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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야고보서 개관
1. 서론
우리는 이제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General Epistles)이라고 부르는 부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것이요. 그리고 여러 사도들의 서신서를 묶은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서신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불리우는 본 서이다.
야고보서는 흔히 '신약의 잠언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실천, 신앙인의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저자와 기록 연대
1) 본 서의 저자 문제
많은 사람들이 본 서의 저자가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 이유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본 서와 같은 고상한 희랍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요, 그 다음 문제로는 성모마리아를 신봉하는 구교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예수님에게는 사촌만 있고 형제들은 없다는 견해 때문에 비롯되었다.
즉 마리아의 '무흠수태'(Immaculat conception) 교리를 지킴으로써 마리아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보호하고자 지어낸 이론으로 이것을 '히에로니무스 설'(Hieronymian)이라 부른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한 후 순결을 지켰으므로 야고보와 같은 예수의 씨 다른 형제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사촌들만이 있는데 성경에서 그들을 예수의 형제나 가족으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이 사촌들도 그렇게 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설을 신봉하는 자들은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이며, 예수의 사촌으로서 글로바의 아내, 즉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자매인 마리아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2)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이라는 증거
그렇다면 우리는 본 서의 저자가 어떤 이유로 예수그리스도의 동생인 초대교회 사도 야고보로 볼 수밖에 없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예수의 동생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마13:55). 그 중에는 분명히 야고보도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약속대로 예수를 출산한 후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예수와 육신적으로 이복 관계인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통 개혁교회들은 믿는데 이 이론을 '헬비디우스 설' (Helvidian)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 야고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다음 희랍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국어와 함께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도 요한도 많은 서신서를 고급스러운 희랍어로 사용치 않았는가? 그 다음 약1:1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밝힌 점이다. 이 사실이 저자의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감독이자 사도였던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아니라면 다른 표현으로 자신을 밝혔을 것이다. 그 다음 본 서 전체에 나타나는 명령적인 용법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가장 친근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 유사한 표현법과 내용 등이 본 서가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산 증표이다. 그는 주후 62년경 순교했으니 그 시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자와 기록 목적
본 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1:1)라고 시작한 것으로 보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성도를 주대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페스(Ropes)라는 신학자는 "모든 성도들은 저 하늘나라 본향을 떠나 이 땅에 흩어진 순례자(Diaspora)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라고 했다. 비록 야고보 사도가 유대 출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었을지라고 그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된다. 기록 목적은 '시험과 갈등의 해결'을 위한 것으로 본다. 외적인 박해로 인한 시험, 교회 내 다른 이웃과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해결하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중심 요지인 것이다.
4. 타성경과의 연관성 문제
루터와 같은 개혁가는 본 서를 '지푸라기'라 불렀다. 바울에게서 확인 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배치되는 듯한 인상을 본 서에서 받았으리라. 그러나 본 서의 내용 중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바울서신서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다. 바울서신에서 강조된 믿음 역시 실천적인 삶을 요구한다. 야고보는 다만 그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유대교적인 논증
내용이 일관된 논리적인 진전이나 사상의 체계는 없다. 다만 당시 유대 랍비와 희랍의 지혜자들의 교수법과 설교 양식이 발견된다. 즉 설교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하는 식이다.
2) 교리 중심이 아닌 생활 중심
본 서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고난, 부활이 없다. 다만,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인 인내, 정절, 선행 등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본 서를 신약의 잠언서라고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와 흡사한 교수법
본 서에는 자연을 사용한 비유법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수법이다. 주 예수와 한 지붕에서 오랫동안 지낸 주의 동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교수법이다.
6. 본 서의 내용 개관
1. 시험과 시련에 관한 교훈(1:1-16)
2. 참예배와 그릇된 예배에 대한 교훈(1:17-2:13)
3. 무가치한 신앙 생활에 대한 교훈(2:14-3:12)
4. 참지혜에 관한 교훈(3:13-18)
5. 교회의 분쟁과 세속화에 대한 질타(4:1-12)
6. 불의한 유력가에 대한 경고(4:13-5:6)
7. 인내에 대한 격려(5:7-11)
8. 맹세, 고난, 질병, 기도, 전도에 대한 금언(5:12-20)
◉[연구1] 시험에 대한 교훈(1:1-18)
인생에는 여러 시험이 있다. 멸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적인 시험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더욱 완숙하게 하는 목적적인 시험이 있다. 이런 시험들을 잘 이겨내어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다.
1. 믿음의 시련(약1:1-4)
ꁾ 서신 서두에서 수신인과 발신인을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 밝힌 발신인 야고보는 누구이며, 그의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ꁾ 수신인인 12지파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여러 가지 시험이란 무엇인가?
ꁾ 그리고 믿음의 시련을 이겨낸 인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시험의 목적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신을 형의 종(노예)이라고 한 표현은 그가 예수님을 육체의 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철저히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서신의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12지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메시야 시대에 회복되리라 예언된 이스라엘 12지파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발견한 것이라(렘3:18). 약1:2의 시험은 멸망케 하는 유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목적이 있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목적은 성장시켜 주고 단련하게 한다. 이 시험의 결과는 인내이며 이는 인간을 온전케 한다.
2) 시험을 통한 교훈
이 서신은 어느 특정한 교회에 쓰여지지 않았다. 즉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어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 행한 주님의 서신인 것이다. 또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일수록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지혜를 구하라(약1:5-11)
ꁾ 시험을 당한 자에게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지혜를 하나님은 어떻게 주시는가?
ꁾ 그리고 어떻게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ꁾ 그리고 왜 야고보는 낮은 자와 부한 자에게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가?
1) 고난 속의 지혜
메튜 헨리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올바르게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난 속에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지혜도 아니며 배부름을 위한 어리석은 지혜도 아닐 것이다. 이런 지혜를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게 주신다(약1:5). 그러나 조건은 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약1:6,8). '두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는 두 주인을 섬기는 불충직한 하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6:24)에서 알 수 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부한 자에게는 겸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피로 산 귀한 존재이다. 부한 자는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팔레스틴에 불어오는 열풍에 금방 시들어 버리는 꽃의 화려함을 깨달아 삶을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고난에 처할수록 기도를 올바르게 해야한다. 무조건 고난을 피해 가려는 습성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지혜롭게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려움을 피해 다니고 순간 순간 잘 되려는 심정은 무속 신앙의 기복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을 겸비함을 갖추어야 한다.
3. 승리의 면류관(약1:12-18)
ꁾ 시험에 관련한 내용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ꁾ 시험받는 자가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ꁾ 인간 내부의 근본적인 죄성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죄악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1) 욕심으로 인한 시험
시험, 시련을 이겨내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고대 세계에 면류관은 왕권을 의미하고 승리와 명예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시련 그 자체는 불행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약1:13의 시험은 자기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시험이다. 이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죄성의 특징은 핑계이다. 아담과 하와가 각각 자기 죄에 대여 핑계를 댄 것처럼 욕심에서 비롯된 죄성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심각성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하시고 거룩하시다(약1:17). 시험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욕심에 대한 책임
현대 자본주의 특징 중 하나는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유발하기 위해 욕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나은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이기적 욕망에 빠지기 쉽다. 이런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기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욕심의 시험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시험을 피해 살아갈 수 는 없다. 다만 자신에게 닥치는 시험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유혹이다.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돈, 섹스, 명예 등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 이 대열에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부모, 국가, 하나님 등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욕심이 죄를 낳고 결국에는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연구2] 믿음과 행함(1:19-2:26)
믿음과 율법(행함)의 관계는 오랫동안 교회의 논쟁거리였다.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쟁이 치열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된 책인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신학은 오히려 바울과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1. 도를 행하는 자(약1:19-27)
ꁾ 야고보는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이는 루터의 이신득의 사상과 대치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키고 행해야 하는가?
ꁾ 특히 말하고 듣는 행동을 어떻게 하며, 행함이 있는 경건이란 무엇인가?
1) 온전한 경건
이 부분은 루터가 거부한 부분 중의 한 부분이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교 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자유를 발견케 한다. 종교개혁을 한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라고 해서 모두 옳지만은 않다. 야고보서를 평가절하한 루터의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후의 종교개혁자들 모두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고 명한다. 이는 잠13:31에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삶의 교훈이다. 그리고 외적 경건과 더불어 내적 경건에 힘써야 한다(약1:27)
2) 경건의 삶
현대를 PR 시대라고 부른다. 자기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손해보는 시대며, 법정에서도 말 잘하는 변호사가 이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를 장식물로 생각하는 자들과 이신득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죄짓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 때 야고보는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켜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2.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13)
ꁾ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ꁾ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이런 일은 어떻게 율법에 어긋나는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동등한 인격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대부분은 비천한 자들과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부자나 고위층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는 귀한 전리품을 다루듯이 하여 자연적으로 교회 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흠을 잡을 수 없었던 부분은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을 하지 않은데 있다.
또 예수님도 온전한 율법을 이웃 사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게 된다(약2:13).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인은 좇아가야 한다. 즉 온전한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2) 교회 안에서의 평등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교회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라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게 되면 이는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흥의 원인이 된다. 즉 교회가 사회의 계층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이때에 일부 교회에서 건축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어려울 때일수록 어느 부자든 교회에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내기를 목회자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26)
ꁾ 바울이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한 구약의 인용(아브라함)을 야고보도 인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인가?
ꁾ 아니면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행함의 중요성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치 않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2) 온전한 그리스도인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을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
◉[연구3] 신앙의 적용(3장-5장)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고보는 가르치고 있다. 즉 입에 대하여,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욕심에 대하여, 산상수훈의 실천에 대하여, 잠언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즉 실천적인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약3장)
ꁾ 교사는 지혜있고 총명해야 하는데 우선적인 첫째 조건으로는 입을 잘다스려야 한다. 이런 자가 행함을 갖춘 믿음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교사는 입을 잘 다스려야 하나?
ꁾ 입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사의 참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어떻게 다른가?
1) 지혜의 열매
초대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 전통에 있었고 유대교 전통에서 교사(랍비)는 매우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불충직한 목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였다(렘23:2). 예수님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심판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마12:36). 그러므로 지도자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입의 능력은 배의 키와 큰 불을 일으키는 작은 불씨와 같다. 한 입에서 악독과 경건이 나오지 않도록 야고보는 경고하고 있다(약3:9-12). 또 참된 지혜에는 선행, 온유, 성결, 화평, 관용, 양순 등의 선한 열매가 있으며, 화평으로 의의 열매가 있고, 편벽과 거짓이 없으나 악한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어 이를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라 한다.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에 그 입의 열매로 구별할 수 있다.
2) 경건의 지혜
거리에서 표시를 한 차가 자주 눈에 뜨인다. 그러나 교통 사고가 났을 경우 또는 교통 혼잡시에 표시차 운전차에게서 거침없이 상소리가 나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입에서 경건과 악독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이다. 이외에도 상소리로 남의 인격을 파괴시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런 때 입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며 경건의 참된 지혜를 가질 것을 명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2. 행치 아니하는 죄(악4장)
ꁾ 이 부분은 산상수훈과 잠언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부분이 산상수훈과 잠언과 맥을 같이 하는가?
ꁾ 행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한다는 의미인가? 약4:5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구절은 구약에 없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행함이 없는 믿음
다툼의 원인은 욕심이라 하였다. 즉 욕심은 세상 것과 연결되어 있다.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리 없다(약4:3). 이런 믿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다(마6:24). 약4:4에 간음하는 여인들은 약4:5과 연결해 볼 때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 이에 대한 문자적 구절이 구약에는 없지만 약4:5이 구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을 읽다 보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질투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마음을 슬퍼하며 남을 비판하지 않고 내일 일을 주께 맡기는 등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다.
2)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
흔히들 산상수훈의 내용은 지키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구약과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또한 산상수훈은 톨스토이의 정신적 기반이었고, 인도의 간디는 톨스토이에 영향을 받았다. 비기독교인조차도 산상수훈의 위대함을 알고 실천하는 데 기독교인이 행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믿음의 참본질을 저버리는 것이다. 비기독교인이 조롱하기 전에 신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3. 길이 참으라(약5장)
ꁾ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실천적인 부분을 야고보는 재차 강조한다. 본문에서는 부(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부가 단순히 죄악된 것인가?
ꁾ 모든 부가 다 죄악된 것인가? 모든 부가 다 죄악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야고보는 어떤 면을 부의 죄악된 면이라고 한 것인가?
ꁾ 그리고 이는 주의 재림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런 종말론적인 시대에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늘나라에 쌓는 복
야고보는 부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부를 쌓는 방법과 재물로 인한 욕심과 재물의 사용법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약5:4에서는 노동력 착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약5:5에서는 물질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욕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즉 부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라 부로 인한 탐욕과 착취가 죄악된 것이다. 우리는 진정 부를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 사악한 부에 대해서도 심판이 곧 임하기 때문이다.
또 주님께서 곧 오시기 때문에 부를 올바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말의 때 교회에서는 기도와 찬양과 신유, 회심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약5:13-20).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2) 올바른 물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경제가 부요해지고 향락이 증가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낀다. 또 빗나간 재림 운동으로 기독교인조차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잊으려하고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수단 없이 부를 쌓아가는 것에 대하여 성경이 경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건전하게 쌓아 올린 부와 부의 올바른 사용은 종말의 때에 결코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신앙은 매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든 사람들과 생활에 있어 다를 바가 없다면 복음에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이 실천은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행여 우리가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을 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공허한 믿음을 갖지 않도록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