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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뒤
글 수필가 김덕호
지난 6월 25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2012년도 유엔 전자정부 평가 시상식에서
세계 193개 국가 중 우리나라가 연속 1위의 영예를 안았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세계 최고의 전자정부 국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이 만든 상품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가운데
국가의 전자행정시스템이기에 더 자랑스럽다.
이 날은 어떤 날인가? 공교롭게도 62년 전 북한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일제 강점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외국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땟거리가 없어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며 죽지 못해 살았다던
선친들의 뼈아픈 이야기를 들을 만큼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가
이제는 부러움을 사고 모델이 되고 있다.
모든 나라가 우리 전자정부를 배우러 오고 그 수출시장 규모도 휴대전화 시장과 맞먹는다는 분석이다.
자동차와 조선, 반도체와 휴대전화, 전자제품과 정보기술처럼
전자정부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효자상품으로서 행정한류를 일으킬 것으로 전망한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62년간 무에서 유를 만든 역동적이고 창의적이며 강인한 우리가 아닌가?
며칠 뒤 7월 2일 한국인이 세계 경제 수장 중 하나가 되었다는 신나는 소식이 이어졌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취임사에서 "세계 가난 극복의 길을
한국에서 찾고 한국의 성공 스토리를 가난 퇴치업무에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을 딛고 세계 7번째로 20-50클럽에 진입하기까지 성장발전과정에서
겪은 조국이 그랬던 것처럼, 조국이 어려운 시절 어린 나이로 미국으로 이민 가서
그 위치에 오른 것은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지나온 긴 세월을 이겨낸
한국인 특유의 유전자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연임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이은 한국인의 자랑이다.
650만명 이상 사상자를 낸 6.25전쟁 휴유증과 보릿고개로 인한 영양결핍증을 앓으면서도
숱한 고난과 역경속에서 묻어난 은근과 끈기, 근면과 성실, 두뇌와 경험의 염색체로
살아남아 62년 후 지금 그 정체성을 여러 분야에서 하나씩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쟁당시 콜롬비아 대통령이었던 오스피나 페레즈의 손자인
마리아노 오스피나 바라야(58)회장이 며칠전 한국전쟁 62주년 기념식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첫마디가 “우리 가족과 우리 조국이 한국의 평화와 자유에 보탬이 된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이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한 건 기적같은 일이다.
한국이 모델이다.”며 초청된 콜롬비아 생존 참전용사 5명과 함께 감격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외국인의 눈도 한국의 62년 전과 후를 비교하면서 기적같은 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아프리카 봉사활동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돼 마음이 뿌듯하다.”
정년 1년 2개월 앞두고 몇 칠전 명예 퇴직한 경북수산진흥과장이
1년간 새마을운동 리더로서 해외봉사활동 차 출발하기 직전 밝힌 소감이다.
공직자로서 평생을 성실하고 원칙주의에 따른 일처리로
존경을 받는 그를 보면 오랜 친구로서 긍지를 느낀다.
다른 한편 눈에 보이는 상품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을 들고
개발도상국을 도우러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피와 땀으로
일구어온 지난 62년 세월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새마을운동이 무엇인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터전에서
교역 규모 1조 달러를 넘겨 세계 9번째 국가로 우뚝 서도록
성장을 일으킨 원동력이 아니었던가?
1970년부터 근면·자조·협동을 기치로 이 운동이 불붙었다.
이에 앞서 이미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같은 내용의 의식개혁,
재건정신교육이 실천되고 있어서 이 운동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그러기에 확산속도가 빨랐다.
친구 일행이 들고 가는 선물이 개발도상국가의 정신·의식을 개혁하여
성장을 돕는 일종의 한류철학이라고 본다면 이 또한 한국의 선한 이미지를 심고
아울러 교역·교류 확대의 초석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 얼마나 가당한 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한류열풍이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술, 스포츠, 학문, 교육, 종교, 의학, 관광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건
한국인 유전자의 활성과 더불어 내공이 62년간 그만큼 쌓여 있다는 것이 아닐까?
62년전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해방 후 북한은 일사불란하게 김일성 공산당 독재 하에
5년간 전쟁준비에 혈안이 되어있는 사이 남한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에 들떠 있었고
방종에 가까우리만큼 규범과 질서가 없었다.
지도자들은 정쟁과 헤게모니 싸움으로 군사력도 경제력도 갖추지 못했었다.
정확지는 않지만 대략 62년 전에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 등
전체의 규모가 남한에 비해 2배 이상이었다고들 추측한다.
남한을 우습게보고 흡수시키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기에 1950년 6월 25일 모내기철, 병력도 민간인도 마음 놓고 있던
일요일 이른 새벽, 헐렁한 틈을 타서 남침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북한 공식통계는 예나 지금이나 국제사회에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간접적인 자료들을 모아 우리나라 통계청이 ‘북한의 주요통계지표’를 발표한 바 있다.
62년이 지난 지금은 국력이 곧 경제력으로 평가되는 시대로 바뀌었다.
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인구는 남한이 북한보다 갑절정도 많다.
인구가 5000만명은 넘어야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관관계에서 이상적인 효과를 준다고 한다.
남북의 경제 규모는 매우 큰 차이가 난다.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이 북한보다 20배,
무역총액은 215배, 자동차 생산은 1068배, 원유도입량은 250배, 발전전력량은 20배가량이나 많다.
실제로는 이보다 격차가 더 벌어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동안 많은 희생을 요하고 피땀을 흘려야 했다.
얼마 전 배가 고파 탈북했다는 17세 북한 보통집안의 소년이 영양결핍으로
137cm(남한 평균 173cm)의 신장에 30kg(남한 평균 67kg) 약간 넘는 체중이 말해준다.
군사력에서 병력 단순 머리 숫자는 남한이 북한에 비해
⅔정도이지만 남한이 평균 체중과 체력에서 월등히 앞선다.
또한 현대전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보력, 기술력, 최신무기 보유에 따라 승패를 판가름한다.
이에 대해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해 본다면 자명한 일이다.
사실 1953년 휴전이후 우든 좌든 모든 국민이 화합하여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고 질서유지에 온 힘을 쓴다고는 했어도
이념적 갈등과 정쟁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1950년대를 보낼 때까지는 최빈국이었다.
1960년대 들어설 때는 이미 구호물자가 줄어들면서 경제적 자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다행히 피난살이가 힘들고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근면 성실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와 수출 드라이브정책을 펼치고 높은 교육열을 갖고
선진국 자유민주주의의 도래를 꿈꾸면서 어려움을 견뎌냈다.
특히 과학․기술교육이 가져다준 합리적․실용적 가치관으로
1960년대 이후 경제 기적이 가능케 된 밑거름이 되었다. 개발과정에서 희생도 따랐다.
대표적인 희생은 월남참전과 독일로의 광부와 간호사의 인력수출이었다.
지도자의 결단과 국민의 일체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사례였다.
1966년 동양에서 잘나가던 필리핀의 지도자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남한의 지도자와 동석한 자리인 월남참전 정상회담에서
지도자의 순간적인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필리핀 지도자는 6.25참전으로 남한에 크게 베풀었다고 여긴
나머지 남한의 자도자를 앝잡아 본데다 월남참전에 소극적이었으나
우리 지도자는 적극적으로 재건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반전(反戰)의 명분도 컸지만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국군의 현대화와 외화획득의 기회를 얻기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64년 서독 함보른 광산에서 위로차 서독을 방문한
우리 대통령 내외와 광부, 간호사 등이 얼싸안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
좀 더 참고 고생하자”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실린
어느 잡지가 이때의 설움과 상황을 잘 말해준다.
경제개발 추진할 돈이 없어서 오죽하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무려 2만명의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의 아픔을 경험한 광부출신들의 모임인
재독한인글뤽아우프 회원들의 얘기가 심금을 울린다.
건설분야를 예로 들어본다.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는 지상 160층에 828m 높이로
삼성물산이 건축한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 빌딩이다.
세계기록을 세운 우리의 건축기술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6월 27일 현재 해외건설 누적 수주액이 5015달러를 기록했다는
보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한국 건설업 해외진출 47년 만에 이룬 금자탑이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사의 중동, 아프리카 지역, 특히 총알이 빗발치는 지역이라도
일감이 있으면 목숨을 내놓고 달려가는 우리 선배들의 피와 땀방울이
1970~1980년대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었다.
또한 2차 석유파동(1979년) 후유증을 겪던 1981~1984년, 4년 동안
우리나라 원유수입 대금의 36%를 ‘중동달러’로 메울 정도로
경제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도 중동의 진출 때문이었다.
바로 6.25의 참상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죽기 살기로 산업화를 이끈
6080의 역군들이 없었으면 어디 가능했겠는가?
최근 교역 다양화를 위해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다가 밀림에서
사고를 당한 고급두뇌들의 희생도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일인가? 달라지지 않은 것은 60년간 일시 중단된 전쟁이요
그로 인한 남북의 분단이 우리에겐 크나큰 아픔이지만
미국의 남북전쟁이 미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듯이 한국도 6.25를 통해
전화위복이 되고 빠른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62년 전후의 통계 비교를 통해보면 높은 긍지를 가질 만하나 이제부터 더 큰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참전국들에게 진 빚과 국제사회에 국격이 갖는 위치에 걸 맞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였던 외국 용사들이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며 싸운 사실을 시간이 흘러도 잊어서는 안된다.
종북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꾸며 댄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전쟁 후
세대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62년후인 지금도 아직 여러 곳에서 보인다.
6.25 참전국이었으면서도 빈국인 아프리카 국가들과 남미의 콜롬비아를
순차적으로 방문하면서 우리나라 대통령이 파병국 대통령에게 늦었지만
62년 만에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하고 두고두고 사랑의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춘 셈이다.
이기려면 철저히 대비해야한다. 따라서 강해져야 한다.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는 전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강국이 될 때 희생자들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정신자세가 승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6.25 발발시와 같은 기강헤이와 오판의 실수는 다시 안하겠다는 각오와
'죽을 각오로 임하면 반드시 산다'는 의미를 되새길 때이다.
전후세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
역사왜곡 세력이 발 못 붙이도록 밥상머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25를 앞두고 청계천광장 앞에서 참전용사 250명과 초중고대학생
500명이 세대간 우정을 나누면서 고마움을 표시한 ‘세대공감 79데이’같은 행사가 좋은 예이다.
전쟁을 겪은 선배들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북한 인민군들이
얼마나 잔학했는지를 무덤에 가서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토해낸다.
어느 신문코너에 났던 말이 기억난다.
남한사회 여러분야에 깊이 들어와 있는 종북 주사파 인사들에 대한 우시개이다.
"1년 내내 밤낮으로 반미를 외치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자녀는 미국에 유학시킨다.
미제 담배를 피우고 미제 영양제를 먹고 영어 회화반에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다.
북한이 그렇게 좋고 떠받들 만 하다면 왜 독특한 쇄국문화와
3대 세습 대가족제도의 학습을 위해 북한에 유학을 보내지 않는지 모르겠다.
기절초풍할까봐 그런가?"라고 꼬집는 말이리라.
82세의 참전용사 미국 쌍둥이 베조스카 형제가 62주년 행사에서
“냄새나고 더럽고 폐허였던 서울이 이렇게 발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그들의 소감에도 귀를 막고있는 모양이다.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채 휴전중이다.
62년전의 미련을 갖고 북한이 호시탐탐 적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범하게 민간교류를 통해 북한과 동반하여
경제자립을 도와주면서 통일비용을 모아 나가야 한다.
때마침 북한 김정은 체제가 경제개혁에 눈을 돌리려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남북의 격차가 좁혀질수록 서로에게 유익하기에 북한의 개혁을 적극 도와야 한다.
이제 전쟁의 아픔도 우리의 자산이고 미래 세대에 더 큰 자산으로 승화시켜나가야 한다.
“우리도 한국처럼 잘 살고 싶어요.”
우간다 공무원 사무엘 이투가 그의 일행과 함께 성주 참외마을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견학을 끝내고 한 말이다.
62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이제는 통 큰 한국인으로서 공생을 위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져야 할 때다.
첫댓글 읽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좋은 글입니다.
62년 전과 현재를 잘 비교해 놓으셨군요.
마음에 와 닿는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건필하십시오. 범선.
제가10살때 동네언니가 간호사로 독일에 돈벌러 간다고 했을때
여러분들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전쟁과 가난한 나라를 위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커서야 알았지요. 이렇게 여러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내나라가 더 견고한 나라가 되기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지에서 흘리신 눈물과 가슴 아픔을 잊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