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및 증보) 크메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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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놀
Lon Nol
론 놀(Lon Nol: 1913.11.13~1985.11.17)은 캄보디아의 정치인이다. 그는 두번이나 캄보디아 총리를 지냈고, 국방부장관을 맡았던 장군 출신이다. 군대를 배경으로 우파의 중진이 된 그는 1970년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의 소련 방문 도중 쿠데타(쿱테타)를 일으켜 공화제 이행을 선언하고, 후에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대통령(재임: 1972~1975)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크메르루즈가 게릴라전을 통하여 캄보디아 전 영토를 장악하자 국외로 탈출했다.
(사진: UPI) 성명서를 낭독하는 론 놀 장군의 모습
1. 생 애
론 놀은 1913년 11월 13일 쁘레이 웨잉(Prey Veng) 도의 화교계-크메르인 가정에서 태어났다.(주1)(주2)(주3) 그는 프랑스적 전통에 따라 교육받았고, 관료가 되길 원했다. 1946년 밧덤벙 도지사를 시작으로, 초대 캄보디아 경찰 총수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군사분야 요직들을 두루 거치게 된다. 1960년에 이르면 그는 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겸직한다. 1966-1967년에는 총리를 지냈다. 또한 1969년에도 두번째로 총리에 취임한다.
론 놀 장군의 사진들
2. 베트남전에의 연루
론 놀과 시소왓 시릭 마딱(Sirik Matak) 왕자는 베트남 공산주의들이 통제하고 있던 캄보디아 동부지방의 상황을 종식시키고, 노로돔 시하누크 통치의 유산인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청산하길 원했다.(주4)
시하누크를 실각시킨 직후 론 놀과 부총리인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왕자는 북-베트남 군대 및 베트콩(Viet Cong)에게 캄보디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적 보급항으로 사용되던 껌뽕 솜 항구도 폐쇄했다. 론 놀의 정부는 친 서방적이고 반 공산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미국은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을 캄보디아 동부지역에서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공중폭격을 해대었다.
얼마 안 있어 새로운 정권에 대항하던 크메르루즈 반군에게 중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시하누크도 캄보디아 국민들이 새로운 정부를 반대하고 신속히 크메르루즈 반군에 가담토록 방송을 통해 부르짖기 시작했다.
(주4) Milton Osborne, Sihanouk, Prince of Light, Prince of Darkness. Silkworm 1994. |
3. 내 전
캄보디아 내전은 론 놀의 충복인 소테나 페르난데스(Sosthene Fernandez: 크메르끄롬-필리핀 혼혈 가계 출신)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크메르국군"(FANK)과, 훗날 점차로 크메르루즈가 전체적 장악력을 갖게 될 "캄보디아 인민민족해방군"(Cambodian People's National Liberation Armed Forces: CPNLAF)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론 놀이 왕정을 폐하고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을 수립한 직후라 특히 농촌지역 민심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지역에서는 시하누크를 지지하는 여론이 강력했다.
시하누크는 베이징에서 망명정부인 "캄푸치아 민족통일왕국정부"(Royal Government of the National Union of Kampuchea: GRUNK)를 수립하고, 그 정치조직으로서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National United Front of Kampuchea: FUNK)을 결성하여, 론 놀에 대항토록 촉구했다. 크메르루즈에게 있어서 시하누크란 존재는 저항활동의 매우 유용한 상징적 존재가 되어주었다. 크메르루즈는 점차로 GRUNK와 FUNK 내 세력을 규합했고, 시하누크에 충성스런 농민들을 반군에 합류시키는 데도 성공적이었다.
국가가 내전 상태에 돌입하자, 론 놀은 미국의 닉슨 행정부에 대해 추가원조를 요청했다. 1970년 11월 18일, 미국의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의회에 대하여 캄보디아에 대한 추가원조 155만 달러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 중 85만 달러가 군사원조였다. 시하누크의 준-비동맹적 외교에 곤란을 겪고있던 미국은, 론 놀 정부에 대해 강력한 협조 의사를 표명했다. 비록 시하누크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으면서도 실제로는 북-베트남 군대(PAVN)와 베트콩(Viet Cong)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 위치한 소위 "호치민루트"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미국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론 놀은 북-베트남 군대는 물론이고 크메르루즈 반군조차 물리치지 못했다. 수많은 지원병들이 자원입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국군은 중무장한 데다 수년간의 전투경험을 가졌던 북-베트남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빠른 시간 내에 전국이 전쟁터로 변해갔고, 경제적 불안정과 난민들의 발생으로 인해, 이제 아무리 많은 액수의 돈으로도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을 지경에 빠지고 만다. 또한 크메르루즈는 중국의 지원에 힘입어 시골지역에서 그 장악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4. 망명생활
(사진: The Honolulu Advertiser 1979-1-6) 론 놀 대통령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직전 망명지인 화와이 자택에서 기자와 대담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그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학살극에 대해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개입해주길 호소했다고 한다.
원래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면서, 크메르공화국 정권은 공산반군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지켜낼 수 없을만큼 군대의 배치가 불가능한 무능정권으로 전락했다. 또한 이 정권은 부정부패 퇴치와 캄보디아 경제를 살리는 데도 실패했다. 그리하여 론 놀의 크메르공화국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다.(주5)
(주5) Milton Osborne, Sihanouk, Prince of Light, Prince of Darkness. Silkworm 1994. |
1975년, 크메르공화국 정부는 오직 프놈펜 인근 지역만을 사수하게 되었다. 마침내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공격해오자 론 놀은 시가지 외곽 둘레로 호신용 모래를 뿌려 적군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결국 1975년 4월 1일 그는 대통령직을 하야해 망명길에 올랐다.
크메르루즈는 이후 그를 처단할 것이라 선언했다. 그의 형제인 론 논(Lon Non), 그리고 롱 보렛(Long Boret)과 시소왓 시릭 마딱 왕자 등 살생부에 등재되지 않은 여타 크메르공화국 관료들은 그대로 조국에 남았다. 그들은 전 정부의 관료들도 살해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에 동참할 수 있다는 크메르루즈 측의 주장을 신뢰했다. 하지만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한 후 이들은 일시에 처형되었다.
론 놀은 최초에 인도네시아로 탈출한 후, 이후 화와이에 정착했다. 그후 1979년에 캘리포니아의 풀러톤(Fullerton)으로 이주했다. 그는 1985년 11월 17일에 사망하여 오렌지카운티의 "로마비스타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참고자료) 론 놀 장군의 아들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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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론 놀 장군의 아들인 론 릿(Lon Rith)이 "크메르공화당"이란 이름의 정당 대표로서 캄보디아 총선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위의 사진은 중국 신화(Xinhua) 통신이 촬영한 것이다. 신화통신의 기자는 "뒤로 젊은 여성들을 대동하고, 사람들을 앞세워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홍콩 액션영화를 상기시켰다"고 조롱조로 보도했는데, 2008년 7월 총선에서 물론 1석도 얻지도 못했고,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위의 사진은 프놈펜 공항 VIP대기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고, 아래의 사진은 공항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동하는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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