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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如天 無比 큰스님]
반갑습니다.
오늘 2월 2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신심명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니 하는 대목부터
할 차례입니다.
이제 오늘로서 신심명 강의가 끝나겠는데요,
신심명 강의 끝나고
내일부터 이어서 바로 증도가 강의가 있겠습니다.
증도가에 대한 자료는 염화실에 많이 있으니까
그것을 복사해서 한글문서에 올려가지고
보기좋게 출력을 해서
교재를 만들어서 보시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68) 유즉시무 무즉시유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
저 앞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여기서는 이제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곧 없는 것이고
없다고 하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의 관계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은
뭐 어떤 마음의 경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있음과 없음의 문제는 더욱 더 그렇지요.
불교에서 이야기는 처음에 이제
있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뭐 안이비설신의도 있고, 색성향미촉법도 있고 뭐 온갖 것이,
고집멸도도 있고 십이인연도 있고 팔정도도 있고,
전부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왜냐하면은 진리에 대해서 또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식, 그것이죠.
그런데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크게 깨달으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면은
있다고 하는 것이 꼭 있는 것만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꼭 없는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크게 깨닫진 못했다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짐작을 하게 되고, 또 그것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그런 문제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있다고 하는 것,
그거 어떻게 우리가 꼭 있다고 말할 수가 없죠.
불교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것입니다.
또 없다고 하는 것도 정말 꼭 없는 게 아니죠.
우리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있다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에도, 요즘 물리학적인 이론에 의하면
100여가지가 넘는 원소들이 그 속에 있다는 걸 알고,
또 있다고 하는 것도 사실
이거는 가만히 분석해보면은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결합이 되어서
겨우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독립된 어떤 완전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하는 것도 그것을 더 나누지 못해서 그렇지,
나누는 기술이 아직 부족해서 그렇지,
얼마든지 나누어질 성질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은,
요즘은 그러지요, 근래에 물질의 최소단위를
쿼크(quark) 라고 하는 그런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그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하나의 결합체라는 거죠.
그와같이 모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가설인 것이고,
연기緣起에 의해서 잠깐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없는 것도 사실은 그냥 없는 게 아니죠,
그래서 이제 이런 이론은 구태여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불교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뭐 상식적인 것이죠.
불교 교리도 처음에는
고집멸도나 팔정도나 12인연이나
이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나가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은 그다음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로 접어들죠.
그것이 반야사상, 없는 줄 볼 줄 아는 그것이 반야인데
그게 지혜죠.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은
아직은 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상식적인 안목이고
그런데
있는 것을 없다고 볼 줄 알고,
없는 것을 있다고 볼 줄 알면은
그것은 상당히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중에 제일 양이 많다고 하는 반야부, 600권이나 되는 반야부 경전은,뭐가 반야냐, 뭐가 지혜냐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지혜다.
그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반야부 경전중에서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늘 외우는
반야심경을 보면은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안의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고
12인연十二 因緣도 없고
팔정도八正道도 없고 사성제四聖諦도 없고
그래서 모든 있는 것은 공空이고 또
공空한 것은 곧 있는 것이고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라고 하는 것은
반야심경 용어를 빌려보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그대로죠
유有는 색色이 되고
공空은 무無가 되고
이렇게 글자만 바꿔 놓으면 그대로 똑같습니다.
이렇게 볼 줄 아는 안목은 이미 반야의 안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도 역시 그렇지요.
부처님의 진정한 모습은 현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현상現象에서 현상이 공空한 것으로 볼 줄 아는 그런 안목이
반야의 안목, 지혜의 안목이고 따라서 그 안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여래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제 돼 있지 않습니까.
600권이나 되는 반야부 경전이 거의 종지가 그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니
이렇게 되어 있죠
(69) 약불여차 불필수수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
만약 이와 같은 이치, 이와 같은 안목, 이와 같은 지혜가
아니라면은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니라.
지켜서는 안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이치가 그렇게 돼 있다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곤란하다는 거죠, 불교적인 안목에서는 이건 우리가 고집하고 지킬 그런 사상이나 주의주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거나
이렇게 이제 변견에 떨어져 있다, 치우쳐있다 하고 한다면은
이것은 우리가 따를 사상이 아니고
따라야 할 주의주장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늘 이야기 했지마는
중도中道적인 안목眼目이고 또 그 중도적인 안목이란
모든 존재가 중도中道의 원리原理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원리原理대로 바로 본 것입니다.
뭐 어떻게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새로운 그런 것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존재가
전부 중도中道의 원리原理에 의해서 존재存在하는 것,
아니죠. 존재存在하는데는 어떤 원칙原則이 있는데
그것을 불교佛敎에서는 중도中道의 원리原理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중도가 있고 모든 존재원리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存在는 존재원리存在原理가 있는데
그것을 불교佛敎에서는 중도中道의 원리原理다,
중도中道의 법칙法則이다,
중도中道의 원리原理대로 존재存在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든지 하는 것은
나중에 뒷사람들이 붙인 일이지 부처님이나 나중에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름을 붙여본 것이지
원리보다 이름이 먼저 생긴 게 절대 아니예요.
불교공부를 많이 하다보면은 이름이 먼저 생기고 그 원리가
나중 따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간혹 그렇게 착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원리가 본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제 깨달으신 분들이
그 이치를 전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모든 존재들,
모든 존재들이 이게 이제 중도中道의 원리原理라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 입각해서 거기에 맞게 사는 것,
이게 이제 우리가 따를 만한 일이고,
우리가 정말 살아가는데 이해해야 할 그런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약불여차若不如此면 불필수수不必須守라
만약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니고 어디에 치우친 견해라면
이거는 지킬 일이 아니다 라는 거죠.
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 순간瞬間은 장구長久한 세월이고
장구長久한 세월은 또 한 순간瞬間이고
또 공간적으로 어떤 하나의 작은 존재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작은 존재-.
이것을 이제 여기서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있었던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런 말들 있었죠. 그다음에
무재부재 無在不在 시방목전 十方目前.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70) 일즉일체 일체즉일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니
일즉이체 一卽一切요
시간이든 공간이든 모두 하나가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71)단능여시 하려불필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다만 능히 이와 같이만 된다면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공부 끝내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끝내지 못함을, 마치지 못함을 어찌 염려하랴
이렇게 이제 해석하는데
그러니까 일一이 일체一切고, 일체一切가 일一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인
이게 이제 중도中道거든요. 중도의 원리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눈에는 아직 그렇게 쉽게
잘 들어오지가 않죠.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죠.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도
한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한순간이다 하는 것 그것도
불교공부 어느 정도 한 사람들에게는 그런대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연하게
이게 이제 중도원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모든 것에 중도원리라는 이 사실에 대해서
자기 살림살이, 자기 견해로, 또는 자기 소신으로 굳어진다면은
공부마치지 못한 것을 어찌 염려 하겠는가,
걱정할 게 없다는 거죠. 그 속에 다 있으니까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72) 신심불이 불이신심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라
그리고 언어도단 言語道斷하고 비거래금非去來今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심信心하면 믿을 신信, 마음 심心자죠.
믿는다는 것과 마음이라는 것 이게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믿는 게 뭐가 믿는 다는 것입니까. 결국 마음이 믿는다는 거죠, 마음이 뭘 믿습니까 마음을 믿는거예요.
마음이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것을 신심이라 한다.
믿는 것과 믿을 대상이 결국은 둘이 아니고 그 둘이 아닌 것을 한마디로 신심信心이라 한다.
그래 여기 신심은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전에 신심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일반적인 종교적 어떤 신앙이 있는 것,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이것은
불심佛心이고 선심禪心이고 도심 道心이고 법심法心이라고
내가 늘 이야기 해왔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입니다.
여기서 신심명 信心銘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中道고
중도中道는 모든 것의 근본根本이고 그런 것이죠.
그게 이제 신심信心이다.
그러니까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도 주욱
말씀드려왔듯이 두루뭉숭이로 한덩어리가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개개箇箇가 완전무결完全無缺하게
독립獨立되어 있으면서
모든 독립된 것들끼리 전혀 걸리지 않고
조화造化를 이루는 것 그게 이제
원융무애 圓融無碍죠.
원융圓融하고 융화融和한 것
이것이 이제 말하자면 둘이 아니라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건 이제 불이 不二에 대한 것
어제도 유마경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 중요한 거예요. 무어라 했습니까
요급상응要急相應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라.
그런 말을 했죠.
요컨대 빨리 상응하고자 한다.
신심 信心의 경지境地, 깨달음의 경지라 해도 좋고요,
불심佛心의 경지, 선심禪心의 경지境地, 중도적中道的 경지境地에
좀 빨리 계합契合하려고 한다면은
한마디로 불이不二라고, 불이不二의 이치理致를 알라고 밖에
달리 말할 것이 없다.
유언불이唯言不二라 오직 불이不二,
그것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랬어요
모든 것이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둘이 아니다 라고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둘이 아니다라고
둘이 아닌 입장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살 때 그것이 바로
신심信心이고 또 중도中道고 불심佛心이고 법심法心이고
말하자면 도심道心이다
이렇게 이제 말씀드릴 수가 있는 거지요.
전체적으로 이렇게 우리가 많은 시간을 두고
깊이 사유思惟하고 자꾸 입으로 읊조려 보고
글로 써보고 이렇게 하면서 마음에서
하나하나 깨우쳐 갈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73) 언어도단 비거래금
言語道斷하고 非去來今이다
그랬어요. 마지막 구절이.
그것은 언어의 길이 끊어져 있다 그랬습니다.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죠.
지금까지 승찬대사께서는
정말 아주 지극히 절제된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게 아주 지극히 절제된 표현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러한 절제된 말도 말로 표현된 것은 아니다.
정말 이건 말을 아끼고 아끼고 그렇게 해서 표현했지만은
이렇게 아껴서 표현한 말도 결국은 언어로써 표현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적으로 과거 미래 현재,
거래금去來今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미래 현재라는 뜻인데,
과거 미래 현재 사실 우리가 시간을 떠나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지만은
사실 중도中道의 입장, 둘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시간적으로도 원융무애圓融無碍해서 하나로 죽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과거다 어느 것이 미래다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도 그런 말이 있죠.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 現在心不可得 미래심 불가득 未來心不可得이라
우리 마음은 사실 마음 마음 하지만은
어떤 과거의 마음이라고 해서 찾아낼 수도 없는 것이고
현재의 마음도 어떤 시간성을 가지고 마음을 집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시간에 두루 변재해 있는 것이 또한 마음이기도 하구요. 마음이 일체사물은 아닙니다. 일체사물은 아니예요. 일체사물은 아니지만 일체사물에 또한 두루 스며 있는 것이 또 우리 마음입니다.
사물에도 그렇고 시간에도 그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아니면서 또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두루 해 있는 것이 또한 마음이죠. 그런 마음의 중도성中道性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려서 이 신심명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한번 다시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불교는 왜 믿는가
불교공부는 왜하는가
불교를 왜 믿는가 하는 그런 질문이나 같습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들은
그 나름대로 머리속에 아마 대답이 떠올랐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 싶어요.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다. 지혜로운 삶,
지혜라는 말로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본 불교는
물론 자비도 상당히 소중하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마는
지혜를 더 우선시 한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의 종교다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는 거죠.
불교도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
행복하려고 불교를 한다.
그건 맞는 말이예요.
행복하기 이전에 지혜가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지혜 없이는 행복이, 제대로 된 행복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불교佛敎적 삶이란,
행복을 전제로 한 불교적 삶,지혜를 전제로 한,
불교적 삶이란 무엇인가
신심信心의 삶이고 중도中道적 삶이고
처음에 말했듯이 지도至道, 지극한 도道의 삶이고
큰 도道라고 표현을 했는데 대도大道의 삶이다.
그리고 이 신심명은 짧은 글이지만은
팔만 대장경을 응축해놓은
그런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여기 있다.
팔만대장경에 있다하면 어디가서 찾을 지 모르죠.
그런데 신심명 안에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 이러면
아마 뭐 불과 얼마 안 되니까
누구든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다가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때
깨달은 분의 지혜가 필요할 때, 부처님의 지혜가 필요할 때
그때 신심명을 한 번 뒤져본다면
그 속에 틀림없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을 것입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어요. 여기는.
자세히 읽어보시면은 가능할 것입니다.
또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복을 얻으려고 하지요.
또 복을 얻으려고 하면
복짓는 일도 이제 불교를 통해서 배웁니다.
복짓는 일도 배우는데 그것도 역시 불교 믿는 이유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복불교 그거 잘못된 거 아니예요.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고 복받으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요.
기복불교 그렇게 폄하할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이 정말 행복을 불러오는 것이고
또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 집니다.
지혜로우면은 행복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얼마든지 풍요로워져요.
우리 불자들, 초보불자들을 보면 대개 이제 시험문제,
시험의 어떤 자녀들의 시험문제, 그다음에
물질적인 문제 해결 이런 것들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불교에 가까이
하는 그런 예들을 많이 보죠. 그건 참 좋은 인연은 돼요.
그런데 사실 그런 문제도 해결이 가능해요.
왜냐하면은 불교 공부를 하면 지혜로워 지니까
모든 문제를 아주 현명하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매달리고 그렇게 떼쓰고 하는 게 아니지요.
이 참 부처님같은 그런 큰 깨달음을 이루신 분의
그 정말 섬세한 가르침, 또 혼자만의 가르침입니까.
2천 600여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수많은,
무수한 깨달은 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못지 않은
그런 깨달은 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전 인생을 그냥 통째로 바쳐서 뭐 쉽게 얻은 게 아니예요. 정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노력을 기울여서 큰 깨달음을 얻은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또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해져서
정말 현명하고 지혜로운 가르침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문제든지
아주 현명하고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 질 수가 있고
내가 어떤 세상의 문제에 봉착했다면 그 문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보다도 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일들이
우리는 모두 불자입니다.불자이기 때문에,
그 불자佛子라는 말이 뭔 말입니까.
그 부처님 아들딸이다 이말이예요.
부처님의 아들딸이면 어떻습니까.
지상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의 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아셔야 해요.
뭐 김씨가 됐든 박씨가 됐든 과거 우리 선조가 무슨 남의 집 종이 됐든 아니면 왕족이 됐든
그까짓 왕족 별볼일 없습니다.
부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명문가는 없고
부처님의 집안보다 더 귀족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래요.
사실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불자들은
아주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불자佛子아닙니까.
부처 불佛자 아들 자子자야, 부처님의 아들 딸이라는 뜻이죠
지상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의 귀족이다.
여기에 우리가 아주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 이후의 수많은 그 2600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이 깨달은 분들이 당신의 그 깨달음의 지혜를 더해 놓은
그 많은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정말 긍지와 자부심으로 그리고 아주 지혜를 깊이 갈고 닦아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
물질이 풍요로워지고 싶어진다면 물질도 풍요로워지고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도 아주 현명하게 판단하고 처리할 할 수 있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삶,
행복한 삶이 성취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신심명을 다 설명을 해 드렸구요.
어떤 분이 이걸 처음부터 한번 죽 새겨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처음부터 한 번 다시 주욱 새길테니까
새기는 방법도 중요해요.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루이틀 하고 말 것이 아닌 이상은
또 특히 제가 염화실에서 시도하는 바가
처음에는 법화경을 가지고 한글로 공부를 했죠.
그다음에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을 거쳐서 불교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모든 불교 성전이 전부 한문으로 됐습니다.
한문이 우리에게는 원전이예요. 산스크리트어가 아니고
우리에게 원전은 한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한문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조금만 마음을 쓴다면은 한문으로 된 경전, 어록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 염화실 법우님들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는 걸로 그렇게 짐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우리가
글 새기는 것도 익혀두시면은
아주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은 신심명 처음부터 새겨드리겠습니다.
信心銘
(1)至道無難(지도무난)이요 維嫌揀擇(유혐간택)이니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며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니
(2)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이니라
만약, 다만 증애하지 아니한다면은 툭 터져서 명백하리라.
(3)毫釐有差(호리유차)하면 天地懸隔(천지현격)하나니
호리라도 차이가 있으면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나니
(4)欲得現前(욕득현전)이어든 莫存順逆(막존순역)하라
앞에 나타남을 얻고자 할진댄 순하고 거슬림을 두지말라
(5)違順相爭(위순상쟁)이 是爲心病(시위심병)이다
어기고 순하는 것이 서로 다투는 것이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나니.
(6)不識玄旨(불식현지)하면 徒勞念靜(도로염정)하리라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갖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자 할 뿐이로다.
(7)圓同太虛(원동태허)하야 無欠無餘(무흠무여)다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라고 남음이 없으니
(8)良由取捨(양유취사)하야 所以不如(소이불여)라
진실로 취사심을 말미암아서 그러한 까닭에 그와 같지 못함이라
(9)莫逐有緣 (막축유연)하고 勿住空忍 (물주공인)하라
유연도 좇지 말고 공인에도 머물지 말라
(10) 一種平懷(일종평회)하면 泯然自塵(민연자진)이라
한가지로 바르게 마음에 품으면은 민연히 사라져서 저절로 다하리라
(11)止動歸止(지동귀지)하면 止更彌動 (지갱미동)하나니
움직이는 것을 그쳐서 그친 데로 돌아가려 하면은 그쳐 있던 것이 다시 더 움직이나니
(12)唯滯兩邊 (유체양변)이라 寧知一種 (영지일종)가
오직 양변에 막힘이라 어찌 한가지를 알 수 있겠는가
(13)一種不通(일종불통)하면 兩處失功(양처실공)이니
한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그 공능을 잃어버리나니
(14)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유를 보내면은 유에 빠지고 공을 쫓아가면은 공을 등짐이라
(15)多言多慮(다언다려)면 轉不相應(전불상응)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상응하지 못함이요
(16)絶言絶慮(절언절려)라야 無處不通(무처불통)이다.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은 어느 곳이든지 통하지 못할 데가 없음이라
(17)歸根得旨(귀근득지)요 隨照失宗(수조실종)이니
근본에 돌아가서 뜻을 얻음이요, 비춤을 따르면은 종지를 잃어버리나니
(18) 須臾返照(수유반조)하면 勝却前空(승각전공)이라.
짧은 시간에 반조하면 앞 경계가 공한 것보다 수승하리라
(19) 前空轉變(전공전변)은 皆由妄見(개유망견)이다.
앞의 경계가 공하여 변해지는 것은 다 망견을 말미암은 것이니
(20) 不用求眞(불용구진)이요. 唯須息見(유수식견)이니라.
진 구함을 쓰지 말것이요 오직 모름지기 소견을 쉴 지니라
(21) 二見不住(이견부주)하야 愼莫追尋(신막추심)하라
두가지 견해에 머물지 아니해서 삼가히 추심하지 말라
(22) 纔有是非(재유시비)하면 紛然失心(분연실심)이니라
겨우 옳고 그른 것이 있기 시작하면 분연히 마음을 잃어버리리라.
(23) 二由一有(이유일유)니 一亦莫守(일역막수)다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하나도 또한 지키지 말라
(24) 一心不生(일심부생)하면 萬法無咎(만법무구)니라
한마음이 생하지 아니하면은 만법에 허물이 없음이니라
(25) 無咎無法(무구무법)이요不生不心(불생불심)이라
허물이 없으면은 법도 없음이요 생멸도 없고 마음도 없음이라
(26) 能隋境滅(능수경멸)하고 境逐能沈(경축능침)이라
능은 경을 따라서 멸하고 경은 능을 쫓아서 잠기어서
(27) 境由能境(경유능경)이요 能由境能(능유경능)이니
경은 능을 말미암은 경계요 능은 경계를 말미암은 능이니
(28) 欲知兩段(욕지양단)인댄 元是一空(원시일공)이니라
양단을 알고자 할 진댄 원래 이 하나의 공이니라
(29) 一空同兩(일공동양)하야 齊含萬象(제함만상)이니라
하나의 공이 둘과 같아서 만상을 가지런히 포함해서
(30) 不見精麤(불견정추) 영유편당(寧有偏黨)
정과 추를 보지 아니할 지니 어찌 편당이 있겠는가
(31) 大道體寬(대도체관)하여 無易無難(무이무난)이라
대도는 그 체가 너그러워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건마는
(32) 小見狐疑(소견호의)하여 轉急轉遲(전급전지)로다.
작은 견해는 의심하고 의심해서 급하게 할 수록 더욱 더디어 지도다
(33) 執之失度(집지실도)라 必入私路(필입사로)여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감이여
(34) 放之自然(방지자연)이라 體無去住(체무거주)라
놓아버리면은 저절로 그러함이니 자체에 가고 머뭄이 없음이라
(35)任性合道(임성합도)요 逍遙絶惱(소요절뇌)라
성품에 맡기면은 도에 합해서 소요자재히 번거로움을 끊고
(36) 繫念乖眞(계념괴진)하고 昏沈不好(혼침불호)니라
마음에 얽매이면, 생각에 얽매이면 진실을 어기나니 혼침은 좋지 아니함이라
(37) 不好(불호)아 勞神(노신)커든 何用疎親(하용소친)이라
좋지 아니한 것과 정신을 수고롭히는 것에 어찌 멀고 가까움을 사용하겠는가
(38) 欲趣一乘(욕취일승)인댄 勿惡六塵(물오육진)하라
일승에 나아가고자 할 진댄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39) 六塵不惡(육진불오)하면 還同正覺(환동정각)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은 또한 정각과 같음이라
(40) 智者(지자)는 無爲(무위)어늘 愚人自縛(우인자박)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조작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묶이도다
(41) 法無異法(법무이법) 妄自愛着(망자애착)이로다
법에는 이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해서
(42) 將心用心(장심용심)하니 豈非大錯(기비대착)가
마음을 가져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43) 迷生寂亂(미생적란)이요, 悟無好惡(오무호오)라.
마음이 이치를 미하면은 생을 미하면은
생이 미한 것이 나면은 이말이죠, 이치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미한 것이 나면은 고요한 것이 어지러워지고, 이건 이제 달리 또 새기는 방법도 있어요.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그랬어요 미생적란이요 처음엔 그래 새겼죠
미혹하면 고요하고 어지러움이 생기며 그렇게 하죠.
깨달음에는 호와 오가 없나니
(44)一切二邊(일체이변)은 良由斟酌(양유짐작)이라
일체이변에 진실로 짐작함을 말미암음이로다
(45)夢幻空華(몽환공화)를 何勞把捉(하로파착)가
꿈이요 환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46)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놔버려라
(47) 眼若不睡(안약불수)하면, 諸夢自除(제몽자제)요.
눈이 만약 잠들지 아니하면은 모든 꿈이 저절로 제해지며
(48) 心若不異(심약불이)하면, 萬法一如(만법일여)다.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아니하면 만법이 일여하니라
(49) 一如體玄(일여체현)하야 兀爾忘緣(올이망연)이라
일여한 체는 깊고 깊어서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50) 萬法齊觀(만법제관)에 歸復自然(귀복자연)이라
만법을 가지런히 봄에 저절로 그러함에 돌아감이니라
(51) 泯其所以(민기소이) 不可方比(불가방비)라
그 소이를 없애면은 가히 견주어 비할 데가 없음이라
(52) 止動無動(지동무동)이요 動止無止(동지무지)니
그치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동하면서 그치면, 움직이면서 그치면은 그침이 없나니
(53) 兩旣不成(양기불성)이니 一何有爾(일하유이)리요
두가지가 이미 이루어지지 않음이라 하난들 어찌 있을 것인가
(54) 究竟(구경)이요窮極(궁극)이라 不存軌則(부존궤측)이라
구경이요 궁극이라 궤측을 두지 아니함이여
(55) 契心平等(계심평등)하야 昭作俱息(소작구식)이니라
마음이 평등한데 계합하면 짓는 바가 다 쉬리라
(56)狐疑淨盡(호의정진)하면 正信調直(정신조직)이다.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 깨끗이 다하면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음이라
(57) 一切不留(일체물류)라無可記憶(무가기억) 하면
일체 머물지 아니해서 가히 기억함이 없으면은
(58)虛明自照(허명자조)하면 不勞心力(불로심력)이라.
텅비어 밝고 스스로 비춰서 마음의 힘을 수고롭히지 아니함이라
(59) 非思量處(비사량처)면 情識難測(정식난측)이라.
사량할 곳이 아니니라 식정으로 측량하기 어려움이로다
(60)眞如法界 (진여법계)는 無他無自(무타무자)라.
진여법계는 타인도 없고 자신도 없음이라
(61)要急相應(요급상응)하면 唯言不二 (유언불이)로다.
급히 상응하기를 요할진댄 오직 둘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로다
(62)不二(불이)는皆同(개동)이다 無不包容(무불포용)하나니
둘이 아니면 다 같아서 포용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니
(63) 十方智者(시방지자) 皆入此宗(개입차종)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은 다 이 종지에 들어감이라
(64) 宗非促廷(종비촉연)이니 一念萬年(일념만년)이요
종지는 촉박하거나 오랜 것이 아님이니 일념이 만년이요
(65) 無在不在(무재무재)라 十方目前(시방목전)이로다
있고 있지 아니함이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로다.
(66) 極小同大(극소동대) 忘絶境界(망절경계)이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경계가 모두 끊어지고
(67) 極大同小(극소동대)라 不見邊表(불견변표)라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변표를 볼 수 없음이라
(68) 有卽是無(유즉시무)요 無卽是有(무즉시유)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니
(69) 若不如此(약불여차)면 不必須守(불필불수)라
만약 이와같지 아니하면은 반드시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니라
(70) 一卽一切(일즉일체)요一切卽一 (일체즉일)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71) 但能如是 (단능여시)하면 何慮不畢(하려불필)가
다만 능히 이와 같으면 어찌 마치지 못함을 염려하겠는가
(72) 信心不二(신심불이)요 不二信心(불이신심) 이라
신심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것이 신심이니
(73) 言語道斷(언어도단)하고 非去來今(비금래금)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님이로다
여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신심명 강의 여기까지 하고 내일부터는 증도가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법석法席을 빛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꽃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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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스님 수고하셨습니다 스님 항상 건강하십시요_()()()_
감사드립니다. () () () 건강하십시요!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라. -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은 둘이아니라는 사실. 고맙습니다._()()()_
一卽一切(일즉일체)요 一切卽一 (일체즉일)이다...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 만 중생들에게 단 이슬과 같은 감로법우를 주시는 어른스님 많이많이 고맙습니다. 법체 강령하시옵소서._()()()_
법문 잘 받아갑니다._()()()_
자료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고준한 법문...고맙습니다. _()()()_
止動無動(지동무동)이요 動止無止(동지무지)니... 그치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동하면서 그치면, 움직이면서 그치면은 그침이 없나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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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었읍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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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마울따름입니다.이러한 인연을 감사드리옵고 행복합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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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원겁즉일념하여 일념즉시무량겁하나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스님, 건강하세요... _ () () () _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신심불이 불이신심 언어도단 비금래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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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