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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포란형의 천년고찰 금련산 마하사 금련산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하사는 부산에서 드물게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신라초기의 고찰이다. 따라서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신비한 전설 또한 많이 간직하고 있는 영험한 사찰이다. 마하사의 창건연대는 신라시대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데 마하사 연기에 따르면 서기 394년 신라 내물왕 39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경북 선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桃李寺)를 세우고, 남으로 내려와 나한기도도량(羅漢祈禱道場)인 마하사를 세웠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와 고구려의 고씨도령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인물로 적고 있다. 마하사라는 절의 명칭은 반야심경의 정식명칭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따 왔는데 마하(Maha)'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에는 반야암(般若庵)과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라는 두 개의 말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사되고 그 터만 남아있다. 마하사가 있는 금련산은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금련산이라 한다. 연산동이라는 지명도 금련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동래지역 풍수에서는 연꽃이 지천으로 많이 피어있는 곳이어서 연산동이라 했다 한다. 어쨌거나 금련산은 그 많은 연꽃들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부처님의 꽃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마하사에는 일주문과 불이문이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천왕문을 만난다. 천왕문은 종루를 겸하고 있는데 입구 외벽에는 험상궂은 모습의 금강역사상이 양쪽에 그려져 있다.
안쪽 벽면에는 사천왕상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다른 사찰이 목각으로 만들어 놓음에 비하여 그림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천왕문을 지나면 이내 강당과 종무소 건물을 만나는데 건물 벽에는 부모은중경을 나타낸 그림이 11면으로 그려져 있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이 건물의 아래로 나 있는 하심문을 지나가야 한다. 전통사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마하사에도 부처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물의 아래쪽으로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건물 아래를 통과하므로써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니 자신을 한없이 낯추라는 불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의미가 된다. 하심문을 통과하여 합장배례하고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면 응진전과 마하대복연, 5층석탑, 삼성각 등이 차례로 보인다. 역사에 비하여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통의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로서 다포양식이며, 옆 벽면에는 심우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군자문 장생문 연화문 등이 조각되어 있는 대웅전의 문살은 화려하고 아름답기가 그지 없다. 대웅전 옆에 있는 응진전에는 불제자 16나한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형상에서 개구리를 붙잡고 있는 나한까지 장난끼가 다분히 배어나오는 나한의 형상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마하사 응진전의 나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시대 선조임금 무렵 어느 해 겨울 동짓날 전날 밤에 마하사의 공양 중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부엌과 화로의 불씨가 모두 꺼져버렸다. 마침 그 날은 동짓날이어서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불이 없으니 큰 탈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양 중은 우선 팥을 씻어 솥에 넣어 놓고는 산 위에 있는 황령산 봉수대를 찾아가서 봉화군에게 불씨를 좀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봉화군은 조금 전 마하사에서 동자승 하나가 올라와서 불씨를 달라 하기에 주어 보냈고 자기들이 먹기 위해 쑤었던 팥죽까지 한 그릇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하사에는 동자승이 없었고 더군다나 불씨를 얻으러 보낸 적도 없었던 지라 이상하게 여긴 공양 중은 서둘러 절로 돌아왔다. 부엌으로 가보니 어느 새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 참 신기한 일이라며 의아하게 생각한 공양 중은 마침 잘 됐다 싶어 그 불로 동지팥죽을 맛있게 끊였다. 팥죽을 다 끊인 공양 중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팥죽 그릇을 들고 나한전에 공양하러 들어갔는데,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앉아 있는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조금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제야 공양 중은 나한님이 절에 불이 없는 것을 아시고 동자승으로 화하여 봉수대에 가서 불씨를 얻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뜻이라 여겨 그 이후로 공양 승은 더욱 부지런히 부처님 공양에 정성을 다했다고 전한다. 영험한 신통력을 지닌 나한이라 그런지 또 다른 전설도 전해오고 있는데 어느 해인가 참새가 모여들어 청정한 도량을 시끄럽게 하고 곡물에 피해를 많이 주었다. 참다 못한 주지 스님이 나한전에 가서 참새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원하였더니 어느 날 뜰 가운데 죽은 참새가 한 마리 떨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 마하사에는 참새가 일체 범접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년 역사를 간직한 마하사 나한전에는 이런 전설도 있다. 어느 해 절에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못한 채 뒷날로 미루고 사부대중이 모여 우선 불사 종료 회향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예식에 따라 범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나무소리처럼 변하며 도무지 범종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에 놀란 수많은 대중이 다시 목욕 정심하고 일제히 나한전에 나아가 "오늘 불사를 거행한 다음 내일은 바로 나한전에 불사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으니 대자비심을 베풀어 줍시사"하고 축원을 올리고 난 후 종을 치니 그 때서야 비로소 종소리가 났다고 한다. 전설이야 어쨌던 영험한 신통력을 지닌 마하사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절터의 풍수를 한번 감결해 보자. 우선 용맥부터 살핀다면 마하사를 품에 안고 있는 주산 금련산은 해발 427m로 북으로는 연제구, 서로는 부산진구, 동으로는 수영구, 남으로는 황령산과 함께 붙은 산으로 연산동의 진산 배산과 마주하고 있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서 출맥한 간룡이 금정구에 이르러 동남으로 지맥을 내려보내니 부곡동의 진산 구월산을 일으킨다. 다시 남으로 몸을 틀어 동래의 진산 마안산을 솟구친 다음 몸을 낮춘 평지룡으로 거제동과 연산동을 지나 신선대 앞바다로 뛰어들기 직전 이곳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니 금련산과 황령산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련산은 낙동정맥의 기운을 금정산으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신령스런 산이다. 황령산 봉수대 옆 정상의 암석 봉우리에 올라 마하사를 내려다보면 정상에서 북으로 내려가는 용맥 하나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어 정상에서 좌로 뻗어내린 용맥은 청룡이 되어 마하사의 내룡을 깊이 감싼다. 금련산에서 내려간 용맥은 백호가 된다. 안산은 배산이고 조산은 동래의 마안산이다. 혈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곳은 자신이 떠나온 조산 금정산이다. 이런 모습을 풍수에서는 회룡고조혈이라 한다. 먼 길을 가다 할아버지가 있는 곳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손자를 아끼는 조부의 정이 느껴지는 대단한 길지이다. 내룡의 모습은 기복과 굴절이 왕성하여 생기가 충만한 생룡으로 황령산과 금련산의 생기를 온몸으로 받아 마하사로 뿜어 넣어 주고 있다. 1600여년 전 아도화상이 마하사의 절터를 잡기 위해 이곳에 올라 지금처럼 금련산을 살폈으리라. 무슨 연유로 하필이면 저 곳에 마하사를 세웠을까. 신라 초기에는 중국의 풍수사상이 이 땅에 전래되기 이전이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고유한 전통풍수 사상만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신라 초기에 석탈해가 집터를 잡기 위해 토함산에 올라 서라벌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반월성이 있어 그 곳을 집터로 정했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라풍수는 형국풍수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마하사의 형국은 금학포란형(金鶴包卵形)이다. 가운데 내룡을 중심으로 양쪽의 청룡과 백호가 깊이 감싸는 형국을 흔히 새가 날개로 감싸는 형국으로 풀이하는데 전통 풍수에서는 이를 봉황과 학, 그리고 금까마귀 등으로 분류한다. 머리가 크면 봉황으로 보았고, 주둥이가 길면 금까마귀로 보았으며 목이 길면 학으로 본다. 내룡의 형세는 목이 길게 내리뻗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마하사의 형국은 금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마하사의 대웅전이 금학의 알이 된다. 금학이 알을 품어 새끼가 부화되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마하사의 수도승이 불도를 이룬 부처가 되어 대자대비한 불법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의미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마하사가 자리잡은 터를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내룡의 오른쪽 중간쯤 자락에 택지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이것은 새가 알을 품는 곳이 날개 밑이기 때문에 내룡의 등성이에 자리잡지 않고 날개쭉지 품안에 위치한 것이다. 학은 날아오를 때 오른쪽 날개를 먼저 펄럭인다. 날개 품을 따져 볼 때 왼쪽 날개보다는 오른 쪽 날개 품안이 먼저 발복을 한다는 것이다. 금학포란형의 형국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려면 황령산 서쪽 자락에 있는 파천암이 제격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형국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길게 내리뻗은 학의 모가지를 청룡과 백호가 깊이 감싸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금학포란형이다. 까마득한 옛날 아도화상이 마하사의 절터를 찾기 위해 수십 번에 걸쳐 금련산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중생구제를 위해 불법을 펼칠 길지를 찾는 모습이야말로 구도승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런지. 땀 흘리며 산을 헤매던 중 아마도 이곳에서 금학포란형을 발견하고는 점지하신 부처님의 가피를 몸으로 느끼며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리라.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을 닮아 금련산이라 부르는 정기어린 산 아래 금학이 포근히 감싸는 금학포란형의 길지야말로 마하사가 천년세월을 넘어 불법을 펼칠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마하사는 부처님의 진리로 중생을 따뜻하게 품어 부화시키고 천상으로 날려 보내는 청정도량이 되는 것이다. |
첫댓글 지척에 이렇게 멋진 천년고찰이 자리잡고 있었네요 (이런 무식 ㅡ..ㅡ;;;; ) 장난기 가득한 나한상의 모습들이 참으로 정겹습니다 조만간에 시간내서 들려 봐야지~~~ 같이 가실 분??????^^
팥죽전설이 여기였군요....신기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