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메릴랜드 대학"(University of Maryland)의 "국제개발 및 분쟁관리 연구소"(Center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nd Conflict Management)에서 제공하는 데이타베이스 "위기에 처한 소수민족"(Minorities at Risk: MAR) 프로그램 중,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들"의 내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임. 참고로 덧붙이면, 현재 이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에 관한 정보 가운데 캄보디아의 소수민족으로는 베트남계 주민들에 관한 내용만 올라와 있음.
※ 이 기사에 첨부된 모든 사진은 "크메르의 세계"가 추가한 것임. |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의 상황에 관한 평가
Assessment for Vietnamese in Cambodia
리스크 평가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은 향후 저항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3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1) 상당한 정치적 제한
(2) 캄보디아 정치구조의 유동적 성격
(3) 동족인 이웃국가 베트남의 잠정적인 지원
하지만 이들이 폭동이나 반란을 꾀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분석적 개관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1945년 이후 이민온 이들이 많다. 일부는 1979년 초 베트남의 침공 이후부터 이주해온 반면, 나머지는 이미 수십 년간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이들이다. 베트남계 주민들 대다수는 크메르어를 말할 수 있는 동시에 베트남어도 사용한다. 베트남계 학교 졸업생들은 취업 등에서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이들 베트남계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길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캄보디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주류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의 위상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양국 간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방침 역시 각 정파의 이념적 입장에 따라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베트남 전쟁은 이웃한 캄보디아에 험난한 상황을 남겨주었다. 비록 노로돔 시하누크 공이 이끈 정부가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려 노력했지만, 캄보디아에는 다양한 정파들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이 1970년 론 놀(Lon Nol) 장군 주도의 쿱테타(쿠테타)를 초래했다. 이 쿱테타는 명백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 군사정권은 출발부터 북-베트남 공산군대가 캄보디아 영토 내에 주둔할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했다. 또한 당시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던 40만 이상의 베트남계 주민들 중 12,000명 정도가 이 정권 하의 집단폭력으로 사망했고, 20만명은 베트남 국경을 넘어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1970년 론 놀이 쿱테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베트남계 이웃들에 대한 학살의 광풍이 시작되었다
검문소에서 베트남계 주민을 찾기 위해 수색 중인 경찰 (사진: Larry Burrows, 1970년 4월)
프놈펜의 교회에서 심문을 기다리는 베트남계 주민들 (사진: Larry Burrows, 1970년 4월)
프놈펜의 교회에서 심문을 기다리는 베트남계 주민들 (사진: Larry Burrows, 1970년 4월)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는 특히 미국이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NLF)의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75년 폴 포트가 이끌던 마오이스트 크메르루즈가 캄보디아를 접수했고, 국호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크메르루즈는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을 타켓으로 삼았고, 약 20만명이 사망하거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크메르 족 중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이전 정권들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살해당해, 이 정권 4년 동안에 거의 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켰다. 많은 수의 베트남계 주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새롭게 캄보디아로 이주해오는 신 이민자들도 섞여 있었다. 새로운 국가를 재건하는 데는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숙련된 기술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는 이들을 환영했다.
베트남 군대가 철수한 후, 베트남계 주민들의 위상은 국내 권력투쟁의 역학구도에 종속되었다. 1980년대의 캄보디아는 베트남 하노이 정부를 등에 업은 훈 센 총리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장악하고 있었다(당시의 명칭은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이다). 1991년 10월 UN이 중재한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이 체결되고, 이후 이 협약의 일정에 따라 1993년 총선거가 실시됨으로써 캄보디아 정치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이 평화체제에서 빠져나가, 자신들이 장악한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폭력을 동반한 선거 보이콧 운동을 시도했다. 새로운 연립정부에는 "캄보디아 인민당"(CPP)뿐만 아니라 여타 2개의 정당들도 참여했다. 4년 후 훈 센 총리가 주도한 1997년 쿱테타가 발생하자, 반정부 및 반-베트남 정서가 새롭게 부상했다. 1998년 총선에서도 훈 센의 CPP가 승리했지만, 야권에서는 선거과정에서 벌어진 CPP의 불법성을 문제삼고 나왔다.
캄보디아의 베트남계 주민들은 다양한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인구학적으로 특별히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없다는 이유로 여러 차별에 직면하였다. 도청들(지방정부들)이 베트남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수상가옥의 정박지들에서 이들을 강제로 밀어냄으로써, 주류 민족인 크메르족은 지난 수십 년 간 베트남계 주민들을 거주지에서 쫓아냈다. 수만 명의 베트남계 주민들은 지난 수십 년 간 떤레 삽 호수(톤레삽 호수) 주변의 40여개 수상마을에 거주해왔다.
시엠립 근처의 뗀레 삽 호수에서 수상마을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주민들 모습 (사진: Bob Holz)
베트남계 주민들에 대한 시민권 부여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캄보디아 국적법"은 국외추방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만 보장하면서, 이들이 요구하는 "시민권 부여"는 유보해두고 있다. 최근에 도 행정기관들은 일부 베트남계 주민들이 캄보디아 시민권 서류를 발급받은 직후 공공연히 이들을 추방시켰다. 시민권 발급 자체를 거부당한다는 점에서,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들의 정치, 경제적 권리는 심각한 제한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캄보디아 내에서 여타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와 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경제적 현안으로는,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얻는 문제와,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도청이나 여타 인종 공동체에 의해 몰수되거나 점유당하는 피해가 문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들 주민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행위는 감소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적 이익 실현을 위해 연합회를 구성하거나 군사조직을 구축했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살펴본 시기 동안에 이들이 반란행위를 했다는 보고도 없다. 그리고 베트남계 주민들의 공동체 내에서 폭력투쟁이 있었다는 보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이들 베트남계 주민 공동체가 캄보디아 내에서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현재 다양한 국제적 활동가들이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UN 인권고등판무관실"(UN Human Rights Commission)과 일본 및 베트남 정부가 포함된다. 최근 수년 간 베트남 정부는 이들을 크메르 공동체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외교성명들을 발표했다.
캄보디아 정부와 베트남계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야당들은 종종 이들을 추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또한 이들이 1979년 베트남의 침공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일반 국민들 역시, 이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 해설) 이 문서는 비교적 최근의 상황에 집중되어 역사적으로 크메르인들이 베트남계 주민들에 대해 갖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은 메콩 삼각주 지역의 크메르인 거주지역을 오랜 시간에 걸쳐 잠식해 들어가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고무농장 노동자와 어부로서 캄보디아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당시에는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인들을 공직 등에 우대한 프랑스 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크메르인들은 소외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베트남인들이 진출한 정황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라.
● 바로가기 : "캄보디아 역사 제6-1장 : 프랑스 식민지 (상)"
1970년 론 놀의 쿱테타 직후 발생한 베트남계 주민들에 대한 학살광풍은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계 주민 학살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는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라.
● 바로가기 : "캄보디아 역사 제8-1장 : 캄보디아 내전 (상)"
이러한 상황에서 1978년 12월, "크메르루즈" 정권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이 10만 이상의 대군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란 위성정권을 세웠을 때, 캄보디아인들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헹 삼린과 훈 센이 이끈 이 정권의 80년대 기간 동안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이주해왔는데, 반 PRK 측의 자료에 따르면 7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베트남계 신이주민들 문제는 크메르루즈로 하여금 평화체제에서 빠져나가는 빌미를 제공키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크메르인들과 베트남인들은 상이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캄보디아는 인도문화권에 속했고, 베트남은 중화(중국)문화권에 속했다. 종교적으로도 캄보디아가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소승불교)로 태국이나 버어마와 동일한 종교문화인 데 반해, 베트남은 중국에서 전해진 대승불교였다. 또한 복식과 관습 등이 달라 의외로 이질적 요소들을 많이 내포한다. 크메르 제국 이후 오랜 침체기 동안, 캄보디아가 태국과 베트남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베트남에 대한 반감이 국민 정서 밑바탕에 더욱 심하게 깔려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
참고문헌
1.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90-93.
2. Keesings Record of World Events, 1990-93.
3. Minority Rights Group International, Minorities in Cambodia Report, June 1995.
4. Nexis Library Information, 1990-2003.
5. Phase I, Minorities at Risk, overview compiled by Monty G. Marshall, 07/89.
외부링크
● 베트남계 주민과 관련된 주요사건 일지 (영문)
(참조) 떤레삽 호수 주변의 베트남계 주민들의 일상생활 모습은 다음 2편의 게시물들을 참조하라.
☞ 바로가기 : "[화보집] 톤레샵의 아이들"(본카페 scheme 회원님 촬영 2009-5-19)
☞ 바로가기 : "[화보집] 톤레샵의 사람들"(본카페 scheme 회원님 촬영 2009-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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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트남족을 찾기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썼는데 그 중 한가지가 캄보디아의 음식중에서 민물고기를 잦갈로 담군 것이 있는데 냄새가 고약해서 캄보디안이 아니면 여간 참기 어려운 것이라 그걸 먹여봐서 인상을 쓰거나 하면 즉였다고 하는 얘기도 있더라구요..그 음식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서,,,
뜩뜨러이 엄뻘 아닌지 모르겠네요.... 젖갈 속에 매실열매 비슷한 씨앗 잔뜩 들어간 것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