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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펑펑 쏟아진다. 예능인 이경규가 2010년 KBS연예대상을 수상하면서 소감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눈이 내린 길을 앞서서 한 발짝 한 발짝 걸으며 후배들이 잘 걸어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소감을 듣는 순간 한시 한 수가 떠올랐다.
흰 눈이 내린 길을 걸어갈 때면 위의 시는 더욱 가슴으로 스며든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붓글씨로 이 시를 휘호하였기 때문에 김구 선생의 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중종 15)∼1604(선조37)의 선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활동한 승병장이었다.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85세까지 살았는데 의발(衣鉢)을 대흥사에 맡겼기 때문에 대흥사입구에 그의 부도가 남아있다.
그런데 최근 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이 시는 조선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 1771(영조 47)~1853(철종 4)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양연의 자는 진숙(晉叔), 호는 임연(臨淵)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다는 평이 있다. 그는 조선후기의 문인으로서 호조참판을 거쳐 1852년(철종 3) 동지의금부사에 이르렀고,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을 평생 사모하였고, 수 백수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한문학자인 정민 교수는 조선후기 한시연구논고에서 위의 시가 이양연의 시임을 확인했고, 안대회 교수는 이양연의 문집인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과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이양연의 이 시가 수록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안교수는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에는 이 시가 수록돼 있지 않기 때문에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고 말했다. 따라서 많은 서예가들이 서산대사의 시로 알고 휘호하였기에 혼란이 적지 않게 되었다. 생몰연대로 보면, 서산대사는 이양연보다 150년 전의 인물이다. 서산대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시와 이양연의 시를 비교하면, 천(穿)-답(踏), 조(朝)-일(日), 위(爲)-작(作) 등의 글자만 다르고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연구된다면 더욱 명확하게 판가름 날 것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전인미답의 눈길을 걸어갈 때는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뒷사람이 그 눈 위에 새겨진 앞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사람은 똑바로 걸어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백범 선생은 하루에 세 번씩 이 시를 낭송하고 실천했다고 하니 선구자의 삶이 얼마나 철저해야하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리에 쌓인 눈을 바라보면서 오늘 나의 행동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서산대사의 시 답설(踏雪)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지니.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이양연의 시 야설(野雪)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 눈 길 뚫고 들길 가도
不須胡亂行(불수호란중) : 모름지기 어지러이 가지 말라.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 오늘 아침 내 발자국이
遂爲後人程(수위후인정) :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니.
(죄와 구원의 핵심) 대신한다는 것은 죄와 구원의 핵심에 모두 존재한다. 왜냐하면 죄란 본래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를 스스로 대신하신 것이다. – 존 스토트
“주님께서 말씀하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비록 너희 죄들이 주홍색 같을 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색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 18)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항상 흰색 와이셔츠를 즐겨 입습니다. 그래서 음식물을 먹을 때나 또는 흙탕물이 튀는 곳에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애써 조심하였음에도 음식물, 국물 등을 먹고 나면 와이셔츠 어디엔가 국물이 튀어 더러워져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특히 여름에는 목덜미에서 땀이 흘러 하루만 지나도 와이셔츠 목부분은 땀과 먼지로 더러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혼들도 죄로 더러워져 있고 양심 또한 더럽고 추한 죄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죄인들의 현주소입니다. 자동차 정비소에 가보면 정비 기사들이 입고 있는 의복들은 오래 동안 기름때가 묻어서 더러울 뿐 아니라 기름때가 말라붙고 찌들대로 찌들어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도 더럽고 기름 냄새와 약취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옷들은 어떤 세탁 방법으로도 깨끗하게 할 수 없어 기름 닦는 걸레로 쓰다가 쓰레기장으로 버려지거나 결국 불로 소각 당하게 됩니다.
죄인들도 그와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하였고 만물보다 더러워진 마음, 연탄 공장보다 더 시커먼 죄악들을 생산해내는 죄 공장을 스물 네 시간 가동하고 사는 우리들의 심령은 끊임없이 솟구쳐오는 시궁창의 부패한 가스와도 같이 죄악을 솟구쳐냅니다. 그러한 죄인의 마음을 무엇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정글에 사냥을 나가다가 어쩌다 늪에 빠지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하여 호흡을 들이마심으로써 몸을 부상하게 하고 낙엽 등을 끌어 모아 간신히 밖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왜냐면 스스로 빠져나올려고 허둥대면 허둥댈수록 몸은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 역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씻어 보려고 바둥대면 될수록 더 깊은 구덩이에 빠지고 더러워져서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비록 네가 잿물로 씻으며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오히려 네 죄악이 여전히 내 앞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예레 2, 22)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답게 양심의 송사를 달래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앞치마를 만들어 앞부분만 가리우고 내 눈에 안보이니 가리워진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창3:6-7). 그래서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을 학대하거나 채찍질하거나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인도같은 나라에서는 찌는 햇빛아래 살갗을 태우며 못이 박혀있는 널판 위에 누워있거나 일생을 벙어리로 지낼 것을 맹서하는 사람, 손이 마비될 때까지 두 팔을 높이 들고 있는 사람, 수천 키로의 여행길을 기어가거나 걸어가는 이도 있습니다. 작고한 불교 승려 성철이라는 사람은 십여년을 앉아서만 수행하여 보았으나 결국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성을 다스릴 수 없어서 “나는 지옥에 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에 가면 베드로의 칠십 계단이 있는데 로마 천주교인들은 이 계단을 밑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기어 올라가며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죄를 자복합니다.
갠지즈 강에서 목욕을 한다고 죄가 눈처럼 희게 될까요? 고행, 금식, 통회, 자복하여 기분상 시원하다고 지은 죄나 죄성이 양털같이 씻어지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는 언제부터인가 산신령같은 무당신앙을 닮아가면서 철야기도회 때와 부흥회 때 또는 기도원에서 밤새 통성기도하며 자신들의 양심소리를 달래보고 주여 삼창 외치며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약간 후련하거나 값싼 눈물을 흘리고 나면 감정상 속이 시원하여 하나님께서도 시원해지셨겠지 착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주교도는 양심에 걸리는 죄들을 신부들에게 고해성사(죄를 고백하는 행위)함으로 두려움을 풀고 개신교도들은 통성기도, 통회자복으로 요란을 떨며 양심의 송사를 막으려 하는 발버둥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행위들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행위(로마 10, 1-4)라고 하고 이러한 애씀을 더러운 옷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들은 더러운 걸레 옷들같으며 또한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잎사귀같이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 64, 6)
일본에 우찌무라 간조라는 그리스도인이며 저술가였던 사람은 양심에 찔려 오는 죄값을 갚아보려고 병원에서 자선행위를 하며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고, 어려운 거지나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죄값을 상쇄해보려고도 하고, 미국에서 신학을 연구함으로 영혼의 해답을 얻으려 했다가 육 개월 만에 포기했고, 자살하자니 지옥불이 기다리는 것같아 죽지도 못하고 있다가 최종적인 묘안을 짜낸 것이 망죄술(忘罪術)이였습니다. 망죄술은 지은 죄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쉴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갔습니다. 그야말로 양심에 한시의 틈도 주지 말고 양심이 질식하여 입을 다물게 하자고 각오를 하고 밤낮없이 분주하게 일하고 글쓰고 자선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은 헛된 것으로 깊은 잠을 못자고 한 밤에 깨어나면 죄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망령처럼 양심과 머리를 어지럽히고 여전히 머리는 망죄(忘罪-죄를 잊어버리는 것)일지언정 본성의 마음은 여전히 망죄(望罪-죄를 갈망하는 것)함으로 인해 파김치가 되고 양심은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하여 예수 그리스도 보혈 아래서야 진정한 양심의 쉼을 누렸다는 기록이 그의 저술 중 구안록(救安錄)에 있습니다.
영국의 신앙인 빅토리아 여왕의 부친이였던 켄트 공작 역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가 임종할 때 그를 돌보던 의사가 “공작께서는 생존시에 선행을 많이 하셨고 공덕을 많이 끼치셨기 때문에 분명히 사후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임종 직전에 있던 켄트 공작이 그 말을 막으면서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은 공작이나 선행 공덕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네” 라고 말했다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께 속한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바라노라”(계시 1, 5-6)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지는 비결은 우선 내 스스로 씻어보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차마 보실 수 없으셔서 저주하셨지만(하박 1, 13) 우리의 영혼은 너무 사랑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늘에서 동거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같이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함께 동거할 수 없기 때문에(시편 5, 4)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세상 죄값을 담당하시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영혼을 눈보다 더 희게 씻어놓으셨습니다. 옛날 모세의 나이가 팔십이였을 때 그의 형 아론은 팔십 삼세였으며 제사장들이였던 모세의 조카들이요 아론의 아들들은 삽십대 사십대였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임명을 받아 처음 전신 목욕을 할 때는 늙은 모세가 아론과 함께 네 명의 젊은 조카들 합 다섯 명 모두를 물로 씻어 주었습니다.(출애 29, 4; 레위 8, 4)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죄를 씻어주심과 같이 손발까지도 친히 씻어주심과 같습니다. “이미 목욕을 받은 자는 그의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나니 온 몸이 깨끗함이라”(요한 13, 10)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주하라”(요한 15, 3-4)
하늘에는 죄가 없으며 하나님의 눈에는 죄가 보여서는 아니됩니다. 또한 동시에 죄인들의 영혼들이 없는 하늘 나라는 머슴들같은 천사들 뿐이기에 쓸쓸하기 짝이 없는 곳이 되고 하나님의 눈에 성도들이 보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즐거움은 있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친히 육신이 되셔서(요한 1, 14; 창세 22, 8)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피를 흘리셨고 온 세상 죄는 눈보다 더 희게 씻어졌습니다. 새 예루살렘 어린 양의 신부에게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가 입혀졌는데 그것이 “허락받은 성도들의 의로움”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의의 세마포로 입혀주신 것을 의미합니다.(계시 19, 8) 그렇습니다. 죄는 눈물이나 선행이나 자선이나 뉘우침이나 회개나 보상이나 망각이나 고행이나 학대나 그 어떤 사람의 방법으로는 씻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 양같이 점 없고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어진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 7)“...아들은 큰 환란으로부터 나온 자들이라 어린 양의 피로써 자신들의 예복을 희게하였느니라”(계시 7, 1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으며 그분의 보혈은 죄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신 순결하고 거룩하신 보혈로써 그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사도 20, 28)였습니다. 그 거룩하신 보혈에는 타락한 아담의 죄성은 흔적조차도 없는 보혈입니다. 그 피가 흘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셨고, 이제 세상 죄인들로부터 공의의 눈을 지나가시고 돌리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보혈 안에서 세상 죄인들을 보시기에 눈보다 더 양털보다 더 희게 씻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 강원도 어느 시골에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였습니다. 탄광촌이 옆에 있고 숯가마들이 근처에 있어서 동네에 새카만 먼지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날따라 하얀 눈이 내려 온 마을과 산등을 덮었습니다. 시골 교회 노인들에게 우리 죄는 연탄같이 새카만 것이었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려 새하얗게 덮은 것같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우리의 죄들을 눈같이 덮어주셨다는 내용으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자 보세요! 동네가 까맣게 보입니까? 하얗게 보입니까? 예, 하얗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도 그렇게 눈부시도록 하얗게 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의 몸이 정결한 물로 씻겼나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자”(히브 10, 22)
오, 죄 때문에 씨름하는 분들이여! 또 열백 번 작심했으나 넘어진 자들이여, 자신이 저주스럽도록 밉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여! 이제 내 속을 내려다보던 눈을 위로 드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 예수님이 내 의(義)이십니다. 이제 그분 안에 내 의가 있습니다. 이미 그분 안에 나의 ‘의’가 함께 동거하고 있습니다. 내 의가 예수님 안에 선발대로 하늘에 가있는데 우리도 당연히 가지 않겠습니까? 네 보물(義)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병사중 하나가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니라”(요한 19, 34)
한강물이나 태평양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었던 내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았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신 주 예수님께 손들고 있는 그대로, 처한 내 모습 그대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너무 늦기 전에, 저물어 춥기 전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속에서 깨끗함을 찾으려했네
아무리 찾아도 보이는 것은 더러운 죄뿐일세
찾다가 지쳐 울고 있을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았네
그분의 피안에서 깨끗해진 나를 보았네
눈이 부시도록 눈보다 더 깨끗해진 내 죄
하나님의 한 의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네”
“그분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게 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라 상속자들이 되게하심이라”(디도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