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검은 화면에서 니체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나는 니체를 모른다. 신이 죽었다는 그를 사실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마부에게 학대당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연민? 사랑? 또,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했다던 말.....
검은 화면은 바람 속을 달리는 말과 마부로 바뀐다. 마차가 스쳐가는 길은 황량하다. 잎사귀 하나 없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늘어선 길을 초라한 말은 달려간다. 늙은 마부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병이 깊어 보이는 말은 고개를 꺼덕꺼덕 수레를 끌고 간다.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듯, 그렇게 가는 것만이 다만 숙명이라는 듯... 첫 장면에서부터 압도된 나는 그 말과 바람과 메마른 가지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정작 마부보다도...
언덕 아래 벌판에 덩그마니 지어진 돌집, 마차가 도착하자 우물가에 섰던 여인이 쫓아온다. 마구간 문을 열어 말을 넣고, 창고를 열어 수레를 넣고... 그들의 행위에 내 힘이 실렸다. 어느 평론가가 영화 속으로 동화된다는 말을 했던데, 그게 바로 동화였던가.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아버지의 마부 복장을 벗기고, 평상복으로 갈아입히는 딸. 그들은 협동한다. 인간의 삶은 가히 협동이기에... 껍질 채 삶은 감자 두 알이 식탁에 놓이고, 한 손으로 껍질을 벗겨 허겁지겁 먹는 아버지... 어둠이 오고 그들은 잠자리에 든다. 너도 안 들리니? 어두운 공간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린다. 58년간 들어온 나무좀 갉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아버지. 변화의 조짐... 거기서부터 뭔가 예고된 듯한 느낌이었다. 첫째 날의 이야기이다.
둘째 날, 아침이 밝고 그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딸은 바람 속에 우물 뚜껑을 열어 물을 긷고, 다시 아버지의 옷을 입힌다. 나는 문득 아침에 눈을 뜨면 거실의 버티컬블라인드를 열고, 침대를 정리하는 내 일상의 행위를 생각했다. 저녁에 그 버티컬블라인드를 도로 닫고, 침대 위 쿠션들을 치우고 이불을 들추어 누울 때면 하루가 너무 짧다는 생각... 얼마나 이 행위를 반복해야 생은 끝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은 반복과 반복이 맞물려 긴 고리를 이루다 어느 날엔가 뚝 끊어져버리는 것일까. 사실이 그랬다.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툇마루를 닦던 어머니가 더 이상 그 툇마루를 닦을 수 없었을 때 어머니의 생은 끝났다. 아버지가 더 이상 아침마다 마당을 비질할 수 없었을 때 아버지의 생은 끝났다.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더 이상 아침마다 거실의 버티컬블라인드, 혹은 커튼을 걷을 수 없을 때 삶은 끝날 것이다.
움직이려하지 않는 말 때문에 마부는 마차몰기를 포기하고, 부녀는 집안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쪼개고, 빨래하는 딸을 위해 한 손으로 빨래 줄을 매는 아버지... 단추를 잠근 채 빨아 널은 흰 셔츠가 한참이나 화면에 가득하다. 구차한 삶을 말하려 함인가.
바람만 몰아치는 창밖, 아궁이 옆 의자에 앉아 번갈아 창밖을 내다보는 부녀, 그 뒷모습과 가랑잎이 휘날리는 창문, 불길이 어른거리는 아궁이... 그것은 빈궁함도 쓸쓸함도 아니었다. 다만 살아 있음을 말했다.
셋째 날, 우물가에 집시 떼가 나타나자 딸은 그들을 쫒는다. 집시들은 저주를 퍼붓고 돌아가고, 딸은 집시 노인이 물이 필요해서 왔던 거라며 주머니에서 꺼내주고 간 성경을 집안에서 더듬더듬 읽는다. 그녀가 읊조리는 구절들은 앞날을 암시하는 듯하다.
넷째 날, 갑자기 우물이 마르고 그들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한다. 딸이 옷과 함께 궤짝에 넣는 여인의 사진 액자, 그들에게도 단란하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수레를 끌던 말은 이제 수레 뒤에 매어가고, 딸은 말처럼 수레를 끈다. 아버지는 한손으로나마 뒤에서 밀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 사라져가던 세 생명의 실루엣. 그러나 언덕 너머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들은 다시 돌아와 짐을 푼다.
다섯째 날, 마구간 문을 열고 병든 말의 멍에끈을 벗겨준다. 체념이다. 어쩌면 자유일지도 모른다. 다시 감자를 삶아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하고, 어둠이 오자 등잔에 불을 밝힌다. 하지만 곧 불이 꺼지고 기름이 가득 채워진 등잔엔 더 이상 불이 붙지 않는다. 불씨마저 꺼져버린다.
여섯째 날의 식탁, 생감자를 앞에 놓고 정물처럼 굳은 두 사람... 정지된 화면 속 그들은 너무 처절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 말하지 않은 일곱 째 날엔 완전한 어둠, 종말이 오려는가. 신은 부재한 것인가. 하지만 가장 어두울 때 빛을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신은 그들에게 물과 불을 내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원할 신 같은 건 본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섬뜩한 생존의 장에서 길어 올려진 그 무엇이 가슴을 칠 때, 나는 오히려 신을 느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무신론을 보지 않았다.
다만 잊고 있던 나의 어느 부분을 송곳으로 찔린 듯 아팠다. 무감각했던 그곳이 감각을 자각하는 되살아남이 있었다. 날 때부터 받았으나 살면서 퇴화된 내면 깊이의 어느 곳이...
오늘 저녁은 좀 더 귀하게 거실 창의 버티컬블라인드를 닫을 것이다. 내일 아침은 더 귀하게 그 버티컬블라인드를 열 것이다. 이 고리가 툭 끊어져버리는 어느 날의 자유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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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거실에서 상영되는 '토리노의 말'
첫댓글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삶이란 죽음보다 아름답겠죠. 신이 계심을 감사하며.
영화 리뷰는 써본 적이 없지만 제 생각을 정리해 둬야 할 것 같았어요. 감동도 지나고 나면 잊혀지니까,
글 속에 감동을 가둬두려고... ㅎ
그런데 저 위의 그림은 어디서 난 거예요?
처음에 영화를 찾으려 검색하다 어디선가 캡처해 뒀었지요. 저 그림이 마지막 장면의 패러디인 줄 몰랐어요. 그때는...