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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효정공파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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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오늘의 나를 만드신 분들에 대한 나의 이야기 / 송일용
錫龍 추천 0 조회 49 13.01.22 20:3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일용아, 너 가사도 잘 못 외우지, 이태리 말도 못 하지, 발성도 안 되지, 나이도 많지. 그래도 나를 의지해서 노래할래? 그래도 나에게 은혜를 입어서 노래할래?”라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물으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하나님. 당신의 은혜를 입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예, 주님! 당신을 의지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던 일 세 가지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피아노가 있으면 부잣집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의 찬양대에 들어가 합창을 하면서 처음으로 규모 있는 음악을 접해 보았다. 그 교회에 다닌 지 4년 반 정도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구원받은 교회로 옮겼다. 1987년 8월이었다.
구원받고 교회 안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으로 사모하는 일이 하나씩 생겼다. 내가 구원받은 무렵에는 자동차 운전면허가 없는 사역자들이 계셔서, 형제들이 운전해서 그분들을 모시고 심방도 다니고 지역 교회에도 다녔다. 그런 형제들이 하는 일이 좋아보여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사모한 첫 번째 일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어느덧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선교회에 대형 버스가 막 생겼을 때 어떤 형제가 교회 버스를 운전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일에 쓰임 받고 싶었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한 번만에 대형 면허도 받게 해 주시고 교회 버스 운전을 하게 해 주셨다. 세 번째는 박옥수 목사님과 함께 지역 교회를 다니면서 집회에도 참석하고 선교훈련을 받는 선교학생들이 참 부러웠다. 나도 박 목사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살고 싶었다.
해가 여러 번 바뀌어 선교학교에 입학했고, 일 년 뒤에는 경북 칠곡 왜관에 개척되는 교회로 파송되었다. 형제 자매들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전도하러 다녔지만 수도원, 수녀원, 카톨릭 성당으로 가득 차 있는 그 곳에서 한 사람 얻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나의 본모습
일 년에 장례를 네 번이나 치른 적도 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내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사역한 지 4년쯤 되었을 때 이웃 김천 교회에 오신 박 목사님을 만났다. 박 목사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하려고 했는데 그 마음을 다 잃어버리고 형편에 매여 사는 내 모습을 보여 드리기가 너무 죄송스러웠다. 목사님께서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자네, 사역하지 말고 노래하면 좋겠네.” 그때 합창단 활동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개척 교회에서 사역한 지도 얼마 안 되고,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음악을 시작하기에는 나이도 많은데….’ 하면서 목사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목사님과의 이 대화는 내 마음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하시는 말씀을 농담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나의 교만함과 목사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련함,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해가 바뀌고,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선교학교로 부르셨다. 여러 사역자들이 재훈련을 받기 위해 선교학교에 왔다. ‘이제는 합창단 안 하고 훈련받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여전히 합창단 일을 하면서 선교학교 형제들과는 따로 지냈다.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무대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목사님의 말씀을 안 듣고 무시하는 사람인 것을 알게 해주셨다. 아프리카 전도여행을 갔을 때나 대덕 수양관 신관을 건축할 때도 박 목사님은 몇 번이나 “자네는 안 돼!”라고 하셨다. 그럴 때마다 ‘정말 나는 하는 것마다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하고 마음에서 나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 그랬는데…’ 하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지 못했다. 나는 옳은 것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내가 옳다는 그 생각이 나를 고립되게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지 못하게 했다.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대상이 박 목사님이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나를 그분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로 드러내셨다. 박 목사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노래가 안 돼서 이렇게 힘든데
한번은 합창단에 같이 있는 몇몇 자매들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빼쩨르)로 음악공부를 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좀 데리고 가지. 이렇게 노래가 안 돼서 힘든데 왜 자기들만 가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박 목사님이 계시는 사택에 노크하고 들어가서 “목사님, 자매들 몇이 러시아에 음악을 배우러 간다고 하는데, 저도 좀 보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빼쩨르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거할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 다음 해인 2005년 3월에 우태직 형제와 나, 그리고 자매들 몇이 빼쩨르로 음악을 공부하러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설레고 기뻤다. 이번에 가서 잘 배워서 박 목사님이나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 전 해에 4주 연속 집회가 있는 때가 있었다. 대전에 살고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성악 레슨을 잘한다는 교수님 주소만 알아 가지고 서울로 기차를 타고 가서, 또 전철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렵게 만난 그 교수님은 너무 바쁘다고 하시면서 어떤 대학교 조교수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다시 어렵게 찾아가서 그 분을 만났다. 레슨비 10만 원을 요구하셨다. 내 사정을 이야기해서 8만 원으로 내리고 남은 2만 원으로 왕복 차비를 하면 딱 맞았다. 월요일 오전부터 집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요일 오후에는 다음 집회 장소로 모여야 했다. 금요일 밤에 집회를 마치고 집에 가면 밤 12시가 넘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한 시간 레슨을 받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든지 굶든지 하면서 대전으로 내려와서 저녁에 장년회에 참석하고 영상채팅을 보고, 다음날 일요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다음 집회 장소로 이동했다. 그렇게 4주를 힘들게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빼쩨르에서의 음악 공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도 나를 의지해서 노래할래?”
막상 가 보니 선교사님이 사시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공부를 하는데, 주위에 계시는 많은 분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것을 보았다. 처음 만난 교수님은 72세된 할아버지셨다. 노래로 시범은 못 보여주시고 우리가 부탁해서 젊었을 때 부르셨던 노래를 CD로 들었다. ‘잘 부르셨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의 실력은 거의 진보가 없었다. 한글 가사도 잘 못 외워서 실수를 많이 했던 내가 거의 접해 보지 못한 이태리 가곡이나 다른 언어로 된 노래를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외워서 부르는 것이 정말 자신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거의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시간표를 짜놓고 기도회도 하고 또 말씀도 나누었다. 박 목사님께서 ‘그라시아스 합창단은 세계적인 합창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으로 배우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나누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좋은 오페라 공연이 있어서 가 보면 더욱 힘이 빠졌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노?’ 하면서 낙심했다.
하루는 호흡에 대한 감각이나 소리를 공명시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연습했는데, 정말 못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좁은 집에서 달리 갈 데도 없어서 화장실에 들어가 눈이 시뻘개지도록 통곡을 했다. ‘목사님 말씀처럼 나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야. 내가 왜 러시아에 보내 달라고 했을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화장실 거울에 비췬 내 모습이 너무 보기 싫었다.
그 다음날 인터넷으로 박 목사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귀신 들린 딸을 낫게 하려고 몸부림쳤지만 고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낙심 속에 있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로 가서 소리쳤다.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반응이 없으셨다. 그럴수록 여인은 더욱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 질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내가 이렇게 무시하는데, 그래도 나를 의지할래? 내가 이렇게 무관심한데, 그래도 나에게 은혜를 입고 싶으냐?’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치 “일용아, 너 가사도 잘 못 외우지, 이태리 말도 못 하지, 발성도 안 되지, 나이도 많지. 그래도 나를 의지해서 노래할래? 그래도 나에게 은혜를 입어서 노래할래?”라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물으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하나님. 당신의 은혜를 입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예, 주님! 당신을 의지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때를 넘어왔다.

우리 마음을 잡아주시는 분
합창단에 있으면서 박 목사님과 사모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다. 특히 연습할 때나 집회 때 합창단이 다 모이면 목사님이나 사모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입는다. 교회를 시작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오신 지난날의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릴 때가 참 많았다. 나도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작은 문제나 나의 연약함 속에 매여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문제도 아니구나’ 사모님의 간증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나는 저분들과 마음이 너무 다르다. 내 마음으로는 합창단을 할 수 없구나’ 하나님께서 박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주셨던 마음을 받아서 살고 노래할 수 있도록 순간순간 이끌어 주셨다.
나 자신이 참 싫었다. 말도 잘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도 싫고, 마음도 좁고 약하고, 고집도 세고…. 뛰어넘어야 할 것이 참 많았다. 무대에 서면 관중을 의식하고 마이크도 의식하고 나 자신도 의식했다.
사모님께서 우리 합창단에게 “관객보다 높은 무대에 서지만, 여러분들 마음은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낮은 곳에 있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세요.”라고 하시며 우리가 마음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뒤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며 우리를 품어 주셨다. ‘그 힘으로 합창단이, 또 내가 오늘도 무대에 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박 목사님께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위해 노래할 때 합창단이 지켜진다.”고 자주 말씀하시면서 합창단 마음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 주셨다.
첫 번째 독창회
다시 빼쩨르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06년 2월,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새로운 교수님을 만나게 해주셨다. 아나똘리(바리톤) 교수님이다. 18세기 벨칸토 발성을 연구 중이라고 하면서 아주 쉽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 아나똘리 교수님은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는데, 그 전 해와 달리 마음에 와 닿고 참 편안했다. 내 마음이 자유로웠던 것은 교수님이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을 때나 발성이 안 될 때도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주면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감기증상이 있어서 몸이 좀 안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교수님은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발성을 시작하셨다. 결국 레슨 시간을 끝까지 다 채우시고 나에게 “지금까지의 레슨 중에 오늘이 제일 좋았다.”고 하면서 함박 웃어 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현관문까지 따라 나가 외투를 입혀 드리면서 ‘스빠씨바(감사합니다)’ 하고 포옹하자, 교수님이 웃는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순간,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전혀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그분의 마음이 느껴져서 눈물이 핑 돌았다.
박 목사님은 합창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창회도 하고 독주회도 해야 실력이 향상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006년 9월에 ‘송일용 독창회’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상당히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곡 선정도 안 됐고 발성이 미숙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성악이든 기악이든 몸에 힘을 빼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나는 발성이 완숙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목에, 턱에, 어깨에 힘을 빼고 호흡으로 받쳐서 받쳐진 그 호흡으로만 노래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교수님은 ‘시간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 노래가 잘 되지 않자 주위에서 많이 염려하는 분위기였고, 리허설을 할 때도 별 차이가 없었다. 합창단원들이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기도했다. 독창회가 열리는 진주 지역 교회에서도 나를 위해, 또 독창회에 초청한 사람들을 위해 철야 기도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를 입는다는 마음이 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 박옥수 목사님이 메시지를 전하시는데, 나도 가족들과 친척들을 초청해서 그분들 평생에 한 번이라도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이 공연은 내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다. 이 독창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독창회를 하는 날, 담담했다. 친척들과 처갓집 가족들도 많이 오셨다. 막이 오르고 1막이 시작되었다. 평소 무대에 설 때와 다르게 마음에 긴장도, 부담도 없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주의 마음임을 느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기도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1막을 무사히(?) 마치고 무대에서 나올 때 울컥하며 눈물이 살짝 고였다. 몇몇 단원들이 “이제 시작이야.” 하며 나를 무대로 내보냈다.
2막도 주의 은혜로 마쳤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무대 뒤로 나왔는데, 합창단원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감동과 눈물의 도가니였다. 3, 4막도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고, 당신의 믿음으로 나를 이곳에 세우신 목사님을 초청하는 시간이라는 마음으로 박 목사님을 무대로 초청했다. 목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무대 위로 나오시는데, 나는 그 순간을 놓칠세라 목사님을 끌어안았다. 목사님은 ‘이 사람, 송일용이 맞아?’ 하시는 듯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내 얼굴을 쳐다보셨다.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공연 후에 공연장 로비에서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고등학생 때 은사셨고 지금 그 학교에 교장으로 계신 선생님을 만났다. 삼천포교회 목사님이 그 분을 초청하셔서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공연장에 오셨다. 선생님께서 “어촌에서 음악가가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내 제자가 음악가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너무 기쁘다.”고 하셨다. 형제 자매님들 외에 새로 오신 분들이 500명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독창회를 마치고 합창단 안에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연회장의 포도주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하인들은 아는 것처럼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내 노래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나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근심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것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보았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한번 부담을 뛰어넘게 해주셨다.
목사님은 그라시아스 합창단원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교만해질까 봐 염려하시며 자주 “항상 부족한 사람임을 알아야 되네.” 하고 말씀하신다. 나는 어디로 보나 교만해질 조건이 없는 사람인데도 형편 속에 쉽게 만족하고 머물러버리며, 대충대충 살아온 미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나의 틀과 마음을 깨뜨리고 찢으셨다. 나는 노래를 익히고 발성을 배우는 데 어떤 단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쏟아야 했다. 합창뿐 아니라 독창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빼쩨르에서 마음의 한 고비를 넘다
2007년 2월, 다시 빼쩨르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단원들과 함께 갔다. 러시아로 출발하기 전에 박 목사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하다 보면 한계를 만난다. 그러나 아무나 그 한계를 넘을 수 없고, 믿음이 있어야, 그리고 마음의 세계가 있어야 넘어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마치 러시아에서 내 마음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아시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람이 많아서 테너 교수님도 구하고 베이스 교수님도 구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계획했다. 나는 계속 아나똘리 교수님께 레슨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번에는 고음을 내는 것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는데, 교수님은 바리톤 아리아 중에 제일 어려운 곡이자 내 목소리에 어울리는 곡이라고 롯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한 아리아를 불러 보라고 하셨다. 정말 그 곡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템포도 너무 빠르고 발음도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가사를 붙이지 않고 ‘랄랄랄라’로 배우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셨다. “이 곡은 우리 빼쩨르 국립음악원 학생들도 6개월 이상, 1년 동안 배워야 부를 수 있는 곡이야.”라고 하셨다.
짜여진 시간표를 따라 새벽에 일어나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 아침식사 후 다 같이 모여서 고린도전.후서를 읽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린도교회에 일어났던 문제들이 내 마음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 말씀에 비추어졌다. ‘나는 이렇게 연약해서 어려운데, 아무도 몰라주네.’ 하면서 스스로 연약함에 매여 살고 있었다. 영적인 생각이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에 마음을 내어주고 용납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힘만 들 뿐이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들었던 목사님의 말씀은 뒤로한 채, 나 자신을 바라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얼마 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츄안츄안 족에게 포로로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사고력과 기억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구속받는 삶에서 구해주려고 힘들게 찾아온 어머니를 향해 활을 쏘아 죽이고도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졸라만’을 생각하면서, ‘내가 사단이 씌운 생각에 잡힌 졸라만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단이 주는 생각에 잡혀 있는 나, 그 생각을 뿌리칠 힘도 없는 나를 이끌어 주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 활을 쏜 사람이 나였다. 내 인생이 저주스러웠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좀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다.
박 목사님 말씀처럼, 신앙에서도 음악에서도 마음의 세계가 없으면 이런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내 마음이 대적자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죄인으로 내려갔다.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 주셨다. 이번에는 러시아에서 발성이나 음악적인 문제보다 신앙의 문제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간섭하셨다. 때로는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고린도후서 6장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소망의 말씀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6:17~7:1)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만한 조건은 나에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약속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그 말씀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하고 계셨는데, 졸라만처럼 사단에게 속아 그 말씀의 실상을 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순간 마음이 평안해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눈물이 흘렀다.
내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만 의뢰하지 않고 사람을 기대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큰 문제였음을 알고 나서,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해야겠다고 마음이 정해졌다.
마음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음악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2개월 동안 레슨을 받으면서, 어려웠던 롯시니의 곡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고음을 내는 것이 안 되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올 날을 일주일 남겨놓고 아나똘리 교수님이 고음에 대한 레슨을 해주셨다.
고음으로 갈 때 공기가 일할 수 있도록 목이나 가슴을 더 열고 소리를 앞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도 마음의 세계와 연결이 되었다. 어려운 대상 앞에서 내가 더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음을 내는 감각을 조금 익히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음악 공부는 평생 공부다. 거기에 비하면 3개월은 너무 짧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마지막 레슨시간에 교수님께서 “작년에는 내 말을 잘 이해 못하더니 이번에는 좀 알아듣는다.”고 격려해 주셨다. 감사한 시간이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한국에 돌아와서 엄청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정기연주회 연습을 마쳤을 때 박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시면서 “지금의 그라시아스가 진짜 그라시아스가 아니다. 믿음으로 한번 뛰어넘은 사람이 진짜 그라시아스 합창단원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목사님께서 합창단 이름을 그라시아스(감사라는 뜻의 스페인어)라고 지어 주셨는데, 어떤 형편이나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또 자신의 연약함과도 상관없이 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그라시아스 멤버라는 마음이 들었다.
2007 정기 연주회, 독창회, 전반기 대도시 대전도집회, 일본 대전도집회, 멕시코 월드캠프, 러시아 아티스트 뮤직 콘서트, 2007 월드캠프…. 바쁜 일정이었다. 목사님은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줍시다! 근심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어서 안고 있는 그 근심을 떨쳐버리게 해줍시다.” 하고 우리에게 외치셨다. 그 말씀처럼,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것을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주었고, 또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참 기뻤다. ‘아, 박 목사님은 이런 맛으로 사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사랑받는 자), 두려워 말라.”(사 44:1~2)
요즈음 이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지으신 것이라고 하신다. 나는 연약한 내가 싫어서 때로는 연약하게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불평도 해보았지만, 하나님은 끄떡없으시다. 내 마음에 크게 보인 것은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부분이다. 내 연약함이 많을수록 하나님이 도와 주실 일이 많은 것이다.
이제까지 나 자신만 바라보았지 나를 도와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말씀 앞으로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복되다는 사실을 조금 맛본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라는 주제의 간증을 부탁받았는데,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복음만을 위해 사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박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그라시아스 합창단을 빼면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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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23 10:40

    첫댓글 그간 러시아에서 있었습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만남의 모양이 떠오릅니다. 그 길 한 켠에서 기도합니다....

  • 13.01.23 11:37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합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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