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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꼭 버려야 할 한국인의 악습, 반드시 배워야 할 정신.
chapter1 <글:한영민>
요즘 별 할일없는 영국 샐퍼드 대학의 트레버 콕스 교수가 무려 1년 동안 실시한 '가장 기분 나쁜 소리'를 뽑는 온라인 투표에서 구토 소리가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지난 주에 읽었다.
구토소리 물론 기분 좋은 소리일 리가 없다. 그러나 아마 한국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그리 낯설고 역겹지 만은 아닐 것이라는 묘한 믿음이 생긴다. 왜 그럴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불쾌한 소리로 지목한 구토소리가 한국인에게는 그리 역겨운 소리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왜 나올까? 아마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익히 들어 오던 소리라 그런 것은 아닐까? 그 외에 이를 가는 소리나 손톱으로 칠판 끍는 소리라던가 하는 소리들이 다음 순위를 차지 하였고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제일 싫다는 의견도 순위안에 들어있다고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다투는 소리가 싫다고 응답한 비율이 점점 커진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호주 사람들이 그 소리를 싫어한다는 소리가 많다. 한국인들이 그 설문조사에 얼만큼 참여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극소수가 참여했을 것이다.
과연 한국인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무엇일까?
아내의 잔소리? 상사의 꾸지람 소리?...
그럼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가장 자주 듣는 기분나쁜 소리는 무엇일까?
너무나 자명한 답이 나오지 않을 까?
싸우는 소리, 다투는 소리. 아마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이 다투는 소리가 가장 싫고 가장 자주 듣는 소리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만큼 우리 한국인은 다툼에 익숙해 있다. 어릴때부터 '밖에서 맞고 다니지 말고 차라리 때리고 와라 치료비 물어 줄테니' 하는 호전적인 부모밑에서 자란 한국인들이라 싸움에는 결코 양보가 없다.
일단 작은 의견 차이라도 생기면 심각한 싸움으로 흔히 발전하는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밖에 나와서 외국인들과 살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호전적이고 거칠게 살고 있는지 쉽게 느낄수 있다. 외국인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도 지나다 얼굴을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 상대에게 호의를 보이지만 한국인의 경우 미소를 지으면 의아해 하면 " 당신 나 알어" 하고 묻기 일수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거부감이 하늘을 찌른다. 외국인 학교의 선생님들의 의견 역시 한국학생들이 다른 얘들과 자주 싸워 골치가 아프다고 토로한다. 역사적으로 외침을 3000번이나 받으며 살아온 한겨례의 슬픈 역사에서 기인한 성품인지 원래 한민족의 품성이 호전적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교육수준에 비해 가장 토론이나 의견 조정에 미숙한 민족은 그 첫 손으로 한국인이 꼽힐 수 있을 게다.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토론문화에 대한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는 것은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획일화된 학교 교육에 기안할 것이다. 주입식 획일화 교육은 토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토론 방식에 대한 교육이 있었겠는가?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말은 이래서 또 다시 증명된다.
지난 달 푸미흥에서 한국인끼리 축구경기를 마치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의견다툼이 벌어져 대판싸움이 나고 그 결과 맞은 친구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식당주인에게 칼을 휘둘어 그만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정말 슬픈 일이다. 같은 동포끼리 이국에서 어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 다툼의 시작이라는 것이 바로 단순한 의견의 차이에서 시작되어 감정이 생기면서 말의 어감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일이라니 참, 한국인의 다혈질 성격과 한국어의 현란한 표현능력을 탓해야 하는 건지...
워낙 한국어에는 다양한 존칭 표현이 있는지라 의견다툼으로 감정이 앞서가며 어투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대뜸 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특히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간의 다툼은 더욱 그렇다. 말에 감정이 실리면 그때부터는 논쟁의 주제는 사라지고 느닷없는 예의문제가 대두된다. '어린놈이 그런 소리를 하면 되느냐, 어떻게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 넌 원래 싸가지가 없었다' 는 등 원 대화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신공격성 다툼이 시작된다. 그리고 소리가 커지고 급기야....
우리가 꼭 버려야 할 악습이 미숙한 토론문화에서 나온 억지, 내 의견을 알리기 위해 남의 의견을 무시하며 목청 컷 악쓰는 습성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정신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예는 언젠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다. 똘레랑스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 이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 사상, 상대방의 이념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렇게 남을 인정하는 목적이 바로 나를 인정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남을 인정해야 내가 인정받는다는 평등의 원리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런 정신은 서양문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최고의 석학 공자는 논어에서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라 했다.
군자는 화목하며 동일함을 취하지 않고 소인은 동일함에도 화합하지 못한다.라고 직역을 할 수 있는말인데 이말에 대하여 성공회대학교의 신영복교수는 '군자는 공존하며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고 공존하지 못한다.' 라고 확실한 뜻을 밝혔다. 즉 여기서 말하는 和란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로 공존과 평화의 원리라고 말했고 同이란 그 반대의 뜻으로 타자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고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어떠하시가? 이 말이 그럴 뜻하지 아니한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소인의 마음이 한국인이 버려야 할 악습이고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여 화합을 이루는 군자의 정신이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상생의 문화다.
원래 공자님의 말씀은 잘따르는 한국인이 아니던가? 공자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믿고 따라도 된다.
아예 이 기회를 통해 대화, 토론, 그리고 논쟁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공부좀 해보자.
먼저 제발 남의 말 좀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남의 발언 도중에 자신의 의견과 다른 말 만 나오면 중간을 짤라먹고 무조건 반박부터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끝까지 경청하라. 그리고 자신이 말하고 싶다면 상대에게 다 발언했는지를 빈정대지 말고 물어라. 그 후 자신의 의견을 말하라.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얘기를 상대가 들어주리라 기대하지 말라.
둘째, 상대의 의견을 틀렸다고 부정하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아무도 남의 의견이나 발언을 틀렸다고 말할 수있는 권리는 없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 비방이라 할지라도 그말이 틀려다고 말하기 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라.
다른 것과 틀린 것은 천양지 차이다. 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남의 말에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다. 일단, 틀렸다는 부정의 단어가 나오는 순간, 논리가 무너지고 감정이 앞선다.
셋째, 감정을 말로 전하라.
대화 중 감정이 앞설 때, 분노가 치밀면 소리를 지르지 말고 당신의 그런 말이 나에게 분노를 느끼게 한다고 자신의 느낌을 말로 전해줘라.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경지인데 일단 해보라. 스스로 차분해지는 것을 느껴지고 또 성숙한 감정 처리가 가능하다.
네째, 대화상대를 잘 골라라.
기본적인 훈련이 안된 상대와는 진정한 대화 커녕 간단한 의견 교환도 불가하다. 대화가 가능한 친구인지를 먼저 확인한 후 논쟁을 펼쳐라. 가장 기피해야 할 상대는 오만과 편견으로 뭉쳐진 완고한 고집쟁이다. 특히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보편적 지식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경험외에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자말을 또 한번 인용하면 학즉불고(學則否固)라 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아집에 쌓인 덜배운 사람은 타협과 양보에 익숙치 않다. 배운사람 즉, 마음이 열린 사람을 대화상대로 구하라.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새로운 지식과 변화를 받아드릴 준비가 된 사람이 마음이 열린 사람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에도 모자란 인생이다.
마지막으로 남을 설득 시킬 것을 꿈도 꾸지 말라.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활을 끝내라. 남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건 아니건 관여하지 말라. 그건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두어라. 자신이 남의 의견에 대한 동의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듯이 그들에게도 그런 권리를 주어야 한다. 나의 지혜로운 의견을 왜 수락하지 않느냐고 열내지 말라는 소리다. 자신의 지혜로움을 뽑내려하지 말라. 어리석음이 지혜보다 앞선 덕목이다. 자신이 아는게 얼마나 초라한가를 깨닫는 사람이 바로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헛된 일 중에 하나가 자신의 지혜로 남을 바꾸려 하는 일이다. 설득을 원하다면 그대의 말에 지혜를 담지 말고 진실을 담아라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저런 상투적인 방법론을 다 강구해도 사실 한국인의 고착된 악습을 버리는데 별로 효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정말 이 기회를 통해 간절히 우리 한국인에게 고하고 싶은 말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소리다. 그리고 그 다름에 실망하지 말라. 타인이 나와 모습도, 정신도, 교육도, 환경도 다 다르듯이 생각과 의견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제발 인정하고 무시하려 들지말라. 같은 한국인이라고 생각마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인이다. 외국인도, 같은 동포도, 친구도, 가족도, 마누라 조차 다 당신과 다를 수 있는 타인이자 각자 자신 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독립된 생명체이다.
다른 이의 개성을 무시하면 그대의 빛나는 개성도 역시 인정받지 못함을 왜 모르시는 가?
이런 간단한 정신이 부족하여 같은 동포끼리 서로 목숨마저 앗아가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누구의 탓인가? 남의 탓이 아니다. 다 우리의 잘못이다.
고질적인 악습을 지니고 사는 우리, 당신과 나의 잘못이다.
chapter2
베트남은 참 변화가 없는 곳이다. 베트남은 한국과 같이 뚜렷히 구분되는 사계가 없으니 계절의 변화를 못느낀다. 이는 곧, 시간의 변화에 둔감해 진다는 뜻도 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 어느새 겨울이 된거야, 어! 어느새 해가 바뀌고 있는 거여, 하며 항상 변화가 일어난 후에야 뒤늦은 인지를 하게된다. 어째 되었든 해가 바꿨다. 그래도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한 곳이 이곳이다.
매번 새해가 돌아올 때 마다 격는 변화의 하나는 일단 숫자다. 작년의 숫자 2006이 제대로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 새로운 숫자 2007이 나왔다. 그리고 또 숫자에 불과하다는 나이도 반갑지 않은 불청객 처럼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남은 시간을 얼마간 밀어냈다. 그래 어째든 관념에 불과한 숫자라도 바뀌었으니 바뀐가 보다 싶다.
그러나 올해 베트남의 생활에서 다가올 변화는 이렇게 연례적인 정도의 강도로는 물러갈 것 같지 않다.
베트남이 WTO에 가입하고 나서 세계 각국에서 투자자가 러쉬를 이룰 것으로 예상되고 한국에서도 역시 수많은 관광객과 새로운 투자자들이 밀려들어 올 것 이다. 5만을 헤아린다는 교민사회가 2년안에 배로 증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공감을 얻고 있다. 그야말로 급변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세계각국에서 투자자들이 몰려와 번뜻한 공장을 세우고 인력을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당장 인력난이 시작될 것이고 한국의 교민들이 밀려오면 교민사회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로 시끄러워지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대 교민 사업이 등장할 것이다. 베트남에 한국인의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다.
그동안 저임금에 의존하며 남의 오다를 만들어 주던 단순 노동 집약적 사업의 퇴조가 예상되고 새로운 물결을 이끌어 나갈 건설과 IT분야 그리고 시비스 사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빤한 상황이다. 이제 경쟁력을 잃은 기업은 자리를 내주어야 하고, 각종 제약이 풀린 새로운 시장에 뛰어든 우수한 기업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칠 것이다.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깡통을 찰 것인가?
세상 만사의 흐름을 본다면 모든 역사는 변화와 대응으로 점철 되어 왔다. 변화를 앞서서 준비하는 자는 발전을 해왔고 변화에 둔감한 자는 사라져 갔다.
모든 생물에게 변화란 바로 생명과 같은 의미를 담고있다. 살아 숨쉬는 시간동안 세상만사는 끊임없이 변한다. 즉 시간이 흐르는 한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아인쉬타인이 말한 절대 속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 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할 방법도 없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절대 상수인 빛의 속도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다고 한다 )
돌처럼 무생물 조차 시간이 지나면 바람과 비에 젖고 깍이고 깨어져가며 변해간다. 아인쉬타인이 절대 상수라고 규정한 빛의 속도조차 변화된다는 이론이 나올 지경이니 세상에는 정말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에게 변화는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의 정보화 시대에서의 변화는 그야말로 숨가쁘게 진행된다. 농경사회에서의 120년의 변화를 지금의 지식 정보화시대에서는 단 5분만에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시대에서도 가장 눈에 뛰게 발전을 거듭하는 신흥 국가 베트남의 중심에서 그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를 디디고 서있다. 어찌보면 다시 없는 행운 기회가 온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삼척 동자도 알고 있듯이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변화는 죽움의 서곡일 뿐이다.
그래 베트남이 변한다는 것은 안다. 경제 상황도 바뀌서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힘겨운 상황에 부딪치게 될 것을 알지만 어떻게 변하란 말인가?
이런 당신의 질문에 적합한 답변을 해줄 사람은 당신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짜피 카멜레온처럼 몸의 색깔이 주위환경에 맞게 자동으로 변화되는 기능과 눈이 360도로 돌아가는 첨단의 기능을 갖고 있지 못한 인간에게는 변화에 대한 대응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쉼없이 노력하고 준비하는 자 만이 살아남는 정글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신의 운명이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미래 학자 엘빈 토플러는 인간을”지식정보사회에서 새로운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속도를 기준으로 '빠른 자(The Faster)''와 '느린 자(The Slow)'로 구분해, 환경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자는 살아 남을 수 있고, 느린 자는 도태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국가와 기업에 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라며 변화의 대응을 삶의 근간으로 발전시켜놓았다.
세상의 변화를 대응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외면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내면적인 방법이다.
외면적인 방법이란 바로 변화에 대응하는 물적 요소를 구비하는 것이다. 즉 자금을 끌어들여 경쟁력을 높히고 종업원의 교육을 강화하여 생산성을 높힌다는 등의 준비가 바로 외면적인 대응 방안이다.그러나 이러한 외면적인 방법은 한시도 쉬지 않고 또박또박 지속되는 변화를 일일히 대응하기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의지나 예상과 다른 또 다른 변화가 생겨날 때는 아무리 준비되어도 충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근복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아무 쉬운 방법이 있다. 내면적인 대응법을 키워라.
즉, 마음을 준비하라. 어떤 변화든지 담대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식과 변화에 순응하는 겸손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 어떠한 변화도 두렵지 않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삼성 개혁의 기치로 내걸은 캠패인 문구,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꿔라]. 이 말은 한마디로 마음을 바꾸라는 말이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이다. 세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깨닫고 자체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 구호로 시작된 삼성의 변화는 불과 십년만에 삼성을 일약 세계 톱 클라스 회사로 발전시켜 놓았다. 1995년 시중에 불량 삼성 핸드폰이 나돈다는 소리에 삼성은 당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핸드폰 10만여대를 수거해 그 제품을 생산한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금 세계 최고의 가격과 품질을 자랑하는 삼성 핸드폰은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삼성이 과연 외형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계획에만 매달렸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들은 먼저 마음을 바꾸었다. 마음의 변화를 이룬 후에 외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갔다.
변화를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마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어자피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변화다. 그렇다면 그 변화를 즐겨라.
변화가 당신의 삶을 파괴할 것인지 성장하게 할 것인지는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
chapter3
만약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타인이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그 말에 절대적인 동의를 보낸다.
어느 영화에선가 본기억이 있는데 한 정신병원에는 과거를 잊는 환자가 있다. 지난온 날의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의 현재조차 과거가 되는 순간 곧 잊어 버린다. 만나서 인사를 하고 몇마디를 주고 받다가 돌연듯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다시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 악수를 청한다. 이미 앞에서 인사한 사람은 잊혀진 과거가 되어버리고 또 새로운 형상을 만난 것이다. 완벽하게 현재에만 의지하면 사는 사람이다. 마치 과거 기록을 다 지우고 앞으로도 어떠한 사용 기록을 남겨주지 말라고 입력한 컴퓨터 처럼 항상 새로운 모습만을 만나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이들이 항상 타인이다.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디딜 때, 한국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래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한국인은 말을 안해도 한국인을 발견한다. 그리곤 미소를 보내고 반응이 괜찮으면 다시 정식 인사마저 나눈다. 그저 같은 한국인이라는 공동분모 하나로 생면부지의 인간들이 마치 소식이 없다가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지처럼 미소를 나누는 것이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저 남들이 사는 방법대로 이렇게 따라서 산다. 이것이 내삶인지 아닌지에 대한 심각한 사고는 정신적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다른 이들의 삶을 충실히 닮아간다.
호찌민에 "우리" 한국사람이 무려 5만여명이 살고 하노이에는 5천여명 캄보디아에 3천여명이 산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지나가다 마치 우연히 어깨가 마주친 사람처럼 나하고는 전혀 무관할 뜻한 사람들에게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악수를 나누고 통성명 하지만 돌아서자 마자 언제 그랬냐는듯 또 무표정한 일상으로 그를 다시 “그” 로 보낸다.
만남이 있지만 사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고는 있을 지 모르지만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시 어느 거리에서 만나면 아마도 또 생경한 사람을 만나듯이 어색한 인사를 나눌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많아지는데 만남은 더욱 더 희귀해지고 외로움은 깊어간다. 거의 모든 삶을 '그' 혹은 '그들'과의 만남으로 채워보지만 여전히 나는 그들에게 '그'이고 그들 역시 나에게 '그'이다.
그저 서로 3인칭으로, 타인으로 남아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석자를 불러주는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 나이가 들어가면 더욱 나를 상대로 내 이름 석자를 제대로 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진다.
남들이 나를 타인으로, 3인칭으로 그들의 입방아에 올려놓을 때는 아마도 하나의 명사로서 내 이름 석자가 나올테지만 나를 상대로, 2인칭의 호칭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은 이제 종적을 감추어 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의 성(性)에 사장이라는 일반화된 호칭을 불러주는게 고작이다. 여전히 일반화된 3인칭의 하나로 남아있다.
친구가 왔다. 30여년을 사귄 죽마고우, 그가 내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른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한다. 2인칭으로 불러주는 내 이름에 그동안 잃어 버렸던 내 존재를 다시 찾는 듯하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나는 비로소 내가 된 것이다.
2인칭으로 나는 불러주는 사람은 타인이 아니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라고 함께 묶어 둘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베트남에 수많은 "우리" 한국사람들, 그들은 과연 "우리" 인가?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사는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 그린, 아무도 알아주지않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을 자신과 같이 읽어주는 친구를 만난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는데 모두들 코끼리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어린왕자는 자신의 보아뱀을 본다. 그들은 진정한 만남을 갖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인식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이 된다.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있어서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소중한 것은 바로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 그리고 근원적인 존재 조차 누군가의 인식 속에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 그리고 모든 사물조차 만남에 의해 가치가 생겨난다. 스스로 존재가치를 갖지 못하고 있다. 개체로서의 의미는 나를 이해하는 다른 개체와의 만남으로 생겨난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꽃을 꽃이라 보는 다른 개체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꽃 역시 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꽃을 꽃으로 보는 만남의 관계를 ‘우리’라고 부른다. ‘우리’ 라고 불리우는 너와 나는 만남을 통해 서로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시킨다.
인간은 거미줄처럼 서로 관계를 엮어 살아야만 한다. 태생부터 남녀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란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엮여산다. 그리고 수많은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은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스며오른다. 왜 그럴까?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일까?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자신이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지 못하면 외로운 거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나를 읽어주고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외로움은 가신다. 나를 나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진정한 만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사는 도시에서도 진정한 만남이 없다면 사막과 다름없이 외로울 것이고 외로운 사막에서도 진정한 만남을 가지면 그곳은 더이상 황량한 사막으로 남지 않는다.
외로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고 만남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다.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요즘 소녀들을 본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얘기하는 특이한 어법이다. 이해하기 힘든 심리다.
왜 자신을 타인으로 만들려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존재가 실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인가? 아마도 그 누군가 나를 인정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어 내 스스로 3 인칭이 되어 자신을 부르는 것 일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서야 의미가 확인되는 인간의 숙명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설익은 어법이다.
그러나 '그(그의 이름)' 혹은 '그들'로 표현되는 3인칭의 타인은 나의 존재와는 관계가 없다.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무의미하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그저 나는 그에게 ‘그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은 존재이니 서로 각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라는 3인칭의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또 다른 3인칭이자 타인인 ‘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너와 나 2인칭의 관계다. 그들이 아닌 나에게 특별한 존재 '너'가 되는 거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응답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나에게 특별한 너가 되고 너에게 유일한 내가 되는 관계가 바로 '우리'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위로하고 아껴준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그가 그린, 아닌 그대가 그린 그 보아뱀도 어렵지 않게 보인다.
2인칭의 관계는 사랑과 배려 그리고 관심에서 태어난다.
그저 지역적 문화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외부적 영향으로 ‘그’가 ‘너’가 되지는 않는다. 특정 개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나에게 특별한 ‘너’를 만들고 너에게 각별한 ‘나’를 만든다.
그리고 진정한 ‘우리’를 만든다.
글을 마치기 전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감상해보자.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chapter4
원래 세상에는 개미가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검은색과 빨강색 그리고 흰색 개미만 있는게 아니라 초록개미와 파랑개미도 있었다. 근데, 우리는 왜 초록개미와 파랑개미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호기심이 많은 엘로이즈라는 요정 때문이다. 엘로이즈 요정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개미에게 그 이유를 물어봐도 말을 못하는 개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답답해진 엘로우즈 요정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여 개미에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
"그냥 어떻게 되나 보려고요"란 호기심에 한 이 행동은 파랑개미와 초록개미를 세상에서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 말을 하게 되었을때 기뻐했던 파랑개미와 초록개미들은 화가 나고 분노할 때마다 말로써 그 화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강도가 약했지만, 점점 강도가 세지고, 말로써 시작한 싸움은 두 집단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엄청난 전쟁을 불러와 모두 멸종하고 만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색깔의 파랑개미와 초록개미를 우리는 다시 못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위베르 니쌍이라는 작가가 쓴 개미라는 제목의 동화에서 나오는 얘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유명한 젊은 작가의 개미와는 다른 책이다.
말이라는 것이 세상사에 작용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된 올드보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15년동안 이유도 모른채 독방에 갖혀지내고 나서 나중에 그 이유가 고교시절 무심코 던지 말 한마디에 의해 사람이 죽고 그 세치혀를 잘못놀린 댓가로 1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갖혀지낸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의 혀를 짤라 가벼운 말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스토리. 영화라는 극을 만들기 위해 과장되게 표현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단 말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끔찍한 파괴력을 표현한 영화였다.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한번 뱉어버린 말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실례는 역사를 통해 수 없이 증명된다.
아마 요즘 한국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중치 못한 말에 대한 부작용을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교사의 역할을 열심히 해주는 나라 지도자가 있어 모든 한국인은 새삼스래 말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살고 있다.
원래 “말” 이라는 어원은 “마알”에서 나왔고 “마알”이란 “마음의 알”란 뜻이라고 한다. 즉 말이란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것인데 밖으로 쏟아 내는 말의 모양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얘기다.
말은 곧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다. 입을 통해 쏟아지는 마음의 알갱이를 보고있자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이 보이지 않는가? 거짓말을 쏟아 내는 사람은 마음에 거짓이 가득한 사람이고, 남의 빈정대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일 것이고, 말꼬리를 흐리는 사람은 뭔가 자신을 잃은 사람이지만, 미소와 함께 감사와 겸손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으리라.
말은 또 역으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말이란 “마음의 알” 이기에 그 “마음의 알” 인 말을 주의깊고 아름답게 가꾼다면 마음도 역시 아름답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말은 하면 할수록 시너지 현상을 일으킨다. 부정적인 언어는 부정적인 마음을 부르고 긍적적인 언어는 긍정적인 마음을 부른다.
심성이 고운 사람은 아름다운 말을 구사할 것이고, 부드럽고 고운 말을 골라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의 말처럼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행운을 원하는 사람은 불만과 불운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남에 대한 비방을 멈춰라.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칭찬과 감사의 언어를 구사하고 , 밝은 인생을 원하면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라. 자신감을 가지려면 말끝을 흐리지 말고, 승리자가 되고 싶다면 솔직하고 진실된 말을 또렷하게 발음하라.
이번에는 말하는 요령에 대하여 얘기를 해보자
필자가 어설픈 영어를 배우고 무역상을 한다며 뻔질나게 외국으로 나 다니던 시절, 서구인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이질감은 그들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긍정 일변도의 표현방식이었다.
바로 지나칠 정도의 칭찬과 완곡한 부정적 표현방식이 그것인데, 그저 별일도 아닌 일에 EXCELLENT, GREAT를 남발하는 낯 가려운 칭찬도 그렇지만, 그들은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절대 부정적인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다른 사람이 사실이 아닌 말을 한다고 반박을 할 때에도 네가 틀렸다는WRONG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올바르지 않다는 INCORRECT라는 단어를 쓴다. 부득히 WRO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MAY라는 조동사를 넣어 “아마 틀렸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 누군간 아주 황당한 말을 하더라도 우리 식으로 흔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소리치는 대신 “썩 훌륭한 생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하는 등, 우리나라에서는 외교적인 수사로만 사용될 표현을 그들은 일상에서 사용한다.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직접적인 부정적 용어의 사용을 극도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프리미엄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이 지난 주 3개월만에 부상에서 일어나 선발출장을 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부진을 보였다. 이유야 어째튼 간에 분명히 그날 박지상은 부진했다. 그러나 영국친구들은 박지성에게 가장 부진한 선수에게 주는 평점 5점을 주면서도 표현은 “ 최상이 아니였다” 라고 명기했다. 아마도 그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말로 인한 해악을 이미 파악을 한 터라 너나 없이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우리가 배워야 부분임이 틀림없다.
말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 요령은 끊임없는 관심과 훈련으로 완성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다음은 반드시 지켜야 할 말의 원칙이다.
- 누구든지 실언은 하기 마련이다. 실언을 했을 때는 즉각 실언임을 사과하라.
- 말에는 반드시 진실이 담겨야 한다. 진실만이 남을 설득할 수 있다.
- 가장 말을 잘하는 방법은 입을 다물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PS) : 매년 이맘때, 연말이 되면 공연히 호주머니에 손이 들어간다. 웬지 마음이 공허해지고 바람도 차지는 듯하여 몸이 움추려 드는 것이다. 또 한해 무사히 보내긴 했는데 할일없이 세월이 흐른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흐른 세월만큼이나 깊어지는 세상의 인연도 있는 것이니 마냥 서러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시간에는 오래된 친구가 그리워진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아무런 갈등이 없는 친구들과 만나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놓고 아무 얘기라도 나누고 싶다. 해가 넘어가기전, 이무럽지 않은 죽마고우들과 허리띠 풀고 세치며 맘대로 돌아가는 말의 방종을 즐겨보는 것도 고달픈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괜찮은 방법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