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창작의 과제와 전망
허경자
이 글에서는 한국의 수필문학이 나가야 할 방향을 창작의 측면에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실험적 측면에서는 ‘낯설게 하기’ 기법의 적용을, 새로운 형식의 모색으로는 ‘퓨전수필‘을, 표현매체의 변화에 따른 방법의 모색으로 ‘영상수필’을, 그리고 수필의 사회참여에 대한 방안으로는 본격적인 ‘생태수필‘의 창작을 제의하려고 한다.
(1) 실험수필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1)란 193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개발된 일종의 창작기법이다. 일상성 속에서 자동화되고 관습화되어 버린 독자들의 지각을 깨뜨려서 낯설게 함으로써 문학적 체험과 인식의 시간을 늘리고, 그 결과로써 감동의 양과 질을 증진시키려는 표현 전략을 통칭한다.
일상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이야기들은 대체로 자동화되고 상투화되어 감동의 충격을 주기에 미흡하다. 따라서 작가들은 이야기에 동원되는 언어, 기법, 장치, 구조 등을 껄끄럽고 낯설게 만들어 탈자동화시켜 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지각과 인식의 시간을 늘려 주고 그 결과로써 감동의 충격과 미적 효과를 증진시키고자 한다. 이 때 감동의 체험시간과 강도는 독자가 독서과정과 수용과정에서 유기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낯설게 하기’의 미적 효과의 일종이다.2) 이것은 언어 자체에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독자들의 심미적 기능을 촉발시키고 미적 감동의 힘을 증진시키는 공통점이 있다.3) 따라서 TV나 컴퓨터 등과 같은 각종 문명 기기들에 의해 삶이 자동화되고 습관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은 더욱 필요하다고 보아진다.
슈클로프스키는 고의로 리듬을 거칠게 한 단어의 구사나 어법의 형태로 ‘낯설게 하기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안성수는 ‘낯설게 하기’를 모든 창작 기법과의 관련성을 전제하면서, 소재 선택의 차원, 기법의 차원, 구조의 차원, 언어 표현의 차원, 의미화(주제 해석)의 차원 등에서 폭 넓게 검토될 수 있다고 보았다.4) 그렇다면 ‘낯설게 하기’ 수법은 수필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다음의 작품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각트일 뿐이니까.
삶도 가벼워야 해. 인간이란 물과 단백질, 지방과 미네랄로 구성된 DNA의 운반체일 뿐이고 인간과 아메바의 차이는 인간이 아메바보다 더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운반하고 복제하는 것일 뿐이라잖아. 우리 몸은 유전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일시적 매개체일 뿐이며 정신적 활동도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에 봉사하는 장치에 불과해, 진정한 생명의 주체는 우리가 아닌 DNA라니까. 삶, 지식, 감정, 그건 모두 허상이야. 우리의 실체는 유전자의 전달을 위한 소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5)
위의 작품은 특이한 소재를 통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해석의 차원에서도 재치가 돋보인다. 가벼워지는 인간의 본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습관과 방식, 문화현상과 인간관계, 성과 생명,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가볍게만 다루려는 세태를 조목별로 때로는 자조와 해학을 곁들여 풀어냈다. 계속 가벼움만을 풀어낼 때 공허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인간은 GACT(Guanine Adenine Cytosine Thymine)라는 DNA 기호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다. 작의는 진지함과 생명존중 추구를 지향하지만 교훈조로 주장하기보다는 자발적 자기 성찰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경험의 기술에서 벗어나 과학적 지식을 동반한 지적 수필로 내용에 있어서 진일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형식에서도 ‘가벼움’이라는 주제와 잘 어울리도록 구어체를 사용하고 단락이 바뀔 때마다 “인간은 각트일 뿐이니까”라는 후렴구를 넣어 강조하고 있다. 외양을 가볍게 하여 독자의 눈을 끌어 무거운 주제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도록 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6)
수필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의 적용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수필의 특성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해석을 유출할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필의 ‘무형식’의 비의가 작품에 따라 알맞은 형식의 창조라고 전제해 본다면 수필창작에서 ‘낯설게 하기’의 시도는 새로운 감동의 전달을 위하여 불가피하다고 여겨진다. 수필문학의 미래는 끊임없는 작가의 실험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험을 위한 실험은 경계되어야 한다. 수필을 위한 실험, 문학을 위한 실험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실험에 앞서 수필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수필의 장르적 속성을 무시하고 수필의 범주를 벗어나면서 시도하는 실험은 무의미하다고 할 것이다. 수필론에 입각한 수필창작의 실험이 되어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2) 퓨전수필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따라 문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장르에 관한 통념의 해체이다. ‘시’ ‘소설’ ‘수필‘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 무너지고 경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통합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이 구축되고 있다. 퓨전7)의 물결이 문학에도 밀려오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시적 영역(서정시와 서사시, 극시)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해 비전문적인 문학, 신변잡기로 취급되면서 약간의 문예적 성격을 띤 글로 각인되어 왔다. 작가의 치열한 예술정신에서 비롯된 미적 감동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얻은 도덕성이나 윤리의식 같은 것을 부각시켜 표현하는 생활문으로 인식되어 왔다.8)
수필이 좀더 예술적인 글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와의 접목을 통하여 수필 나름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기 위한 적극적인 도전의식이 필요하다. 소재의 확장과 형식적 접목의 시도로 수필이 어떻게 변화되고 전개되는가를,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시인이 인생을 낱낱이 해부하고
소설가가 인생을 켜켜이 곱씹을 때
수필가는 인생을 음미하고 노닐자네
아름답고 은은하고 촉촉하고 아스라함
몇 십 년쯤 후진하여 유유자적 거닐자네
케미컬 스티드 다이내믹은 금기
동성애 포르노 사이버에 대한 글도
너도 금물 나도 사절 품위 손상 제1호라
패륜아 사창가 깡패들의 세상은
신성 침해적 소재라 얼씬도 말렷다.
효심의 불모여도 효심만을 자랑하고
부덕(婦德)은 간데없어도 부덕만을 입에 달고
신의(信義)를 팔면서도 신의만을 앞세우고
인정은 메말라도 인정으로 산다 하네
혼돈보다 정화 욕정보다 순애보
품위 있는 작품 위에 양심 팔아 사기극.9)
위 글은 모순이 많은 우리의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동하며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지 않은 변화 속에서 갈등적 요소가 생겨나는 점을 풍자하고 있다. 전통적 율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이라는 시간 위에 놓여진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한 작가의 눈에 비친 진실은 천편일률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10)
현대는 개성이 중시되는 다양성의 시대이다. 시나 수필, 소설도 통념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문학 장르의 경계가 얇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가능성 획득의 암시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시와 구별이 모호해진 수필이나 동화 같은 순수함을 지닌 수필, 소설 이상으로 독자를 긴장시킬 수 있는 수필 작품과 비평적 성격이 강한 수필의 모습이 등장하여 문학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퓨전수필‘이며 시적 수필, 소설적 수필, 비평적 수필, 희곡적 수필, 동화적 수필로 확장 발전해야 한다. 이 모두가 어우러져 녹아 내릴 때 ‘퓨전수필‘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11)
윤재천은 ‘퓨전수필‘을 주장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수필은 ‘퓨전수필‘이며 어느 형태의 문학이든 독자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 퇴출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 “퓨전 시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지루함을 경계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퓨전은 무질서한 해체나 집결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우리의 생활에 대응하는 문학(시와 소설, 수필)의 영역 구분에 대한 굳건한 성곽을 무너뜨리면서도 문학이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재창출되고 발전하는 문학의 형태를 의미하고 있다. 수필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상상력이 동원된 창의적인 수필의 기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이나 통합이 아닌, 이론을 근거로 한 작품의 창출을 희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필문학의 결집을 기대하고 있다.12)
퓨전수필에 대해서는 이유식도 언급한 바 있다. “시와 소설, 수필을 합성하여 문학을 창출하되 그것은 수필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영역, 즉 수필이란 동일 장르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13)이 그의 주장이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수필문학은 과거의 통념에서 벗어나 편견을 버려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접목을 통한 수필의 발전을 모색해야 할 시기라 할 것이다.
(3) 영상수필
현대는 디지털 시대이다. 유연성과 섬세함, 인내력 등이 요구되는 시대이며 급변하는 변화와 다양한 요구가 공존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생활에는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가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직장은 물론 가정에서도 그 활용도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듣고 싶은 음악을 컴퓨터에서 다운 받을 수 있고 극장에 가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작가들이 이미 육필에서 컴퓨터를 사용한 글쓰기로 옮겨 왔으며 자기만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수요자인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독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각종 작품 공모도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인터넷을 통한 문학작품의 홍보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종이책을 위협하며 전자책이 발간되고 있으며 인터넷 문학 사이트를 찾는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그만큼 사이버 공간의 활용이 작가나 독자 및 문학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밀접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14) 이러한 문학의 현실을 유한근은 그의 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세기의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내용 및 형식의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 왔던 것을 우리는 안다. 리얼리즘 문학운동이 다다이즘, 큐비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파격적인 모반적인 예술운동의 도전을 안팎으로 받아 왔으나 금세기 말까지 버텨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버틸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문학작품의 창작이 아니라 그 창작품을 실을 매체에 대한 불안과 염려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정보매체인 컴퓨터의 역할이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가. 그 확대 여부와 기능에 따라 예기치 않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수필을 위하여 그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고도화되어 가는 사이버시대에 전개될 사항을 간과할 수는 없다.15)
이제는 오프라인상에서 종이책만이 문학이던 시대에서 온라인상의 사이버 문학이나 영상문학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따라서 수필문학은 사이버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는 20~30대의 문학적 수준과 성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까지 수필은 중년의 문학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수필작가 층 또한 대부분 중년이어서 온라인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관계로 종이책의 위치가 수필계에서 여전히 보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독자층 곧 사이버 공간의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수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이해하여 적절한 대응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수필문학이 당면한 과제이다.
21세기는 인쇄매체로부터 영상 및 CD매체로 표현매체가 급변하고 있는 영상 정보화의 시대이다. 읽기로부터 보기와 듣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언어행위가 바로 문장화되어 만인에게 공개되며 음성화까지 되고 있다. 인쇄된 글을 읽는 경우는 그것을 읽어 본 후 작품성을 평가할 수 있지만 인터넷에 올려진 경우에는 우선 시선을 제압하는 광고효과 즉 마케팅 개념이 가미된 작품에 좋은 평가를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독자의 선택기준이 작품성보다는 마케팅 효과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결국 문학 작품도 멀티미디어 효과에 적잖이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수필은 미술(컴퓨터 그래픽)과 음악과 제휴하게 된다는 장르의 결합 형태를 기대하게 된다. 말하자면 작품의 마케팅 효과에 따라 그림과 음악을 곁들인 수필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CD매체가 문자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이행하게 되어 말과 음악과 동작이 동화되는 새로운 개념의 미의식이 출현하게 됨을 예상하게 만든다.16)
이제는 인쇄매체에 의존하던 과거의 낡은 문학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매체를 통한 전달 방법을 모색할 때 수필문학은 미래에 각광을 받는 새로운 문학으로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4) 생태수필
현대인들에게 당면한 최대의 관심사는 환경과 생태, 그리고 녹색문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의 온난화, 가뭄과 폭우, 돌풍, 오존층의 파괴 등으로 인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기상이변들이 속출하며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오늘의 생태적 위기가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가 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생태문학17)의 중요성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생태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를 문학에서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문학은 인간의 삶의 반영이며 더구나 수필은 이러한 실질적 삶의 문제를 고백하는 문학이라 더욱 진지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수필의 경우에 삶의 문제는 인간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생명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았다. 간혹 환경, 생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에도 자연파괴, 공장폐수, 대기오염, 원자력과 핵 위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고발이나 풍자보다는 대체로 소재주의적 차원에 머물고 있어 본질적인 생명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즉 생명의 위기적 상황에 대한 대중적인 각성이나 생명관의 변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성과 존재원리, 우주생명의 공동체적 질서관에 대한 발견이나 재인식 등에 관해서는 미진하다고 볼 수 있다.18)
이제는 이런 편향된 소재주의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대전환이 수필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태문학이란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태 문제를 성찰하고 비판하며 나아가 새로운 생태 사회를 꿈꾸는 문학을 의미19)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은 소재적 측면에서 생태계 파괴 문제에 그치지 말고 자신과 세계의 본성과 존재원리에 대한 인식, 개인의 생명의 존엄, 자연과 인간의 조화, 남성과 여성의 상호 관계성, 생산과 소비양식의 문제, 생태학적 윤리관, 삶의 다양성과 지역공동체, 인간욕망의 문제 등의 다채로운 소재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20)
그렇다면 이 같은 환경, 생태 즉 생태 존중의 문제가 수필문학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인가를 몇 편의 수필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박달나무가 빽빽히 들어찬 정수리 부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눈길을 뛰어다니다가 불안했던지 작은 바위 밑에 웅크리고 앉아 조그만 미동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십여 미터 전방에서 총을 겨눈다. 수선거리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토끼는 여전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너무나 곱다. 하아얀 산자락. 회갈색 몸집. 어느 청초한 여인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홍보석을 뽑아다가 박아 놓은 듯한 눈동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짐승이 아니었다. 가장 경건한 신성의 피조물이요, 잘 다듬어진 자연의 신비였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내 손은 차츰 떨리기 시작했고 눈을 바로 보기가 두려웠다. 아마 이럴 때를 두고 생명의 존엄성을 자각한다는 것일까. 이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신성 앞에 오직 나만이 무법자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시간을 정지시킨다. 그러나 토끼는 여전히 움직일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붉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어쩜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되레 가엾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 홍보석 눈동자에 위압당해 저열한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순간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하여 연발로 여섯 발을 쏴버렸다. 총소리는 산등성이 이곳 저곳을 울리며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결국 총알은 토끼 몸에 박힌 것이 아니라 쑥밭 같은 내 영혼을 겨냥한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음이 편할 것이라 믿었는데, 웬걸 그 붉은 눈동자의 환영은 그대로였다. 무턱대고 쏘아 버린 총소리에 밀려났다가 되돌아온 메아리에 실려 다시 머리 속으로 숨어 든 것이다. 그것은 아마 깨어 있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라 생각된다.21)
안재진의 수필 「눈동자」의 일부이다. 여기서 화자는 한 마리의 토끼를 사냥감이라기보다는 가장 경건한 신성의 피조물로, 잘 다듬어진 자연의 신비로 다가서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이 독자를 경외감에 빠지게 하는 상당히 발전적인 소재인 것이다.22)
다음은 생태계 파괴에 관련된 수필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용문은 장돈식의 「베짱이의 죽음」이다.
자연계를 눈여겨보노라면 신비스러운 발견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나 송어만이 아니다. 산방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길가 비탈에 자그마한 샘 구덩이가 있는데 해마다 알락배개구리가 여기에 알을 낳는다. 알은 이 웅덩이에서 부화하여 올챙이가 되고 여기서 자라난 올챙이가 네 발이 생기고 개구리 모양을 하게 되면 산으로 기어 올라간다.
이 놈들은 한 여름 내내 산을 활발하게 쏘다니며 벌레를 비롯하여 먹을 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포식한다. 그러다 어른 개구리가 되면 월동을 한 다음 봄을 기다렸다가 반드시 이 웅덩이를 찾아와 알을 낳아 대를 잇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웅덩이의 둑을 터서 물을 빼버렸다. 그 동안 꽤 자란 올챙이는 땡볕에 말라 죽고 어른 개구리가 다시 와도 물이 없으니 산란을 할 수가 없다. 걱정이 돼서 내가 삽과 괭이로 작은 둑을 쌓아 물이 고이게 해 주면 길에 고인 물로 도로 기반이 약해지는 것이 싫어 물길을 막아 놓은 사람이 못마땅한 수로원(水路員)은 또 터놓고, 쌓고, 트고…….
오늘 아침에도 산속 산책로를 오르는데 길바닥에 주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메뚜기 같았으나 자세히 보니 베짱이였다. 항문, 즉 산란관을 땅바닥에 꽂은 듯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채 차바퀴에 깔려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왜 여기까지 차를 타고 와야 하는지.
이들은 얼마 전, 10월 하순경까지도 풀숲에 숨어 영롱한 음향으로 가을을 노래하던 베짱이들이다. 한 생을 마감하기 전에 후세를 남겨야 한다는 숭고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알을 까 묻으려고 여기에 왔으나 지난해 그 어미가 했던 것처럼 땅을 팔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 길에다 시멘트를 바른 것이다.23)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자연을 찾아 계곡에 거처를 마련한 뒤 다가서게 된 자연의 신비로움과 인간의 모진 자연 파괴의 행태를 서술하고 있다. 그가 산방에서 쓴 글들을 보면 신의 섭리를 교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깨닫고 있으며 묘사하는 풍경 속에서 자연의 혼과 인간의 혼의 관계를 발견해 낸다. 그리고는 독자에게 자연 속에 인간의 원천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생태 문제는 단순한 환경오염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있어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비판하거나 동양정신의 미화나 자연을 신비화하는 관념으로만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에서 환경 문제의 수용은 반드시 생명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생태 문제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실천을 통해서만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생태나 환경의 문제는 인간의 삶과 직결된다. 수필이 이런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다루는 문학이라고 볼 때 생태 문제는 어느 장르보다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위대한 문학은 감동을 통해 태도의 변화를 가져온다.”라는 괴테의 말처럼 생명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수필문학의 미적, 사회적 기능을 확보하는 길이 될 것이다.24) 이에 대한 수필 작가들의 성찰과 실천이 매우 절실하게 요구된다.
지금 내 심장은 평균보다 몇 십 번이나 더 뛰는 것일까.
지바고가 걸어가는 라라를 보고 이름을 미처 부르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았을, 그의 심장은 몇 번을 뛰다가 파열했을까. 오래 전 햇볕이 내리꽂히는 운동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하며 생긴 불규칙한 맥박은, 2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본, 그 후부터 빈번해졌다.
심장이 급하게 뛸 때 마음은 조용해진다. 침묵 속에서 달콤한 죽음의 공포를 잠시 느낀다. 왼손 맥박을 센다. 하나, 둘……아흔 셋……. 부정맥(不整脈)이 있는 나는 맥박이 정상보다 빠르게 뛸 때 몸 속에 흐르고 있는 혈액의 흐름을 느낀다. 적혈구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적혈구는 1mm 속에 450만 개가 있고, 매초 1억 개가 소멸되며 혈액 속에서 100일 정도 활동한 다음 파괴된다. 지구의 두 바퀴 반이나 되는 혈관을 다니며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적혈구가 나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쉼 없는 울림, 울림.
복숭아 모양의 내 고향집에서는 소리가 납니다. 생명의 진동 소리이고, 다른 한 존재를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며 관계 확인의 이음줄이 떨리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나의 생성과 소멸은 창조주의 작품이지만 내 운행은 주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는 잠시도 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쉬면 주인을 잃게 되니까요. 나는 주인의 생명의 원천이고 내 생명의 기한이 허락받은 한, 달려야 합니다. 대동맥은 12차선 같아요. 그것을 지날 때는 마음대로 구르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어요. 나는 일정한 속도로 10만km를 달리고 싶은데…….
오늘도 우리 집에 지진이 일어났어요. 넘어지고 깨지고 서로 부딪치고, 짧은 동안의 동요지만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주인의 청각 신경을 통해 어떤 소식이 들어왔거나 잠을 못 잤거나, 몸을 혹사했나 봐요. 요즈음 이런 일이 예전보다 자주 일어나요.
난리를 겪고 나면 내가 운반해야 할 산소의 양이 줄어들어요. 그러면 나와 친구들은 할 일이 적어져 열심히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고 우리 몸이 더러워집니다. 그때 노르아드레날린이 나와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아세티코린인데, 이 친구가 오는 날은 축제 같아요. 깨끗한 물을 마시며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데 이 친구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됐어요. 너무 오래 그를 못 만나서,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어요. 내 상태가 어떤지 주인이 알아야 하거든요. 내가 격렬하게 움직이니까 주인이 힘들어 하더군요.
주인은 가슴에 손을 대며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나는 정신없이 뛰어가다 맑은 종소리를 들은 듯했어요. 이 소리에 내 발길은 평정을 찾았지요. 주인의 얼굴에 안도의 엷은 미소가 떠오르네요.
내가 지나는 길 중에는 넓은 곳도 있지만 아주 불편한 곳이 있습니다. 지저분하고 좁은 골목길입니다. 처음에 잘 정비된 도로가 훼손된 이유는 주인의 나쁜 습관 때문이지요. 잠 못 자고, 운동 안 하고, 게다가 피곤하다고 단 음식을 즐겨 먹기 때문입니다. 경화된 이곳을 지나다니기 싫다고 친구들이 움직이지 않고 벽에 붙어 버려서, 지금은 지나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빠져 나오면 내 몸도 더러워져요. 나도 벽에 붙어 움직이지 말까 망설이지만 내 심술을 막아 주는 것이 좌우에 커다랗게 두 곳이 있어요. 1조나 되는 친구들이 몸을 씻는 곳이지요. 주인이 아기였을 때는 밝은 붉은빛이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몸에 붙은 찌꺼기를 많이 떨어뜨려서 흑갈색으로 더러워졌어요. 도시의 매연과 연기를 몇 십 년 동안 마셨거든요.
오늘은 내가 우리 주인을 떠나는 날입니다. 나는 주인 몸에서 100일 정도밖에 못 살아요. 내가 없어지면 동생이 태어나서 주인을 지켜 주지요. 참 고단한 일생이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인은 숲의 향기를 한 번밖에 못 만나게 해 주며 나를 혹사시켰지만, 나는 주인을 좋아했어요. 복숭아 모양의 고향집을 다양하게 가꾸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체온말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따뜻하게 해 주었어요. 10만km의 여정이 힘들 때 언젠가 들었던 맑은 종소리나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받은 온기를 제일 꼭대기에 있는 본부를 통해 전해 주며 위로해 주었어요. 내가 남기고 가는 눈물방울이 주인이 이 땅에서 머무는 시간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면 좋겠네요.
심호흡을 한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밀착된 손을 통해 내 몸의 혈관을 흐르며 하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25조의 적혈구가 있는 인간의 ‘생명’.
어떤 부사, 형용사가 필요 없는 하나의 명사로 빛나는 시원의 단어다.
―조재은의 「혈의 누」, 『비너스의 서랍』, 분당수필문학회 8. 2004. pp.46-49.
조재은의 수필 「혈의 누」는 장인정신에 바탕한 ‘다르게 보기’의 예를 보인다. 기존의 통념을 배제하고 일탈한 변화. 통속적 사유의 세계를 벗어난 자유로운 비상이다. 텍스트의 낯설게 하기는 이런 새로운 시선에서 열리게 된다. ‘혈의 누’라. 독자는 이 수필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순환하는 피돌기에 긴장할 것이다. 착상도 그렇거니와 그 소재의 선택이 참신하다.
심장이 급하게 뛸 때 마음은 조용해진다. 침묵 속에서 달콤한 죽음의 공포를 잠시 느낀다. 왼손 맥박을 센다. 하나, 둘……아흔 셋……. 부정맥(不整脈)이 있는 나는 맥박이 정상보다 빠르게 뛸 때 몸 속에 흐르고 있는 혈액의 흐름을 느낀다. 적혈구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그렇다. “적혈구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고 했다. 잠시 ‘혈의 누’를 이인직의 신소설로 착각한 독자는 아연할 것이다. 긴장과 충격으로 이 수필의 읽기는 출발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생활 주변의 그런 소재와는 전혀 다른 뭔가 생소함이 독자를 일단 긴장하게 하고, 차츰 작품 속에 빠져들게 한다. 드디어 독자에게 뭔가가 짚여 오는 게 있다. 혈액의 순환. 작가는 우리 몸의 적혈구의 행로를 따라가고 있구나 생각하게 한다. 적혈구는 이 수필의 소재다. 이는 한마디로 소재를 보는 작가의 열린 시선 즉 ‘다르게 보기’일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한마디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 생명에 대한 공경은 바로 인간 사랑에 근거한다. 어떤 부사나 형용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시원의 단어가 바로 생명이다. 결국 이 수필은 소재와 제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면서 주제의 의미화에 성공하고 있다. 어찌 이 수필이 생명에 대한 외경만을 말하려 함일까. 우리는 작가가 이를 비유로 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에도 귀기울이게 한다.
1968년 바르트는 ‘작가의 죽음’을 선포했다. 여기서 작가의 죽음은 곧 문학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엇 때문에 바르트나 미셀 푸코는 작가의 죽음을 공공연히 선포했는가? 여기서는 먼저 텍스트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작가들이 발표해 내는 담론들이 “어떤 목소리도 대화자도 없는” 부재 현상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그래 작가란 마땅히 김병익의 언술과 같이 “세계를 상투적으로 보기를 그치고 끊임없이 부정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도모하는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마땅히 “한없는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절망과 도전, 모험과 패배의 무거운 짐을 지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지닌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글쓰기는 헤엄에 비유된다.
오늘의 작가는 늪 속을 유영(遊泳)하는 자일 것이다. 문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극도로 불투명해져 있고, “그 불투명한 액체성의 공간 속을 오늘의 작가는 헤엄치고 있다.”고 성민엽은 말하고 있다. 그래 여기 이런 불투명한 액체성은 한없이 끈끈하기까지 하다고 하였다. 문화산업과 멀티미디어, 사이버 스페이스가 또 그것을 움직이는 후기 산업사회의 자본과 권력이 강한 접착력으로 헤엄치는 동작을 옭아매고 있다. 그리하여 그 불투명함에 눈이 멀고 끈끈함에 속박되어 작가의 헤엄치기는 더욱 어려워져만 간다. 만일 힘에 겨워 동작을 멈춘다면 어찌 될까? 아마도 그때는 죽어 썩어서 늪에 동화되어 버릴 것이다. 이제 선택은 오직 하나 늪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의지밖에는 없다. 다르게 보기는 문학적 상상력을 고양하기 위한 장인정신일 것이다.
기계화, 정보화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유비쿼터스 즉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듯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장벽조차 허물어 버리는 크로스오버의 지적 낭만도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는 다르게 보기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