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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강 - 般若品- 5
善知識아 摩詞般若波羅密은 最尊最上最第一이라 無住, 無往, 亦無來로되 三世諸佛이 從中出이시니라 當用大智慧하야 打破五蘊, 煩惱, 塵勞니 如此修行하면 定成佛道하야 變三毒爲戒定慧하리라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從一般若하야 生八萬四千智慧니 何以故오 爲世人이 有八萬四千智慧일새니 若無塵勞하면 智慧常現하야 不離自性이니 悟此法者는 卽是無念, 無億, 無着하야 不起誑妄하고 用自眞如性하야 以智慧觀照하야 於一切法에 不取不捨니 卽是見性, 成佛道니라
善知識아 若欲入甚深法界와 及般若三昧者인댄 須修般若行하고 持誦金剛經하야 卽得見性이니 當知此功德이 無量無邊이라 經中에 分明讚嘆하니 莫能具說이로다 此法門은 是最上乘이니 爲大智人說이며 爲上根人說이라 小根小智人이 聞하면 心生不信하나니 何以故오 譬如天龍이 下雨於閻浮提하면 城邑聚落이 皆悉漂流하야 如漂棗葉이어니와 若雨大海하면 不增不減이니 若大乘人과 若最上乘人이 聞說金剛經하면 心開悟解라 故知本性에 自有般若之智니 自用智慧하야 常觀照故로 不假文字니라 譬如雨水가 不從天有라 元是龍能興致하야 令一切衆生과 一切草木으로 有情無情이 悉皆蒙潤하며 百川衆流가 却入大海하야 合爲一體인달하야 衆生本性의 般若之智도 亦復如是하니라
善知識아 小根之人이 聞此頓敎하면 猶如草木의 根性小者가 若被大雨하면 悉皆自到하야 不能增長인달하야 小根之人도 亦復如是하나니 元有般若之智는 與大智人으로 更無差別이언만 因何聞法하고 不自開悟오 緣邪見障重하고 煩惱根深이니 猶如大雲이 覆盖於日에 不得風吹면 日光이 不現이니라 般若之智도 亦無大小언만 爲一切衆生이 自心迷悟- 不同하야 迷心은 外見에 修行覓佛이나 未悟自性일새 是卽小根이니 若開悟頓敎하야 不執外修하고 但於自心에 常起正見하야 煩惱塵勞- 常不能染하면 卽是見性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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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知識(선지식)아 摩詞般若波羅密(마하반야바라밀)은 最尊最上最第一(최존최상최제일)이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자꾸 외우라. “말이라도 외우라” 라고 권했지요?: (15강)
불광 법회에서는 이 마하반야바라밀을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외우는 이상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정근할 때 꼭 외워요. 광덕스님께서 워낙 육조단경을 좋아하셨고, 또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제목 속에 반야심경의 사상. 금강경사상. 또 600권의 반야부 전체의 어떤 사상. 그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요.
그리고 육조스님께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우라고 분명히 이렇게 육조단경에서 말씀 하셨고,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와 닿으니까 정근을 할 때 꼭 마하반야바라밀을 정근을 하지요. 마하반야바라밀.
이 설명 듣고 보니 이 이상 없지요?
불교는 이렇게 보면 교리가 복잡한 것 같아도 육조스님의 설명을 이렇게 들으면 아주 간단하지요.
최존최상최제일이다. 無住, 無往 亦無來(무주, 무왕 역무래)로되→ 머무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또한 오는 것도 없음이로되,
三世諸佛(삼세제불)이 從中出(종중출)이라→ 그로부터 종中. 그 가운데부터 다 “삼세제불이 마하반야바라밀에서 나왔다.” 이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최존최상최제일이예요. 그 마하반야바라밀은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無往 예요. 무슨 절에 가면 법당 안에 있다든지, 무슨 히말리야의 산꼭대기에 있다든지 그것이 아니에요.
또 이것이 물체라서 걸어가는 것도 아니에요. 나에게서 떠나가 버리는 것도 아니에요. 往 자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모든
三世諸佛(삼세제불)이 從中出(종중출)이시니라→ 모든 삼세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전부 이 마사반야바라밀로부터 나왔다.
當用大智慧(당용대지혜)하야→ 마땅히 대 지혜를 써서,
打破五蘊, 煩惱, 塵勞(타파오온, 번뇌, 진로)니→ 오온. 번뇌. 진로를 타파해라. 우리는 색. 수. 상. 행. 식.
色이라고 하는 물질로 형성된 이 肉身(육신). 또 육신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온갖 意識(의식)의 흐름.
受(수). 想(상). 行(행). 識(식). 받아들이는. 感受(감수)하는 심리작용. 또 감수해서 생각하는
“아 날씨가 춥다. 추우니까 이 추운 날은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 생각을 어떤 실천으로 옮기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뭐 “옷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다.”라고 한다든지, 그것이 행이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식은 그 根本(근본). “인식자리다.” 이렇게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등등으로부터 온갖 망상이 생기지요.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보통 사람들의 근본은 五蘊(오온)이예요. 오온이 나와요 그냥...
몸과 마음이지요. 五蘊皆空(오온개공)할 때 “몸도 마음도 텅 비다.” 그런 표현을 하는데, 그 오온을 근거로 해서
거기서 생기는 번뇌. 또 거기에 진로. 이 진로라고 하는 것은. 이 塵(진)은 거울에 먼지가 낀 것같이 우리의 본성을 흐리게 한다. 또 勞(로)는 피로하다는 것이거든요. 몸이나 마음이 피로하면 뭐든지 잘 안되지요.
내 뜻대로 안 움직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번뇌의 다른 이름을 “진로 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타파해야 된다. 오온. 번뇌. 진로를 깨뜨려야 된다.
如此修行(여차수행)하면→ 이와 같이 수행할 것 같으면, 定成佛道(정성불도)하여→ 결정코 불도를 이룬다. 틀림없이. 定자는 그런 뜻이에요. 틀림없이 불도를 이루어서, 變三毒爲戒定慧(변삼독위계정혜)하리라→ 삼독을 변화시켜가지고서 계 정 혜를 만들 것이다. 삼독을 돌이켜서 계정혜를 만들 것이다.
이것을 회향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回三毒(회삼독)하야 向戒定慧(향계정혜)하리라] ←이렇게 만들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독을 우리의 살림살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삼독이 또 결국은 삼독이 계정혜가 되는 겁니다.
貪(탐) · 塵(진) · 痴(치).
탐은 戒(계)의 반대이고,
진은 定(정)의 반대이고,
치는 慧(혜)의 반대입니다. 어리석음과 지혜는 반대가 된다고요. 삼독이 나쁜 것 같지만 사실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삼독을 부릴 수 있는 그 요소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감이 떫다고 해서, 떫은걸 먹지만 않으면, 떫은 그 맛 그 자체는 아주 좋은 거예요.
아주 좋은 거라고요. 떫지 아니한 감은 달지도 아니해요. 단맛이 어디서 오는가하니 떫은 것이 변해서 단감이 되지, 떫은 맛 없는 감은 달지도 않다네요.
단감도 처음에는 떫다고요. 단감도 어릴 때는 먹어보면 떫어요. 처음부터 단가하고 먹어보면 아니에요. 떫어요.
그것이 좀 커지면서 달아 지는 거예요.
보통 본래 떫은 감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홍시해서 먹는 그런 감은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아주 떫디떫은 감은 나중에 홍시 되놓으면 아주 달아요. 그 떫은걸 누가 먹으래요? 안 먹고 그걸 그냥 잘 보관해 있으면 나중에 단맛이 된다고요. 삼독도 마찬가지에요.
삼독을 부리지만 마세요. 속에 있는 것은 괜찮아요. 속에 있는 것은 그 삼독이 지혜가 될 요소라니까요. 계정혜가 될 밑거름이라니까요.
삼독이 없으면 戒定慧(계정혜)가 없어요. 삼독을 돌이켜서 계정혜로 바꾸는 것이 회향의 도리입니다.
여기에 三毒을 변화시켜서 계정혜를 만든다.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탐진치 삼독이 있고 번뇌 많고, 嗔心(진심)많고 慾心(욕심)많고 癡心(치심)많으면, 사실은 그거 좋은 거예요. 그것이 아주 좋은 거예요. 부리지만 않으면 좋은 건데, 그걱을 자꾸 부리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부리기전에 잘 요리를 그걸 해가지고 계정혜 三學(삼학)으로 변화시키는 그 작용이 필요하지요.
善知識(선지식)아 我此法門(아차법문)은→ 나의 이 법문은 從一般若(종일반야)하야→ 이 하나의 반야로부터
生八萬四千智慧(생팔만사천지혜)니→ 8만4천 지혜를 내는 것이다. 이 일반야 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 이지요. 깨달음의 지혜. 여기서부터 그 외에 온갖 지혜가, 사람이 겪는 일 마다 지혜가 필요할 것 아닙니까?
그 겪는 일 마다 필요한 지혜가 8만4천 지혜지요. “8만4천 지혜가 난다.”
何以故(하이고)오→ 왜냐?
爲世人(위세인)이 有八萬四千智慧(유팔만사천지혜)일새→ 세인이 8만4천 지혜가 있기 때문 일새.
세인이 8만4천 지혜가 있으니까 8만4천 지혜가 나오는 것이지, 없으면 8만4천 지혜가 나올 수가 없지요.
若無塵勞(약무진로)하면→ 만약에 진로가 없을 것 같으면, 智慧(지혜)가 常現(상현)하야→ 지혜가 항상 나타나서, 不離自性(불리자성)이니→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니, 지혜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 다른데서 굴러온 것도 아니고, 보따리로 싸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자리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自性에서 떠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 투철하게 깨달으신 분은 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빗나가는 일이 없어요. 말씀에 빗나가는 일이 없다고요.
자기 깨달음이 투철하지 못하면, 이야기하다 보면 빗나가는 수가 있는데...
悟此法者(오차법자)는→ 이 법을 깨달은 사람은,
卽是無念, 無億, 無着(즉시무념, 무억, 무착)하야→ 이러한 도리를 깨달은 사람은, 곧 무념이고. 망념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억이라 기억하는. 이것도 쓸데없는 생각을 기억하는 그런 것이 없고, 무착. 집착이 없어서,
不起誑妄(불기광망)하고→ 광망을 일으키지 아니 하고, 광망은 미치거나 잘못된. 미친 것은 옳은 것을 그르다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고, 뒤바꾸어 보는 견해를 誑이라고 합니다. 정상인이 아닌, 정신착란을 가진 사람이라든지 보통 세속에서 말하는 狂人(광인)이라든지 하는 그런 광인을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뒤바뀌게 생각하는 것. 뒤바꾸어 생각하는 그런 생각들을 “誑”이라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광망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用自眞如性(용자진여성)하야→ 자신의 진여성품을 써서, 진여성. 이것이 뭐 自性(자성)이나 佛性(불성)이나 진여성이나 전부 우리 한마음자리. 저 깊은 한마음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여성을 써서, 자성. 자진여성. 똑 같은 뜻이지요.
以智慧觀照(이지혜관조)하야→ 지혜로서 환히 비추어가지고서, 於一切法(어일체법)에→ 일체법에 있어서,
不取不捨(불취불사)니→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지니, 거부 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거기에 껌뻑 넘어가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특별히 취하거나 그러지도 않는다. 이것이 通流(통류)지요. 不取不捨가 통류입니다.
卽是見性(즉시견성), 成佛道(성불도)니라→ 그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니라.
일체법에 불취불사. 참,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는 그저 하루 종일 취사선택 하다가 볼일 다 보죠.
取捨選擇(취사선택). 아 이건 들을만한 이야기다. 뭐 아이고 듣기 싫은 이야기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싫다 뭐...
그 강창익 인가? 모처럼 시원스러운 일을 하나 했더군요. 온 미국에서도 막 그냥 그 사람 후원금이 들어오고 야단이지요. 아 인기가...
그 사람 고집통이라고 하긴 합디다마는, 그 두 김씨들에 대해서 물 먹인 일에 대해서 얼마나 통쾌해 하는지...
그래봐야 뭐 지 혼자 별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수는 없지마는, 모두 좋다고 오늘 신문에도 이만하게 났어요. 곳곳에서 후원금이 막 오고 그냥,
이메일에 편지가 수 천통이 오고, 힘내라고 말이지, 우리가 밀어주겠다고 힘내라고 막 야단이래요.
미국에서도 후원단체가 생겨버렸어요. 엊그저께...
그 사람 밀어줄라고요. 희안하게 그렇게 돌아가는 수가 있더라고요. 그 험한 지금 정치...
재미있는 일을 했어요 어쨌든... 그렇게 고집 있는 사람들이 더러 좀 있어야 되는데...
於一切法(어일체법)에 不取不捨(불취불사)니→ 일체법에 있어서,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지니, 지혜로서 보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어요. 우리는 너무 그냥 취사선택하다가 인생 다 그냥 보내는데...
그 예나 지금이나 뭐 중생들의 살림살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취사선택이지요. 그저 取捨選擇(취사선택).
신심명 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至道無難(지도무난)이라 有嫌揀擇(유혐간택)이니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하리라. 지도무난이예요: “지극한도”라고 하는 것. 깨달음의 도. 불도라고 하는 것. 그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지도무난이 어려움이 없다.
유혐간택이예요.: 간택하는 것만 꺼릴 뿐이다 이겁니다. 간택하는 것만 삼가 하면, 간택하는 일만 없으면 그대로 道이다. 至道(지도)다 이겁니다.
전부 간택아니면 취사거든요. 간택. 취사하는 것. 이것 때문에 도 가 마음에 아니 오지, 이것만 없으면 전부 벌써 도인노릇할 것이다 이겁니다. 至道無難 有嫌揀擇
일체법에 불취불사니 卽是見性(즉시견성)→ 그것이 견성이고, 成佛道(성불도)니라→ 그것이 성불입니다. 성불도라. 참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견성이 뭐냐 하면 여기 선생님들 설명 못하실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
배운 지식 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길게 설명할 겁니다. 성불이 뭐냐? 아 성불은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뜻인데, 부처라고 하는 것은 뭐고, 사전에 뭐 어쩌게나 저쩌게나,
어떤 경전에 뭐 어쩌구 저쩌구 너절하게 그냥 몇 페이지가 너머 갈 겁니다.
一切法(일체법)에 不取不捨(불취불사)하고 以智慧觀照(이지혜관조)하야→ 지혜로서 관조해. 지혜로서 보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어요. 사실은... 취하고 버릴 것이...
그저 아전인수 격으로 모든 사물을, 모든 사건을 판단하다 보니까, 취사할 것이, 버릴 것이 있고, 나쁜 놈이 있고 뭐 좋은 놈이 있고 그렇게 되는데, 지혜로서 그걸 보질 못하고 그저 정으로 보고, 자기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그러다보니까 그렇게 됩니다.
善知識(선지식)아 若欲入甚深法界(약욕입심심법계)와 及般若三昧者(급반야삼매자)인댄→ 만약에 어떤 사람이 심심법계. 매우 깊은 진리의 세계. 그것이 甚深法界지요. 매우 깊은. 심히 깊은 진리의 세계. 그 다음에 반야삼매. 지혜의 삼매. 이것은 지혜의 세계지요.
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고자 할 진댄,
심심법계= 반야삼매. 표현은 다르지만 둘이 아닙니다.
깊은 지혜의 세계나, 반야의 삼매나, 반야삼매에 들어가야 심심법계가 자기 것이 되고, 심심법계에 들어갔다는 소리는 반야삼매를, 지혜를 체득했다는 뜻이 되고 그렇습니다. 거기에 들어갔다고 할 진댄,
須修般若行(수수반야행)하고→ 모름지기 반야행 을 닦고, 持誦金剛經(지송금강경)하야 그랬어요.→ 금강경을 지송해라. 우리가 좀 웃기는 표현을 한다면
“육조스님도 역시 금강경에 집착 하는군”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금강경 때문에 도통을 했으니까 역시 금강경에 집착 한다. 이런 말해도 아마 웃으면서 받아 줄 겁니다.
“육조스님도 금강경 좋아하시는구나. 아니면 집착하는 구나.” 이렇게 하지마는, 육조스님은 빙그레 웃으실 겁니다. ‘내가 금강경을 말 하는 것 하고, 네가 금강경을 말 하는 것 하고.’ 어디 같은 줄 아느냐?’
持誦金剛經(지송금강경)해서→ 금강경을 지송해서,
卽得見性(즉득견성)할지니→ 곧 견성할 것이니, 당신이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
[성철스님은 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 “내라”하고 명령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러더라고요. 머물지 않고 마음이 난다 이겁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머무는데도 많지요. 많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이 어디에 집착한 것이 아니니까요.
어쨌든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는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상상도 못한 정신적인 아주 특수한 체험을 하게 되지요.
알고 보니 그것이 見性(견성)이더라는 말입니다.
卽得見性(즉득견성)이니→ (그런 경험이 있으시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곧 견성할 것이니,
當知此功德(당지차공덕)이 無量無邊(무량무변)이라→ 마땅히 알아라 이 공덕이 무량무변이니라.
자기 성품을 봐 버리면, 거기에서 오는 그 공덕이 무량무변 이다 이겁니다.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요.
달마스님이 처음에 중국에 왔을 때, 양 나라 무제가 “아 내가 말이지 좋은 절도 많이 짓고 스님들도 많이 만들어 가지고, 불교를 이렇게 번창 하게 했는데, 이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라고 물으니까
“所無功德(소무공덕)이다. 공덕이 전혀 없다." 거 좀 공덕이 있다 해주고, 호강도 받고 대접도 받고 그럴 것이지, 양 무제 수준이 그렇지 그러면...
거기다 대고 “없다”라고 뭐 이렇게... 하긴 "없다”라고 한 그 말이 千秋(천추)에 빛을 발하는 것이지요.
달마스님이 거기서 “아 당신 대단하다.”고 “당신 아주 대단하다.”고 그래놓고 뒷방에서 혼자 빙긋이 웃는 것 보다는, 그러고 대접받느니 보다는, "없다”고 하고 쫓겨나는 것이 정말 아주 값진 일을 한 것이지요.
천추에 빛나는 그런 모범을 보인 것이지요.
여기는 성품을, 성품 속에 있는 공덕이야 말로 無量無邊이고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그것은 뭐, 예를 들어서 절을 수억만 채를 짓고, 스님을 수억만 명을 만들었다 손치더라도, 그것 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이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갈무리 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보배는 이것은 뭐 비교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달마스님은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항상 마음을 깨달으신 분이고, 견성성불을 주장하신 분이니까 마음의 도리가 아니고서는, 그까짓 것 복 좀 지어가지고 한 것. 그거 어디 마음 견성하고 비교가 되느냐 이겁니다. 도대체 그건 비교나 게임이 안 되니까, 거기다 늘 관심을 둔 달마스님으로선
“아이고 전혀 공덕이 없어. 그걸 뭐 공덕이라고 그래?
전혀 공덕이 없다.” 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간 거예요.
양무제를 한번 밟아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나간 겁니다. 달마스님의 안목에서 보면 없는 것이지요. 그 까짓 것. 그 뭐 몇 푼어치 된다고...
우리 마음의 세계의 무궁무진한 그런 보물에다 대면...
그래 여기의 이 육조스님도 “이것이 견성이다.” 이겁니다.
자기 성품 속에서 발견한 이 공덕이야 말로 무량무변한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當知此功德(당지차공덕)이 無量無邊(무량무변)이라→ 마땅히 알아라 이 공덕은 무량무변하다.
불교를 이야기해도 이렇게 명쾌하고, 간단명료하면서도 시원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經中(경중)에 分明讚嘆(분명찬탄)하니라→ 경중에 분명히 찬탄했다. 이 금강경의 공덕은...
莫能具說(막능구설)이로다→ 능히 갖추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금강경에 여러 번 나오지요. 금강경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한 그 功德(공덕)은 不可量(불가량) 不可稱(불가칭) 無有邊(무유변) 不可思議(불가사의) 공덕이 있다. 그리고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만한 七寶(칠보)로서 以用布施(이용보시). 보시에 사용 한다 하더라도, 그 공덕보다도 금강경을 수지독송 爲人解說(위인해설) 하는 공덕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아주 심한 경우는, 이 생명을 남을 위해서 수없는 생명을 바쳤다 하더라도... 그 공덕 대단 하지요. 그렇지만 금강경의 공덕하고 비교해서는 또 게임이 안 된다. 고 까지 금강경에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 바로 여기서 밝힌 그거예요.
금강경의 도리는 결국 견성에 있기 때문에, 그 성품 속에서 발견한 그 공덕이야말로 물질로서 보시하고, 이 생명으로서 보시한. 거기에 따르는 공덕도 찬사가 대단 하지요. 대단 하겠지만, 그것 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것은, 결코 허풍도 아니고, 또 이해하기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여기에서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경중에 분명히 찬탄해 말하니라. 莫能具說(막능구설).→ 그것을 어떻게 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가 있겠느냐? 갖추어서 설명할 수가 없도다.
此法門(차법문)은 是最上乘(시최상승)이니→ 이 법문은 최상승이야 가장 높은 가르침이니, 금강경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금강경을 지송하라고 해놓고는요. 최상승이니 爲大智人說(위대지인설)이라 거기에 그런 말 있지요? 지인을 위해서 설 한 것이다. 爲上根人說(위상근인설)이라 상근인을 위해서 설 한 것이다. 大乘人(대승인)을 위해서 설 한 것이다. 小根小智人(소근소지인)이 聞(문)하면 心卽狂亂(심즉광란)하여, 狐疑不信(호의불신)할 것이다 그런 말이 있지요. 마음이 그만 광란을 해 가지고서, 의심하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 내용이 금강경에 있어요.
小根小智人(소근소지인)이 聞(문)하면→ 소근소지인이 금강경의 도리를 들으면 心生不信(심생불신)하나니→ 마음에 불신을 낸다. 금강경에는 심즉광란하여, 호의불신할 것이다 그랬지요. 何以故(하이고)오→ 왜냐?
譬如天龍(비여천룡)이→ 비유컨대 하늘에 있는 용이,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 이 당시 사람들의 상식에 맞추어서 하는 비유예요.
下雨於閻浮提(하우어염부제)하면→ 염부제란 육지라는 뜻 이예요. 육지에다가 비를 잔뜩 쏟아 붓는다 이겁니다. 그러면, 城邑聚落(성읍취락)이→ 마을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皆悉漂流(개실표류)라→ 그러면 둥둥 떠가지요.
우리나라도 일 년에 한 번씩 그런 구경 안 합니까?
완전히 그냥 지붕만 남지요. 지붕만 남기도 하고 혹은 집이 떠가기도 하고...
옛날 초가집은 흙으로 쌓아놔 가지고요.
우리는 어릴 때 그런 거 많이 봤어요. 집이 그냥 떠내려가는 거예요. 왜냐? 떠내려가기 좋게 되어 있어요.
나무는 전부 얼기설기 짜 놓았거든요. 그래 그것은 안 흩으러져요. 그런데 벽이라든지는 전부 흙이고 돌이라고요. 물 들어가면 전부 그대로 사르르륵 가라앉아 버려요. 뭐 거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나무는 뜨니까 달랑뜨는 거예요. 흙은 전부 가라앉아 버리고... 물 들어가면 흙은 저절로 녹게 돼있으니까 잘 떠요. 잘 떠내려가 아주... 그러니까 성읍취락이 개실표류 라는 말이 그냥 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떠서 흘러가는 거예요. 그것이 마치
如漂棗葉(여표조엽)이예요.→ 대추나무 잎을 따서 물에다 확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마치 대추나무 잎이 물에 둥둥둥 떠내려가는 것 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지요.
사실 그래요. 큰 물이졌을 때, 예를 들어서 장강 같은데. 양자강 같은데나 황하강 같은데 큰 물 져가지고 조그만 집들 떠내려가는 것 아마, 그 광경이 그대로일 거예요. 이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거니와 그런데
若雨大海(약우대해)하면→ 육지에 비가 내리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만, 만약에 바다에 비가 내릴 것 같으면, 不增不減(부증불감)이예요.→ 이거 뭐 얼마가 왔는지...
不增不減이니 若大乘人(약대승인)과 若最上乘人(약최상승인)이→ 근기가 수승한 사람 이예요. 큰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대승인 이예요. 또 최상승인도 역시... 말이 좀 달라서 그렇지 가장 높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근기의 사람이,
聞說金剛經(문설금강경)하면→ 금강경 설 하는 것을 들을 것 같으면,
心開悟解(심개오해)라→ 마음이 개오.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열리고 悟解한다.
깨달아서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육조스님은 정말, 타고나기를 참 잘 타고 났어요.
자기의 일생에는 참 불우한 삶을 청년시절 까지는 살았지만, 일자무식꾼으로서 생계유지도 안 돼 가지고 겨우겨우 살다시피 그렇게 했지만, 타고난 그 심성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까, 금강경 한 구절 듣고는 그냥 그대로 마음이 열려 버렸지요.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당신의 그 과거의 그 경험이 그냥 그대로 되 살아 날 꺼예요.
故知本性(고지본성)에 自有般若之智(자유반야지지)니→ 그러므로 알아라. 본성에 스스로 반야의 지가 있으니,
自用智慧(자용지혜)하야→ 스스로 지혜를 써서,
常觀照故(상관조고)로→ 항상 관조하는 까닭으로,
不假文字(불가문자)니라→ 문자를 빌리지 않는다. 문자가 필요 없다 이것이지요. 결국은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잘 이해하고, 마음을 잘 깨달아서 그 깨달은 대로 지혜롭게 살자고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외에 뭐 문자 많이 알자고 하는 것. 그것은 아니다 이겁니다.
자용지혜. 자유반야지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 반야지지. 그걸 가지고 스스로 잘 써요. 상관조.
지혜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지혜로서 모든 것을 척척척척 분별해내요. 나에게 좋은 소리가 들리는지 안 좋은 소리가 들리는지, 내 팔짜가 기구하던지 어쨌든 간에, 그것을 지혜로서 환히 꿰뚫어 볼 것 같으면, 남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요. 문자를 빌릴게 아니니라.
譬如雨水(비여우수)가→ 비유하건데, 빗물이
不從天有(부종천유)라→하늘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元是龍能興致(원시용능흥치)니→ 원래용이 능히 일으킨 것이다. 구름이 일어나가지고서 구름이 많이 모여가지고 결국은 비가 되는 그것을 용 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용이 능히 흥치한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상식수준으로 하는 소리지요.
令一切衆生(영일체중생)과 一切草木(일체초목)으로 그리고 有情無情(유정무정)→ 유정물이라든지 무정물이든지 이런 것들이,
悉皆蒙潤(실개몽윤)하며→ 전부 비가 올 것 같으면 그 비에 젖고, 비의 혜택을 입게 되지요. 그래서
百川衆流(백천중류)가 却入大海(각입대해)하야→ 이 골짝 물 저 골짝 물. 이 강물 저 강물이 전부 큰 바다로 다 들어가서,
合爲一體(합위일체)인달하야→ 합해서 하나의 덩어리가 바닷물이 된다. 하나의 바다가 되듯이,
衆生本性(중생본성)의 般若之智(반야지지)도→ 중생본성 가운데 있는
반야지지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니라→ 또한 다시 그와 같다. 일체 여러 가지 지식과 일체 여러 가지 알음알이 이런 것들이 전부 깨닫고 나면, 전부 하나의 큰 깨달음의 지혜에 전부 귀속이 된다.
善知識(선지식)아 小根之人(소근지인)이→ 근기가 작은 사람이, 聞此頓敎(문차돈교)하면→ 이 돈교를 들을 것 같으면, 돈교는 반야경. 금강경의 도리입니다.
금강경의 도리를 돈교 라고 그러고, 또 육조스님의 심중에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것인가 하니, “번뇌가 곧 보리다.” “범부가 그대로 부처다.” 이것보다 더 빠른 가르침은 없지요. 그 보다 더 한꺼번에 되는 가르침은 없어요.
돈교라고 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닦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되는 것. 단박에 되는 가르침을 돈교라고 합니다. 보통 小乘敎(소승교). 大乘始敎(대승시교). 大乘終敎(대승종교). 大乘頓敎(대승돈교). 一乘圓敎(일승원교). 이런 차원의 돈교가 아니에요. 여기서는...
그냥 단박에 되는 것. 漸敎(점교)의 반대말을 頓敎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될 돈자거든요. 뭐 “몰록 돈” 그러는데 한꺼번에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번뇌가 곧 보리다 이겁니다. 생사가 곧 열반이거든요.
범부가 그대로 곧 부처다 이겁니다. 이것보다 더 속전속결이 없지요. 돈교는 속전속결입니다.
그냥 당장에 되는 거예요. 당장에... 그러니,
小根 근기가 작은 사람들이, 聞此頓敎(문차돈교)하면→ 이 돈교법문을 들을 것 같으면 좀 곤란하지요. 감당을 못하지요.
猶如草木(유여초목)의 根性小者(근성소자)가→ 비유컨대, 뿌리가 작은 초목이,
若被大雨(약피대우)하면→ 큰 비를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요? 넘어져버리지요.
悉皆自到(실개자도)하야→ 전부 다 넘어져가지고서,
不能增長(불능증장)이라→ 뿌리가 다 뽑혀버려...
작은 나무에는 비가 적당이 와야지, 많이 와 버리면 그냥 씻겨 내려가 버려요 그냥...
씻겨 내려가 버리고, 넘어져 버리고 오히려 죽어버린다 이것이지요. 불능증장이라. 증장 하지 못 하듯이,
小根之人(소근지인)도→ 근기가 작은 사람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나니→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元有般若之智(원유반야지지)는→ 원래 가지고 있는 반야의 지혜는,
與大智人(여대지인)으로→ 큰 지혜인과 더불어서
更無差別(갱무차별)이언만→ 본래 차별이 없건만, 사람에게는 그 차별이 본래 없거든요.
다만 그 그릇이 다를 뿐이지, 근본 마음자리는 똑 같으니까요.
因何聞法(인하문법)하고→ 무엇을 인해서 법을 듣고도
不自開悟(부자개오)오→ 스스로 개오 하지 못하느냐. 왜 못 깨닫느냐 이겁니다.
緣邪見障重(연사견장중)하고→ 삿된 견해의 장애가 무거움을 인연하고,
煩惱根深(번뇌근심)이니→ 번뇌의 뿌리가 깊음을 인연한 것이니, 이유와 緣(연)은 그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문에... 그런 조건으로 삿된 견해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다.
소견이 바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 첫째예요. 소견이 삿되면 제일 문제가 되지요.
猶如大雲(유여대운)이→ 마치 큰 구름이,
覆盖於日(부개어일)에→ 또 비유를 잘 들지요. 비유가 뭐 몇 번 나오지요. 큰 구름이 해를 다 가려버린다 이겁니다. 그래서
不得風吹(부득풍취)면→ 바람이 그 구름을 불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日光(일광)이 不現(불현)이니라→ 태양빛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구름이 덮어버리면 나타나지 않지요.
般若之智(반야지지)도 亦無大小(역무대소)언만→ 반야의 지혜도 또한 대소가 없어요. 사람에게...
작은 사람이라고 작고, 큰 사람이라고 크고, 남자라고 더 크고, 여자라고 더 작고, 이런 것이 없이 똑 같은데,
爲一切衆生(위일체중생)이 自心迷悟(자심미오)가 不同(부동)하여→ 일체중생의 자심의 미오가. 미혹하고 깨달은 것이. 아는 것이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迷心(미심)은 外見(외견)에 修行覓佛(수행멱불)이나→ 미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밖으로 자꾸 찾는 거예요. 밖으로... 수행을 해가지고서 자꾸 밖에서 찾아요. 밖을 보면서 부처를 찾으나,
未悟自性(미오자성)일새 그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자기 속에서 찾아야 되는데 자꾸 밖에서 찾는 겁니다. 너무 밖을 향해서 찾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래서 未悟自性(미오자성)일새→ 자성을 깨닫지 못 함 일새.
是卽小根(시즉소근)이니→ 이것이 곧 작은 근기이니,
若開悟頓敎(약개오돈교)하여→ 만약에 돈교를 개오. 깨달아서
不執外修(불집외수)하고→ 밖으로 수행하는 것. 밖으로 닦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但於自心(단어자심)에→ 다만 자기 마음에서,
常起正見(상기정견)하여→ 항상 정견. 바른 소견을 일으켜서,
煩惱塵勞(번뇌진로), 常不能染(상불능염)하면→ 번뇌와 진로에 항상 물들지 아니하면,
卽是見性(즉시견성)이다→그것이 곧 견성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근본이고, 또 자기 자신이 근본이니 만치, 지혜든 부처든 견성이든 성불이든 전부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경전을, 대승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아함부 경전 같은데도, 그런 말이 사실은 많아요.
많은데 그런 쪽으로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대승경전이고,
일상의 생활에 마음의 관리를 잘 해가지고, 깨달음은 놔두더라도 편안함 이라든지, 깨달은 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물을 觀照(관조)하는. 正觀(정관)하는, 아주 고요히 관조하는 그런 쪽으로 발달 된 것이 남방불교 같은 입장 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요.
아함부 경전 속에서도 그 유명한 법문! 自燈明(자등명). 法燈明(법등명). 얼마나 유명한 말씀입니까.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또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그것은 여기 육조스님 말씀하고 똑 같은 말이지요.
“법등명” 한 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의지
하라” 그 외에 다른 것은
“의지하지 말라.” 라고 해버렸습니다.
“딴 것은 의지하지 말라.”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
리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
고, 그 외에 것은 의지하거나 등불로 삼지 말라.” 이렇게 아주 간곡히, 그 법문을 아주 상당히 많이 하셨어요. 저기 초기경전 같은데도 보면...
불교는 사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간단하다면 간단하지요. 교리가 하도 많이 발달해서 복잡한 것 같지만, 육조스님은 아주 얽히고설킨 교리를, 모르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다행이기도 해요. 또 뭐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명쾌하게 하실 분이지마는...
아주 더욱 다른 것은, 선사들의 도인들의 가르침보다도 더욱 아주 명쾌하게 우리마음. 心性에다가 중심을 두고 이렇게 설명해가니까 가닥잡기가 너무 아주 쉽게 되어있어요. 가닥을 잡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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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