
"네...고맙습니다"
"그럼 버스타는 곳까지 어두운데
제가 랜턴이 있으니까 같이 가시죠"
"그냥 저희들끼리 가겠습니다, 선배님"
"아~그러면 제가 섭섭하죠.
가요, 갑시다, ㅎㅎ"
하면서 랜턴을 비추면서 선배가 앞장을 선다.
버스정류소에는 버스가 출발준비를 하였고
나는 거듭 선배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럼, 동생분 잘 가세요"
"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뭘요...ㅎㅎ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빠빠잉~"
"네, 들어가세요"
"선배님 고맙습니다"
백열등 가로등이 서 있는 버스정류장엔
출발을 준비하는 버스의 굉음으로 시끄러웠고
그 틈에서 선배는 취기가 오르는지
잘가라고 손을 흔들더니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지고
기사분과 우리둘을 실은 버스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
"응?"
"여긴 나쁜 사람이 많지 않어?"
"왜?
나쁜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어?"
"왜, 있잖아.
이런 곳에는 사기꾼, 범죄자들의 피난처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잖아"
"이런 곳에는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단다.
예전에는 무허가 탄광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하려면 하면 신원조회를 다 해야 돼"
"그렇구나...
오빠 선배님 너무 좋으시다..."
"여기에는 가슴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
실연을 당했거나
사업에 실패를 했다거나
사회가 싫어서 온 사람들도 있고...
하여튼 나쁜사람은 거의 없어.
모두 순박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내일을 설계하는 사람이 더 많어"
"그렇구나..."
"우리 시내가면 뭐할래?"
"오빠 마음대로...
어차피 오빠한테 나의 시간을 주러 왔으니까
이제부터 혜미의 시간은 오빠거야,ㅎㅎ"
"그런게 어디있냐..."
버스는 우리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떠났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탓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오뎅, 호떡을 굽는 포장마차랑
군고구마장수가 길 가에 있었고
군밤을 굽는 아줌마도 몇 분 계셨다.
"밥 먹을래?"
"나, 배 안고픈데...오빠 배고파요?"
"아니, 나도 생각없어,
뭐하지 그럼...
너, 뭐하고픈 거 없냐?"
"그런거 없는데..."
"영화보러 가기에도 시간이 그렇고
밥도 생각없고...
술이나 더 마실래?"
"오빠, 그럼 우리 여행가자"
"무슨여행?
너, 여기까지 오는 것도 여행이잖어"
"그건 혼자만의 여행이었고
오빠랑 같이 어디 가고 싶어요"
"그래?
어디 가고픈데?"
"음...
여기서 강릉까지 멀어요?"
"그건 나도 잘 몰라,
일단 저 앞에 있는 터미널로 가보자"
"네..."
우리는 길 건너 터미널로 향했고
언제부터인가 혜미는 내 팔짱에 팔을 끼고
추운지 자꾸만 몸을 붙혀온다.
"추워?"
"네,
아주 많이...
아주 아주 추워요, ㅎㅎ"
하면서 몸을 더 밀착시킨다.
"하하...자슥"
우리는 강릉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강릉터미널에 우리를 내렸고
다시 택시를 타고 경포대로 향하였다.
마침 그 곳은 '겨울바다축제'라는 행사를
'무지개콘도'라는 곳에서 주최를 하여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제법 붐볐고
사람들 틈으로 축제가 열리는 것을 구경했다.
바닷바람이 심해진 탓인지
흩뿌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아련하게 흘러나오는 마이크소리에는
바람소리가 겹쳐서 울렸고
마침 노래자랑을 하는 시간인지
급히 맞춘 듯한 어눌한 밴드의 박자에 맞추어서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빠"
"엉,
왜?"
"오빠도 노래 잘하잖아요,
한 번 나가서 불러보실래요?"
"얘가 지금 무슨말을 하는거냐?
노래랑 담 쌓은지 벌써 몇 년인데 그러냐,ㅎㅎ"
"피~
거짓말도 잘하셔~
아까 오빠 방에 기타가 있는 것도 봤는데요?"
"그건 그냥 전시용으로 산거야.
노래 안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박자도 못 맞출거야,ㅎㅎ"
"오랜만에 오빠노래 듣는게 소원인데...
오빠 그러지말고 한 번만 불러주라, 응~"
"아니, 얘가 왜 이런데,ㅎㅎ
자신없으니까 안할래"
"혜미의 소원이라는데두?
그러지 말고 한 번 해 봐요.엉~"
"아, 얘가 피곤하게 만드네,ㅎㅎ"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혜미의 소원이라니까,
엉... 엉~ 제발..."
"에휴,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야호~~~~!!!
아저씨 여기요, 여기...
우리 오빠가 노래하신데요!!!"
사회보시는 분을 향하여 혜미가 외쳤다.
"올라오세요!"
사회자가 우리를 가르키며 올라오라고 종용하였다.
나는 무덤덤하게 무대 위를 올라 섯다.
"어디서 오셨어요?"
"네...본가는 경상도에 있고요,
지금은 영월에서 일하는 근로자입니다."
"아, 경상도사나이시라서 목소리도 힘이 있네요,
저 여자 분은 신부이신가보네요,
신혼여행오셨어요?"
"아니, 그게..."
내가 말끝을 얼버무리자...
"네, 두 분 축하드리고요,
부르실 노래곡명은요?"
"네...
반주가 될런지 모르겠는데요,
송 창식의 '사랑이야'를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반주되요?"
사회자가 반주단을 향하여 물었다.
반주를 하시던 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이런 어쩌죠?
급하게 밴드팀을 맞추다 보니까
반주가 안된다고 하는데
다른 노래를 하셨으면 하는데요..."
"그럼 제가 기타를 메고 해보면 안될까요?"
"앗, 그래도 되죠.
반주자님 기타를 이 분께 좀 드리죠"
반주자가 기타와 의자를 들고 왔다.
"그럼 송 창식의 '사랑이야'를 감상하시겠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를 쫓아서 강원도까지 온 혜미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너무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해서인지 떨리네요.
못하더라도 좋은 노래이니 만큼 망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불러 볼께요"
D#m로 시작하는 기타코드를 변형해서
기타줄을 뜯기 시작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별
어느 하늘이 이렇게
당신이 피워 놓으신 불처럼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 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
가슴속에 항상
혼자 그려보던 그 모습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음......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어느 빛
어느 바람이 이렇게
당신이 흘려 넣으신 물처럼
조용히
속삭이듯 이렇게
영원할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 선가
한 번은 올 것 같던 순간
가슴속에 항상
혼자 예감하던 그 순간
단 한번
미소에 터져 버린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음......"
거칠어지는 겨울 밤하늘로
나의 노래는 울려 퍼졌고
애잔함이 묻어서
가슴속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사에 힘입어
알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서
노래가 언제 끝났는지도 몰랐다.
숨죽인 채 나의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그 때서야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 와
혜미의 곁으로 다가 섯다.
"오빠......"
"......"
"오빠아!..."
"응, 왜?"
바람소리에 혜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묻혔고
두 번 부를 때 나는 대답을 했다.
베시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면서
박수를 친다.
"역시 오빠의 노래는 가수급이야"
"부끄럽게 왜 그러니, ㅎㅎ"
"부끄럽긴요, 정말 좋았어요"
"정말 그랬어?"
"네, 정말요"
그 날 우리는 노래덕분에
'무지개콘도'에서 제공하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30평은 됨직한 최고급 스위트룸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룸서비스로 양주 한 병과
각종 과일이 담긴 안주를 받았다.
"한 잔할래?"
"난, 양주 별로인데..."
"나도 술은 안마셔.
그래도 폼은 잡아보자, ㅎㅎ"
"그래요, 그럼...
근데 이 마개는 어떻게 열지요?"
코르크마개를 한 양주병을 들고
혜미는 어찌 여는지 몰라서 양주병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오빠, 이 마개 좀 열어봐요,
배우기는 했는데 한 번도 안해 봐서..."
심각한 난관에 부딪힌 사람마냥
혜미는 병을 툭툭치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래?
그 옆에 나사식으로 된게 따게야,
이리 줘 봐"
코르크마개에 따게를 꼽고 마개를 열려고 했는데
오래 묵은 술인지 마개가 열리지를 않고
자꾸만 병안으로만 들어 갔다.
"이런, 이게 잘 안되네, ㅎㅎ"
"오빠,
그러다 마개가 병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은데..."
"에이,
차라리 마개를 병 안으로 밀어 넣자,
그게 더 빠르겠다"
"그래요, 그럼..."
결국 마개는 병 안으로 들어갔고
따게로 마개를 몇 번을 찔러서인지
코르크 조각들이 병 안에 가라 앉았다.
"내가 한 잔 부어줄께요,
잔드세요"
몇 잔을 스트레스로 연거푸마시고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로
술잔을 들고 나란히 섯다.
희뿌연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가
쉼없이 백사장으로 밀렸다가 사라지고
이내 뒤따르던 파도에 묻혀서
새로운 포말을 만든다.
창조에 창조를 거듭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애써 혜미의 시선을 피했고
그리움을 억누르며 살았던 고행의 지금,
힘듬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밖만 내려다 봤다.
난, 지금 무엇을 하는걸까.
그리움에 몸부림쳤던 과거와
지금의 아련함이 겹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혜미를 사랑해도 될까...
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스쳐간 동생이었을 뿐인데
나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고
너무도 갑자기 다가오는 혜미...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거지.
목이 메어서 지금이 꿈만 같았다.
아팠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미래를 위하여
노력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꿈은 더욱 없었기에...
안된다.
그를 가져서는 안된다.
나는 미쳐 갔다.
송두리째 인생을 버리고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떠난 내 과거가
치욕스럽고 저주스럽지만
혜미를 이용한 내 삶의 돌파구는 찾으면 안된다.
안된다.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혜미야"
"네, 오빠..."
"바깥 풍경이 정말 좋지?"
"네....."
"혜미야"
"네..."
"너...
정말 소원이 뭔데?"
"저요?......
제 소원은요.....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는게 소원이예요"
"평범속에서 비범을?
너무 어렵다, ㅎㅎ"
"오빠, 저는요...
사람들 틈에 묻혀서 사는 오빠가 좋아요.
어둑한 곳에 오빠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미치겠더라고요...
사실은
오빠가 적어준 전화번호로 처음 전화했을 때
탄광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실망했어요.
그래도 내 마음을 다 주고 싶은 사람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숨어버렸는데
내가 하는 일들이 엉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빠를 만나러 온거고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지금은 너무 좋아요.
오빠~,
오빠아~"
"엉"
"오빠도 좋아요?"
"그래...
좋아..."
"췻,
오빠도 뭔 말 좀 해 봐요,
나만 오늘 계속 이야기하네요"
"너무 혼자 지내다보니까 말을 잃었나 봐, ㅎㅎ"
"아뇨, 오빠는 원래 말수가 적어요,
마음문을 열고 대화를 하면 될건데..."
"미안해,
무슨 말을 하지..."
"아니예요,
오빠는 그냥 말없이 조용한게 어울려요."
"ㅎㅎ..."
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감싼다.
핼쓱한 겨울달이 창문으로 비추었고
목까지 타들어가는 젊음의 정념이
밤을 불태우고 있는 지금,
바람은 점점 거칠어서 파도를 울렸고
창문 틈으로 차가운 공기와 함께
알싸한 술기운은 넘실대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면서 비워진 술잔을 채웠고
콘도에서 제공한 양주 한 병이 비워졌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에 가득했다.
바람을 맞은 창문은 덜컹거렸고
점차 어두워져 가는 바깥을 바라보면서
문득 바닷가가 걷고 싶었다.
잠이 들면 숨이 멈출 듯한 갑갑함과
어두운 해변가에 허황스레 서 있는
파라솔이 바람에 휩쓸려 넘어지는 광경에
갑자기 혜미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그리움에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혜미의 순결한 영혼을 뺏기엔
홀로 선 나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했고
감히 사랑을 할 수가 없음을 느꼈다.
어찌할까.....
"오빠~"
"엉..."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셔요?"
"아니, 그냥...
바깥 경치가 을씨년 스러워서
아무 생각없이 바라 보고 있어..."
"오빠~"
"엉, 왜..."
"홀로 서 있기 힘들지 않어?"
"무슨 말이야?"
"아니, 외롭지 않냐구..."
"외롭지...
많이 많이..."
"이제 그만 오빠도 오빠의 인생을 찾았으면 하는데..."
"내 인생?"
"네...
오빠 인생..."
"난, 그냥 지금을 만족하면서 살래.
언젠가는 내가 나를 알게 될 때가 있겠지..."
"그 때가 언제인데요?"
"글쎄다..."
"오빠"
"엉"
"오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뭘 어떻게 생각해?"
"그냥...
느낌같은거..."
"느낌이라...
사실은 별 느낌없어, ㅎㅎ"
"실망이네
여기까지 오빠를 보러온 내 마음을 모르시다니..."
"모르긴 뭘 몰라, 다 알지..."
"그런데도 느낌이 없어요?"
"......
혜미야~"
"네, 오빠"
"마지막 잔인데 우리 건배나 한 번 하자, ㅎㅎ"
"그래요,
건배!"
"건배!
건강해라, ㅎㅎ"
"오빠도 건강하고요..."
마지막 남은 술을 말끔히 비웠다.
또 다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지우기 위하여
TV테이블로 다가가서 TV를 켰다.
정규방송은 이미 끝났는지
콘도에서 제공하는
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뇌리가 자꾸만 하늘에서 바닥으로
바닥에서 하늘로 왕복하더니
몇 잔 마신 술로 두통이 옴을 느꼈다.
"혜미야"
"네..."
"나, 머리가 아픈데
잠시 밖에 가서 바람 좀 쐴께"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밖은 추워,
가게에 가서 그냥 맥주 몇 병 사서 올께"
"네, 그러세요"
"넌, 그 틈에 샤워나 하던지 해라.
금방 올께"
"네, 알겠어요"
밀려 오는 두통때문은 아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 듯 콘도를 빠져 나와서
가로등이 줄줄이 줄 선
해변가를 걸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무슨 대화들을 재미있게 하는지
삼삼오오 모인 젊은이들이
밝은 미소를 뿌리고 있었다.
난, 어디를 가던 주변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곁 길로 걷는 내 자신을 숨기면서
늘상 외로움에 묻혀서 살며
언제나 고뇌만 잔득 안았다.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가...
무엇이 나를 벌레처럼 방치했고
처절한 삶의 몸부림에 갇히어서
의미없는 삶을 이어가는걸까...
한참을 걷다가
문이 반 쯤 열린 가게에서
맥주 5병을 사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혜미는 침대 오른쪽에서 잠이 들었다.
불을 덩그러니 켠 채
콘드에서 제공하는 잠옷을 입고
여독과 술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차가운 바깥공기를 한참 맞은 탓인지
온 몸에 추위가 엄습하였고
갑자기 따스한 방 안으로 들어오니
일시에 한기가 들었다.
맥주가 든 까만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놓고
가만히 혜미 곁에 가서 앉았다.
머리를 감았는지 긴 머리칼은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렸고
추운지 잔득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이불을 덮었다.
순간 몸을 반대쪽으로 뒤척이면서
반 쯤 눈을 뜨더니,
"오빠도 주무세요..."
"엉, 그래...
잘 자라..."
이불을 올려주고 테이블에 놓인 봉지에서
맥주 한 병을 빼서 마신다.
존재의 이유, 그리고
사랑.....
사랑이란게 도데체 무엇이지.
혜미가 오직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게 많이도 어색했다.
난,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데...
나는 능욕스럽게 살았다.
지금도 처절한 삶을 산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젠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나에겐 주어진 사랑은 없었고
있다고 하여도 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버림만 존재했던 내 인생에
가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맥주 3병을 게눈 감추 듯 마셨다.
갑자기 속이 역했다.
일시에 마신 많은 술들이 뱃 속에서 폭발을 하여
다시 밖으로 분출을 하려고 하였다.
얼른 화장실로 달렸다.
참 많이도 약해졌구나...하는 생각에
변기통에다 구역질을 해 댔다.
많이...
누군가가 등을 두드렸다.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난 손을 저으며...
"됐어,
이젠 괜찮아, 고마워..."
"가만히 있어 봐요...
더 두드려 줄께요...
술을 섞어 마셔서 그런가 봐요..."
"창피하네...
나 좀 씻을께, 나가줄래..."
"네...그러세요..."
안스러운 듯 혜미가 나를 빤히 올려다 본다.
잠이 들었다가 깨서 그런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
혜미의 눈을 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은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얼른 자렴..."
"네, 알겠어요..."
속에서 나온 분비물이 옷을 버렸기에
윗 옷을 벗고 말끔히 세탁을 했다.
그리고, 옷을 다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적신 뜨거운 물은
발아래 하수구로 소용돌이 쳐서 들어 갔고
뇌리까지 온통 흔들리는 술취함을 느끼며
몸 구석구석에 비누칠을 하면서
아련하게 샤워를 했다.
속옷만 입고 방 안으로 들어 섯다.
큰 룸이라 방이 2개라서 좋다고 생각하며
잠옷을 찾고 있을 때
혜미가 잠옷을 들고 다가온다.
"안 잤어?"
"오빠같으면 잠이 오겠어요?
자, 여기 잠옷...입으세요"
"엉, 고마워..."
"그 사이에 3병이나 드셨어요?"
"엉..."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봐요"
"많이 피곤할건데 자렴"
"오빠~"
"엉..."
"나, 남은 맥주 마시고 잘래요,
오빠가 침대에서 주무세요"
"이런, 그만 마시고 자라"
"저, 아직 안 취했어요,
그냥 자면 잠이 안 올 것 같으니까
이 것만 마시고 잘께요"
"말 안 듣고 고집부리는 것 좀 봐"
"...오늘만 고집부릴래요,
용서해주세요."
혜미는 이미 맥주병을 따게로 열고
잔에 한 잔을 붇고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너, 가만히 보니까 술꾼이다, ㅎㅎ"
"많이 못마셔요,
나도 왜 이렇게 술이 잘 먹히는지 모르겠어요"
"아닌데, 평소 실력같아, ㅎㅎ"
"오빠~
제 옆에 와서 앉아 봐요"
"나, 잠오는데..."
"잠시만요...
잠시만 와서 앉아 봐요"
혜미가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시늉을 깜찍하게 한다.
"그럴까..."
"제가 하고픈 말이 있는데요...
오빠..."
"엉, 무슨 말인데, 해 봐라"
"저..."
"뭘 말할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데..."
"저...
오빠를...
진정으로 사랑하나봐요"
"푸~ 그 녀석 참...
내가 뭐가 좋다고 그래?"
"딱히 어디가 좋은게 아니고요...
오빠 전체가 다 좋아..."
"그래?
진심이야?"
"네, 진심이니까 여기까지 와서
오빠랑 같이 밤을 보내잖아요..."
"혜미야"
"네..."
"이제 그만 멈춰라,
멈춰야 해"
"뭘 멈춰요?"
"나는 말야,
너랑은 어울리지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난, 너가 보다시피 인생의 실패자야.
내가 하는 일이 되는 것도 없었고
지금은 꿈도없고, 의지도 없어..."
"......"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란다.
철없던 시절에 겪었을 너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어,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고
소녀적에 일으킨 불장난이라고 생각해,
이제 그만 그 불을 끄야 해"
"......"
"난, 너무 초라해,
반면에 너는 너무 똑똑하고
사리분별이 분명하니까
세월이 조금만 더 지나면 깨달을거야"
"아뇨, 아니예요
난, 여태 살아서 숨쉬는 동안,
오빠만 갈망했었고
앞으로도 오빠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
누가 뭐래도 난 오빠를 잘 알아,
그러니 오빠도 자학을 그만하고
자기 자리를 찾았으면 해요"
"내 말...잘들어야 한다.
난, 이미 퇴색된 내 젊음을 버렸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찾았을 때에는
너가 내 옆에 없을거야.
그 세월을 내가 모르는데
너가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나 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거야?"
"아무튼 난 오빠만 볼래,
오빠가 나를 거부하고 잊는다고해도
나는 온통 오빠 뿐이니까
나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말아줘요"
"세월은 나와 너를 기다려주질 않아
난, 여기에서 곧 떠나겠지만
우리의 삶은 지금도, 미래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우리를 갈라 놓을지도 몰라.
난, 분명히 말하는데 자신이 없다."
"그래요,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죠.
오빠말대로 우리를 영원히 갈라 놓는다고해도
난, 오빠가 나를 사랑할 그 때,
그 때를 기다려볼래요..."
"사랑?
우리가 사랑이 뭔지나 알어?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는게 뭐가 있겠니?"
"오빠,
사랑은 무엇을 얻을려고 하는게 아니래.
모든 것을 다 주고 희생하면서
상대를 배려하는거래요,
맞아요,
나는 아직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오빠 역시 사랑을 모르니깐
이제부터라도 오빠도 나를 사랑해 보세요.
내가 오빠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만큼
오빠도 나를 생각하고 그리워 해 보세요.
그러면 사랑이란 감정을 알게 될거예요..."
"참 어렵네..."
"오빠,
한 사람을 늘상 가슴에 간직하고
그 사람을 그린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할 때가 있어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픈 곳은 없을까...
식사는 제 때 맞춰서 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모든 것이 그냥 하는 생각은 아니라고 봐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지금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하죠.
그 사람이 바로 오빠예요..."
"......"
"내가 오빠를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서 사랑하면 안되나요?"
"그거야...니 맘이지"
"저는요, 꿈이 참 많았어요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도 싶었고...
변호사도 되고 싶었는데요...
우리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실 때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간호사가 될려고 노력을 해요.
오빠도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을 갖고서
열심히 노력하면 안돼요?"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 가셨어?"
"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엄마 참 이쁘셨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머니의 얘기를 하자
어느 새 혜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볼을 타고 눈물을 떨구었다.
"지금 계시는 엄마는요...
예전에 오빠가 저희 집에 놀러 오셨을 때 계신 엄마는
새엄마예요..."
"그렇구나...
울지 말어..."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주체없이 흘러 내리는
혜미의 눈가에 눈물을 닦고 있었다.
"오빠,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안되요?
나, 한 번만 안아 줘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일찍 경험하고도
자신의 현실을 잘 받아들이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혜미가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살며시 안은 혜미의 몸이
격렬한 울음으로 들썩였고
그럴 때마다 그를 안은 두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가했다.
머물 수 없는 세월의 리듬 속에서
굴곡많은 인생의 외줄타기를 하기에
언제나 현깃증을 내뿜으며
인간의 냉정함을 뒤로 하고
미련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다니지만
내 몸은 언제나 허무함에 휩싸여서
수많은 절망만 곱씹었다.
내 아련한 과거의 불빛으로
오늘을 지탱하며 살고 있지만
그림자는 언제나 텅비어 있고
그렇기에 마음도 죽어서 떠나고
빈 껍데기만 안고 사는 이유로
나는 사랑을 증오하여야 한다.
내심 고민하는 나의 자화상에 침뱉는다...
사라진 것은 과거이다.
이제 더 이상 과거 속을 살지 말자.
나의 방황은 마지막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이면서
혜미를 안았다.
혜미로 인하여 나의 방황을 접을 수만 있다면...
내가 혜미를 가짐으로
마지막 소망을 꿈꿀 수 있다면
하늘도 지금의 나를 용서할까...
용서가 될까...
만감이 교차하는 뇌리가
나를 밀었다가 당기고
다시 끝없는 절벽아래로 밀쳐서
추락하는 아련함을 맛보게 한다.
알싸한 술냄새가 풍긴다.
혜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밀쳐 들어 왔고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그의 혀는
뱀처럼 나의 혀와 온 몸을 감더니
따뜻한 타액의 향기를 머금고
서로를 교감하게한다.
긴 키스......
밝음이 있다면 어둠도 교차하고
그 안에서 숨쉬는 우리는
서로가 낯설고 두렵더라도
지금은 행복해야한다.
지금을 죽여야 한다면,
지금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기꺼이 죽음으로서 받아들이고
모조리 내 걸로 섭취해야 한다.
욕심일까...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희망일까...
휘청대는 내 작은 가슴에
너무도 크고 깊은 상처가
눈물흘리는 혜미의 모습에
일제히 일어선다.
배 중간에 있을 용의 심장같은
불줄기가 온 몸을 감싸고
나를 억누르지 못할 감정으로
추악한 죄를 짓는 듯했다.
하지만,
하지만...
추악한 감정의 죄를 짓는다고 해도
나는 이 순간만은 혼돈의 늪으로
더 이상 빠져들지 말아야한다.
추악한 나를 데리고 나와서
드 넓은 감정의 물길을 따라서
생각의 강으로 나를 불러 내어서
진실된 사랑을 하여야 한다.
어차피 나는 슬픈 운명인 것을
아니 그렇게 만든 것은 스스로인데
나는 왜 혜미를 끌어 안고서
이렇게 쳐다보며 연연해 할까...
나의 덫에서 이제 그만
빠져 나와서 살고픈데
오늘도 여지없이 내 안에서
나를 머물게 하는 현실이
정말 야속하고 슬프다.
먼 훗 날.
나는 지금의 나를 바라 보겠지.
지금의 내 모습이 과연
어떤 매개체의 그림으로 비춰질까...
이젠 살고프다.
너무 긴 방황을 했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려는 생각부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날까지
한 번이라도 행복한 웃음을 못해봤기에
지금 나는 혜미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난 나이다.
그만 방황 할련다.
혜미의 입술을 꼬옥 물고서 이제 그만
본연의 나의 길로 가리라.
그만 그만 헤메고 싶다.
날 잡아줄 이도 거두어줄 이도 없는
텅 빈 이 세상을 이제 그만 홀로
묵묵히 가리라...
나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혜미와 함께
잠시나마 잊고서 괴로움 따위를 잊고
철저히 사랑하며 살아 보리라...
괴로움아~ 그만 떠나라.
미련아~ 그만 멈추어라.
꿈아~ 그만 깨어나라.
이제 또 다른 시작을 하자.
나를 되찾는...
시간이 멈췄다.
분출하는 욕정을 참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게 내 삶의 또 다른 시작이라면
나는 기꺼이 혜미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닌데...
넓은 더블침대에 우리는 누웠다.
긴 키스는 이어졌으며
혜미의 원피스 잠옷은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벗겨졌고
핑크색 브라가 반 쯤 보이면서
우리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브라를 풀기 위하여 눈을 뜨고
혜미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등 뒤로 손을 돌릴 때
꼭 감은 혜미의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멈추었던 시간의 굴레가
혜미의 눈물로 다시 움직이더니
나를 일깨우며 시간의 신이 노하 듯 말한다.
"멈추어라, 멈추어라..."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어라, 멈추어야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멈추어야만 한다, 멈추어라..."
시간의 신은 나의 양심이었다.
핏빛 인생길이 핑크빛 사랑과 더불어
행복한 순간을 만났는데
여기서 멈추어야하나...
양심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나는 역겨운 사랑을 느끼고
결국 멈추고 말아야 하는가.
그럴 순 없었다.
에메럴드 형광빛이 감도는 방 안엔
뜨거운 육신들이 부딪혀서 내는
황홀한 신음소리가 가득했고
입 가에서 내뿜는 온기와 함성이
일시에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내 몸을 혜미의 몸에
힘을 주어 밀어 붙인다.
그는 두 팔로 나를 힘차게 안으며
두 다리를 활짝 벌려서
나를 거부하지 않고
서서히 나를 받아들일 준비와
고통에 일그러진 나의 얼굴을 덮으며
이젠 행복하기만을 기원하는
그의 손이 내 몸을 만져온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계속 흘렀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나의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연신 나의 입술을 핥으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
광란의 시간은
멈추었다, 흘렀다를 반복하며
그 때마다 번득이는 초침의 칼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꼽히면서
나의 몸놀림을 거세게 했다.
시간은 그렇게 가버린다...
지금의 아픈 의식들을 잠재우기 위하여
나는 과거들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지나간 현실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고통과 고뇌에 휩싸인 채
어눌한 사랑을 토할려고 한다.
인간은 원래 나약하기 그지 없으며
그 나약함을 깨지 못했던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나는 오늘 참 많이도
나를 속이고 지나고 나면
허무만 남겼던 발자취들을
무엇으로도 보상 받지 못할 것인데
지금의 망가짐과 위태로움이 그저
긴 한숨으로만 나오니 공허하기 짝이 없다.
힘겨운 지금,
눈물 뿐이었던 나 혼자만의 시간.
그렇게 무의미하게 잘도 흘러 갔고
사는 자체가 싫은 것은 아마도
내 뜻대로만 산 댓가 였기에
진정 잔인한 나의 눈물만 거듭했었다.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나의 미래는
허무의 잔영만 쌓일 것이고
주위는 온통 검은안개만이 피어 오르기에
결코 절망의 바다를 건널 수는 없을진데...
온 몸을 집어 삼킬 듯한 집 채 만한 파도가
일시에 내 앞에 정신없이 닥쳐 오며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면서도
막상 죽음이 닥쳐올 때는
한없이 두렵고 겁이 나던 때가
불현 듯 뇌리를 파고든다.
죽음이란 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가슴 속에 항상 그리던 사랑과 미래의 꿈이
이제 서서히 다가온는 환영과
또 다시 사라졌던 고통의 나날들이 다가오더니
나는 그 속에서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에 운다.
소중한 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같은 밤...
나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막막함에 시달려 온 마지막 밤은
이렇게 혜미와 지고 있다.
돌아보면 아픔만 점철된
덧없는 세월을 느끼기에
나는 오늘을 깃점으로
모든 것을 잃을까, 얻을까...
세월의 마디 마디마다
다가오는 힘겨움과 서러움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며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구석지고 외진 나의 길이
언제나 음지에만 있다해도
이제 그만 아파하고
다시 길거리로 나설련다.
눈물만 가득했던
지금의 허상을 버리고서
언제나 대담스런 남아로
그렇게 이 삶을 꾸려야 한다.
혜미와 더불어...
시간의 신이 나에게 결국 졌다.
거친 몸 속을 헤메이다
끝없이 솟구친 질퍽한 사랑의 물은
혜미의 온 몸을 비수처럼 파고 들어서
나는 혜미를,
혜미는 나를 빼앗고
이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뱃가죽이 댕기는 듯한 격한 힘을 가하며
끝없는 물줄기를 분출하여서
나는 그를 얻었고 그는 내 안에서
퍼득이는 한 마리 새처럼
온 몸을 벌려서 사랑의 물을 받으며
자지러지는 듯한 행복의 함성을 토하면서
그도 결국 나를 빼앗는다.
흥건히 흐른 사랑의 물은
혜미의 몸 속에서 뻘건 피들과 아울어져
하얀 침대커브를 선홍빛으로 적시며 흘렀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키우며
죽음보다 진한 아찔함을 만났다.
이것이 사랑일까...
절망은 아닐까...
끝은 아닐까...
전부일까...
우리는 말없이 누웠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거친 숨소리와
뜨겁게 피어오른 욕정의 불길이
떨리 듯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혜미야..."
"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뭐가요?"
"아니,
널 지켜주지 못해서..."
"아니예요...
제가 바라던 일인걸요...
저, 지금 너무 너무 행복해요..."
"......"
"오빠"
"엉"
"저, 이대로 죽어 버렸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야?"
"이 행복을 깨지 않고 싶다는 말이죠..."
"그래도 죽는다는 말은 하지말어"
"네..."
"나 좀 볼래"
"안돼요,
나 지금 움직이면 큰일나요"
"왜?
많이 아퍼?"
"아뇨,
아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그럼 왜 움직이면 안된다는거야?"
"저, 지금요...
밑에 힘을 꽉 주고 있어요, ㅎㅎ"
"무슨말이야?
왜 힘을 주고 있어?"
"저...
오빠 눈을 꼭 닮은 아기를 갖고 싶어요.
코는 나 닮았으면 좋겠고...
음...키와 몸매는 우리 둘 다 닮으면 되겠고
마음은 오빠를 꼭 닮았으면 좋겠고..."
"너...
어쩔려고 그런 생각을 하니?"
"왜요?
오빠, 겁이 나나 보네...
겁쟁이네, 우리 오빠, ㅎㅎ"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럴 수는 없잖아..."
"대책이 없기는 왜 없어요.
오빠만 내 옆에 있으면 되요.
있어줄거죠? 네?"
"혜미, 너 정말..."
"네, 정말이예요.
누구 뭐래도 난 내 생각대로 할거예요.
자신도 있구요, 오빠만 내 옆에 있어줘요.
그러면 되요."
"아, 나...
너 정말 그러면 안되잖아.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잘 모르고..."
"아뇨, 아니,
난, 오빠를 잘 알아요.
그러니 그냥 옆에만 있어준다고 하세요.
그런데 날짜를 계산해 보니까...
이번에는...아닌 듯해요, 걱정마세요"
"걱정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됐고
나는 정말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이야"
"괜찮아요,
오빠보고 책임져 달라는 말은 절대 안해요.
내가 오늘 했던 행동은 전부 내가 원해서예요.
오빠를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마음을
이제 겨우 10%정도 삭였는걸요.
난 계속 오빠한테만 안길거예요.
그렇게 알고 나만 사랑해야 해요, 알겠죠?"
"...노력해보께..."
"피...
하여튼 오빠는 소심한 것 같어, ㅎㅎ"
"그래, 이제부터 나를 소심이라 불러라"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나의 전부이고 나의 하늘인데 어찌 그렇게 불러요,
대신에 이제부터는 서방님이라고 불러야지, ㅎㅎ"
"이 녀석이 점점..."
"왜요?
그렇게 부르면 안되요?
그래도 난 그렇게 부를거야, 암 암,
그렇게 부르겠사옵니다, 서방님, 호호~"
"에휴...내가 어찌 너를 말리겠냐..."
"그런데 오빠...아니지, 서방님,ㅎㅎ"
"엉,
왜?..."
"오빠는 왜 대학을 안갔어요?"
"...그게
안 간게 아니고 못갔지, 뭐..."
"내가 알기로는 대학을 간 걸로 아는데..."
"가면 뭐하니...솔직히
내 적성이랑 맞지도 않았고
적응을 못해서 그만 두었어."
"그랬구나...
오빠~"
"엉?"
"나...휴지 좀 집어 줘요,
힘을 막 주고 있는데도 자꾸만 흘러..."
"그래?"
몸을 돌려서 내 옆에 있는 곽티슈를 건넸다.
곽티슈를 받아 든 혜미가
얼굴을 잔득 찌푸리고 휴지를 뺀다.
"아이고, 큰일났네..."
"왜?"
"흘러서 침대시트를 다 버렸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오빠, 불 약하게 좀 켜주실래요"
몸을 일으켜서 전기불을 1단으로 켜니
연한 핑크빛 불이 들어 왔다.
혜미는 몸을 일으켜서 휴지를 빼더니
침대시트에 묻은 것을 열심히 닦았다.
"읔, 냄새가 이상해"
침대시트를 닦은 휴지를 코에다 대더니
냄새를 맡더니 얼굴을 귀엽게 찌푸리면서
내뺕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원래 그런 냄새가 난단다..."
"그렇구나...
휴지는 아침에 잠 깨면 치워야지.
오빠 우리 이제 자자"
"그래, 자자"
몸을 일으켜서 희미하게 켜진 불을 끄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오빠"
"엉, 왜..."
"이런 질문은 좀 그런데...
나, 어땠어요?"
"뭐가 어땠어?"
"아니, 그런거 있잖아요...
만족한다고나 할까, 그런 거..."
"......"
"오빠도 처음이구나, ㅎㅎ"
"...엉,
그래, 솔직히 첨이야..."
"그럴줄 알았어요.
나, 지금 너무너무 행복해...ㅎㅎ"
"나도 행복해,
우리 이 기분으로 잘 자고 일찍 일어나자"
"네...
사랑해요, 오빠..."
"나도..."
"네?
저를 사랑한다구요?"
"자슥...그래,
이제 부터 열심히 사랑해볼께"
"좋아, 너무 좋아, ㅎㅎ...
오빠야..."
"엉, 왜?"
"나, 잠들게 자장가 불러 줘요.
오빠가 노래 불러주면 금방 잠이 들 것 같아"
"그래?
무슨 노래를 불러 줄까?"
"아무 노래나 불러줘요.
오빠가 부르면 다 좋아"
"그래?
그럼...
요즘 내가 일하면서 가끔 부르는 노래가 있긴한데..."
"무슨 노래인데요?"
"엉...
무슨 노래냐면
'벗님들'이 부르는 노래인데
요즘 분위기와 딱 맞는 노래지..."
"그래요,
불러주세요"
"그래,
노래 부르면서 우리 자자"
"네..."
-'벗님들'의 '사랑의슬픔'-
하늘엔 흰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
무슨 생각에 걸어 왔는지
알 수 없어요...
달리는 창가에 흐르는
눈꽃처럼 허무한 사랑에
눈을 감으면 그대 생각에
가슴이 시려워요.
아~속삭이 듯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
아~헤어지며 하는 말
나를 잊으라고...
거리엔 흰눈이 쌓이고
내 가슴엔 사랑의 슬픔이
피어나지 못할 눈꽃이 되어
빈 가슴을 적시네.
아~속삭이 듯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
아~헤어지며 하는 말
나를 잊으라고...
거리엔 흰눈이 쌓이고
내 가슴엔 사랑의 슬픔이
그대 가슴 안에 흩어져버린
눈꽃이 되었나요...
고요한 방 안에
잔잔한 노래가 메아리졌고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혜미는 노래를 자장가로 삼으면서
고요히 잠이 들었다.
가만히 몸을 일으켜서 창가로 갔다.
창 밖에는 눈이 거칠게 흩뿌렸고
눈발 속에 감춰진 내 얼굴을 찾아서
헬쓱한 모습을 애써 지운다.
힘겨운 과거가 생각이 났다.
힘든 일들이 너무도 많았고
두려운 현실을 스스로에게 속이며
가식적이고 배려적인 척 했던 삶이
지금의 나를 능욕스럽게 만든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잔에 가득 부어진 김빠진 술을 마셔보았지만
가슴은 더욱 좁아져 가더니
무한한 세월의 그림자를 밟으며
짓이겨진 내 허상을 떨치려고 몸부림한다.
우울한 기분을 안고서
늘상 하는 것처럼 마음의 눈물 닦으며
긴 상념의 바다를 건너보지만
삶의 순간 속에서 많이도 생각했었던
참다운 행복을 느끼기보단
더욱 진한 아픔만이 느껴진다.
알싸한 추위가 엄습하였고
느끼지 말아야할 사랑연습이
너무나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세상은 온통 어두움 뿐이었다.
노을처럼 번져가고 가슴을 태우며
나 떠날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모두 잊을 연습도 함께 하여야한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혜미의 그 눈빛.
초라한 모습과 긴장한 모습의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강한 사랑을 전했기에
나는 혜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나 살아 가는 동안 혜미를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고 행복이라면
나는 지금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아픈 추억의 잿빛을 버리고
이젠 아픔과 영영 안녕을 고하리라.
변함없이 혜미를 선택할 다음 세상을 그리면서
혜미 곁에서 영원히 똑같은 꿈을 꾸면서
사랑을 먹으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리라.
혜미를 사랑하리라...
알싸한 바닷내음과
향긋한 호텔방의 냄새가 상충되어 어울려서
일찌감치 눈을 뜬 아침의 기분은 묘했고
심한 편두통때문에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흘러간 지난 밤은
오묘한 여운으로 굵게 남아서
짧은 착각을 한 것처럼 행했던 사랑의 행위가
평생 기억 속에 깊이 각인이 될 듯
퍼덕이는 순간 순간을 헤메는 아침이다.
언제 일어났는지
혜미는 이미 세면을 끝내고
화장대를 바라보면서 화장품을 연신 바르며
거울 속으로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돌아보고는 아침인사를 한다.
"오빠, 일어났네.
좋은 아침이예요"
"엉...
일찍일어났네...
지금 몇 시나 됐어?"
"지금...
6시40분이네"
"아직 그 시간밖에 안됐어?...
그런데 벌써 씻고 화장을 하니?"
"네...
습관이 되서 일찍 일어나요.
새벽에 일찍 학교에 가야지
도서관에 좋은자리를 잡을 수가 있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나도 씻어야지"
"그러세요"
"그런데 이렇게 일찍 나가서 뭐하지?"
"뭐하긴요...
우리 둘만의 추억만들기를 해야죠"
"그래?
무슨 추억을 만들고픈데?"
"음...
우선 큰 노트를 한 권씩 사는거예요.
그 노트 첫 장에 굵은 매직으로 똑같이
'내사랑 명훈과 혜미'라고 크게 이름을 적은 뒤
지금의 감정을 적는거예요. 그리고...
그 노트는 서로 생각날 때마다 편지식으로 적어서
만날 때마다 바꿔서 읽기해요.
같이 사진도 찍고 맛나는 식당에도 가보구...
할 일이 많네요, 얼른 씻으세요"
"그래, 일단 씻어야겠네..."
아침의 맑은 마음을 배려한 탓인지
콘도 내에는 잔잔한 교향곡이 흘러 나왔고
로비에서 'check out'을하고
우리는 길을 나섯다.
수평선 저 끝의 건너 편에서
이글거리 듯 쏟구쳐 오르는
태양의 쉼없는 빛을 받은 길 가의 하얀눈은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을 내 뿜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우리는 두 손을 꼬옥 마주잡고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올라서
백사장을 가득 덮은 하얀 눈이
서서히 잠식을 당하고 마침내
황톳빛 모래가 서서히 드러나더니
우윳빛 포말에 휩쓸려 바다로 빠진다.
밤 새 내린 하얀 눈 때문에
거리에는 동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빗자루와 삽을 들고 눈을 치우기에 부산하고
그 틈에 개들이 달음질하고
애들의 눈싸움이 한창이다.
눈이 녹은 질퍽한 길로
혜미와 나는 서서히 걷다가
어느 늙으신 부부가 하는 해장국집,
구석진 자리에서 아침 해장국을 먹었다.
노부부가 보시는 자리에서도
혜미는 서슴없이 애정어린 행동으로
반찬과 밥을 먹여준다.
이 것이 행복일까...
계산을 치루고 신발을 보고 깜짝놀랐다.
질퍽한 길을 걸으며 온통 진흙신발이
밥을 먹는 사이,
노부부가 말끔하게 닦아 놓으셨다.
"아니, 할머니...
신발을 이렇게 깨끗하게 닦으셨네요"
"뭐...
다시 나가면 금방 더러워질건데"
"그런데 왜 깨끗히 닦으셨어요?"
"그래도 내 집에 온 손님인데
나가서 다시 더럽게 되더라도
새로 신는 기분이라도 좋아야지유~"
"아이구,
정말 뭐라고 드릴 말이 없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별 말을 다하네유~
내가 더 고맙쥬~"
"고맙긴요, 저희들이 고맙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들를께요"
"그러세유~
잘들 가세유~"
우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
해장국 집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쉬운 걸음을 했다.
"혜미야"
"네, 오빠..."
"너, 집에 내려가야 하지 않니?"
"저, 집에 안가요"
"아니, 집에 안가다니?
지금 방학이잖아"
"방학이라도 집에는 안가고요,
기숙사에 있으면서 실습나가요"
"실습?"
"네, 그냥 병원에 나가서
아픈 사람을 돌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배우고 있어요"
"그렇구나...
힘들겠네"
"힘든 것은 아직 없는데요...그런데
나는 내과 간호사가 되고 싶었었는데
요즈음은 외과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그거야...
환자가 어디 아프던지
주사 잘 주고 간호를 잘해주면 되는 일아니야?"
"그것도 중요하지만요,
내 성격에 맞는 일을 해야죠.
내 비유가 다른 과친구들보다 강한 편이라서
외상을 깊이 당한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보걸랑요...
나는 외과로 가고싶은데
교수님은 자꾸 내과를 지원해라고 그러세요"
"누구보다도 너 스스로가 너를 잘아니까
많이 생각해보고 결정을 하렴..."
"네...
그런데 오빠"
"엉,
왜?"
"오빠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예요?"
"글쎄...
휴우..."
무의미한 삶을 꾸려가는 내 삶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글쎄라니요?
앞으로 살아 가면서 계획같은 것 있잖아요"
"계획이라...
나는 아직 그런 계획을 해 본 적이 없어..."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을 것 아니예요"
"뚜렸한 계획과 목표는 아직 없어.
하지만 곧 여기를 나갈 생각이야"
"곧?
그 곧이 언제인데요?"
"보자...
한 번 생각해 보구..."
"무슨 생각요?"
"별 생각은 아니구...
내가 탄광에 들어온지 벌써 13개월이 되었거든.
짧지 않는 세월이지만
그런대로 인내를 배웠고
나의 한계가 어디 쯤일까...하는 것도느꼈어.
돈이 조금만 더 모이면 나갈거야."
"돈이야 다른 일을 하면서도 벌 수 있잖아요"
"너가 내 말 뜻을 이해가 안되나본데
굳이 돈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야.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지금을 학대하면서
진정 올바른 미래를 창조해 볼려고 있는거야"
"이해야 되는데 일이 너무 힘들고 험하잖아요"
"그렇게 힘들고 위험하지도 않어.
안전수칙만 잘 지키고 열심히 하면 보람도 있어."
"그래도 나는 오빠가 그기서 일하는건 반대예요.
그러지 말고 그만둬요, 나의 부탁인데..."
"안그래도 곧 그만둔데도..."
"곧이 글쎄 언제 쯤인데요?"
"......
길게는 일 년, 짧으면 반 년만 더 있다가..."
"너무 길다...
그러지 말고 오빠,
다음달이 구정이니까 그 때 그만 둬라, 엉?"
"그건 안되구...
사실은 내 목표가 5백만원만 갖고 가는거걸랑.
그 돈이 다 만들어지면 나갈거야"
"5백만원?
그 돈으로 뭐할건데?"
"아직은 무얼할까는 생각을 안해 봤는데
그 정도는 있어야 뭘 해보지 않겠니"
"하기사..."
"그럼 오빠, 나랑 약속하나 해.
5백만원만 모으면 그만두기로..."
"그래...
그렇게 할께"
"그럼 약속해요"
혜미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펴더니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을 걸게한다.
그리고는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눈을 찔끔감더니
더 큰 미소를 보인다.
"좋아?"
"그럼요, 무척 행복해요"
"너, 웃으니까 정말 이쁘다"
"정말요?
정말?"
"그럼, 정말 이쁘다...
그런데 화장을 너무 하얗게 했다.
좀 진하게 해서 멋도 부려 봐."
"나는 내 피부에 불만이야.
우리엄마가 나를 너무 하얗게 만들었어.
다른 친구들 피부는 뽀얗는데 난 너무 흰색이라서
모기한테나 물리면 금방 표시가 나요."
"하얀거나 뽀얀거나 같잖어"
"아뇨, 같지 않아요.
제가 학교에서 별명이 두 개나 있어요,
하나는 내가 성질부리고 토라지면 '하얀악마'고요,
또 하나는 '하얀천사'예요.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그래요."
"너도 토라지고 성질 부려?"
"그럼요,
나도 사람인걸요, ㅎㅎ"
"난, 너가 화도 못내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어, ㅎㅎ
'하얀천사'가 너한테 어울린다, ㅎㅎ"
"밖으로 표를 안내는 것 뿐이지 사실은
속으로 화 많이 내고 그래요...
아, 저기 있네.
오빠, 나 따라와 봐요."
"어딜가려고?"
"글쎄, 따라와 보세요"
혜미는 횡단보도를 건너더니
이제 막 문을 열었는지 점원인 듯한 여자가
show window를 열심히 닦고 있는
금은방의 문을 열고 들어 간다.
"어서오세요"
유리를 열심히 닦던 여자가 인사를 한다.
"저기요...
우리 둘이 끼게 똑같은 무늬의 반지 없어요?"
"반지요?
여기서 골라 보세요"
가게 안의 진열대에 놓인 반지를 가르킨다.
"혜미야,
너, 뭐하는거니?"
"뭐하긴요,
우리 둘이 똑같은 반지 사서 끼게요"
"너..."
"잠자코 계세요,
저, 돈 많아요,
우리 아빠가 사장인 거 아시잖아요, ㅎㅎ
이리 와서 마음에 드는 반지 있나 좀 보세요"
"꼭 사야되겠니?
난...
그런 것 꼭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데..."
"잠자코 계시라니깐요.
제가 하고프니까 오빠는 그냥 제 뜻에 따라 주세요.
아무런 부담없이 그냥 끼고만 계셔 주세요.
저기요,
이 것 이쁜데 좀 볼 수 있어요?"
몇 쌍의 반지를 꺼내서 끼워보곤 했지만
서로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가 없었다.
뽀루퉁해진 혜미의 얼굴을 보고 안쓰러워서
시계를 사지고 권했지만
꼭 반지를 하고 싶다고해서
세 군데의 금은방을 둘러서
손가락에 겨우 맞는 반지를 찾았지만
반지가 너무 크고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갈등을 느끼며 몇 개를 더 보더만
결국 작은 링반지를 샀다.
"오빠, 손 내밀어 봐요"
"엉..."
"에혀, 오빠 손가락 마디가 너무 굵어서
반지가 안어울리네...
다음에 이쁜 반지 맞춰서 끼워줄께요"
"뭐, 꼭 이쁘야 반지냐?...
난, 마음에 들구먼.
손 내밀어 봐,
내가 끼워줄께."
"맞아, 마음이 문제지.
그래요, 나도 끼워줘...
뭐 그런대로 이쁘네. 그쵸?"
"너무 크고 화려한 것보단
이렇게 작고 소탈해도 좋으네"
"그러네요..."
"우리 커피나 한 잔하러 가자.
얘기나 좀 했으면 싶은데..."
"그래요,
뭐, 별달리 할 일도 없는데..."
"저 앞에 커피숍이 있네.
가자."
이른 시간이라 넓은 커피숍에는
아무도 없었고 잔잔한 음악이
실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 그리움되어~~~연속듣기
01 김현식-사랑했어요,
02 녹색지대-사랑을 할거야,
03 박윤경-부초,
04 박길라-나무와 새,
05 추가열-나같은 건 없는건가요,
06 이문세-나는 행복한 사람,
07 조용필-그 겨울의 찻집,상처,
08 바람꽃-비와 외로움,
09 조항조-사나이눈물,
10 진시몬-애수,
11 이진관-오늘처럼,
12 유익종-비가,
13 김연숙-그날,
14 패티김-9월의 노래,
15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6 이정옥-숨어우는 바람소리,
17 노영심-그리움만 쌓이네,
18 조용필-기다리는 아픔,
19 안치환-내가 만일,
20 최성수-당신,
21 박인수-사랑의 테마,
22 태진아-애인,
23 왁스-화장을 고치고,
24 최성수-해후,
25 해와달-축복,
26 최유나-흔적,
27 최진희-천상재회
첫댓글 마지막글올라온지 꽤된듯한데..뒷글이 안올라온다는..ㅡㅜ
현모후 월요일, 화요일...바쁜 척, 바쁜 일주일이 된다, 게임 접하면 니가 없어 허전해서 짱개만 패느라 바쁘고...집정리, 창고정리...그리고 일?(연애아님),ㅋㅋ
황혼형님 다음애기에 넘~신경안쓰시네....ㅡㅡ;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