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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스크랩 영화(16)-랑페르 L`Enfer(관계와 소통이 단절된 지옥도)
돈키호테 추천 0 조회 95 07.01.04 21: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어로 ‘지옥’이라는 의미를 지닌 영화 <랑페르 L'Enfer>는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옥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작품은 이미 타계한 폴란드의 거장 크르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서 각본으로 써 놓은 「천국」, 「지옥」, 「연옥」
삼부작 중 하나를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이 영화로 완성한 것이다.
특별히 <십계> 연작을 통해 오늘날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한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현대의 지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몰래 자기 알을 갖다놓고, 거기서 제일 먼저 부화한 새끼 뻐꾸기가
다른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일찌감치 ‘운명’이라는 단어에 심오한 초점을 맞춘다.
다른 알을 떨어뜨리다가 자기가 떨어져서 죽을 운명에 처한 새끼 뻐꾸기...
금방 교도소를 나온 한 남자에 의해 안전하게 둥지로 옮겨지지만,
그 놈은 남은 알 하나마저 밖으로 밀어버리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그 남자의 동정어린 행동은 과연 잘 한 일일까?

부인의 오해와 고발로 인해 징역을 살다 나온 이 사람은 끝내 아내의 완강한 거부와
딸들의 외면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오해와 죽음에 대한 상처를 그대로 끌어안은
딸들의 삶은 각각 고립되고 소통이 단절된 채 근근이 이어진다.
영화는 하나 같이 뒤틀리고 왜곡된 관계 안에서 허망하게 생명을 소진하고
네 여인을 통해 지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성(父性)을 거부하고 상실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와 단절된 이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불리던 신, 곧 하느님을 잃어버린 세상의 비극과
기묘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하나 같이 부성을 버렸거나, 그에 대해 무지하거나,
딸 같은 아이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의 부성의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같은 신이 없는 세상’, ‘신과 같은 아버지가 없는 세상’의 자녀들은
고아와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실존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마치 세 자매의 아버지의 묘만 유일하게 비석도 없이 허술하게 팽개쳐져 있듯이,
현대 세계에서 신은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을 만큼 잊혀지고 버려졌다.





드디어 세바스티앙이 진실을 밝힘으로써 세 자매가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 함께 기차에서 마주 앉아있는 장면은
영화가 이제껏 보여준 톤과는 아주 다르게 밝고 쾌활하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기차에서 늘 잠을 자던 셀린느는 이 때 비로소
무의식적인 망각의 세계로부터 깨어나고, 세 자매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웃음꽃이 핀다.
안느의 입을 통해 “함께 있으니까 좋아”라는 말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라 불리는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외쳤던 것과는 정반대의 고백을 하고 있다.
이렇듯 관계가 다시 올바르게 회복된다는 것은 서로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트러지고 왜곡된 관계가 바로 잡힐 때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구원은 곧 지옥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그러나 딸들이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고발한 이유가 오해임을 밝혔을 때,
“난 후회하지 않아!”라는 말로써 단호하게 마침표를 찍는 이 여인의 얼굴은
지옥의 단면도라 할만하다.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빗대어 말하고 있는 신화 ‘메데이아’에 관한 이야기는
남편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 자기 딸들까지 살해한 여성성의 잔혹한 일면을 보여준다.
메데이아, 과연 영웅적인 여인일까?
이 영화가 차용한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과 '우연'이 동전의 양면이듯이
‘영웅’ 또한 '어리석은 자'와 다름이 아니다.
부성을 잃어버린 세계에는 모성 또한 온전히 남아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목에 깁스를 해서 고개를 숙일 수도,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이 여인의 뻣뻣한 모습은
지옥을 살면서도 그것을 천국이라고 우기는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결코 '후회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게 살 수 없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가지고 어떤 평자는 영웅적인 용기로 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임을 우린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더 깊이 머물게 되는 부분은 “본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어머니가 대표하는 현대 세계의 근원적인 죄는 자기가 본 것만을 믿는다는 데에 있다.
이 같은 태도는 안느가 사랑한 노교수 프레데릭이 말한 것처럼
데카르트 이후 세계를 제패한 이성주의, 실증주의, 과학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커다란 눈동자가 그려진 액자가 걸린 소피의 집은 마치도 이러한 신념의 원형처럼 자리 잡고,
남편의 외도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소피의 처참함은
어머니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업보로 작용한다.
소피의 시점에서 남편을 쫓는 카메라의 눈은 관객으로 하여금
훔쳐서라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다.
인간이 자기 눈과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이 세상은 신을 잃어버리고
비극마저 존재할 수 없게 된 세상이다.
비극은 운명과 신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세상은 ‘우연’이라는 간단한 말마디로써 신과 운명의 힘을 물리쳐버린 것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만화경의 이미지는
바로 “본다는 것”의 과대망상적인 의미 확장과 왜곡의 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장치로 쓰인 것이 아닐까?
삼각형의 거울을 통해 단편적인 이미지가 끝없이 재생산되어
대상의 본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문양을 만들어내는 만화경은
자기가 보고 오해한 장면을 세 딸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을 지옥의 이미지로 그려낸 어머니의 눈과 닮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처절한 고독과 불행을 몸세포 하나하나까지 담아낸 엠마누엘 베아르의 연기는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완벽하다.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 101분. 프랑스. 15세 이상 관람가
공식 홈페이지 http://cinecube.egloos.com/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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