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7:1 <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행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행 17:10 <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다 >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행 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행 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6 <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다 >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행 17: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행 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행전 제 17 장
=====17:1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었다 (16:12,40)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 ' 암비볼리 '(Amphipolis) 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 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 ( 要衝地 ) 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 ' 아볼로니아 '(Apollonia) 는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 ' 와는 다른 곳이다 .
데살로니가 -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 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 (Thermaic Gulf) 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 데살로니가 (Thessalonica) 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
그래서 키케로 (Cicero, B.C.106-43) 는 이곳을 ' 우리 영토의 심장부 ' 라고 했다 .
이 도시는 B.C.42 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 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 (Civitaslibera) 의 특권이 주어졌다 .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 만의 도시
로 정치 ,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
다 ( 살전 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
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 ( 살전 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 여 km 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
다 (R.N.Longenecker).
유대인의 회당 - 렌스키 (Lenski) 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 다
른 두 도시 , 곧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부분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인
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반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도체와 회당이 있었
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그곳을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
=====17:2
자기의 규례대로 (* , 카타 토 에이오도스 ) - ' 규례 ' 의 헬라어 ' 에
이오도스 ' 는 ' 에도 '(* ) 의 완료 부사로서 ' 습관 ', ' 익숙한 일 ' 등의 뜻이다 . 이는
이미 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 살라미 (13:5), 비시디아 안디옥 (13:14), 이고니온 (14:1) 등에서 바울은 이
미 그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파했다 . 바울이 회당을 다른 곳보
다 먼저 찾은 이유는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 물론 바울
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거부당한 후에
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식의 기계적인 수준을 밟아 증거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 다만
바울은 자신이 ' 이방인의 사도 ' 로 부름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족 유대
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 ( 優先的 ) 인 일로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 롬 1:16;2:9,10).
세 안식일에 - 이 구절만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 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 바울은 3 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 회당에
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 (Furneaux).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 쓸 것 ' 을 공급받
았고 ( 빌 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점 ( 살전 2:9) 등이 이 사실을 뒷
받침한다 .
성경을 가지고 -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
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
강론하며 (* , 디엘려사토 ) - 원형 ' 디알레고마이 '(* ) 의 제
1 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 담론하다 ', ' 문답하다 ', ' 연설하다 ' 등의 뜻을 나타
낸다 .
=====17:3
뜻을 풀어 ... 증명하고 - 여기서 바울의 설교 형태가 잘 드러난다 . 바울 설교의 중
심은 대개가 ' 증거와 선포 ' 의 형태였다 .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
하였다 . 이러한 증거와 선포는 13:16 이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 그리고 그가 메
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 21:23; 시 2,16,110 편 ;
사 53 장 등이었을 것이다 .
=====17: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뒤따른다 .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 ' 경건한 헬라
인들 ' 을 가리킨다 . 여기서 20:4 에 언급된 ' 아리스다고 ' 와 ' 세군도 ' 가 예수를 믿게 되
었던 것 같다 . 그리고 ' 귀부인들 ' 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
도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 한편 호르트 (Hort) 는 이 ' 귀부인들 ' 은 다른 사람들
이 아닌 ' 이방인들의 유대인 아내들 ' 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 한편 여
기서 헨헨 (Haenchen) 은 사회 지도급 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데
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그들이 바울 일행에 대한 박해를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
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 핍박의 주동세력은 시당국자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 (I.H.
Marshall).
=====17:5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에서처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
아들이지 아니하고 ,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 살전 3:3-10 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
이었다 .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쫓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
등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
( 罵倒 ) 하는 것이었다 .
야손 - 이는 ' 여호수아 ' 또는 ' 예수 ' 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 학자들에 따
라서는 이 사람이 유대인 (Lenski, Longenecker) 이 아니면 이방인 출신 (Robertson) 이라
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 .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 바울과
그의 전도단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처럼 (16:14) 여기서는
' 야손 ' 의 집에서 머물렀다 . 그런데 본 구절의 ' 야손 ' 이 롬 16:21 에 언급된 바울 친척
인 ' 야손 ' 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
=====17:6
발견치 못하매 -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
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
야손과 및 형제를 - ' 형제 '(* , 아델포이 ) 란 야손의 형제를 의미한다기 보
다는 여기서는 예수 안에서 함께된 ' 그리스도인들 ' 을 의미한다 (Howard Marshall). 불
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그들의 눈에 띄는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가당치 않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
읍장들 - ' 폴리타르카스 '(* ) 라는 칭호는 B.C.2 세기부터 A.D.3 세기에
걸친 시대의 비문에서 발견되었고 마게도냐의 도시들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 이 칭
호는 로마 영토 내의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킨다 . 로마는 데살로니
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 , A.D.1 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고 그후 2 세기에는 읍장이 6 명이 되도록 늘렸다 .
천하를 어지럽게 - 당시 ' 천하 ' 라고 하는 말은 곧 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켰다 ( 눅
2:1). 따라서 본문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셈이다 .
=====17:7
들였도다 - 헬라어 ' 휘포데데크타이 ' 는 원형 ' 휘포데코마이 '(* ) 의 현
재 완료형으로서 ' 손님으로 영접하다 ' 는 뜻이다 . 이는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 또 야손의 음모로 그의 집에서 작당 ( 作
黨 ) 하여 범죄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여기서 가이사의 명은 가이사 율리우스 (Julius Caesar)
의 ' 황제의 법령 ' 을 뜻한다 .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
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고 제국 내 모든곳에 적용되었다 .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
역이었다 .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 그들은 바울
의 설교 중 ' 하나님의 나라 ' 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
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지도 모른다 (14:22;19:8;20:25;28:23,31). 그리고 이
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
고 그의 서신들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 왕국 ' 이라든가 ' 임금 ' 이란 말을 가
능한 회피했을 수도 있다 (R.N.Longenecker). 그렇지만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초월하여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
=====17:8
무리와 읍장들이 ... 소동하여 -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
었다 . 이러한 억울한 누명에 대해서 야손과 그 일행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으며 그
들을 위해 증언해 줄 바울과 실라도 그곳에 없어서 읍장들의 처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없는 반을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
=====17:9
보 ( 保 ) 를 받고 놓으니라 - 법정 용어로서 판결이 명한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이다 .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바
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
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야손 일행은 이후로 바울의 일행을
도시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
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
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어려움이지 야손과 그의 일행의 보석금에 관한 문
제가 아니다 (D.E.Haenchen). 한편 살전 2:18 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 사단이 막음 ' 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
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 (J.W.Packer).
=====17:10
밤에 형제들이 - 읍장들이 보석금을 받고 조건부적으로 야손의 일행을 석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 체류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
다 . 야손이 읍장들에게 끌려갔을 때 아마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 있었을 것이고 낮보다는 다소 안전한 밤이 되서야 소수의 새로운 개심자들의 길
안내로 데살로니가를 떠날수 있었을 것이다 .
베뢰아 -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
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
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
=====17:11
더 신사적이어서 - ' 더 신사적 ' 의 헬라어 ' 유게네스 '(* ) 는 비교급의 형태
로서 ' 가문이 좋은 ', ' 출신이 좋은 ', ' 고귀한 '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간절한 마음으로 (* , 파세스 프로뒤미아스 ) - ' 프로뒤미아스 ' 는
' 열심히 ', ' 자신해서 ', ' 준비된 ' 등의 뜻이며 ' 파세스 ' 는 ' 모든 ' 이란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 마
13:3-8).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 상고하다 ' 의 헬라어 ' 아나크리노 '(* ) 는
' 자세하게 골라내다 ', ' 체를 쳐서 가려내다 ', ' 탐색하다 ', ' 조사하다 ' 는 등의 뜻을 내
포한다 .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 ( 審問 ) 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
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의를 다시
금 잘 새겼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고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
=====17:12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 - 상류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헬라인
들을 가리킨다 . 그 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방인들과 이교도를 믿던 사람들도 다
소 있었을 것이다 . 복음은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 롬 1:16). 한편 바울의 아시아 여행
에 동반했던 부로의 아들 ' 소바더 ' 도 (20:4) 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 소동케 하거늘 - 베뢰아에서 선교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달
려왔다 . 이들은 똑같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
지는 못하였다 . 그런데 이 소동의 무리에 베뢰아 사람들이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 이는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베뢰아의 유대인들
이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 ( 適意 ) 를 나타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
=====17:14
바울을 ... 바다까지 가게 하되 ... 거기 유하더라 -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
동으로 인하여 베뢰아 도시 안에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
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난다 . 바울이 바다로 나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메돈 (Methone) 이나 디움 (Dium) 이나 피드나 (Pydna) 로 갔을
것이다 (Longenecker, Lenski).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보다는 다소 위험이 적다
고 판단되었던지 베뢰아에 계속 체류하여 아직은 성장이 미약한 그곳 교회를 보살폈던
것 같다 .
=====17:15
바울을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 바울이 다른 곳을 두고 하필 아덴으로 갔던 이유
는 이곳에 언급되지 않는다 . 다시 말해서 아덴이 베뢰아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 장소
여서인지 (Haenchen), 아니면 마게도냐가 안전해지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계속하려고 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의 대부분을 여행
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장소를 택해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덴을 선
택해 그곳을 찾아갔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가장 좋을 듯하다 (Lenski).
실라와 디모데를 ... 속히 오게 하라 - 바울이 아덴으로 갔을 때 디모데가 베뢰아에
남아 어떤 일들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 다만 그들의 행적을 서
신서와 비교해 보면 다소 윤곽이 잡힌다 .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
난다 ( 살전 3:1). 그러나 바울은 다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 ( 살전 3:2), 실라
는 마게도냐 ( 추측컨대 빌립보일 것이다 ) 로 파송한다 . 이 사이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으며 (18:1),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 (18:5; 살전 3:6).
=====17:16
아덴 - 아덴 (Athens) 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 (Piraeus)
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 동쪽으로는 펜텔리
쿠스 산 ,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 (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 아덴 '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페리클레스 (B.C.495-239) 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 (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 아
울러 문학 , 철학 , 과학 ,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
였다 .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 (B.C.431-404) 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 그
렇지만 그 문학적 ,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 그러나 그 화려한 명
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
=====17:17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 멘 운 '(* ) 이란 말은 ' 따라서 ' 라는 뜻으로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 내며 본 단락의 도입부분 (16 절 ) 과 본론부분을 연결시켜 준다 (17 절 이하 ).
회당에서는 - 바울은 그의 규례대로 먼저 회당을 찾았다 . 어떤 학자는 바울은 먼
저 회당을 방문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누가의 독특한 서술 양식에 따라 일부러 첨가된
것이라고 본다 (Conzelmann). 그러나 바울의 습관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역사적 사
실에 대한 기록으로 봄이 나을 것이다 .
저자에서 - 아덴에는 다른 그리이스 도시들처럼 오직 하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
다 . 이 시장은 상업과 웅변과 철학적 담론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한가한 사람들이 소
일 ( 消日 ) 을 위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였다 (Meyer). 한편 헨헨 (Haenchen) 은 이 시장
이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옹기시장 (* , 케라메이코스 ) 으로서 아덴의
생활중심지였다고 설명한다 .
변론하니 (* , 디엘레게토 ) - 2 절의 ' 강론하며 ' 와 같은 뜻으로 바울이 회
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세히 증거하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
들에게 설파한 것을 나타낸다 .
=====17:18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 - ' 에비구레오 ' 는 ' 에피큐로스 학파 ' 를 뜻하며 , ' 스
도이고 ' 는 ' 스토아 학파 ' 를 뜻한다 .
쟁론할새 - 바울이 직업적인 철학자들과 함께 논쟁에 참여한 것을 나타낸다 . 당시
아덴에는 직업적인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
에 나타나곤 하였다 .
말장이 (* , 스페르몰로고스 ) - 원래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 점차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얻어 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 양 도용 ( 盜用 )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 그리
고는 이 말이 결국 변변치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 결국 여기서
이 말은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같은 인물로 보았다는 뜻이다 .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 철학자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
각했던 것같다 .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이방신들이 숭배되었고 또 그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신으로 생각했으며 ' 부
활 '(* , 아나타시스 ) 이란 말을 예수란 신의 배우자인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
던 것으로 보인다 (I.H.Marshall, Longenecker, Haenchen). 참고로 그리이스의 열 두
신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차례
헬라이름
로마이름
맡은일
성구
1
제우스
쥬피터
천지창조
행 14:12
2
헤라
쥬노
생산 . 결혼
3
포세이돈
넵춘
바다
4
하데스
풀루토
음부
5
아레스
마즈
전쟁
6
헤르메즈
머큐리
상업
행 14:12
7
헤파이스
볼칸
대장간
8
아포로 대테
비너스
연애
9
아폴로
졸
음악 . 문예
10
아데미스
피아나
사냥
행 19:27
11
세레스
농업
12
미네르바
지식
=====17:19
아레오바고 - 이는 문자적으로 ' 법정 ' 또는 ' 아레스의 평의회 ' 라는 뜻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 기구였다 . 바울 당시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면책 ( 勉責 ) 특권을 누렸다 . 한편 바울이 끌려간 아레오바고에 대해 , 어떤 학자들은 아덴인들의 비공식적 집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Barnes). 이 견해는 바울의 연설투가 법정상의 변호와 거리가 멀고 또 재판 진행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 반면에 이를 , 바울의 가르침 내용을 심문하기 위해 열린 공식 법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Hemer). 이 견해는 디오누시오라는 아레오바고 관원에 대한 언급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34 절 ). 걸론적으로 이것이 반드시 법적 재판의 형식을 띤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적 집회의 성격임에는 분명하다고 봄이 무난할 듯하다 .
=====17:20
무슨 이상한 것을 ... 알고자 하노라 -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이지만 조롱 섞인 태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 아울러 그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 헬라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는 바울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 따라서 바울에게서 더욱 자세한 내용과 그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 그러나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고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 자체가 무모했다 .
=====17:21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이는 아덴 사람들의 호기
심 많고도 경박한 생활 태도를 말해준다 .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
다녔고 , 새로운 것이라고 찾았을 때는 또 이내 식상 ( 食傷 ) 해 버렸다 . 이에대해 B.C.5
세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온은 아덴 사람들을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었다 (Thucydides, History). 이러한 피상적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 이들은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
도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
=====17:22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바울이 이 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
해서나 혹은 철학자들 앞에서 철학을 강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 다만 바울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서 그곳에 선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
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영역 성경 KJV 는 이 부분을 ' 너무 미신적이다 '(too sup-
erstitious) 라고 번역하고 , NIV 는 ' 매우 종교적이다 '(very religious) 라고 옮긴다 .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 종교성이 많다 ' 고 한 것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던 때문인 듯하다 .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이나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칭찬 (Chrysostom) 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그들의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됨이 더 합당하다 (Calvin, Luther).
=====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 , 아그노스토 데오 ) - 이러한 유형의 비문을 증
거하는 것들이 있는데 , 2 세기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 (Pausanias) 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 ' 이 있었다고 전한다 . 또
한 버가모에 있는 한 비문에도 ' 알지 못하는 신 ' 이 새겨져 있다 (Bruce, Longenecker,
Blaiklock, Marshall, Meyer).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이나 비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Longenecker, Haenchen). 이는
아덴 사람이 가진 신관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 그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
다고 보았으며 ,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 알지 못
하는 신에게 ' 라는 글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도
시를 ' 알지 못하는 신 ' 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Blaiklock). 바울은 이러한 헬라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 즉
여느 때와 같이 유대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
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그와 아덴사람들과의 접
촉점을 마련하였다 .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 알게 하리라 -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으로서 ,
' 알지 못하는 신 ' 을 언급하는데 , 아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 바울은 이러한 ' 막연한 신관 ' 을 가진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
고 있는 창조 (24 절 ), 구속 (25-30 절 ), 부활 (31 절 ) 의 신관을 도입하여 제시하고 있다 .
=====17:24
우주와 ...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 하나님은 헬라의 많은 신들 중에 주신인 제우스
처럼 여러 신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시다 . 아덴에는 약 30,000 이 넘
는 신들이 있었다 .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에 하나로 포함하
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
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 그분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
풀 한 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 ( 生死禍福 ) 을 주관하신다 .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 ' 손으로 지은 전 ' 은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교하여 본다면 쉽게 ' 파르테논 신전 ' 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 .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
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 ( 왕상 8:27).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국한될 수가 없으시다 . 그분은 전지전능 ( 全
知全能 ) 무소부재 ( 無所不在 ) 하신 분이다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
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렇게 소유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항구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놓고 옷을 입히고 또 좋은 장소에 그 신상들을 안치시킨다 . 그러나 하나
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심으로 인간의 희생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 그
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 하여 더 많이 응답하거나 기뻐하시
지도 않는다 . 그분은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 우리의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다 .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고 충만하사 자신 안에서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만큼 충족하신 , 이른바 유복적 속성 ( 有福的 屬性 ) 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 딤전 1:11;6:15).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 이 세
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치도 연장할 수 없다 .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 생
명과 호흡 ' 의 주인이시다 .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 (Attic) 본
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 그러나 바
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 (Bruce, Longenecker). ' 한 혈통으로 '( 한글개역 , KJV) 라는 번
역은 ' 여스 헤노스 하이마토스 '(* ) 라고 되어 있는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 ( , A, B 등 ) 에서는 ' 하이마토스 '(*
) 가 생략되어 있고 단지 ' 여스 헤노스 '(* , 피 ) 라고 기록되어 있다 .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따르는데 ( 현대인의 성경 , NASB, RSV, NIV 등 ), ' 한 사람으로부
터 '(from on 또는 from one man) 라고 번역할 수 있다 . 여기서 ' 한 사람 ' 은 아담을 염
두에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사
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 롬 5:12-21; 갈 3:28). 이러한 하나됨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었다 (Bruce).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
로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인간관을 피력하고 있다 .
연대를 정하시며 ... 경계를 한하셨으니 - ' 연대를 정하셨다 ' 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
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한 14:17 에 근거하여 볼
때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 D.E.Haenchen). 본절은 24 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들의 ' 알지 못하는 신 ' 은 곧 하나님으로 창
조주이시며 , 그는 시간을 만드사 , 사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게 하셨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까지 정하신 것이다 . 이러한 사상은 시편 기자와
모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 시편 기자는 '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
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 라고 노래했다 ( 시 74:17).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음을 교훈하고 있다 ( 신 32:8).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
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사상에 근거하여 아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
고 있는 것이다 .
< 각 학파의 주장비교 >
에피큐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주창자
에피큐로스 (EPICURUS)B.C341-270
제논 (Zenon.B.C340-265)
이름의유래
주창자인 에피큐로스의 이름땅
제논이 아덴의 아고라 관장에서늘 가르치던 장소가 장식회랑 (Paintedstos) 이었던 데서 유래 .
주장
쾌락이 인생의 주된목표라고 주장 . 이쾌락은 육욕적인 것이아니라 고통 . 육정 . 공포 죽음등에대한 염려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 즉 . 아타락시아 (ataraxia) 를 뜻함
우주속에 내재하며 인간삶의 지침이 되는 원칙으로서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함 . 엄격한 금욕주의와 만물을 통찰한다는 로고스론 . 최선을 다하는자는 지위계급을 막론하고 칭송을 받을것이라는 만민 동등주의 . 만인 형제사상을 주장함
종교관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으나그신들이인간의 삶과는 전혀 관련성을 맺지않고 . 있다고하는 자연신교의 입장을 취함 .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했으며하나님을 세계정신이라고 생각함 .
=====17:27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 ' 더듬어 찾다 ' 는 뜻의 헬라어 ' 프셀라파오 '
(* ) 는 ' 만지다 ', ' 느끼다 ' 는 뜻으로 '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 ' 을 나타낸다 . 이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
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쫓아 다녔지만 그들
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 .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
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
상 ,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17:28
그를 힘입어 ... 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 (Creta) 의 시인 에피메니데스 (Epimeni-
des, B.C.6 세기 ) 의 4 행시 ' 크레티카 '(Cretica) 에도 나온다 .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 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 바울은 당시 아덴인
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한 것
이다 .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 (Aratus, B.C.315-240) 의 시 ' 패
노메나 '(Phaenomena) 에 나온다 .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 (Cleanthes, B.C.331-
233) 의 시 '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 '(Hymn to Zeus) 에도 나타난다 . 바울이 이곳 외에
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 ( 고전 15:33; 딛 1:12) 그는 희랍
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
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 ( 與件 ) 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 그는 자신
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 희랍 세계의 시
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 한
편 24-28 절의 바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희랍의 철학적 사고와 비교된다 .
+----+---------------------------+---------------------------------------------+
| | 바울의 설교 | 헬라의 철학적 사고 |
+----+---------------------------+---------------------------------------------+
| | (1) 하나님은 한 분이다 . | (1) 스토아 철학 : 범신론 |
| +---------------------------+---------------------------------------------+
| | (2)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 | (2) 에피큐로스 철학 : 세상 만물은 영원전부터 |
| | | 존재해 온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 . |
| +---------------------------+---------------------------------------------+
| | (3) 인류는 한 하나님에서 | (3) 아덴 사람들은 아티카 (Attica) 본토의 |
| | 창조되었고 같은 조상을 |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
| | 가진 후손이다 . | 자부함 . |
| +---------------------------+---------------------------------------------+
| | (4)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 (4) 에피큐로스 자연신론 (deism) : 신은 인간의 |
| | 삶을 섭리하신다 . |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음 . |
| +---------------------------+---------------------------------------------+
| | (5) 천지의 주재시다 . | (5) 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
| | |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 또 한사람의 |
| | | 손으로 신들을 새겨 만질 수 있다고 여김 . |
+----+---------------------------+---------------------------------------------+
=====17:29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 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
(Stoicism) 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 자연의 본성 ' 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
는 사람이 현자 ( 賢者 ) 이고 ,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 이는 자연 그 자체
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 그런데 바울
은 그들의 용어인 ' 신의 소생 ' 이라는 싯구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 셩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 창 1:26,27). 따라서 자연물 ( 금 , 은 , 돌 따위 ) 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
다 .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 ' 알지 못하던 시대 ' 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 지나간 세데 '(14:16) 라고 표
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
'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의 헬라어 ' 휘페리돈 '(* ) 은 ' 보지않다 ', ' 간과하다 '
는 뜻이다 .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 ' 알지 못하던 시대 ' 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
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 (14:16; 롬 3:25). 그렇지
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
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더 이상 ' 알
지 못하는 신 ' 이 아니다 . ' 알지 못하는 신 ' 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 알지 못하
던 시대 ' 도 끝이 났다 .
회개하라 ( , 메타노에인 ) - 이는 ' 메타노에오 '(* ) 의 현재 능동
태 부정사로서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
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 ( 以
信得義 ) 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
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 ( 살전 1:9,10).
=====17:31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 예수께서 자신을
' 인자 ' 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 ( 막 14:41; 눅 17:24)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
한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 ( 人性 ) 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 본절에서 심판주를 ' 사람 ' 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
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
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 계 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 죽은 자 가운데서 다
시 살리신 ' 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 즉 본절은 인자의 ( 죽으심과 )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
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 이 설교를 두
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
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 그러나 바울
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 (34 절 ).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
았다 .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 빌 3:8)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운인다 .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
다 .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
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 .
======17:32
저희가 ... 기롱도 하고 ... 다시 듣겠다 하니 - 부활이란 주제는 역시 아덴 사람들에
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 몸의 부활에 관한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육체를 속되고 악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 고전 1:18). 시인 에스킬루스 (Aeschy-
lus, B.C.525-456) 가 ' 사람이 일단 죽으면 티끌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결코 부활
은 없으리라 ' 고 노래한 바 있듯이 본문의 아덴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과 비웃음으
로 일축 ( 一蹴 ) 해 버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 그러나 일단의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욱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듣기를 요청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
=====17:33
바울이 ... 떠나매 - 바울의 설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는 거부되었지만 , 몇몇 사람
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 하지만 바울은 더이상 아레오바고 광장에 머무르기를 거절하
였던 것 같다 . 아마 바울은 공공장소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자유나 권한이 있지 않았던
듯하며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 그랬더라도 다행히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Haenchen).
=====17:34
몇 사람이 ... 믿으니 - 여기서는 세례를 주었다거나 예배를 드렸다거나 , 또는 장로
를 세원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소수의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 간
략한 언급에는 이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결코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 바울은 이곳에서 아덴 선
교의 복음의 씨를 심은 것이다 .
디오누시오 - 이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 다만 후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덴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 이는 첫 개종자가 대개 그 지역 교회의 지도
자가 되었던 사실과 ( 고전 16:15,16) 조화를 이룬다
카페 게시글
사도행전QT
사도행전17장
일성1독
추천 0
조회 46
20.03.24 12:41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