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관자재보살께서 사리불을 한 번 다시 불러 집중하도록 주위를 환기시킨 다음에 모든 법은 공한 것임을 앞서 설명했는데 그 공한 모습은 이러하다고 설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공한 모습이 바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제법(諸法)은 인식현상(認識現象)이라 했습니다. 우리 인식주관에 인식되어 드러난 것인 제법(諸法)은 그대로 공한 모습인데 구체적으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제법(諸法)은 무엇인가 다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제법(諸法)이란 모든 법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로 일체법(一切法)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체법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불교는 실상(實相)을 살필 때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체라 하면 삼라만상 산하대지 등 일체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기 쉽지만 생문(生門)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 질문한 내용을 보면 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는 부처님께 질문합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그 일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시 인도에서는 일체(一切)라는 말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습니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이라 는 말과도 같은 개념이었고, 당시의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서 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었는데 부처님은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나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잡아함 권 13> 이 말씀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십이처(十二處)란 육근(六根)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을 말합니다. 일체(一切)는 이 십이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체가 우리 인식 주관을 거쳐서 나타난 모습은 공하다 것입니다. 이 일체법(一切法)이 공하다는 것은 앞으로도 나오기에 뒤에 가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리는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인 진리를 중생과 성인이 바라보는 눈이 다릅니다. 중생은 일체를 바라볼 때 오염(汚染)된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오염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바라보든 분별망상(分別妄想)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배우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이 예쁘다-못생겼다, 얼굴을 성형했다-안 했다, 곱다-밉다 등 가지 가지 망상을 일으키며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은 그런 망상이 없이 본다는 것입니다. 분별망상에 의해 보여지는 것은 실체(實體)가 아닙디다. 허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염상(染相)입니다. 이런 분별망상은 연기법(緣起法)에 의하여 전개되어 마침내 고(苦)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 중생은 늘 이렇게 무엇을 집착하고 분별상을 내고 있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들은 모두 공한 것이어서 집착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공상(空相)은 온갖 염상(染相)이 떨어져 나간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공상(空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상(實相)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여(眞如)라 합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절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공한 모습인 순일무잡한 절대의 모습인 진여의 세계[法界]에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는 것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불생불멸(不生不滅) '일체법불생 일체법불멸(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체법 (一切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체법은 우리 인식 주관에 드러난 인식현상인데, 그 드러난 대상의 모습이 실은 일정한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실은 이러한데 중생들은 그 대상이 있는 것이라는 분별망상을 내어 생긴다고도 하고 멸한다고도 하지만 실은 공한 모습에는 그렇다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중생들의 분별망상에서 일어난 현상일 뿐 본질인 공상(空相)에는 즉 진여(眞如)만 드러날 뿐 여여(如如)한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미혹의 세계인 중생계[此岸)에는 생멸이 일어나지만 깨달음의 세계[彼岸]에는 생멸이 없습니다. 중생은 늘 분별망상하여 늘 극단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진여가 드러나는 깨달음의 세계에는 중도(中道)의 세계이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진여는 불생(不生)이므로 무한한 것이며 불멸(不滅)이므로 영원합니다. 2) 불구부정(不垢不淨) 제법(諸法)의 모습은 공상(空相)이라 했습니다. 중생이 제법을 바라보면 늘 분별망상이 일어납니다. '곱다-밉다, 좋다-나쁘다, 더럽다-깨끗하다' 하는 망상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이 똥이 더러울까요? 깨끗할 까요? ㅎㅎㅎ 우리는 이 똥을 보면 더럽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마 깨끗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벌레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똥이 맛있는 먹거리자 집으로 느낍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같은 똥이라도 몸안에 간직하면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몸 밖으로 나오면 더럽다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똥이라는 성품이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작용이 그렇게 느낄 따름입니다. 또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아기똥을 보고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아기똥도 그럴까요? '똥'이라는 법계(法界)를 무명이라는 껍질이 씌워져 더럽느니 깨끗하느니 하는 분별망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무명의 껍질이 벗어진 모습에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의 세계는 망상이 떨어져 나간 본래청정(本來淸淨)입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공양(供養) 초대를 받아 나가고 없는데,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늦게 돌아와서 뒤따라 갔으나, 그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담을 돌아가는데, 한 거지가 담 밑에서 죽을 먹으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를 보니 문둥이었습니다. 발우를 들이대니 그 거지가 죽을 따라 주는데, 이때 공교롭게도 파리 한 마리가 죽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문둥이가 손가락으로 파리를 건지니, 문드러진 손가락이 죽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가섭존자는 말없이 손가락을 건져내고 거지가 보는 앞에서 이 죽을 다 먹었습니다. 한 스님이 신도의 집을 방문했는데, 아기가 오줌을 싸서 바닥에 있는 밥주걱에 묻었습니다. 때가 되어 점심공양을 차려 주는데, 아까 그 주걱으로 밥을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밥생각이 없다고 거짓말하면서 먹지 않고 나왔습니다. 다음날 또 그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감주를 주기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잘 먹었 다고 하례를 하니, 어제 스님이 안 먹고 남기고 간 밥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웩! ㅎㅎㅎ 가섭존자는 분별을 이르키지 않았고 스님은 분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법은 그대로입니다. 법의 본 모습은 공상(空相)이요, 공상이므로 진여가 드러납니다. 여기엔 분별(分別)이 떨어져 나간 불구부정(不垢不淨)인 본래청정(本來淸淨) 그대로입니다. 3) 부증불감(不增不減) 제법(諸法)의 공한 모습에 있어서 세 번째는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분별망상(分別妄想)의 세계입니다. 중생은 제법이 공한 줄 모르고 늘 무엇 인가 있다고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집착 때문에 끊임없이 연기(緣起)가 일어납니 다. 무명(無明)을 인연(因緣)하여 행(行)이 일어나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일어 나고... 그래서 마침내 생사의 고통 속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중생은 분별망상으로 인하여 온갖 차별상을 일으키니 수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없앴다 하기도 하고, 무엇을 보고 깨끗하다 더럽다 분별심을 내는가 하면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합니다. 늘려 보기도 하고 줄여 보기도 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울고 웃는 등 오만상을 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제법이 공한 줄을 안다면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제법이 공한 모습을 철견(徹見)하면 본질인 실체(實體)를 보게 되니 진여(眞如)가 드러납니다. 이 자리는 연기(緣起)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불생불멸인데 어찌 더럽고 깨끗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여여부동(如如不動)한데 어찌 늘어나고 줄어듬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여(眞如)는 영원(永遠)하고 청청(淸淨)하며 원만구족(圓滿具足)합니다. 이상 여섯 가지 제법(諸法)의 공(空)한 모습을 육불연(六不然)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여(眞如)의 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중생은 늘 분별망상으로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여(眞如)의 실상(實相)은 중도상(中道相)을 보이는 것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합장 _()_ |
첫댓글 분망상을 버릴 수 없으니, 그게 문제네요.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망상을 버리면 성인이지요. _()_
12처에 대한 인식이 이제야 일어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 주세요. _()_
감사합니다~잘읽고갑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_()_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은 공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상은 생사를 초월 했고 유무를 초월 하였기에 진리 그 자체로서 진실상 중도상 이겠지요. 공상은 생각되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보여지는 내용 이기에 반야(지혜)의 눈을 뜰때 공상은 볼수 있겠지요.....나무묘법연화경()()()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 육불연은 제법의 실상이지요. 반야의 눈이 열려야 볼 수 있지요. _()_
감사합니다. _()_
모든 것이 분작용으로 파생할 따름입니다. 분이 없으면 고요한 법인데 말이 그렇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_()_
어려운 반야심경을 심열을 다하여 올려놓아 잘보았습니다.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