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신도회 결성 ‘포항회관’ 출발
역대 주지 스님
1985.01.23 1대 안산 스님
1986.06.29 2대 월산 스님
1989.01.17 3대 월산 스님
1990.09.05 4대 용암 스님
1993.01.20 5대 무원 스님
1997.01.19 6대 무원 스님
2000.03.16 7대 덕해 스님
2001.01.05 8대 진덕 스님
2001.01.12 9대 경천 스님
2005.01.13 10대 용암 스님
2009.01.04 11대 진덕 스님
2013.01.02 12대 문덕 스님
역대 신도회장
1970 1대 전덕일
1975 2대 이준영
1977 3대 김정배
1979 4대 이달환
1981 5대 이달환
1982 6대 도영봉
1983 7대 이경출
1986 8대 이천오
1987 9대 이경출
1988 10대 최상규
1992 11대 강재수
1995 12대 최상규
1998 13대 최상규
2001 14대 정건도
2004 15대 최병렬
2007 16대 최병렬
2010 17대 김길환
2013 18대 최병렬
황해사 略史
1970 김도선, 진종수, 권분남 불자 등 10여 명이 구인사 참배 후 덕수동에서 법회 후 신도회 결성. 이후 김도선(삼신연탄 운영) 불자 자택, 죽도시장 상가 2층(임대), 덕산동(113-1번지) 등으로 옮겨 다니며 ‘포항회관’ 이름 내걸고 법회 봉행
1980.9 포항시 두호동 994번지 561평을 매입해 회관 이전
1981.5 관세음보살상 봉안
1988.12 포항시 득량동 68번지 대지 1,524평을 사찰부지로 매입
1989.1 대충대종사, 사찰명을 황해사(黃海寺)로 명명
1994.11.23 포항시 학잠동 산20번지 168~169번지 내 2.200평 매입. 건립 기공식 봉행
1995.1 포항지부로 승격
1998.11.29 황해사 건립 낙성 대법회 및 대승전(현 대웅보전) 1,053존불 봉안식
1999.1. 학잠동 산19번지 640평과 산19-1번지 110평 매입
1999.1 전두환 전 대통령 황해사 방문
1999.5 제1회 천태 황해예술제 개최
1999. 삼보 석등 점등
1999.5 독거노인 및 소년소녀 가장 돕기 바자회
2000.8 학잠동 산21번지 2100평 매입
2000.12 창립 30주년 기념 대법회
2008.11 황해사 증축불사 낙성 및 삼존불 봉안 대법회
2008.11 어린이 음악아카데미 발표회
2009.5 황해사 전통사찰요리반 결성
2009.6 일심청정 관음정진 백만독 정진법회 봉행
2009.8 관음33응신 봉안 고불법회
2009.9 제36회 상월원각대조사기 청년회 배구대회 우승
2009.10 일심청정 관음정진 백만독 불사 회향법회 및 대웅보전ㆍ관음전 현판 제막
2010.1 황해사 전통사찰요리 발표회
2010.4 제2차 일심청정 관음정진 백만독불사 입제
2011.3 관음33응신 봉안법회
2011.4 관음33응신 봉안 기념 학술세미나
2011. 전통음식보존연구회 발족
2011.11 제2회 전통 음식문화 축제 개최, 백화정 낙성
2012.4 자비동산 내 ‘백화정 연기문’ 봉정법회
2012.7 해동제일 관음신행 근본도량 발원 대법회
2012.10 자비동산 내 수월관음 봉안 및 천태조사 법어비 제막 법회
김도선 불자 등 10여 명 모여 법회
음악ㆍ문화교실 운영 등 포교 주력
1970년 포항에서 유명한 삼신연탄 안주인인 김도선(여) 불자를 비롯해 진종수ㆍ권분남 불자 등은 구인사를 참배한 뒤 포항으로 돌아와 신도회를 결성한다. 현 황해사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변변한 법당이 없어 처음에는 포항 덕수동에서 10여 명이 모여 법회를 봤다. 이후 김도선 불자 자택, 죽도시장 상가 2층(임대), 덕산동(113-1번지) 등으로 옮겨 다니며 대충대종사로부터 받은 ‘포항회관’ 이름을 내걸고 법회를 봤다. 법회를 거듭할수록 신도수도 늘어났다. 법회 때는 본산(구인사)에서 스님들이 내려와 법문을 하며, 신도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 전에 올릴 과일을 살 돈 조차 없을 정도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법회 때는 빚을 내 과일을 사서 부처님 전에 올리고, 신도들에게는 점심공양으로 국수를 삶아 주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사정은 좀 나아져 몇몇 신도들이 개인 돈으로 공양을 올리곤 했단다.
포항회관은 1980년 두호동에 56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해 회관을 이전하면서 한 단계 발전한다. 신도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회관 매입에는 김도선(사찰에서는 ‘삼신보살’로 통했다. 삼신연탄 안주인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불자의 힘이 컸다. 김도선 불자의 며느리인 이성희(여, 65) 황해사 복지위원은 “당시 시어머니께서 환여동(당시는 환호동)에 있던 280여 평의 집을 (포항회관에) 희사했다. 이 집을 팔아 두호동에 사찰 부지를 산 것으로 안다”며 “이 일은 나를 제외하고 황해사 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두호동으로 회관을 옮기고 나서 신도는 200~300명으로 늘었다. 이로 인해 포항회관의 재정적 여유도 생겼다. 불자들이 낸 시주금을 모아 1988년 득량동에 사찰부지 1,524평을 매입해 이전 준비를 했다. 이듬해 대충대종사는 사찰명을 황해사(黃海寺)로 명명했다. 신도를 늘려가던 황해사는 1994년 학잠동 산 20번지(현 황해사 부지)에 대지 2,200여평을 매입한 뒤 사찰 건립 기공식을 봉행,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불사금이 없어 주지 스님을 비롯해 신도들은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김승규(여, 59) 부회장은 “당시 주지 (무원)스님이 태백에서 숯을 많이 가져왔고, 신도들이 트럭에 싣고 나가 팔았다. 절에서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고, 때론 시주를 받아서 불사금에 보탰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성희 복지위원은 “건물이 완공 되기 전에는 잠잘 곳이 없어 스님들이 내 집에서 주무시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사찰에 차가 없어 초파일 제등행렬 때 집에서 타던 차(포니)와 3륜 연탄 트럭을 깨끗이 세차한 뒤 종기를 달고 행렬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1995년 황해사는 포항지부에서 포항지회로 승격돼 사격(寺格)이 높아졌다. 스님과 신도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황해사는 1998년 11월 29일 낙성 대법회 및 대승전(현 대웅보전) 1,053존불 봉안식을 봉행, 포항지역 관음기도도량으로 재탄생했다.
건물은 1층 식당 및 기계실,2층 종무소 및 합창단실, 청년회실, 학생회실, 어린이실 등 총236평. 3층 요사채 및 천태강의실, 4층 1,053존불과 관세음보살,상월원각대조사 진영, 신중탱화를 모신 대승전 등을 갖춘 종합불교회관이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꾸준히 사찰 주변 토지를 매입해 사역(寺域)을 넓혔다. 1999년 1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황해사를 방문해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증축불사 완료 및 삼존불 봉안 대법회, 2009년 대웅보전ㆍ관음전 현판 제막, 2011년 관음33응신 봉안하는 등 도량 외연 확대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내적으로는 일심청정 관음정진 백만독 불사, 십선실천운동 등을 통해 불자들의 신심함양에도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11년 백화정 낙성, 2012년 7월 ‘해동제일 관음신행 근본도량 발원 대법회’를 봉행한데 이어 자비동산 내 수월관음 봉안 및 천태대사 법어비를 제막, 관음도량으로서의 면모도 갖췄다.
황해사는 문화포교에도 진력하고 있다. 1995년 제1회 천태 황해예술제를 시작해 지금까지 매년 열고 있고, 2009년 전통사찰음식 보존연구회를 결성한 후 전통사찰요리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 매년 김장김치를 담가 지역 소외 이웃들과 나누는 한편 독거노인 및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자선 바자회, 연말연시에 지역 관공서를 통해 저소득 가정에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다.
황해사에는 다도회, 합창단, 청년회, 학생회, 어린이회, 산악회 등 다양한 신행단체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활발하게 활동을 했으나 현재는 침체돼 어린이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들 신행단체의 창립 시기나 활동상황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내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린이 음악아카데미를 통해 어린이 포교가 활성화 되고 있고, 문화교실에서 △요가 △꽃꽂이 △전통사찰요리 △민요장구 △서예 △다도 등의 교육을 진행, 포교는 물론 신행단체들이 활성화 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