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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의 유해가 맨처음 뭍에 오른 이락사
임진왜란(정유재란)
전쟁이 끝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로 옮겨진 곳이 이락사이다. 이락사에 옮겨진 유해는 곧바로 남해 충렬사로 옮겨졌고 석달이 지난 이듬해 장군의 외가가 있는 아산 현충사에 모셔졌다.
이락사가 어느 정도 순국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32년이다.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때로 170년 전의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973년 6월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이락사는 "관음포충무공전몰유허"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비각으로 오르는 초입 계단 오른쪽에 한글로 된 비석이 서 있다. "리충무공전적비"는 단기 4280년(서기 1947)에 남해군민이 힘을 모아 세운 것으로 리홍주가 글을 짓고 리갑성이 글을 썼다.
전적비에서 이락사 비각으로 가는 길은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 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 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조국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락사'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운해'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大星隕海"라. '큰 별이 바다에 잠겼다' 뜻이다. 두 현판은 모두 박정희 전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글과 같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글씨를 써 나갔다.
대부분의 한자 현판은 우에서 좌로 써 나가지만 유달리 박정희 전대통령은 국문을 씀에 있어 한자를 차용한 것 뿐이라는 자주적인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늘 그렇게 써 왔다. 물론 노량에 있는 남해 충렬사의 현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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